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섬의 서쪽 사면을 타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자 실로 장엄한 풍경이 갑자기 나타났다. 깎아지른 절벽 너머로 볼카노성이 보였는데 아이맥스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또렸했다. 두 섬을 갈라놓은 해협으로 수중익선과 요트가 지나가고 있었고 태양이 바다에 드리운 붉은 기운이 마치 폭포처럼 선박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름들이 절벽을 스쳐 해협을 통과하며 붉은 지평선을 향해 몰려갔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보았지만 그 어떤 이미지도 내가 본 것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디지털카메라의 2.5인치 액정에 담긴 해협과 절벽, 불카노의 풍경은 빛바랜 관광엽서처럼 식상하고 진부한 것이었다. 스쿠터를 타고 달려와 맞이한 풍경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것의 일부였다. 수백만 년 전 내 발밑 저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지각변동이 이 성과 저 건너의 불카노를 만들었다. 지도만 보고 작다고 무시했던 섬이었다. 그러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런 자각이 내게 상상하지 못했던 쾌감을 주었다. 그리스인들이 내가 서 있는 바로 여기에 서서 이 괴상한 섬을 만든 신을 상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외눈박이 거인들이 해협을 지나가는 선량한 선원들에게 집채만한 돌을 던진다고 믿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협곡의 곳곳에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현대의 나는 고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그것이 화산활동의 결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곧 이 세계의 먼지로 사라질 것이나 내가 서 있는 이 불안정한 화산도와 해협, 뜨거운 바다는 오래도록 남아 전설을 생산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내 구름들이 몰려왔다가 바다 위로 흩어졌다.
스쿠터를 타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는 안과 밖이 통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풍경은 폐부로 바로 밀고 들어온다. 그 순간의 풍경은 오직 나만의 것이다. 저 아래 까마득한 해안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하는 신중한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이고 절벽을 향해 달려나갈 때, 비로소 나를 이 섬에 데려온 이유, 여기 오기 전까지 자기 자신마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진짜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런 풍경을 다시 보게 될 때, 우리 몸의 일부가 갑자기 격렬히 반응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 김영하, 「 오래 준비해온 대답 」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