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선 서로가 필요하다(서경식)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7월12일, 신형 코로나 바이러스의 만연으로 도쿄에 4번째 ‘긴급사태 선언’이 발령됐다. 올림픽이 전례없는 ‘무관중’ 개최로 결정됐고, 일본 사회는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이는 예측할 수 있었던 사태이므로 좀 더 일찍 적절한 대책을 세웠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이권’이나 ‘체면’에 연연했던 정부 여당의 실정 탓이다라는 비판도 당연히 많다. 맞는 얘기지만, 이런 비판은 오히려 좀 약하고 너무 늦은 감이 있다. 원래 ‘무관중’이 아니라 ‘중지’했어야 한다. 사회의 대세가 “이미 결정한 거니까”라거나 “이제 와서 그만둘 순 없다”는, 너무나도 ‘일본적’이라고 해야 할 기분(일종의 허무주의)으로 흘러가고 있다.
새삼 말할 것도 없지만, 나 자신도 원래 이번 도쿄올림픽뿐만 아니라 올림픽 자체에 반대하는 쪽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내셔널리즘’과 상업주의로 뒤범벅이 된 가식의 제전이기 때문이다. 올림픽이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비판정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고대 로마제국 투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을 연상하게 된다. 그 군중은 이교도가 맹수의 희생양으로 제공되는 장면을 구경하며 열광했다. 올림픽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는 많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해두자.
정년퇴직을 한 지 3개월 남짓 지났다. 퇴직 직전까지 이래저래 바빴기 때문에 솔직히 좀 지쳐 있었다. 퇴직하고 나면 한가해져 실컷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안이한 생각이었다. 잡일들은 간단히 정리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일을 하는 능률이 이전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사흘이면 될 것이라 생각한 일이 1주일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다. 늙는다는 게 이런 것이리라. 당연하다. 그래서 ‘정년’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돼 보지 않고는 실감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내와 함께 병원 다니느라 쓰는 시간이 많다. 코로나 바이러스 백신 접종도 받았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접종받을 수 있는 ‘고령자’로 분류돼 있다. 내가 ‘고령자’라는 걸 자각한 것은 버스 할인승차권을 손에 쥐었을 때와 이번이다.
백신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는 접종하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동시에 ‘백신 부족’, ‘제○파 내습’ 등의 보도를 들으면 빨리 받아야 되는데 하는 초조감마저 일었다. 모순된 생각이다. 우리는 둘 모두 백신 접종 뒤 2, 3일간 꽤 심한 발열과 함께 권태감을 체험했다. “그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정말 그런 것인지, 본래 이런 백신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지 아직 모른다.
사람이 자신의 건강과 생명의 주권자가 되는 것은 쉬운 노릇이 아니다. 하물며 감염증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협이 그 상대인데다, 의지해야 할 과학도 사람이 자기 스스로 실험해서 판단할 수 없는 이상 ‘전문가’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전문가를 전적으로 신용할 수도 없다. 그 배경에는 제약회사나 의료기관의 이권이나 ‘보험 위생’을 통해 인민을 통제하는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이 있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건강과 생명에 관한 주권을 박탈당한 상태다. 어정쩡하고 뒤숭숭한 기분은 근본적으로 이 부조리한 무주권 상황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정년을 맞아 시간이 생겼다기보다 좀 멍해져 버렸다. 지금 아마도 나는 유식자(有職者)에서 무식자로, 초로(初老)에서 진짜 노인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고, 심신 모두 그 이행과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리라. 다만 정년 덕에 일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책을 마음대로 읽는 일이 많아졌다. 이른바 ‘불요불급한 책’이다. 독서라는 행위는 본래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본다. 요즘 읽은 책 중에서 재미있었던 것을 소개하겠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미국의 병―팬데믹이 폭로한 자유와 연대의 위기>(Our Malady―Lessons In Liberty From A Hospital Diary. 국내 번역서는 <치료받을 권리>). 글쓴이는 1969년생의 미국 예일대 역사학부 교수로, 중·동유럽사 전문가다. 주요 저서로 <블러드랜드―히틀러와 스탈린 대학살의 진실>(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블랙어스―홀로코스트의 역사와 경고>(Black Earth: The Holocaust as History and Warning) 등이 있다. 이 두 책은 저자의 전문분야 저작으로, 절반은 내 일(집필)의 필요 때문에 입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들의 저자가 동일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 좀 의외였다. 입수한 것도 코로나 재난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코로나’는 아니지만) 심한 감염증 때문에 2019년 12월부터 입원해서 생사의 경계를 오가며 코로나 팬데믹과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도전한 선거전의 와중에 생각해낸 것을 쓴 것이다. 조금 인용해 보겠다.
“우리 병(malady)의 일부는, 미국에서는 ―생과 사에 대해서도 그러하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전제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데에 있다. 만일 의료를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더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생존이 빈부나 사회적 지위에 좌우된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면, 우리의 생활은 걱정으로 가득 찬 고독한 것이 더는 아니게 될 것이다. 우리는 깊은 의미에서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만일 나치스의 홀로코스트를 악의(悪意)의 극한의 형태로 간주한다면, 궁극의 선은 무엇일까? (중략) 나치스는 의료를 인간과 인간 이하의 존재,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존재로 나누는 수단으로 삼았다. 만일 우리가 타자를 질병을 옮기는 자로 보고 우리 자신을 건강한 희생자로 본다면 나치스와 별 차이가 없게 된다.” “자유라는 것의 패러독스는 도움 없이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자유는 고독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와 동시에 연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이 나라의 어디에서 살든 우리는 물체가 아니라 인간이며, 인간으로 대우받을 때 비로소 든든해질 수 있다. (중략) 자유롭기 위해 우리에겐 건강이 필요하다. 그리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필요하다.”
좀 더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 여유가 없다. 현대사의 대량학살 전문연구자가 자신이 중병으로 누워 있던 병상에서 의료보험제도부터 삶과 병, 죽음, 그리고 ‘자유’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를 고찰했다. 필치는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인데, 거기에 ‘연대’의 의의를 강조하는 휴머니스트의 뜨거운 피가 흐른다. 저자의 비판은 당연히 미국 의료보험제의 미비점과 결함, 그 근저에 있는 가치관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적어도 일본에도(아마도 한국에도)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의료 현장을 침식해온 결과가 현재의 참상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연대’다.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번역 한승동(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