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반려
촛불을 점점이 켜두었지만 넓은 강당 안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아물아물 긴 의자들처럼 보이는 것들 앞에는 각각 사람이 딱 한 명씩만 서있었다. 그렇게 30여 명쯤의 어른과 아이들이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눈에 들어오는 수의(壽衣)라는 것을 입고 있었다. 긴 의자 같은 것들은 다름 아닌 ‘관(棺)’이었다.
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작은 탁자 위에는 검정 테이프로 장식되어 묘하게 낯선 나의 영정 사진이 서있었다. 그리고 가지런히 펜과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검은 리본 두 줄과 하얀 테이블보, 그리고 실제로 깃털 정도의 무게일 빈 종이가 몹시 무거워보였다.
“여러분, 유언장을 작성해 주세요.”
젊어서부터 일기를 꾸준히 써 온 나였다. 그러나 막상 펜을 손에 쥐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쥐새끼 모양, 가슴은 쿵쾅거리는데 그 순간을 모면할 수는 없었다. 마침 친구들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게 있어 이름 석 자를 먼저 적었다. 열 세 자리 숫자의 주민번호도 기억해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둘러보았다. 대부분 펜을 열심히 움직거리는 걸 보니 남겨질 가족을 위해 생각해 놓은 유언이 있었나보다. 여기저기에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숫제 수도꼭지처럼 눈물콧물을 쏟는 사람도 보였다. 내 오른쪽 옆에 자리를 잡았던 남편도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슬쩍 훔치고 있었다.
지난여름, 아들 내외가 모처럼 같이 피서를 가자고 했다. 그런데 날씨가 하도 무더워서 지칠 대로 지친 우리 부부는 겨울로 미루자고 했었다. 대신 연말에 있는 내 생일 즈음 가족여행을 계획했었다. 하필 때마침, 온 나라 안이 부정 비리로 어수선하여 나는 생일을 조용히 보내자고 했다. 그랬더니 아들 녀석이 어디서 알았는지 ‘웰다잉(well-dying)’ 이라는 죽음 체험 프로그램에 참석하자고 제의했다. 아들은 식도암 초기로 재작년, 수술 없이 독성이 강한 항암제를 투여받는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마쳤었다. 유쾌한 것과는 거리가 먼 행사로 해를 마감하면 새해까지도 우울한 기분이 연장되지 않을까 싶어 반대를 했는데 고집 센 남편이 찬성하고 나섰다. 남편 생각에는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에 안성맞춤인 송년행사였나 보다.
“엄마!”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았다. 아들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통곡을 하고 있었다.
“왜? 상훈아, 너 괜찮니?”
“엄마, 구역질나고 힘든 치료를 다시 받아도 여기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겠어요. 애 생각에 관 속에 들어가기가 겁나. 흑흑.”
“그래. 들어갔다가 나오면 이제 건강하게, 행복하게 잘 살아.”
아들이 서럽게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짠했다. 아들 옆에서는 11살짜리 손자가 그런 아빠를 낯선 사람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내가 돋보기를 안 가져와서 글자가 안 보여 그러는데 유언장 좀 대필해주시오.”
“아저씨, 누구한테 쓰는지 받을 사람 이름도 써야 하나요?”
눈물바다인 강당에서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이 이어지니 진행 요원들이 분주해졌다. 그리고 진행자는 당황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자, 자.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신 분들은 들어가 주세요. 관 뚜껑을 닫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셀프 서비스인 식당에서 물을 가져다 달라는 것도 아닌데 불친절까지는 아니어도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입 다물고 빨리 죽어져 관 속에 들어가란다. ‘참가비는 다 받아먹고, 민폐 끼치지 말고 조용히 죽으라는 거야 뭐야?’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사람들은 스스로 ‘입관’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 쓸 말이 남았는지 쭈뼛거리던 사람들도 앞에 놓인 관 속에 들어가 몸을 뉘였다.
“여보, 잘 가! 사랑해.”
하며 왈칵 눈물을 쏟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관 뚜껑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까칠한 수의 밑의 내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진행 요원이 와서 말없이 제 할 일을 했다. 관 뚜껑이 닫히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좁은 공간에 누워있다는 갑갑함과 언젠가 진짜 들어가 누울 수밖에 없다는 두려운 생각이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이건 가짜야’ 하고 자위도 해보았으나, 몇 톤의 흙이 내 위에 쏟아지고 꽝꽝 다져져 도무지 다시 살아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난날들의 기억이 하나둘씩 머리를 쳐들고 감고 있는 눈앞을 지나갔다. 어린 시절이 떠올랐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젊은 얼굴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고시절, 그리고 아들을 키우며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눈을 감을 것을 생각하니 슬퍼졌다. 눈물이 주르르 흘러 귀를 간질였다.
“드르릉 컥컥, 후유.”
갑자기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의 코골이 소리가 분명했다. ‘저 양반이 어제 저녁 반찬으로 올린 닭볶음탕을 보고 신이 나서 소주를 까더니만?. 이 상황에서 코를 곯다니 말이 돼?’
“배고픈데 밥 안 주나?”
“난 찜질방에서 삶은 계란이란 잔뜩 먹고 왔는데?.”
“허구한 날 나가서 대체 뭘 하는 거야. 돈 쓰고 여편네들이랑 어울려서 수다밖에 더 떨어? 내참, 마음에 안 들어서 원.”
‘아이고! 자기는?. 정년퇴직 때까지 회사 일이랍시고 하루가 멀다고 늦게 들어오고 흥청망청 술에, 외박에?. 나야 이제 나이 먹고 챙길 애들도 없겠다, 늙어 어그덕대는 몸 어쩌다 지지고 온 것뿐인데 뭐가 못마땅해서 심통이람.’ 하고 밉살스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남편도 늙어서 잔소리가 늘지 싶어 동병상련이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냉동실에 있던 닭볶음탕을 데워준 것이었다.
“어머님, 아버님. 어떠셨어요?”
일이 있다며 참석하지 못한 며느리가 뒤늦게 나타나 살살거렸다.
“엄마. 있잖아요, 저는 관에 들어갔을 때 조금 재밌었어요.”
“하하. 할애비는 그 속이 컴컴하고 답답해서 좀 겁나던데.”
“아이고, 그래서 주무셨나?”
“호호. 그러니까 두 분 이대로 오래오래 사세요.”
“어? 엄마가 그랬잖아. 할머니, 할아버지는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가시니까 말 잘 들으라고.”
아들 내외는 우리 부부를 집에 태워다주고 자기들의 보금자리로 내뺐다. 철없는 손자의 말이었지만 서운한 게 사실이었다. 내 나이 70이 넘어 아무래도 젊은 애들보다 죽을 날이 여러 뼘 더 가까울지언정, 결국엔 누구라도 추월해 결승점에 먼저 다다를 수 있는 것이 죽음이란 걸 모르나 싶었다. 며느리는 아들이 죽음 체험을 신청했다는 말에 대뜸 ‘미쳤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했다. 자기 남편이 암투병까지 했는데도, 아직 죽음은 자기한테 올 게 아니라고 여겼나 보다. 며느리는 그 시간에 동네 내과병원에서 ‘신데렐라’라고 불리는 미용주사를 맞았다고 손자 녀석이 일러주었다. 미용주사만 맞은 건지 보톡스 시술도 받은 건지 며늘애의 얼굴이 부석한 게 평소와 달라 보였다. ‘어머니, 저는 늙기 싫어요. 호호.’ 늙기 싫다는 건 죽기도 싫다는 말이겠지. 미용주사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시계는 움직여, 사실 죽음으로 한 발짝 걸어가고 있었던 것인데도. ‘주름 없앤다고 나이 안 먹는 걸로 착각하지 마라!’ 라는 말이 입 바깥으로 나올 뻔했지만 용케 참았다.
‘안녕하세요. 웰다잉센터입니다. 죽음 체험 참가자 여러분들은 참가 후기를 남겨주세요.’ 며칠 뒤 이런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보내준 주소를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별의 별 댓글이 다 보였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은 어떤 학생은 관 속에 누워서 셀카를 찍었다고 했다. 어떤 체험자는 집에 돌아가서도 그 순간을 돌이켜보면 눈물이 난다며 다시 태어난 걸로 생각한다고 올렸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낮게 흘러나오면서 관의 덮개가 열릴 때 희미한 빛이 들어왔었다. 나이 먹은 이 콧구멍과 폐 안으로 신선한 산소가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노랫말처럼 죽을 때까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생의 반려자인 남편과 잘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날은 감회에 젖어 ‘삶의 리셋 그리고 리필.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면서 자꾸 그걸 까먹는다.’ 라고 일기장에 썼다.
문단속을 하고 안방에 들어와 전등을 끄는데 띵똥 소리가 났다.
“얘, 저승 잘 갔다 왔니?”
늙어서 잠이 없어 걱정이라며 늘 징징거리는 올빼미 여고동창이 휴대폰 톡으로 물어왔다. 다소 무거운 주제였지만 담담한 척, 나는 웃는 토끼 얼굴의 이모티콘을 골라 보냈다.
“그래, 소풍 잘 마치고 왔다 이거지. 언제 죽는지 단전단수처럼 예고나 해주면 좀 좋아. 그치? 조만간 만나자. 잘 자.”
“응.”
나는 고물고물 글씨가 잘 보이지도 않지만,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어스름 저녁에 콩 고르기보다 서툴고 힘들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쩌면 그렇게도 재치있고 신속하게 답을 보내는지 늘 궁금했다. ‘얘는 늙지도 않나봐. 맞다. 어느 시인이 이 세상 소풍 마치고 돌아가리라 그랬었다. 소풍이든 휴가든 마치기 상당히 아쉬운 활동이 아닌가. 산뜻하게 그만 둘 수는 없는 걸 테지.’
“여보, 자?”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우니 어둠 속에서 남편이 조용히 물었다.
“자려고요. 여보, 우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시다.”
“그래야지. 여보?, 이제부터 되도록 밤에 마시는 술을 줄여야겠어. 밤에 마시면 뇌에 안 좋대. 낮술로 바꿔봐야지. 그리구 안주는 몸에 좋은 걸로 좀 만들어줘. 관에 들어가 보니 철저하게 혼자더라니까. 내 몸은 내가 아껴야지.”
내가 못 산다, 못 살아. 진짜 죽어볼 수 없어 다행인지 아니면 유감인지?. 저 인간일랑은 관 뚜껑을 열어주질 말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