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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世家上
許 穆
高句麗始祖는 朱蒙이니 姓高氏라 初扶餘國君이 得優渤女한데 感日影而娠하여 生朱蒙이라 以爲無人道而生하여 棄之한데 馬牛避不踐하여 以爲神하여 遂牧之라 生七年에 能執射하여 號曰 朱蒙이라하니 朱蒙者는 善射之名이라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이니, 성은 고씨이다. 초기에 부여국 군왕이 우발수(優浡水)의 여자를 얻었는데, 이 여자가 해그림자에 감응하여 임신이 되어 주몽을 낳았다. 人道를 인함이 없이 낳았다 하여 버렸는데 마소가 피하여 밟지 않자, 신령스럽다고 여겨 마침내 거두어 길렀다. 태어나 7세가 되었는데, 활을 잘 쏘았다. 호를 주몽이라고 하였으니, 주몽이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이르는 명칭이다.
* 주몽(朱蒙): 고구려의 시조. (재위 : B.C. 37~19).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ㆍ추모(鄒牟)ㆍ상해(象解)ㆍ도모(都慕)ㆍ동명성왕(東明聖王). 아버지는 동부여왕(東夫餘王) 금와(金蛙),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
* 우발여(優渤女): 《기언》 권32 〈단군세가〉에 “우발은 늪 이름이다. 태백산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한국문집총간 256집에 수록된 《무명자집(無名子集)》 시고(詩稿) 권6 〈동사를 읊다〔詠東史〕〉에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國君有子七人한데 忌其才能하여 謀欲殺之라 朱蒙이 乃與烏伊․摩離․陜父(협보)三人으로 亡至卒本扶餘라 能聚衆立國하고 國號高句麗라하니 當漢建昭二年이라 降松壤하고 滅荇人北沃沮하니 始大라
부여국의 군왕에게 7인의 아들이 있었는데, 주몽의 재능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도모하였다. 주몽이 마침내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능히 무리를 모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니, 이때는 漢나라 建昭 2년에 해당한다. 松讓의 항복을 받고 행인과 북옥저를 멸망시키고 나서 비로소 나라가 커졌다.
* 한건소이년(漢建昭二年): 한원제(漢元帝)의 연호로, 2년은 기원전 37년이며, 신라 혁거세 21년이다.
* 송양(松讓): 《국역 동사강목》 제1상 을유년 6월 조에 의거하여 대본의 ‘壤’을 ‘讓’으로 바로잡았다. 송양은 인명으로, 비류국(沸流國)의 임금이다. 고구려의 주몽이 송양으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에 그 지역에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를 삼았다. 참고로 송양(松壤)은 지명으로,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의 이칭이다.
* 행인(荇人):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나라 이름이다. 《국역 동사강목 부록 하권 행인개마구다국고(荇人蓋馬句茶國考)》
漢鴻嘉二年에 朱蒙卒하니 號東明聖王이라
한나라 홍가 2년에 주몽이 졸하니, 호는 동명성왕이다.
* 한홍가이년(漢鴻嘉二年): 한 성제(漢成帝)의 연호로, 2년은 기원전 19년이며, 신라 혁거세 39년이다.
子類利立이라 用扶芬奴하여 降鮮卑爲屬國이라 薛支ㅣ 言於類利曰 國內의 尉那巖은 險阻하고 地宜五穀하며 多麋鹿하여 可居라하여 遂徙居한데 太子解明은 不肯從이라 好勇力한데 有黃龍國君이 遺太子弓하니 太子以慢禮辱己라하여 折而棄之하니 使者慙이라
아들 유리가 즉위하였다. 부분노의 꾀를 써서 선비를 항복시키고 속국으로 삼았다. 설지가 유리에게 말하기를, “국내 위나암은 험준하고 토질이 오곡에 알맞으며 사슴이 많아 살 만한 곳입니다.”하였다. 마침내 도읍을 옮겼는데, 태자 해명은 즐겨 따르지 않았다. 또 용력을 좋아하였는데, 황룡국의 군왕이 태자에게 활을 보내자 태자가 ‘예를 소홀히 하고 자기를 욕보였다’ 하여 활을 부러뜨려 버리니, 사자가 부끄러워하였다.
* 유리(類利): 고구려 2대왕. 재위 기원전19~18년.
* 부분노(扶芬奴): B.C. 50경~1세기 초의 고구려 장군. 동명왕이 처음 건국했을 때 건국 직후였으므로 의식(儀式)을 아직 갖추지 못하여 비류국(備流國)의 사신(使臣)이 고구려에 다녀갈 때마다 예를 갖추어 송영(送迎)할 수 없어서 왕이 이를 창피하게 여기자 부분노는 비류국에 들어가 고각(鼓角)을 훔쳐 왔다. 비류왕은 이 사실을 후에 알았어도 항의하지 못하였다. 동명왕을 도와 군제를 정비, B.C. 32년(동명왕 6)에 장군이 되어 오이(烏伊) 등과 함께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여 빼앗았고, B.C. 9년(유리왕 11)에는 변경을 자주 침략하는 선비(鮮卑)를 지략으로 대패시키고 이를 속국(屬國)으로 만들게 하였다.
類利ㅣ 怒以爲挑亂敗國之子라하고 賜劍曰 以此死하라 太子曰 父命이니 不可逃也라하고 遂之礪津原自殺이라 類利悔之하여 立祠原上하고 追思不已라
유리가 노하여 ‘난을 도발하고 나라를 망칠 자식’이라 하고는 검을 내리면서 말하기를, “이 칼로 죽어라.”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이니, 피할 수 없다.”하고, 마침내 여진의 언덕으로 가서 자살하였다. 유리가 이를 후회하여 언덕 위에 사당을 세우고 추모하기를 마지않았다.
王莽時에 發句麗兵하여 以伐胡라 類利ㅣ 不肯出兵에 迫之하니 類利ㅣ 出塞侵遼하고 擊殺太守田譚하다 莽怒하여 遣嚴尤하여 擊之하고 類利를 降封下句麗侯라
왕망이 집권했을 때 고구려의 군사를 동원하여 호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유리가 출병하려고 하지 않자 압박을 가하니, 이에 유리가 변방을 나가 요를 침략하고 태수 전담을 쳐서 죽였다. 왕망이 노하여 엄우를 보내 고구려를 치고, 유리를 하구려후로 강등하여 봉하였다.
* 왕망(王莽): 중국의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임금이 된 사람(재위: 8~22). 5년 평제(平帝)를 죽이고 영(嬰)을 왕위에 오르게 하여 자기는 섭황제(攝皇帝)가 되었다가 8년에는 스스로 신황제(新皇帝)라 일컫고, 9년(고구려 유리왕 28)에는 나라 이름을 신(新),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이라 하였다. 23년 왕망은 신나라를 세운지 15년만에 유수(劉秀ㆍ후한광무(後漢光武))에게 곤양(昆陽)에서 패하여 죽자 나라는 망하고 후한(後漢)이 시작되었다.
扶餘國君帶素ㅣ 責讓類利曰 我先王은 與先君東明王으로 義至厚한데 而誘我信臣하여 亡逃立國이라 國小兵弱이면 以小事大하고 以弱服強이 禮之順也온 王이 不循此道하며 欲長保社稷은 難矣라하니
부여국 군왕 대소가 유리를 꾸짖어 말하기를 “우리 선왕께서는 그대의 선군인 동명왕과 의리가 지극히 두터웠는데, 동명왕은 우리의 믿을 만한 신하를 꾀어 달아나 나라를 세웠다. 나라가 작고 병력이 약하면,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약자가 강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예의 순리이다. 왕이 이러한 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사직을 길이 보전하고자 하면 어려울 것이다.”라 하니,
類利謝曰 寡人은 僻在海隅하여 不聞禮義라 今大王有敎한데 敢不唯命가하다
유리가 사죄하고 말하기를, “과인은 바닷가의 궁벽한 곳에 있어서 예의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가르침이 있는데,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王子無恤이 幼로되 聞之하고 以爲失對하여 自請見使者하고 謝曰 我先君東明王은 神靈受命이라 大王이 譖諸父王하여 辱我先君하고 令之牧馬라 我先君이 見幾出國한데 今大王은 不悔前愆하고 恃強國蔑我耶아 請使者還報라하다
왕자 무휼이 어렸지만, 이 말을 듣고 대답을 잘못했다고 여기고는 자청하여 사자를 만나 사례하고 말하기를, “우리 선군이신 동명왕께서는 신령의 명을 받아 나셨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부왕에게 참소하여 우리 선군을 욕보이고 말 기르는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선군께서 기미를 보고 나라를 떠나신 것인데, 지금 대왕은 과거의 허물은 뉘우치지 않고 나라가 강한 것만 믿고서 우리를 멸시하는 것입니까. 사자는 돌아가 보고하십시오.” 하였다.
旣使還에 扶餘ㅣ 發兵攻之한데 遣王子無恤以拒之한데 無恤이 縱兵擊殺盡之하다
사자가 돌아가자 부여가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왕자 무휼을 보내 맞서 싸우게 하였는데, 무휼이 군사를 풀어 모조리 쳐 죽였다.
天鳳五年(西紀 18年. 新羅 南解王 15年)에 類利卒하니 號瑠璃明王이라 太子無恤立하다
천봉 5년에 유리가 졸하니, 호는 유리명왕이다. 태자 무휼이 즉위하였다.
* 무휼(無恤): 고구려 제3대(재위: 18~44) 왕이다. 대해주류왕, 대주류왕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무휼이다. 아버지는 유리왕, 어머니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였으며, 주변 세력에 대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개마국과 구다국, 낙랑국 등을 병합하였다. 또한, 우보와 좌보를 처음으로 임명하는 등 통치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힘썼다.
百濟飢하여 東北落에 亡入句麗者ㅣ 千餘家라 立始祖東明王祠라
백제에 기근이 들어 동북쪽 부락에서 도망하여 고구려로 들어오는 자들이 1000여 가호였다. 시조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王攻扶餘라 有怪由者ㅣ 自言北溟人한데 長九尺請從이라 與餘兵戰에 其國君馬蹶하니 怪由直前斬其王이라 餘兵猶力鬪하여 圍之數重한데 有大霧七日에 無恤ㅣ 潛師遁去라
왕이 부여를 공격하였다. 괴유(怪由)라는 자가 스스로 북명(北溟) 사람이라고 하며, 키가 9척으로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부여 군사와 싸울 때 그 나라 군왕의 말이 거꾸러지자 괴유가 곧장 앞으로 쳐들어가 그 왕의 목을 베었다. 부여의 남은 군사가 오히려 힘껏 싸워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짙은 안개가 7일 동안 끼는 덕에 무휼이 몰래 군사를 움직여 달아났다.
旣還國에 深自責하여 弔死問孤하니 國人大悅이라 怪由死에 葬於北溟之南하고 以時祭之하다
나라로 돌아온 뒤에 깊이 자책하여 죽은 자들을 조문하고 고아들을 위문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괴유가 죽자 북명의 남쪽에 장사 지내고 철철이 제사를 지내 주었다.
有仇都․逸苟․焚永이 爲部長하여 所爲多黷貨하니 百姓怨之라 廢爲庶人하고 以㪍素代之라 㪍素ㅣ 作太室居之하며 使三人者로 坐之堂下라 三人者ㅣ 慙自悔러니 卒爲善人이라
구도, 일구, 분영이 부장이 되어 소행이 뇌물을 많이 탐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고, 발소로 대신하게 하였다. 발소가 태실을 지어 거처하며 세 사람을 당 아래에 앉게 하였다. 세 사람이 수치스럽게 여겨 스스로 뉘우치더니 마침내 착한 사람이 되었다.
* 독화(黷貨): 옳지 못한 수단(手段)으로 손에 넣은 재물(財物).
王曰 㪍素ㅣ 賢하여 能服人改行이라하고 以爲沸流部長하여 賜姓太室氏라
왕이 말하기를, “발소가 賢能하여 능히 사람을 복종시키고 행실을 고치게 하였다.” 하고, 비류 부장을 삼아 태실씨라는 성을 내려 주었다.
用王子好童計하여 襲取樂浪하고 因以滅之라 好童ㅣ 重於王하니 太子之母ㅣ 忌之하여 譖之曰 好童無禮라하니 王疑之라
왕자 호동의 계책을 써서 낙랑을 습격하여 취하고 인하여 낙랑을 멸하였다. 호동이 왕에게 신임을 받자, 태자의 어머니가 시기하여 호동을 참소하기를, “호동이 무례합니다.” 하니, 왕이 호동을 의심하였다.
好童曰 不可自說彰母之惡이라하고 遂自殺하다
호동이 말하기를, “어머니의 악을 스스로 말하여 드러낼 수는 없다.”하고, 마침내 자살하였다.
建武二十年에 帝ㅣ 遣兵攻取樂浪地薩水以北하여 屬漢이라
건무(建武) 20년에 황제가 군사를 파견하여 낙랑 땅 살수(薩水) 이북을 공격하여 취해서 한나라에 소속시켰다.
* 建武二十年: 建武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20년은 서기 44년이고, 신라 유리왕(儒理王) 21년이다.
無恤卒하니 號大武神王이라 太子解憂幼하니 國人이 立其弟解邑朱라 五年卒하니 號閔中王이라
무휼이 졸하니, 호는 대무신왕이다. 태자 해우가 어려 나라 사람들이 동생 해읍주를 세웠다. 5년에 졸하니, 호는 민중왕이다.
* 해읍주(解邑朱): 고구려 제4대 왕(재위 44∼48). 이름은 해색주(解色朱) 또는 해읍주(解邑朱)로 알려져 있다.
太子解憂立한데 不仁하여 射殺諫者하고 恣所欲하니 國人叛之라 其臣杜魯ㅣ 弑之하고 而立瑠璃孫宮한데 才七歲라 母太后聽政하다 葬解憂於慕本原하고 因以爲號라
태자 해우가 즉위하였는데, 어질지 못하여 간언하는 자를 화살로 쏘아 죽이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니, 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신하 두로가 해우를 죽이고 유리의 손자 궁을 세웠는데, 나이 겨우 7세라. 모태후가 정사를 대신 처리하였다. 해우를 모본원에 장사 지내고, 인하여 해우의 호로 삼았다.
* 해우(解憂): 고구려의 제5대 왕(재위 48∼53). 대무신왕의 아들. 한나라 북평 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 채동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 궁(宮): 고구려 제6대 왕(재위 53∼146).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는 등 영토를 넓혔으며 중앙집권적 형태로 체제를 정비하여 실질적인 국가의 면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王旣長에 伐東沃沮하여 取其地爲邑하고 又侵掠遼東六縣하다 王立六十六年에 與獩貊襲漢玄菟하다 幽州刺史馮煥․玄菟太守姚光․遼東太守蔡諷이 伐句麗하니 王ㅣ 遣王弟遂成하여 拒之라
왕이 성장한 뒤에 동옥저를 정벌하여 그 땅을 취해 읍으로 삼고, 또 요동의 여섯 현을 침략하였다. 왕이 즉위한 지 66년 되던 해에는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습격하였다. 유주자사 풍환, 현도태수 요광, 요동태수 채풍이 고구려를 정벌하니, 왕이 왕의 동생 수성을 보내 막게 하였다.
遂成이 出奇兵하여 擊玄菟․遼東하여 陷其城하고 燒其邑하며 獲首虜二千餘人하다 又與鮮卑로 攻遼東에 王이 以遂成領軍國事하고 以沛者穆度婁爲左輔하고 福章爲右輔하다 穆度婁ㅣ 知遂成陰有謀하고 稱疾하다
수성이 기병을 출동하여 현도와 요동을 쳐서 그 성을 함락하고 마을을 불태웠으며, 2000여 인을 사로잡았다. 또 선비와 함께 요동을 공격할 때, 왕이 수성을 영군국사로 삼고,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복장을 우보로 삼았다. 목도루는 수성이 남몰래 도모하는 바가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 대고 물러났다.
丸都에 地震이라 王夢에 有豹斷虎之尾하여 卜之曰 王之族에 殆有謀絶王之後라하다 遂成이 出獵謂左右曰 王老而我且老矣니 願諸君爲我計之하라 左右曰 唯命이라한데
환도에 지진이 일었다. 왕이,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자르는 꿈을 꾸었다. 점을 치니, 이르기를 “왕의 친족 중에 왕의 후손을 끊으려는 도모가 틀림없이 있다.”고 하였다. 수성이 수렵을 나가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도 늙었고 나도 늙었다. 제군이 나를 위해 도모하기를 바란다.” 하니,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有一人諫曰 王이 賢明하여 國人無叛心이라 王子不遜하면 禍且及矣나 王知王子敬順하면 當揖讓而有位라하니 遂成不悅이라 左右曰 妄言이라 不殺謀泄이라하니 遂成ㅣ 遂殺諫者라
어떤 사람이 간하기를 “왕이 어질고 명철하여 나라 사람들은 배반할 마음이 없습니다. 왕자께서 불손하면 화가 장차 미칠 것이나, 왕께서 왕자의 공경하고 순종하는 마음을 알게 된다면 마땅히 왕위를 왕자께 선위할 것입니다.” 하니, 수성이 좋아하지 않았다. 좌우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망녕된 말입니다. 죽이지 않으면 모의가 누설될 것입니다.” 하니, 수성이 마침내 간언한 자를 죽였다.
右輔福章이 言於王曰 遂成將叛하리니 不誅亂作이라하되 王不聽하고 遂讓於遂成하니 王立九十四年이라 稱太祖라
우보 복장이 왕에게 말하기를, “수성이 장차 모반할 것이니, 주벌하지 않으면 난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마침내 수성에게 왕위를 선위하였다. 왕이 즉위한 지 94년 만이다. 태조(太祖)라고 칭하였다.
遂成ㅣ 立하니 年七十六이라 殺太祖元子莫勤이라 其弟莫德이 恐禍及하여 自縊死라 太祖ㅣ 百十九에 卒하니 明臨答夫ㅣ 弑遂成이라 左輔菸支留ㅣ 迎立王弟伯固하니 年七十七이라
수성이 즉위하니, 나이가 76세였다. 태조의 원자(元子)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동생 막덕(莫德)이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다. 태조가 119세에 졸하였다.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수성을 시해하였다. 좌보 어지류(菸支留)가 왕의 동생 백고(伯固)를 맞이하여 세우니, 나이가 77세였다.
* 수성(遂成): 고구려의 7대 왕(재위 : 146~165). 휘는 수성(遂成). 태조왕의 동생. 즉위에 앞서 121년(태조왕 69) 한나라의 유주 자사(幽州刺史) 풍환(馮焕), 현도 태수(玄菟太守) 요광(姚光), 요동 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 등이 합작하여 예맥(濊貊)을 공격할 때 왕명으로 이들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고, 동년 11월에는 군국지사(軍國之事)를 통솔함에 이르고, 123년에는 패자(沛者) 목도루(穆度樓)ㆍ고복장(高福章)과 함께 정사(政事)에 참여하여 권세를 잡아 왕위를 탐냈다. 이에 동생 백고(伯固)가 간언(諫言)하였으나 듣지 않고, 146년(태조 947)에 이르러 비상 수단으로 왕위를 찬탈코자 함에 이 기세를 짐작한 태조대왕이 양위함으로써 즉위하게 되었다. 즉위하자 왕 2년 2월에 관노부(灌奴部) 패자(沛者) 미유(彌儒)를 좌보(左輔)에 임명하고 동년 3월에는 왕위 계승을 반대하던 고복장(高福章)을 사형에 처하고 왕의 옛 친구인 어지류(於支留)와 양신(陽神)에게 봉작(封爵)하여 요직(要職)에 앉혔다. 148년(왕 3)에는 태조 대왕의 원자(元子) 막근(莫勤)을 살해, 그 동생 막덕(莫爵)도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자살했다. 이후 왕은 나날이 횡포해지고, 신하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을 뿐더러 백성을 혹사(酷使)하여 원망의 소리가 높았고, 165년(왕 20) 10월 명림답부(明臨答夫)에게 살해되었다.
伯固ㅣ 避入山中不出한데 至是立之하여 伯固立하다 號遂成爲次大王이라 遂成子鄒安이 逃匿山中이라가 詣闕請罪한데 封邑爲讓國君하다
백고가 피하여 산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으로 세우니, 백고가 즉위하였다. 수성의 호를 차대왕이라고 하였다. 수성의 아들 추안이 달아나 산속에 숨었다가 대궐에 이르러 죄를 청하였는데, 고을에 봉하고 양국군으로 삼았다.
* 백고(伯固): 고구려 8대 신대왕(新大王) 재위 165~179년. 6대 태조왕(太祖王) 궁(宮)의 아들.
熹平元年에 玄菟太守耿臨이 攻句麗라 王問計於群臣하니 沛者答夫曰 兵衆者면 宜戰이요 兵少者면 宜守라 我深溝高壘하고 勿與戰이면 漢兵遠鬪千里라 饋糧不能持久니 不過旬月하여 其勢必歸리니 我以精兵薄之면 蔑不勝矣라하여 從其計라
희평 1년에 현도 태수 경림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왕이 뭇 신하들에게 계책을 물으니, 패자 답부가 말하기를 “군사가 많으면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으면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해자를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지키기만 하고 더불어 싸우지 않는다면, 한나라 군사는 멀리 천 리를 와서 싸우는 것이라 군량을 오래 지속적으로 댈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1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 형세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것이니, 이때 우리가 정예병으로 그들을 친다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하여, 그 계책을 따랐다.
* 희평 원년(熹平 元年): 희평은 후한 영제(後漢靈帝)의 두 번째 연호로, 1년은 서기 172년이고,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19년이다.
漢兵이 攻之不克하고 食盡而歸에 答夫ㅣ 率輕騎追擊하여 大破之하다
한나라 군사가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군량이 다 떨어져 돌아갈 때, 답부가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光和二年(179年)에 國相答夫死하니 年百十三이라 伯固卒하니 號新大王이라 太子男武立하다 外戚貴臣比於畀留․左可慮ㅣ 執國命한데 國人內叛하니 王欲誅之라
광화 2년에 국상인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백고가 졸하니, 호를 신대왕이라고 하였다. 태자 남무가 즉위하였다. 외척이자 귀신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나라의 권력을 쥐고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부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려 하므로 왕이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다.
* 남무(男武): 고구려 제9대 왕(재위 : 179~197).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휘는 남무(男武)ㆍ이이모(伊夷謨), 신대왕의 둘째 아들. 왕비는 제나부(提那部) 우소(干素)의 딸. 형인 발기(發岐)가 못났으므로 남무가 왕이 되었다. 그는 모든 일을 잘 판단하여 처리하였으며, 아울러 관용과 용맹을 갖추고 있었다.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어진 정치를 하였으며 194년에 진대법(賑貸法)을 세웠다. 197년에 사망, 고국천원(故國川原)에 장사지냈다.
二人이 遂擧兵叛하니 王伐而誅之하고 乃下令自責하고 徵晏留任國政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였다. 왕이 정벌하여 처형하고 나서 바로 영을 내려 자책하고,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 안류(晏留): 동부 출신이다. 191년(고국천왕 13) 왕비의 친척인 연나부(椽那部)의 어비류(於卑留)와 좌가려(左可慮)의 반란을 진압한 직후 고국천왕이 새로운 인재등용정책을 추진할 때 고구려 4부(部)가 함께 동부의 그를 천거하였다. 이에 왕에게 불려가 국정을 맡을 것을 부탁받았으나, 사양하고 대신 을파소(乙巴素)를 추천하였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천거한 공으로 대사자(大使者)에 제수되었다. 방위부(方位部) 출신으로 기존의 나부(那部)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 강화를 추진하던 때에 등용된 인물이다.
晏留ㅣ 薦乙巴素하여 以禮聘之하여 拜爲相이라 巴素ㅣ 明政敎하고 愼賞罰하니 民人以安하고 內外無事라 王이 以薦賢하여 受上賞이라하고 拜晏留大使者하다
안류가 을파소를 천거하여, 예를 갖추어 초빙한 다음 제수하여 재상으로 삼았다. 을파소가 정교를 분명하게 하고 상벌을 신중하게 하니,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왕이 ‘어진 이를 천거하여 높은 상을 받는 것’이라 하고, 안류를 대사자에 제수하였다.
* 을파소(乙巴素): 고구려의 재상. 압록곡(鴨綠谷) 사람. 유리왕 때의 대신 을소(乙素)의 손자. 191년(고국천왕 13) 왕이 각 부(部)로 하여금 유능한 인사를 천거케 하니, 4부에서 함께 안유(晏留)를 천거하였는데, 안유는 다시 왕에게 을파소를 천거했다. 왕은 을파소를 불러서 중외대부(中畏大夫)의 벼슬과 우태(于台)의 작위를 주었으나 을파소가 사양하자 왕은 그 마음속을 알아채고 국상(國相)에 임명했다. 이 때 옛 대신들과 왕의 척족들이 매우 시기하고 반대했으나 왕의 강력한 만류로 진정되었다. 을파소는 지성으로써 나라를 받들며, 정교(政敎)를 명백하게 하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여 천하가 태평 세대를 이룩하였다. 농부에서 일약 국상이 되어 13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사망하니 全國民이 슬퍼했다.
立賑貸法하고 問鰥寡孤獨廢疾貧者하다 自三月로 至七月히 發粟貸民하고 冬則收之를 以爲恒式이라 時當東漢之末世라 天下大亂하니 漢人來附者衆이라
진대법을 확립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홀로 남은 노인,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문하였다. 3월부터 7월까지 곡식을 풀어 백성에게 꾸어 주고 겨울이 되면 거두어들이는 것을 일정한 법식으로 삼았다. 이때는 동한의 말세에 해당하여 천하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와서 귀의하는 漢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 진대법(賑貸法):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펴나가던 중 194년(고국천왕 16)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이 크게 상하여 백성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미곡을 나누어 준 기록이 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이 질양(質陽)에 사냥을 나갔다가 길 옆에 앉아 우는 자를 만났다. 그 연유를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신은 매우 가난하여 늘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부양하여 모셔왔는데 올해는 곡식이 자라지 않아 품팔이할 곳이 없어, 한 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어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고국천왕은 왕인 자신의 잘못을 탓하고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또한 관리들에 명하여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자립할 수 없는 자들를 널리 찾아 구제하게 하였다.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官穀)을 풀어 가구(家口)의 많고 적음에 따라 차이를 두어 곡식을 진휼 대여하케 하고, 겨울인 10월에 갚게 하였다.
建安二年(197年)에 男武卒한데 其妻于氏ㅣ 祕不發喪하고 夜私見王之弟發岐曰 王死而無子하니 當立汝爲君이라하되 發岐不答하고 責其無禮하니 乃去하여 矯遺命하여 立發岐弟延優하다
건안 2년에 남무가 졸하였다. 남무의 처 우씨가 남무의 죽음을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고, 밤에 사사로이 왕의 동생 발기를 만나 말하기를, “왕이 죽었으나 자식이 없으니, 마땅히 너를 세워 임금으로 삼겠다.” 하였는데, 발기가 대답하지 않고 그 무례함을 꾸짖으니, 이에 떠나 유명을 詐稱하여 발기의 동생 연우를 세웠다.
延優立하여 納前王之妻하다 發岐ㅣ 奔遼東하여 乞兵於公孫度하여 討延優不克하니 自刎乃死라 漢平州民千餘家來라 魏太和元年(227年)에 延優卒하여 葬山上陵하니 是爲山上王이라 太子憂位居立하다
연우가 즉위하여 전왕의 처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발기가 요동으로 달아나 公孫度에게 군사를 청하여 연우를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나라 평주의 백성 1000여 가호가 왔다. 위나라 태화 1년에 연우가 졸하였다. 산상릉에 장례하니, 이 사람이 산상왕이다. 태자 우위거가 즉위하였다.
* 우위거(憂位居): 東川王. 고구려 제11대 왕(재위 : 227~248). 일명 동양왕(東襄王), 산상왕의 아들. 213년(산상왕 17) 태자(太子)에 책봉, 산상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 위(魏)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위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던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사신을 죽였고, 238년에는 위나라를 도와 공손 연(公孫淵)을 토벌하는 등 친선관계를 맺었다. 뒤에 위나라의 영토를 공격하자 244년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고, 환도성(丸都城)이 함락, 남옥저(南沃沮)로 피신하여 한때 목숨이 위태했으나, 용장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지략(智略)으로 적을 격퇴했고, 이듬해 환도성을 버리고 동황성(東黃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사망 후 자원(紫原)에 장사지냈다.
吳主孫權이 遣使求和한데 王이 斬其使하여 傳首於魏라 魏幽州刺史毌丘儉이 合玄菟兵하여 伐句麗라 王自將步騎二萬하고 戰於沸流上하여 敗之하고 再戰於梁貊하여 又敗之라
오나라 군주 손권이 사신을 보내와 강화를 요구하였는데, 왕이 사신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나라에 전해 주었다. 위나라의 유주 자사 관구검(毌丘儉)이 현도의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다. 왕이 직접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沸流水) 가에서 싸워 무찌르고, 양맥(梁貊)에서 재차 싸워 또 무찔렀다.
* 손권(孫權): 중국 삼국 시대 오(吳)의 태제(太帝, 재위 : 229~252). 자는 중모(仲謀). 형 책(策)이 사망한 뒤 주유(周瑜)의 보좌로 강동(江東)을 차지하고 유비(劉備)와 함께 적벽에서 조조(曹操)를 대패시키고 위(魏 : 220)ㆍ촉(蜀 : 221)의 뒤에 오(吳)를 세워(222) 소위 삼국 시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진(晋)에 멸망되었다(284).
王有驕志하여 以五千騎로 擊之大敗하니 收餘兵奔鴨綠原이라 儉陷丸都에 王出走하니 遂屠其城하다
왕이 교만한 뜻이 있어 5000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였다가 크게 패하자 나머지 군사를 거두어 압록원으로 달아났다. 관구검이 환도를 함락함에 왕이 달아나니, 마침내 그 성을 도륙하였다.
初에 王數侵遼東한데 有臣得來諫하되 王不聽하니 嘆曰 終見此地荊棘生焉이라하고 因不食死하다 儉聞之하고 禁軍中하여 有犯得來塚者는 斬이라하고 悉還其妻子虜者라
처음에 왕이 자주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득래라는 신하가 간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자, 탄식하여 말하기를 “마침내 이 땅에 가시덤불이 생기는 것을 보겠구나.”하고, 인하여 먹지 않고 죽었다. 관구검이 이 말을 듣고 군중에 금령을 내려 득래의 무덤을 범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하고, 포로로 잡혀 온 그의 처자식을 모두 돌려보냈다.
王奔南沃沮하여 賴密友․紐由二臣力하여 退魏兵하고 得復國이라 以丸都殘破로 徙都平壤하다
왕이 남옥저로 달아나 밀우와 유유 두 신하의 힘에 의지하여 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나라를 수복할 수 있었다. 환도가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겼다.
魏正始九年(248年)에 憂位居卒하니 號東川王이라 王은 寬仁愛人이라 及卒에 國人이 如悲親戚하고 有自殺以殉者라 太子然弗立이라
위나라 정시 9년에 우위거가 졸하니, 호는 동천왕이다. 왕은 너그럽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였다. 졸하자 나라 사람들이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듯 하였으며, 자살하여 따라 죽는 자도 있었다. 태자 연불이 즉위하였다.
* 연불(然弗): 고구려 12대 中川王. 재위 248~270년.
王之妻貫那ㅣ 艶而妬하여 王殺之라 魏攻邊邑하니 王以精兵五千으로 戰於梁貊하여 大破之하여 斬首八千이라 晉泰始六年(270年)에 然弗卒하니 號中川王이라 太子藥盧立하다
왕의 처 관나가 요염하고 투기가 많아 왕이 그녀를 죽였다. 위나라가 변방의 읍을 공격하자 왕이 정예병 5000명으로 양맥에서 싸워 크게 무찔러서, 참수한 자가 8000명이었다. 진나라 태시 6년에 연불이 졸하니, 호는 중천왕이다. 태자 약로가 즉위하였다.
* 약로(藥盧): 고구려 13대 왕(재위: 270~292년). 서천왕(西川王) 일명 서양왕(西壤王). 이름은 약로(藥盧)ㆍ약우(若友).
肅愼氏ㅣ 來伐邊邑하니 王이 遣其弟達賈하여 拔檀盧하여 徙其民六百戶於扶餘南하고 降部落七을 皆爲附庸이라 有二弟逸友․素勃不遜하니 誘而殺之라
숙신씨가 와서 변방 마을을 공격하니, 왕이 동생 달가를 보내 단로를 함락하여 그 백성 600가호를 부여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항복한 7개의 부락을 모두 부용국으로 삼았다. 두 동생 일우와 소발이 불손하자 유인하여 죽였다.
* 부용(附庸): 큰 제후국(諸侯國)에 부속된 작은 나라.<예기禮記 왕제王制> 不能五十里 不達於天子 附於諸侯 曰附庸(불능오십리 부달어천자 부어제후 왈부용 ; 영지領地가 50리 못 되면 천자에게까지 연계를 짓지 못하여, 제후에게 부속시키니 이를 부용이라 한다.)<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
元康二年(292年)에 藥盧卒하니 號西川王이라 太子相夫立이라 猜忌達賈하여 無罪而殺之하니 國人流涕라 又殺其弟咄固하니 咄固子乙弗이 匿於民伍販鹽이라
원강 2년에 약로가 졸하니, 호는 서천왕이다. 태자 상부가 즉위하였다. 달가를 시기하여 죄도 없는데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또 달가의 동생 돌고를 죽이니, 돌고의 아들 을불이 천한 백성들 속에 숨어들어 소금을 팔며 살았다.
* 상부(相夫): 고구려 제14대 왕(재위: 292~300). 일명 치갈왕(雉曷王). 이름은 상부(相夫)ㆍ삽시루(imagefont矢婁). 서천왕의 태자(太子).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시기심이 많아 즉위하자 곧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백성의 존경을 받음을 시기하여 살해하고 이듬해에는 동생 돌고(咄固)도 사사(賜死)했다. 창조리(倉助利) 같은 명신(名臣)을 국상(國相)에 등용, 연(燕)나라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막기도 했으나 그 후 사치와 방탕에 흐르고, 298년 흉년으로 기근(飢饉)이 심했으나 화려한 궁궐을 짓고 창조리의 충고를 듣지 않다가 300년 창조리에 의해서 폐위되었다. 그 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했다.
三年(293年)에 燕慕容廆ㅣ 來伐急하니 王ㅣ 出奔新城하다 北部小兄高奴子ㅣ 擊破廆衆이라 加奴子爵大兄이라 患慕容氏兵強하여 攻伐無已하여 拜奴子北部太守하여 以備廆라
3년(293)에 연나라 모용외가 와서 공격을 급하게 하니, 왕이 신성으로 달아났다. 북부소형 고노자가 모용외의 군사를 쳐서 무찔렀다. 고노자에게 대형의 작위를 더하였다. 모용씨의 군사가 강성하여 공격을 그치지 않을 것을 근심하여 고노자를 북부 태수에 제수하고 모용외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八年(298년)에 國大饑하여 民相食이라 相夫ㅣ 大發國人하여 治宮室하니 助利諫에 相夫曰 國相이 欲爲百姓死乎아하다 助利ㅣ 與群臣으로 謀廢相夫하고 閉之外室하니 相夫自殺하다 迎立咄固子乙弗하다 葬相夫於烽山하고 號曰 烽上王하다
8년(298)에 나라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상부가 나라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하여 궁실을 지으니, 조리(助利)가 간하였는데, 상부가 말하기를 “국상이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은가?” 하였다. 조리가 뭇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상부를 폐위하고 외실에 유폐하니, 상부가 자살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을 맞이하여 세웠다. 상부를 봉산에 장례하고, 호를 봉상왕이라고 하였다.
* 을불(乙弗): 고구려의 제15대 왕(재위 300∼331). 국토 확장에 진력하였다. 현도군을 공격하여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고 313년 낙랑군을 멸망시켰다. 314년에는 대방군을 정벌하여 영토로 삼았다.
乙弗立하여 以三萬兵으로 攻玄菟하고 虜八千人을 移之平壤하다 大興二年(319年)에 慕容廆ㅣ 又遣兵伐之하니 乙弗이 求盟乃還하다 咸和六年(331年)에 乙弗卒하니 號美川王이라
을불이 즉위하여 3만의 군사로 현도를 공격하고, 포로 8000인을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대흥 2년에 모용외가 또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을불이 맹약하기를 구하여 마침내 돌아갔다. 함화 6년에 을불이 졸하니, 호는 미천왕이다.
太子斯由立하고 改名釗라 咸康八年(342年)에 還居丸都라 其年에 燕王皝이 自將勁兵四萬하고 攻陷丸都하니 王出走하다
태자 사유가 즉위하였다. 이름을 쇠(釗)로 고쳤다. 함강 8년에 환도로 돌아와 거처하였다. 그해에 연왕 모용황이 직접 날랜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환도를 공격하여 함락하니, 왕이 달아났다.
* 사유(斯由): 고구려 제16대 왕(재위 : 331~370). 국강상왕(國罡上王). 휘는 사유(斯由) 또는 쇠(釗). 15대 미천왕의 아들. 336년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고 342년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했다. 동년 11월 연나라의 모용 황이 내침하여 환도성을 함락, 왕모를 인질로 하는 동시에, 미천왕의 묘를 파서 시체를 싣고 많은 보물과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하여 돌아갔다. 343년 왕의 아우를 연에 파견, 많은 보물을 바치고 미천왕의 시체를 찾아왔다. 평양의 동황성(東黃城)으로 다시 천도. 355년 왕모가 귀국했다. 370년 백제의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사망했다.
燕發前王乙弗之塚하여 載其屍하고 虜王母及妻男女五萬하며 燒其宮室하고 夷其城郭而歸라 王이 獻珍寶奇物하고 稱臣於燕하니 燕乃還前王之屍나 猶留其母爲質이라
연나라가 전왕 을불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실어 가고 왕의 어머니와 처, 그리고 남녀 5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궁실을 불태우고 성곽을 허물어뜨린 다음에 돌아갔다. 왕이 진귀한 보석과 기이한 물건을 바치고 연나라에 신하로 자처하니, 연나라가 그제야 전왕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왕의 어머니는 억류하여 볼모로 삼았다.
永和十一年(355年)에 燕還王母하고 封王爲樂浪公이라
영화 11년에 연나라가 왕의 어머니를 돌려보내고, 왕을 봉하여 낙랑공으로 삼았다.
咸安元年(371年)에 以王屢侵百濟하니 其王親率師攻平壤이라 王力戰拒之라가 爲濟兵所射殺이라 號故國原王이라
함안 1년에 왕이 백제를 자주 침략하자 백제의 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을 공격하였다. 왕이 힘껏 싸워 대항하다가 백제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호는 고국원왕이다.
太子丘夫立하다 二年에 秦符堅이 送佛經․佛像하여 佛法始行이라 其年에 立太學하여 敎子弟라 遣將攻百濟北邊하여 陷水谷이라 將大擧以報라가 年飢乃止하다
태자 구부가 즉위하였다. 2년(372)에 진나라 부견이 불경과 불상을 보내와 불법이 비로소 행해졌다. 그해에 태학을 세워 자제를 가르쳤다. 장수를 보내 백제의 북쪽 변방을 공격하여 수곡을 함락하였다. 장차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마침내 그만두었다.
* 구부(丘夫): 小獸林王. 고구려 17대 왕(재위 371~384년).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한다. 휘(諱)는 구부(丘夫). 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들인데 몸이 장대(壯大)하고 웅략(雄略)이 있었으며 전진(前秦)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어 진왕이 사절과 중 순도(順道)를 보내 불상(佛像)과 경문(經文)을 전하였는데 이로부터 불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이다. 또 대학(大學)을 세우고 자제를 교육시켰다. 동 2년(372년)의 일이다. 동 3년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4년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동 5년에는 초(성)문사(肖(省)門寺)를 창설하여 순도를 두고 이불란사(伊弗蘭寺)를 개창(開創)하여 아도를 두니 이것이 해동(海東) 불법의 시초이다. 그 후 백제와 끊임없는 공방을 계속하였다.
* 부견(符堅): 중국 전진(前秦)의 3대 군주로서 왕맹(王猛)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나 왕맹의 충언을 듣지 않고 백만군사를 동원하다가 8천의 군사에 불과한 진(晋)의 사현(謝玄)에게 패하여 몰락하였음. 곧 지나치게 패도(覇道)를 추구하다가 실패한 군주로서 인용되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
太元元年(376年)에 入貢于晉이라 太元九年(384年)에 丘夫卒하니 號小獸林이라 無嗣하여 母弟伊連立하다
태원 1년에 진(晉)나라에 입공하였다. 태원 9년(384)에 구부가 졸하니, 호는 소수림이다.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동모제 이연이 즉위하였다.
* 이연(伊連): 고국양왕(故國壤王). 고구려 제18대 왕(재위 : 384~391). 제17대 소수림왕의 동생. 385년 랴오둥[遼東]을 정벌, 랴오둥과 현도(玄菟)를 빼앗고, 남녀 1만을 포로로 하여 귀환했으나 11월 연(燕)의 모용 농(慕容農)의 침입을 받아 랴오둥과 현도를 내어 주었다. 386년 8월 백제를 공격하고 392년 신라와 수교(修交), 3월에는 하교하여 불법을 널리 펴기에 애썼다.
出兵四萬하여 攻陷玄菟․遼東하고 虜獲萬餘나 慕容農ㅣ 擊之하여 復二郡이라 十七年(392年)에 立國社하고 修宗廟하다 下令崇佛求福하다 伊連卒하니 號故國壤이라 太子談德立하다
군사 4만 명을 출동시켜 현도와 요동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포로 1만여 명을 사로잡았으나, 모용농이 이를 쳐서 두 고을을 수복하였다. 17년(392)에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축하였다. 영을 내려 불교를 숭상하고 복을 구하게 하였다. 이련이 졸하니, 호는 고국양이다. 태자 담덕이 즉위하였다.
* 담덕(談德): 고구려 제19대 왕(재위 : 391~413). 휘는 담덕(談德) 또는 안(安). 별칭 호태왕(好太王)ㆍ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ㆍ영락대왕(永樂大王). 18대 고국양왕의 아들로, 17대 소수림왕 4년(갑술(甲戌) : 374)에 출생. 386년 태자가 되고 391년 즉위했다. 드물게 보는 영걸로, 즉위년에 서북의 연(燕)과 싸우고, 동시에 남쪽에 수륙군을 내어 백제를 쳐서, 신라를 구했다. 또 내침해 온 일본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사방에 확대했다. 404년 다시 일본과 내통한 백제가 신라를 침공한 때, 신라의 청에 의하여 군대를 남하시켜 일본군과 정면 충돌하고, 일본군을 궤주(潰走)케 했다. 또 만주를 완전히 장악하고 한강 이북 땅을 통합, 고구려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1875년(청(淸) : 광서원(光緒元)) 봉천유수(奉天留守) 숭실(崇實)이 통구(通溝) 지방의 민정을 선포할 때 광개토왕 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왕이 죽은 후 장수왕 2년(414)에 부왕의 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재료는 녹회색,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어 있고, 크기는 높이가 땅 위에서 약 627.5㎝, 넓이는 제일 넓은 곳이 195㎝, 좁은 곳이 138㎝로서, 한국 것으로는 제일 큰 비석이다. 새긴 글씨의 체는 전한(前漢) 예서(匠書)의 고박(古朴)하고 중후(重厚)한 서풍이며, 글의 내용은 고구려ㆍ신라ㆍ가야의 3국이 연합하여 왜군과 싸운 것, 그리고 일생 사업을 기록한 것이다.
王이 親帥衆四萬하고 攻取百濟邊邑十城하다 又擊關彌克之하고 築七城이라 百濟將眞武來侵에 王擊破之하고 殺八千人하다 燕王盛이 自將三萬兵하고 伐拔新城․南蘇하고 拓地七百里하여 徙其民五千戶하다
왕이 직접 4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백제의 변방 마을 10개의 성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또 관미를 쳐서 이기고 7개의 성을 쌓았다. 백제의 장수 진무가 와서 침략하자 왕이 쳐서 무찌르고 8000명을 죽였다. 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직접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신성과 남소를 공격하여 빼앗고, 700리의 땅을 개척하여 자기 백성 5000호를 이주시켰다.
* 관미성(關彌城):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각미성(閣彌城)과 동일한 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391년 7월에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탈취하고, 10월에는 군사를 7개 방면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동안 공격한 끝에 함락하였다. 이에 백제는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관미성을 탈환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58성(城)을 취한다. 《삼국사기》에서는 관미성이 '백제 북쪽 변경지대의 요새로서 사면이 깍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요새'라고 기록하고 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성(烏頭山城)이라는 주장이 있다.
義煕九年(413年)에 談德卒하니 號廣開土라 太子巨璉立하니 是爲長壽王이라
의희 9년에 담덕이 졸하니, 호는 광개토(廣開土)이다. 태자 거연이 즉위하니, 이 사람이 장수왕이다.
* 거연(巨璉): 장수왕(長壽王) 생졸 394~491, 재위 412~491년. 장수왕 시대를 고구려의 정치∙사회∙문화적인 전성기로 부르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가장 넓은 땅에, 가장 잘 갖추어진 제도 그리고 선진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남진정책을 펼친 끝에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은 확실히 한반도의 그것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에 따라 신라와 백제도 자극과 위협을 받았다. 자극은 자극대로 위협은 위협대로 세 나라의 발전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