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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희망을 꿈꾸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일산동지방 참포도나무교회 안준호 목사
1. 골목으로 내려가다.
_이유는 없어, 개척교회가 싫을 뿐이야
개척교회를 시작하는 전도사와 목사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꿈과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회 현실은 엄혹합니다. 참포도나무교회는 2004년 1월 16일에 개척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개척 목회를 준비하던 세 가정이 함께 뜻을 모아서 작은 원룸에서 예배를 드리며 개척 장소를 찾았습니다. 그 가운데 장항동 731번지 한호를 분양받아 예배당으로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때 교회 현관에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하신 ‘세상은 나의 교구다’라는 구호를 붙였습니다.
개척교회는 새로운 신자들을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 초기부터 전도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강원도 평창에 자리한 '복음농장'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올라가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농사를 지어서 그 수확물로 전도를 했습니다. 옥수수 만개를 새벽에 쪄서 트럭으로 옮겨서 2천 명과 나눴습니다. '예수 믿으시고, 동네 교회에 나가세요'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전도를 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2천 명 중에 단 한 명이라도 저희 교회에 한 번만이라도 나와 주길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명도 교회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계속해서 농사를 짓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해 가을에는 김장을 2 천포 기해서 젊은이들의 거리에서 문화축제를 열고 지역주민들과 나누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대학원에서 받은 장학금을 모두 그곳에 쏟아 넣고 전도를 했습니다. 그 뒤 겨울에는 장모께서 직접 담그신 된장과 고추장을 1kg 용기에 넣어서 이천 명과 나눴습니다. 그 뒤에는 깻잎김치를 나눴습니다. 그 일을 통해서 저는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저희 교회에 나와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전도를 하면서 한 가게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눠주었는데 그분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일산의 대형교회를 다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을 전도하려고 나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마음으로 그분은 제가 꼭 챙겨서 드렸습니다. 귀한 농산물들을 받고 기뻐하시고 저희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신대원 전도학 세미나의 그분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역교회 중에서 이름을 아는 다섯 교회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렸는데 그분은 일산에서 제일 큰 교회부터 5위까지의 교회를 자랑스럽게 써넣으셨습니다. 제가 다른 학우를 시켜서 혹시 바로 옆 건물에 있는 개척교회는 모르시냐고 물어보니, 모르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분만은 바로 옆 건물에 들어와서 매번 인사를 드리고 귀한 농산물을 나눠주었던 개척교회는 기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인터뷰를 통해서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없어, 개척교회가 싫을 뿐이야" 그 이후 저는 기존 교회에서 전도라는 이름으로 행하지만 실상은 자기 교회 홍보에 지나지 않는 '전도'를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_실어증에 걸린 전도사
교우들과 일 년이 넘게 기도하면서 마음을 다해온 전도가 실패로 끝나자 목회의 위기가 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목회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목회자가 열정을 다해서 기도하고 설교하고 진행한 일들의 결과가 아무것도 없으니 교인들도 조금씩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제 목회에 맞은 첫 번째 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제 안에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목사에게 가장 크게 바라는 것은 ‘설교자’로서의 능력일 것입니다. 그런데 개척 목회를 하면서 한 세 달 정도 설교를 하다 보니 설교를 할 때마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제 안의 한 영이 떠서 설교하는 저를 보면서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너는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왜 그렇게 큰 목소리로 떠드느냐?”, “너는 예수를 믿지도 않는데 왜 성도들에게는 예수를 믿으라고 강변하느냐?”는 목소리가 제 안에서 분명하게 들려오다 보니 설교를 하기에 어려울 정도까지 왔습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설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며 또한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은혜 가운데 설교하며 살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제 모습은 설교단에서 선포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설교단에서는 사랑과 소망 그리고 용서와 평화를 전했지만, 제 삶에는 그 어느 곳에도 사랑과 소망 그리고 용서와 평화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폴 틸리히와 같은 신학자들에게는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말은 계속해서 허공을 맴돌게 되었고 저는 점점 말을 더듬게 되었고 길을 잃은 말들은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조금씩 말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겪은 실어증의 경험은 ‘존재’와 ‘삶’의 불일치였습니다. 제가 하는 설교와 실제 삶의 괴리, 그 건널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분리가 제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숙제였습니다.
_숲에서 만난 성령님
새로운 출발은 의외로 쉽게 다가왔습니다. 아내와 저는 교우들이 예배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숲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햇볕이 비치고 바람이 부는 숲을 걷다가 보면 모든 시름과 근심을 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가 인도하는 예배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숲에 들어가면 언제나 성령님께서 저를 맞아주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숲을 걷고 또 걷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지고 온 몸이 살짝 열기가 오르기도 합니다. 그때 저는 숲을 시원하게 흔들어주는 바람 소리 가운데서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괜찮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그 한마디를 듣고 날아갈 듯이 좋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비록 제가 예배를 인도하는 예배 가운데는 아직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았지만, 제 삶과 사역에는 성령님께서 이미 들어와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이제 그 음성에 순종하면 될 터였습니다.
2. 골목에서 만나다.
_골목길을 쓸던 날
첫 번째 교회 처소에서 저는 새로운 가족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일산 신시가지 상업지구 8층 건물에 자리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사람을 만나야 그들과 친구가 되고 전도도 하고 교제도 나눌 터인데 도심 중심부 빌딩 안에 교회가 있다 보니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를 지금 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백석동 13블록 마을 안으로 이전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내는 피아노 학원을 시작했는데 저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피아노 학원 앞을 쓸고 또 쓸었습니다. 가을이 되니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낙엽들이 제 앞으로 몰려왔습니다. 낙엽을 쓸다가 보니 한 목소리가 제 머리를 툭 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이제 조금 컸구나”. 제가 그 목소리를 듣고 바로 대답했습니다. “주님,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전에는 네가 일어나도 마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너로 인하여 이 마을이 깨끗해지잖니?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를 보고 지나가는 분들이 먼저 저에게 빙긋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음성의 정체를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음성이 저를 변화시킨 것은 분명합니다. 그 음성으로 인하여 저는 마을 골목으로 들어왔고 그 마을 속으로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골목길에서 낙엽을 쓸던 날 저는 그렇게 주님의 음성을 만났습니다.
_어린이 북카페 숲을 걷다
이제 교회를 장항동 상업지구에서 백석동 13블록 주거지역으로 옮기면서 저는 새로운 모델의 교회를 꿈꿨습니다. 저는 아동 사역을 집중으로 하는 교회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 마을 속으로 들어가서 마을 아이들을 위한 친구와 같은 교회를 꿈꿨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인테리어를 ‘어린이도서관’과 ‘북카페’가 합쳐진 형태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제가 숲을 걷다가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으니, 그 이름을 ‘어린이 북카페 숲을 걷다’라고 지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가 운영하던 피아노 학원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주로 이곳을 이용했습니다. 초등학교 학생들은 이곳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책을 봤고, 학부모들은 제가 타주는 ‘드립 커피’를 마셨습니다. 이곳에서 ‘열두 광주리 요들단’을 만들어서 아이들과 매주 월요일 요들을 배우고 몇 차례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여름이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강원도 평창으로 2박 3일간 여행을 떠나서 수련회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저는 마을 안에 남겨진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 1시간 학교는 노는 곳? 삶을 배우는 학교!
어린이 북카페 숲을 걷다의 이름을 걸고 그곳에서 평일에는 어린이도서관과 동네 사랑방의 역할을 감당했고 주일에는 그곳에서 교우들과 동네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초등학생들이 주로 이 공간을 이용했는데 저녁 6시 정도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6시가 지나도 집에 가지 않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제 아내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던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아내는 7시가 넘어야 학원이 끝나기에 이 시간 정도가 되면 출출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동아(동네 아이의 줄임말)야, 집에 왜 가지 않니?”. 동아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집에 가도 아무도 없어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 라면 먹으려는데 너도 함께 먹을래?” 동아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서 그 날 처음으로 동아와 제가 함께 라면을 같이 먹었습니다. 그 날부터 저는 매일 저녁 라면을 끌이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동네 아이들 몇 명이 저와 함께 놀고 라면을 먹게 되었습니다. 한 보름 가량 제가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라면을 끌여 먹었더니, 아내가 그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학원을 끝나고 오면 매일 밥을 해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6년 동안 아내는 매일 저녁마다 많게는 10명에서 적게는 세네 명의 저녁밥상을 차려주었습니다. 이른바 말 그대로의 밥상공동체가 시작되는 경험이었습니다.
저희는 매일 저녁 함께 모여서 밥을 같이 먹었습니다. 아이들이 그 날 경험한 이야기들을 저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때로는 하하호호 깔깔대며 웃었고 때로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아이들에게 따끔하게 가르쳐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 경우 아내와 저는 경청과 환대로 동네 아이들을 맞아주려 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제가 교회학교를 통해서 배운 경험 그대로였을 것입니다. 어릴 적 교회학교에 나오면 선생님들은 저를 넓은 품으로 안아주셨습니다. 그 경험이 오버랩이 되면서 학교생활에 지친 아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려 했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놀기만 했는데 아이들 안에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나면 아이들과 동네 골목을 걷고 뛰고 그곳에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러다 간디와 함께 스와라지 운동을 했던 비노바바베가 주창한 ‘1시간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노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동네에서 저희 공간을 “저곳은 노는 곳”이야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신학교 은사이신 송순재 교수님께서 저에게 1시간 학교를 소개해주셨습니다. 1시간 학교는 간디와 함께 스와라지 운동을 했던 비노바바베 선생님께서 주창한 마을학교 모델입니다. 그는 하루에 1시간씩 읽기와 쓰기와 같은 간단한 지식만 가르쳐 주어도 충분히 배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어른들이 교사가 되어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을학교의 형태가 바로 1시간 학교입니다.
저는 1시간 학교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시간학교를 세우고 그곳에서 매일 1시간씩 아이들의 공부를 도왔습니다. 수업은 ‘글쓰기’, ‘다도’, ‘공예’, ‘일본어’, ‘영어’, ‘동네 체육’, 그리고 ‘영어소설 읽기’를 했습니다. 저는 ‘영어소설 읽기’수업을 맡아서 동아들에게 쌩땍쥐베리의 ‘어린왕자’를 함께 읽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취지에 동감하는 선생님들로 꾸렸고, ‘어린이북카페 숲을걷다’를 통해서 만난 아이들이 함께 했습니다.
신앙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1시간학교
비노바 바베가 제안한 ‘1시간학교’운동은 그의 힌두교 신앙에서부터 출발하고 끝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을 떠받치고 있는 신앙공동체의 힘으로 ‘1시간학교’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면에 착안하여 ‘1시간학교’를 진행하는 힘을 개신교 신앙공동체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사회복지모델로 진행을 하다 보면 기독교적인 가치에 대해서 전하고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신앙교육이라는 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시간학교에 속한 아이들을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로 한정을 짓고 그 아이들에게 주일에는 신앙공동체에서 살게 하였고, 평일에는 ‘1시간학교’에서 자립과 성장을 위한 공부를 하도록 도왔습니다.
이후 1시간학교는 수업을 진행하지 않고 밥상공동체의 형식을 띠는 자율학교로 진행했습니다. 1시간학교 학생들이 학교를 마치고 오면 함께 밥을 먹고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왔습니다. 또한 시간이 날 때마다 ‘도시 청소년을 위한 숲을걷다’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도시 청소년들에게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1시간학교 학생들이 대학을 진학하거나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그들이 자립을 할 때까지 교회에서 ‘1시간학교 장학회’를 조직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매년마다 장학금을 지급했습니다. 대학생들에게는 매년 50만 원을 지원하여 자신의 자립과 성장을 위해서 쓰도록 도왔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한 명의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기까지는 한 마을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커피마을을 만들다(Coffee House for Village)
1시간학교를 5년 정도 운영하다 보니 어려움이 왔습니다. 1시간학교 학생들을 위해서는 좋은 프로그램이지만,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려면 비용과 헌신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 시기에 저희는 다른 사역을 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의 모든 여력을 1시간학교에 쏟아부었습니다. 그것도 새로운 학생들을 뽑지 않고 중학교 1학년에 만난 다섯 명 정도의 아이들에게 집중했습니다. 학생들이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그리고 대학생으로 성장하면서 1시간학교에 매일 오는 학생들도 줄어갔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1명의 학생만이 ‘1시간학교’에 매일 나왔습니다. 1명의 아이지만 그 아이를 위해서 1시간학교를 운영하려니 비용이 부담이 되었습니다.
작은 교회이다 보니 사례비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사십 만원 가량 생활비를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 비용은 아내가 피아노 학원을 하면서 보태야 했습니다. 여러모로 고민하던 끝에 ‘커피마을’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커피마을’을 통해서 번 돈으로 1시간학교를 운영할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청소년들의 문제를 고민하다 보니 가장 커다란 문제는 마을의 상실이었습니다. 전에는 마을이 살아있었기에 그 마을을 중심으로 교육과 선교를 진행할 수 있었는데 마을의 실종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삶을 보살 필 수 있는 공간과 관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박원순 변호사의 ‘마을 만들기’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습니다. 저 또한 그 일환으로 백석동 13블록의 마을 만들기를 ‘커피마을’을 통해서 이루어 보려 했습니다.
- 목사, 목수를 꿈꾸다
‘커피마을’을 준비하는 가운데 인테리어 업체와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공사를 다 하지 못하고 공사를 멈추게 되었습니다. 비용은 떨어지고 공사는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직접 인테리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커피마을 공사를 진행하던 2009년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추운 날씨에 손이 찢어져 가면서 목공 작업을 했습니다. 한 번은 길가에서 목공 작업을 하는데, 한 아저씨께서 저에게 “목수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분께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저는 목수가 되고 싶은 목수입니다”.
그렇습니다. 원치 않게 시작한 목공 작업과 목수의 삶이었지만 저는 목공 작업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목사는 주로 말을 많이 하는데, 목수는 말이 아닌 자신의 삶으로, 땀으로, 노동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수의 일은 정직해서 제가 일한 만큼의 결과를 항상 가져다줍니다. 이때부터 저는 목수가 되기를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계속된 목공 작업을 통해서 신학교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땀이 가르쳐 주는 진리를 목공 작업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 작은 것들에 주목하다
커피마을은 6평밖에 안 되는 작은 카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참포도나무교회도 삼십 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였습니다. 작은 가게를 준비하다 보니 공간의 제약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가게를 준비하면서 아주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몇 권 밖에 꽂히지 않는 작은 책장, 4인용 책상 두 개, 의자 여덟 개가 살림살이의 전부였습니다. 작은 공간을 만들다 보니, 제가 그때까지 대형교회에 경도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대형교회를 선호하고 마트도 대형마트를 선호하고 기업도 대기업을 선호합니다. 그렇지만 작은 교회에는 사람들의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작은 것들은 왜소한 것들이며 부정적인 것처럼 치부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작고 비천한 존재들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작은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6평도 안 되는 작은 카페를 만들면서 작지만 아름다운 신앙공동체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루시드 폴의 음악을 들으며 ‘커피마을’ 블로그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작고 작은 카페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작고 작은 사람들과 함께 살겠노라고 마음먹는다. 힘든 노정 속에 그 느린 시간의 흐름도 견디지 못하고 발목이 부러져서 일어설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누울 수도 없고,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 설 수 도 없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하는 가여운 어린 당나귀와 같은 작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너무 작아서 특별할 것도 없는 작은 동네 골목의 작은 가게로, 큰 사람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작은 교회로 영원히 남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눈물이 또로록 흐른다. 루시드폴은 참 좋은 가수다. 고맙다. 귀하다.”(커피마을 네이버 블로그)
- 사람들을 만나다
목회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로 복음 가운데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커피마을’의 문을 열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이 저를 찾아서 오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마을의 인테리어를 손수 하다 보니 시간이 거의 6개월 이상 걸렸습니다. 사람들이 저희 카페를 궁금해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커피마을’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왜 이런 골목 안쪽에 카페를 세웠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운데 조금씩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삶에 지친 음악가를 커피마을에서 만났습니다. 그녀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길에서 만나서 자신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인생길 가운데 주님을 만나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되길 바라니, 자매님도 이제 나와 함께 예수님을 따라가요” 그런데 참 놀랍게 그 날부터 지금까지 함께 신앙 공동체원이 되어서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배우며 신앙공동체를 일구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친구가 아무도 없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또 어떤 날은 우울증 약이 없으면 도무지 한 잠도 잘 수 없는 사람들, 아침에 집을 나오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 한 마디로 하자면 가여운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커피를 한 잔 시키고 자신들의 삶의 짐을 저에게 토로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려고 힘쓰게 되었습니다.
- 프러포즈 카페, 커피마을
커피마을의 문을 연 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커피마을 밖에서 수선한 소리가 들려서 나가봤더니, 한 청년이 앞집 아가씨에게 프러포즈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꽃불로 하트를 그려서 그 안에 들어가 프러포즈를 하려나 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골목에 부는 바람을 생각하지 못했나 봅니다. 이쪽의 촛불을 켜면 저쪽의 촛불이 꺼졌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촛불 때문에 쩔쩔매는 것을 나가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커피마을로 초대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프러포즈 문의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커피마을은 일산에서 유명한 프러포즈 카페가 되었습니다. 열다섯 커플 정도가 커피마을에서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작은 교회다 보니 이때까지 결혼식 주례를 하지 못했는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프러포즈 진행을 맡다 보니 그들에게 덕담을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프러포즈를 하는 젊은이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지 말고 신앙을 꼭 가지라고 전해 주고 원하는 커플에게는 축복기도까지 해주었습니다. 그 뒤로 그 커플들은 결혼을 한 뒤 커피마을에 와서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앞집 아가씨는 그 청년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고 있습니다. 바로 앞집이라서 자주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프러포즈를 받던 그날이 생각이 나서 빙긋이 웃게 됩니다.
- 마을콘서트를 시작하다 / 마을에서 펼쳐지는 콘서트
커피마을의 문을 열던 그 해 5월에 '마을콘서트'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때는 박창수 씨의 '하우스콘서트'가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을 내서 박창수 씨가 진행하는 ‘하우스콘서트’에 참여했습니다. 저는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삼십 평 남짓한 공간에 사람들이 앉아서 음악을 듣는데 편안한 극장식 의자에서 들을 때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음악을 듣고 서로 소통했습니다. 그 모습에 착안하여 ‘마을콘서트’를 시작했습니다. 동네 아이들에게 제가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어릴 적부터 문화적 감수성을 키우며 살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에 들었던 음악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잊히지 않고 지탱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들은 문화공연을 하면 대부분 무료공연을 하는데 저희는 만원씩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 까닭은 ‘마을콘서트’의 주인은 교회가 아닌 마을이 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7년 동안 기적과도 같은 마을콘서트가 27회나 열렸습니다. 매번 60~80명가량의 관객들이 마을콘서트의 객석을 채웠습니다. 첫 회 콘서트는 저희 마을 아이로서 전 세계적으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고 주목받고 있는 최하임, 최하영, 최송하 세 자매의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2회 콘서트에는 오혜령, 정규환 부부의 콘서트가 있었는데 콘서트를 통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재즈밴드, 인디밴드, 클라리넷 연주, 비올라 연주, 하프 연주와 같은 다양한 콘서트들이 ‘마을콘서트’의 무대를 채웠습니다.
마을콘서트를 진행하다 보면 마음이 짠할 때가 많습니다. 예배당에 가득 찬 마을 주민들과 함께 음악을 듣다 보면 서로의 마음을 동시에 울릴 때가 있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한 공간에서 함께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그 경험을 통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마을로 바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점점 더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 길, 우물, 부엌 그리고 들판
마을 한복판으로 들어와서 사역을 하는 동안 제 작업실은 길바닥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 시절 길 위에서 낙엽을 쓸다 보니 동네 어른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도서관을 운영하다 보니 동네 아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몇 달 간을 길에서 목공 작업을 하다 보니, 동네 이웃들과 길거리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그렇게 사람들이 제가 목사인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커피마을'이란 이름으로 커피숍을 열었더니, 삶의 위기에 놓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고, 저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었습니다. 십자가를 높이 걸고 강대상에서 설교를 할 때는 어느 누구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양복을 벗고 작업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일하고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뛰어놀고 커피숍에서 커피를 탔더니 많은 사람들이 목사인 저를 알아주고 저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사역지도 회당이 아닌, 길거리였고 우물이었고 부엌이었으며 그리고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했습니다.
- 목사, 바리스타로 평일을 살다
처음 커피마을의 문을 열고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들을 받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목사’에 대한 이미지들이 있는데 앞치마를 두르고 커피를 내오고 계산을 치르는 모습이 저만 낯선 것이 아니라 손님들과 교인들도 낮 설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금세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양복을 입고 강대상에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평일에는 교우들과 똑같이 평상복을 입고 앞치마를 두르고 바리스타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동의 신비를 조금씩 배우게 되었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있으면 기도하는 제 자신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바리스타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일상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그들과 같은 모습과 자리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단 한마디 “당신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당신과 같은 불쌍한 사람이랍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만나는 거예요”라고 말해 준답니다.
그리고 손님들이 돌아간 자리를 치우고 그들의 온기가 남은 찻잔을 물로 닦으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때로는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찻잔에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 번은 새벽 2시까지 설거지를 하는데 주님께서 저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습니다. “아이야 괜찮아. 내가 너와 함께 하마” 그 한 마디의 주님의 말씀이 저로 하여금 매일매일 설거지를 하고 목공을 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3. 골목길에서 만난 예수
- ‘내리막 길’에서 만난 예수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제자들의 부푼 꿈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참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실망하여 다시 자신들이 살던 마을,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동행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대화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시면 예수님은 엠마오로 향하여 함께 내려가셨습니다. 그들과 대화가 깊어지면서 예수님은 성경을 풀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의 집으로 들어가서 떡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눅 24장 13절에서 31절) 이 짧은 경험이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는 가운데 ‘커피마을’을 통한 제 사역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커피마을에서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한 때는 부푼 꿈을 가지고 살던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가정과 건강을 잃고 외롭게 홀로 남겨진 사람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커피 한잔을 하면서 저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저는 그들에게 때로 성경말씀을 풀어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로 편하게 떡과 빵 그리고 밥을 나누는 사람들 가운데 눈이 열려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발견하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 경험을 통해서 목회에 대해서 정의하게 되었습니다. 목회란 다름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그와 함께 하는 여행길 이야기인 것입니다.
- 가나예배당 for Les Miserables!
커피마을의 문을 연 뒤에 예배는 1시간학교 학생들이 공부를 하던 공부방에서 드렸습니다. 주일 11시에 예배를 드렸는데 탁자에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처음 이렇게 예배공간을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목회를 생각한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던 곳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론상으로는 그럴싸하지만 실제 예배를 드리다 보니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 많았습니다. 서로 둘러앉아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서로 겸연쩍어하는 부분도 있었고 오토바이가 빵 하고 달려가면 예배를 드리다가도 창밖으로 자연스럽게 고개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 예수님이 아닌 예수님의 은총이 매일매일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타면서도 기도를 할 수 있겠지만 엄마의 품과 같은 예배당에서 한껏 울면서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근처 교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의 예배당이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제가 예배당으로 올라가려 했더니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보면서 기도하려면 지하 기도실로 가서 기도하랍니다. 물론 기도실에 가서 기도를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엄마 품속과 같은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매일 동네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보면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때 그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나 봅니다.
그래서 예배당을 찾아서 떠돌다 보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니 어느 누구도 막지 않았습니다. 수녀님이 얼핏 보다가 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자신이 하던 일을 보러 사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성당 사람들은 저를 무심하게 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무심함이 저를 편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성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어쩌다가 예배당도 하나 없는 목사가 되었나 생각하면서 성당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성당을 찾아가서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 손으로 만든 예배의 집, 기도의 집을 찾아 나설 때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커피마을 지하에 있던 와인 창고가 이전하게 되면서 그곳을 계약하여 예배당으로 꾸미게 되었습니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기도의 힘으로 짓고 싶었습니다. 목수 한 분을 모시고 구조공사를 마치니 모든 비용이 바닥이 났습니다. 기도하면서 혼자 공사를 진행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오셔서 도움을 주시고 지역 교회 목사님들이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서 예배당을 완성해나갔습니다. 루시드폴의 레미제라블 앨범을 들으면서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를 생각하며 예배당 이름을 ‘가나예배당’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예배당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나예배당 for Lesmiserables’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가나예배당’이 생긴 뒤에 저희 교회는 조금씩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할 곳이 생기니, 이제 다른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듣다 보니 조금씩 교인들의 신앙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예배당’을 견학 한 뒤에 몇몇 교회들이 모델 삼아서 인테리어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 들어주는 목회
예수님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의견을 물어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의견이 옳은 경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커피마을에서 목회를 하다 보니 제가 제일 많이 한 일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한 분이 오셔서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한 시간 뒤에 다른 분이 오셔서 또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날 그런 식으로 다섯 분이 오셨는데 그분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더니 하루가 다 지났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그들을 긍휼 하게 여기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항상 ‘고해소’를 떠올리곤 합니다. 제 안에는 그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이 저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죄를 용서해주시길 그들이 죄에서 놓임을 얻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 교회 밖, 사람들을 위한 목회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지만 대부분 복음을 전하실 때는 길거리와 과부의 주방 그리고 산과 들에서 전하셨습니다. 당시에 바리세파사람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만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성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찾아가셔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고 그들의 몸에 손을 데고 기도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회는 말 그대로 성전 밖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신 목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회 안에 익숙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을 믿지 않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으로 변화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타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이 옮겨와서 교인이 많아집니다. 개체교회를 놓고 볼 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전체 교회를 놓고 본다면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지난 12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교회 밖 사람들이 제 목회의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아니 대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친구가 되려고 했습니다. 복음에서 소외받은 사람들, 교회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 관심이 있지만 선 듯 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복음을 알리고 가르치는 일, 그리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제 목회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인 먼저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의 진실한 친구가 되어주고 친구가 된 이후 복음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만난 지 7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복음의 복자도 꺼내지 못한 친구들을 볼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습니다.
- 마을 안의 성소
뉴질랜드 남섬 데카포 호수에는 ‘선한양치기의 교회’가 있습니다. 경치가 아름다운 호수에 돌로 지은 작은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곳의 재단 부분에 호수가 보이도록 창을 가로로 내놓았는데 그 위에 올린 작은 십자가를 통해서 호수를 바라보는 풍경이 꽤나 근사합니다. 저는 사진을 통해서 그 교회를 알게 되었는데 자료를 찾다 보니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내서 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퇴사를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학교를 쉬기도 했답니다. 무엇이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뭔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거룩한 풍경을 통해서 일상의 삶이 전해주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함이라 생각합니다. 그곳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데카포 호수가의 ‘선한양치기의 교회’는 거룩한 곳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최근 개신교회가 겪는 위기 가운데 하나는 교회와 예배당이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한 곳, 성소라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라는 슬로건이 영향을 많이 주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은 아니지만, 사람은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초공간적인 사역을 하시지 않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한계가 있는 공간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공간을 거룩한 곳,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거룩한 공간으로 바꿔가셨습니다. 그런데 도시 개척교회들은 냄새가 나는 지하에 정성을 다하지 않은 분위기 가운데 예배를 드립니다. 공간은 어떻든지 간에 설교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모든 공간이 그 용도에 최적화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예배당을 값비싼 자재로 만들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당 안에 우리의 마음을 담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뭔가 그 장소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거룩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렇게 거룩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폴틸리히Paul Tillich는 이러한 공간을 ‘Sacred Vacant’(거룩한 비움)이라는 용어로 설명했습니다. 일상의 지친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는 거룩한 비움의 장소가 바로 예배당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마음과 생각을 갖고 ‘가나예배당’을 마을 속에 거룩한 성소가 되도록 꾸몄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예배당을 와서 거룩한 체험들을 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지만, 사람은 공간을 필요로 하고, 교회도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 로렌스 수사를 꿈꾸며
로렌스수사 혹은 로렌스 형제(1611-1691) 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38세 나이에 파리에 있는 맨발의 까르멜 수도회에 들어갔고 ‘부활의 로렌스 형제’라는 수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을 평수사로 지내면서 부엌일과 샌들 수선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일평생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고 훈련했습니다. 그의 저서로 알고 있는 책도 그가 죽은 뒤에 수도원에서 그의 글들을 모아서 출판한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카페에서 바리스타로 일을 하면서 로렌스 형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떤 힘이 생기는 것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때로는 회개가 터져 나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주님의 위로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개신교 목회자는 대부분 말을 통해서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훈련이 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을 대부분 자신의 존재를 앞서가기 십상입니다. 말로는 다 할 수 있지만, 실제 삶 속에서 그 말을 이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 삶의 목표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아닌 로렌스 형제와 같이 그가 일하는 주방과 일터에 주님의 임재하심이 함께 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하는 일이 커피를 내리고 와플을 만드는 단순한 일이겠지만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4. 골목으로 내 몰린 사람들
- 팽목항으로 내려가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에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주로 하던 일이 커피마을에서 사람들에게 커피를 타주는 일이었는데 차마 커피마을의 문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죽어 가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커피마을의 문을 걸어 잠그고 팽목항으로 향했습니다. 수원까지는 자전거로 이동을 했고 그곳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에서 내렸습니다. 진도대교 앞에서부터는 걸어서 팽목항까지 들어갔습니다. 봄이 오는 진도에는 유채꽃이 만발했습니다. 그렇지만 앰뷸런스들은 분주하게 진도와 팽목항을 오갔습니다. 4월 23일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준비해 간 커피와 초콜릿을 바다에 뿌리면서 잠시 기도를 했습니다. 아이들 떠나는 길에 커피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우연하게 KBS방송국 ‘다큐3일’팀의 카메라에 찍혔고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참사를 목격하면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죽어간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만들어 낸 참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의 마음이 아프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아픔이 치유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이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저는 진도 팽목항을 다녀온 뒤로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다녀온 뒤로도 며칠 동안 아 무일도 못하고 지낼 때 전화가 한통화가 왔습니다. 몇 년 전 커피마을을 취재했던 분이신데 세월호 단원고 생존자 71명이 고대 안산병원에 있는데 상담을 받지 않으려 해서 대학생들이 들어가서 멘토링을 하려 하는데 저에게 커피바리스타 멘토링의 강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저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커피 기구를 준비해서 4일간 세월호 생존자 학생들에게 커피를 가르쳤습니다. 제 수업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2달간 안산 중소기업연수원에서 한주에 두 번씩 커피바리스타 멘토링을 진행했습니다. 7월이 되어서 학생들이 단원고등학교로 돌아갈 때도 함께 들어가서 2주 동안 커피바리스타 멘토링을 진행했습니다. 2014년 7월31일에는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이 강화에서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 ‘해변테크노파티’란 이름으로 커피 파티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 달려라 커피, 지금 당신께 달려갑니다.
2014년 4월 16일 이후로 제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전에는 커피마을 안에서만 칩거하다시피 했는데 매일 커피 도구를 가지고 이 곳 저곳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월호 안에서 대피하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에게 선원들이 한 말이 “가만히 있으라”였습니다. 결국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었기에 피해가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세월호만 아니라,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 때문에 침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커피마을의 문을 닫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저는 시위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다른 면에서 그들과 연대하기를 바랐습니다.
2014년 8월부터 일 년 동안 세월호 희생자 형제, 자매 멘토링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경기도와 서울에 자리한 중학교 2곳에서 커피바리스타 강습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에게 커피를 가르쳤습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커피를 가르치면서 저는 학생들과 교사들이 많은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교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하고 있었으며 마음의 병을 가진 선생님들이 꽤 많았습니다. 그래도 커피 수업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서 경차(레이)와 트레일러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비를 갖춘 뒤 연대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9월에는 광화문에 나가서 열흘 동안 매일 저녁에 인디밴드 공연과 커피를 나누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 작업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10월부터는 8주간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커피와 와플을 실종자 가족들과 함께 마셨습니다. 이일을 위하여 서울연회 마포지방이 모든 비용을 지원했습니다. 저는 ‘달려라커피’를 사회적 심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 위에서 불의함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될 수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며 기도하겠습니다”란 현수막을 걸었더니 경찰이 와서 떼라고 말합니다. 제가 뭐가 문제냐?라고 따졌더니, 젊은 경찰은 제가 믿지 못할 말을 남기고 황급히 떠났습니다.
“유가족들이랑 같은 마음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제가 항의하려 하자 젊은 경찰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왜 유가족들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며 기다리면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종북좌파’란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 교회에서 설교를 할 때, “세월호 이야기만 안 했으면 참 좋을 텐데”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하고 생존자들에게 커피를 가르치는 일이 왜 종북좌파란 말을 듣는 이유인지, 그리고 왜 교회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잊지 않겠다는 다짐들은 사람들 안에서 잊힌 지 오래입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아픔을 잊었고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세월호 안에 제주 강정기지로 향하던 철근이 400톤가량이 실렸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 사실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언론에서 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달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커피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열세분의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의 어머님들이 저에게 커피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번 주 수업은 그들이 시위 현장으로 나갔기 때문에 수업을 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루빨리 이 사회가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지금은 위로할 때가 아니라, 사과할 때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모든 진상들을 규명한다면 그 뒤에 유가족들이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다만 그 일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아픔을 당한 자들의 곁에서 함께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지금도 안산을 오가는 이유입니다.
5. 골목에서 희망을 꿈꾸다.
- 골목 교회 목사, 목수가 되다.
세월호 참사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 밖에 있는 젊은이들이었는데 세월호 참사가 자신을 바꿨다고 고백했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기회가 되었고 그 일로 인해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한 권사님의 도움으로 ‘청소년 목공 놀이 마을공작소’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참포도나무교회 청소년들과 목공 작업을 했습니다.
커피마을에서 만난 4~50대 남성들은 대부분 위기를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직장에서는 밀려나고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은 희망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업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단순한 일들을 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삶의 보람을 느끼고 그 일을 통해서 타인들을 돕는 것은 생각해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문제가 사실은 교육의 문제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들의 문제가 아닌 그동안 학교와 교회에서 정말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한 희망을 비춰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전가하기에는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와 교회는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공부가 의, 식, 주,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옷과 먹거리 그리고 집과 가구를 만드는 일들 이 모든 것들을 예술적인 활동으로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는 1시간학교는 이 네 가지 영역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함께 밥을 먹고 노동을 하고 잠을 자고 여행을 떠나고 음악회를 준비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삶의 기술들을 습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소년 목공 놀이 마을공작소’의 시작은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을공작소가 생긴 뒤로 청소년들이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자신들도 이다음에 중학생이 되면 목사에게 목공을 배우겠다고 합니다. 지역 목회자들이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아서 가구를 만들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기도 하나를 마음에 품었습니다. “감신대에 목공소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제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제가 목공을 하면서 힘을 많이 얻었던 것과 같이 후배들이 목공을 통해서 마음의 쉼을 얻고 또 목회의 힘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목공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 침묵하는 법, 살아내는 법을 배우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현실이 되어서 2016년 봄학기에 감리교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선교와 목공예술’이라는 목공신학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한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감신목공소’를 꾸렸습니다. 30평이 넘는 공간에 학생들이 DIY로 목공 작업을 할 수 있는 목공교실을 꾸렸습니다. 그리고 24명의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하고 15주간의 목공수업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의 변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학기말 과제로 ‘자기 의자 만들기’를 주었는데 학생들이 대부분 ‘자기 의자’를 만들지 않고 아빠의 의자, 아내의 의자, 아이의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친구는 아빠와의 추억이 담긴 의자를 만들었고, 한 친구는 이제 태어날 자신의 아이를 생각하면서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대부분 지식만을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신학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마음으로 기도하는 방법, 마음으로 신학 하는 방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마음으로 신학을 하게 될 때 삶과 신학의 분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위해서 지난 4월 ‘가구제작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이제 정말 자격을 취득받은 목수인 셈입니다. 그렇지만 진짜 목수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 골목 속에 세워진 커피마을 2호점
커피마을 서대문점은 우연한 기회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커피마을의 모델을 테이크아웃 카페로의 전환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카페교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카페'와 '교회'의 건널 수 없는 문화의 차이에 있습니다. 카페는 말 그대로 카페의 문화가 있고 교회는 교회만의 문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양립하기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큰 부분에서는 통하는 점이 있지만, 그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 저는 오히려 서로를 분리시켜서 진행시키고자 했습니다. 평일에 목사가 교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삶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렇게 정직한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가정의 생계를 이어가도록 돕는 것이 '커피마을'의 미션이 될 것 같습니다.
그동안 교단과 교회는 개체교회 목회자들, 특히 도시 개척교회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의 생계의 문제에 대해서 외면해왔습니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이 생계비 지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원을 받으면서 자립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립을 위해서라도 외부의 후원을 끊고 후원을 받으면 자립을 위한 구조로 변경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카페교회'라는 용어보다는 오히려 '커피마을'이란 이름으로 모든 일들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나와서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났듯이 그렇게 저도 길거리에서 우물가에서 동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어쩌면 '커피마을'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이제 제대로 길을 떠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_골목 교회 골목 목사
마을 안의 작은 개척교회를 담임하다 보니, 저희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서 저희 교회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지난 십 년 동안 저희 공동체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단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을 교회', 네 저희 교회는 마을 교회를 지향합니다. 마을 안에 자리하며 무너진 마을공동체를 일으키는 교회가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을 교회라는 단어는 요즘 흔한 '마을기업, 마을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사회사업의 한 종류처럼 보일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교회라는 단어도 제 마음에 쏙 들지 않았습니다.
'작은 교회', 저희 교회는 작은 교회입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는 인원이 40명밖에 되지 않으니 작은 교회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4명이 모이는 교회보다는 열 배는 더 큰 교회이고, 400명이 모이는 교회에 비해서는 열 배 작은 교회, 4000명이 모이는 교회에 비하면 400배, 4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 비해서는 4천 배나 작은 교회입니다. 그러니, 작은 교회라는 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기준점이 바뀌면 크고 작은 것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모이는 수로 평가하는 것은 신성모독이라고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교회는 그 신앙의 질에 문제가 있는 교회였지 모이는 수가 적은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를 '작은' 혹은 '큰'교회로 부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입니다.
'개척교회', 저희 교회는 10년 전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러니 개척교회라고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준도 애매합니다. 개척교회와 기성교회의 차이는 교단에서는 어떻게 정하는지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아마 대답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한 대형교회에서 파생된 개척교회는 이미 모이는 수가 천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개척교회인가요?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아니면 60년대 서대문 가난한 마을에서 개척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된 섬에 있는 그 교회의 개척정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개척교회'라는 단어도 쓰지 않으려 합니다. '개척정신'이 없는 교회는 아무리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교회는 기성교회의 하나에 불과할 뿐입니다. '개척교회'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척정신'이며, '개척 영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다 저는 어느 날, "아 우리 교회는 골목 교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골목 교회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제 눈가에 눈물이 맺힙니다.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의 골목에서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저희 교회는 골목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마을 안 깊은 골목에 쪼그려 앉아 있는 교회입니다. 1층에는 골목카페가 있고, 지하에는 '가나 예배당 for Les Miserable'라는 이름의 골목 예배당이 있습니다. 저는 매일 이 골목에 있으니, 저는 골목 목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예수님도 골목에서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골목에서 죄인들을 만나셨고, 골목에 있는 우물에서 여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사람들이 가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골목도 주님은 거침없이 다니셨습니다. 골목 끝 경건한 사람들은 들어가지 않던 , '잡놈'들의 집에도 주님은 들어가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다음에도 골목길 옆집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셨고,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골목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은 산에 있지만, 교회는 골목에 있습니다. 골목에서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차를 타고 지하주차장에 고급차를 세워놓고 헌금을 하는 교인들만 만날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 나가서 예수님이 만나셨던 길거리의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들의 흔들리는 발걸음 붙잡아 줘야 하고, 그들의 고된 삶에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곧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입니다. 저는 이 골목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죽더라도 절대로 이 골목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 골목에서 저도 죽고 부활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저는 골목 교회 목사입니다.
- 순례자의 길을 떠나는 도시 속 영성공동체
가나예배당의 공사를 마친 그다음 해부터 저희 교회는 ‘순례자의 길’이란 고정된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매년 목표가 바뀌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의 목표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한 곳에 정착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분연히 길 떠나는 구도자의 공동체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제가 지난 12년 동안 일산신도시에서 살면서 목회를 하면서 느낀 소감은 교회는 신도시 안에서 대형마트나 골목슈퍼마켓과 같이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은혜가 넘치는 것 같지만 사람들은 종교를, 신앙을, 예배 서비스를 소비하고 있었습니다. 신앙 앞에 자신을 바로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편리와 목적에 따라서 교회를 선택하고 그 목적이 다하면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옮기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저희 교회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 표어를 ‘순례자의 길’로 정하고 주보에는 이런 문구를 넣었습니다.
“참포도나무교회는 신앙에 대한 단순한 관심과 종교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우리는 진지한 자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우리의 삶 가운데 분연히 일어나 주님께서 명령하신 ‘순례자의 길’을 걷기를 소망합니다. 이 삶에 동행하시기 원하시는 분은 소정의 과정을 거쳐서 ‘참포도나무교회’에 입교하실 수 있습니다.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은 목사와 상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문구를 주보에 넣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교회는 사람을 가려서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그분께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도 받아주셔서 목사 노릇을 하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사람을 가려가면서 받을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려가면서 교인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기 위해서는 그 목적과 본분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잃기 쉬운 것이 개척교회 목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매 주일 예배 시간에 성만찬 순서를 가집니다. 이 공동체의 근원이 목사의 설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함께 밥을 먹고 코이노니아 시간을 갖습니다. 수요예배에는 본회퍼 목사님의 ‘신도의 공동생활’을 읽으며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영적 실제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주중 새벽기도회에는 몇 분의 교인들이 나와서 함께 성서를 읽으며 중보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금요일 저녁마다 ‘1시간학교’모임이 있습니다. 직장을 마치고 교회로 와서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교회에서 다 같이 잠을 잡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 교제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교회 모델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것과 같이 모든 분들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도 과연 내가 가는 길이 맞는가? 계속 물어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지난 12년 동안 주님에게 성실하고자 노력했고 제 삶의 길에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가운데 저는 앞으로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 ‘오래된 새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해 아래 새것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듯이 해 아래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단 하나의 말씀을 제 삶으로 오롯이 고백하게 된다면 성공과 실패가 아닌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이 될 것입니다. 그 길은 바로 한 알 밀알이 썩어서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25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요 12:24~25)
제가 이 곳,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 13블록 커피마을이 자리한 이 후미진 골목에서 썩어 죽을 수 있다면, 이곳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아멘.
**안준호 목사는 누구인가
1970년 3월 3일생
학력
1997년 2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과 졸업 (감신90학번)
2008년 2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경력
2004년 1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일산동지방 참포도나무교회 개척
2008년 4월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부연회 목사안수
2008년 5월 ‘1시간학교’ 시작하다
2010년 5월 ‘커피마을’ 시작하다.
2010년 5월 ‘마을콘서트’시작하다.
2012년 7월 ‘가나예배당 for Lesmiserables’입당예배를 드리다.
2014년 4월 아름다운 배움 세월호생존자, 희생자 형제자매, 유가족 커피바리스타 멘토링 시작하다.
2014년 5월 ‘달려라커피’ 시작하다.
2015년 5월 ‘청소년 목공 놀이 마을공작소’를 시작하다.
2016년 3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대원 ‘선교와 목공예술’ 세미나 개설
2016년 3월 감신목공소 설립
2016년 7월 커피마을 서대문점(2호점) 시작하다.
2016년 9월 감리교신학대학교 ‘노동 영성 교육’ 강사
2017년 3월 감리교신학대학교 ‘노동 영성 교육’ 강사
2017년 3월 감리교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농촌선교’ 강사
현 참포도나무교회 목사
커피마을 대표
아름다운 배움 커피 바리스타반 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신대원 강사
연세대학교 미래교육원 ‘삼애목공교실’ 강사
1시간학교 운영자
마을콘서트 운영자
마을공작소, 감신목공소 대표 / 가구제작 기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