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백년지대계? 당장의 전략이 필요하다(정희진)
정희진의 융합 _27
학교를 없앨 수 없다면 돌봄 기관으로 전환해야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통치(1884~1945년) 초기, 프랑스 관리들은 베트남에 쥐가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쥐를 퇴치하기 위해 쥐 꼬리를 모아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정책을 시행했다. 시간이 지나자 현지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쥐를 기르기 시작했다. 쥐 퇴치 정책은 사람들의 절실한 필요(돈) 때문에 실패했다. 이 이야기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동기(動機, motive)와 그 동기가 지향하는 바에 관한 좋은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번 글 ‘영어, 영어 교육을 생각한다’가 나간 뒤 다양한 독자 메일을 받았다. 공통점은, 안타까움이었다. ‘미래 세대’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글이 부족하기도 했고 생각지도 못한 의견을 들으니, 이 주제에 대해 더 써야겠다는 동기가 생겼다. 독자의 의견 중에는 쉬운 영어 프로그램을 개발한 재미교포가 이를 무료 제공하겠다는 제안, 내 글이 사대주의를 비판해서 민족 자존감을 회복해주었다는 ‘감사’, 현장 영어 교사의 고뇌와 인생 상담, 영어에 대해 썼으니 중국어에 대해서도 써달라 등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이 넘쳤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한 이야기는 30년간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친 교수의 편지였다. “저는 사람은 배우지 않으려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선생이 넘쳐도 영어를 배우지 못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공부가 강제로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발, 이 말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공부를 하라면 좀이 쑤신다는데, 어떻게 책상에 앉아 있습니까? 모두가 이봉주가 되지 않고, 될 필요도 없듯이 공부도 그렇지 않은가요? 왜 공부를 억지로 시킵니까. 제 생각엔, 교육이란 정직한 사람을 만드는 제도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생 교직에 몸담아왔던 이의 슬픈 요약, “인간이란 공부하지 않는 존재다”.
학생들은 왜 공부하지 않는가. 동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공부를 해야 할 동기를 가져야 하는가?
융합은 대계가 아니라 전략
교육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 아직도 이 말에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교육이나 환경 문제는 중대한 일이어서 당장의 필요보다 멀리 보고 큰 틀에서 정책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구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 언제 백년 후를 생각한단 말인가. 말년에 “나도 자본주의가 이렇게 발전할 줄 몰랐다”던 마르크스가 1883년에 사망했으니 사후 백년인 1993년에도 피시통신 시대였는데, 지금 ‘발전’ 속도를 생각해보라. 백년 전, 지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 매일 코로나 확진자 숫자가 코앞의 뉴스다. 지금 북미 대륙 서부는 49.5도, 수백명이 사망하고 있다. 교육이 아니라 하루의 생존이 큰일, 대계(大計)다.
인류에게 교육이 절실했던 시기는 백년 전 일이다. 계몽으로서 교육은 잠시였고, 이후 학교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계급을 재생산하는 제도였다. 학생들은 어린 시절부터 좌절과 폭력을 경험한다. 지금 학교폭력 가해자는 주로 동료들이지만, 예전에는 교사의 체벌이 흔했다. 한국 사회는 학교 공부를 인격적 열등감으로 연결한다. 그나마 학력(學力) 사회도 아니고 학벌 사회다. 20여년 전부터는 학벌의 문마저도 부모의 능력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동기부여 단위는 사회가 아니라 가족으로 이동했다.
인구-교육-고용의 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영어 공부를 포함, 모든 학생이 공부를 잘할 수 없고 ‘잘해 봤자’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불가능한 임무를 실현하려고 한다. 나는 앞서 말한 교수의 의견(정직한 시민 양성)이 당대 교육정책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영우 작가의 <제가 해보니 나름 할 만합니다―40대에 시작한 전원생활, 독립서점, 가사 노동, 채식>에는 대한민국 ‘진보적 부모’의 솔직한 심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세상에 대한 건강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춘, “그러면서도”,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학생’(큰따옴표는 원저).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아이를 다르게 키우고 싶었다… 실은 이런 마음도 욕망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알아서 잘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부모가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은퇴 자금을 사교육비로 날리지 않도록, 자녀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도 잘하고, 인성도 좋고, ‘부모 고마운 줄도 알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런 ‘천사’는 많지 않다.
결국, 자기 자신이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젊은이들이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때, 현실에 맞는 정책이 가능하다. 여성들에게 강제 낙태시술을 했던 ‘가족계획’은 잊었는지, 지금은 아이를 낳으라고 난리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저출산은 사회를 보존하기 위한 여성의 진화생물학적 선택이다. 정부와 지자체가 대책을 세운다며 집행하는 자원이 아까울 뿐이다.
돌봄 공동체로서 학교
자본주의 발달의 결과를 요약하면, 실업의 일상화(빈부격차)와 팬데믹(기후위기)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코로나19로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집단이 누구일까 물어보았다. 간호사 등 방역 당국, 자영업자, 소상공인, 관광업계라고 대답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엄마들이라고 생각한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문을 열었다. 학교가 문을 닫는 초유의 사태는 전업·취업 주부 할 것 없이 24시간 아이들을 돌보고, 공부를 독려하고, 세끼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전쟁 같은 일상을 만들었다. 요즘은 외식도 많아졌지만, 아예 규범을 무시할 수 없다. 엄마들은 비명을 지른다.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1978년 우연히 북한의 선전방송을 시청한 뒤 지인에게 “김일성이 잘생겼다”고 말한 혐의(반공법 위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던 90대 노인에게 41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어렸을 때 내가 받았던 반공 교육도 이런 경우와 비슷하다. ‘북한은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며, 가족과 아이들을 떼어놓고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비인간적 사회’라고 배웠다. 당시 북한의 실제가 어쨌든 간에, 안전한 어린이집과 학교야말로 부모들이 가장 원하는 사회가 아닌가.
학교의 역할은 공부에만 있지 않다. ‘가정처럼’ 미래 세대에 대한 돌봄 기관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가족도 학교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말 때가 왔다. 학교를 없앨 수 없다면, 다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현직 고교 교사는 말한다. “학교는 학부모에게 환상을 줍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눈앞에 안 보이면, 학교에만 있으면 공부하는 줄 알아요. 코로나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학부모예요. 학교가 문을 닫고, 아이와 부모가 직면하게 되니 사달이 났어요. 현실을 목격할 수밖에 없거든요.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나 학원에 있으면 행복해해요.”
최근 20여년 동안 공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수많은 대안학교가 생겼다. 물론 대안학교도 문제가 많다. 내 친구는 자녀를 대안학교에 보냈는데, 실질적인 이유는 기숙사였다. 일단 아이를 안 보는 게 ‘마음이 편하고’,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공부는 어차피 자녀 본인의 몫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지혜로운 부모에 속한다. 대안학교 중에는 지역 유기농 농가와 협약을 맺고 학생들이 농사를 배우면서 상품화되지 않은 작물로 급식을 하는, 농가와 학생과 학부모 삼자가 모두 행복한 경우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조차 자녀들이 방학 때 집에 오면 부담스러워서 여행을 보낸다는 부모도 많다. 이것이 부모와 아이가 함께 생활하는 ‘정상가족’의 실제다.
사교육비, 폭력과 학습 포기가 만연한 학교, 돌봄에 지친 부모(특히 엄마들)를 위한 대안은 학교를 공부와 함께 일상적 돌봄의 공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0년 전에는 학생 수가 80명이 넘는 콩나물 교실이 많았다. 지금은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많지 않다. 더구나 ‘지방 소멸’ 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학교와 가정을 투 트랙으로 총체적 돌봄을 제공하는 교육이 불가능할까. 오히려 지금 현실이 훨씬, 비정상 아닌가.
융합은 초월적 위치에서 여러가지 지식을 합하는 관념이 아니다. 이동이다. 현실로부터 출발해(rooting), 필요한 실천으로 옮겨가는(shifting) 사고다. 현실에서 시작, 해결책을 찾는 전술적 사고(실사구시)다. 현실 인식이 너무 늦으면, 우리의 자리(뿌리)가 썩게 된다. 이 글의 발문 “타인의 편집된 삶과 나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불행”, 나는 이보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통찰을 근래 읽은 적이 없다. 앞서 말한 김영우 작가의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의 중학교 3학년 자녀가 쓴 글이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