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센 강을 따라 걷거나 튈르리 공원에 갈 때마다 아쉬움에 젖은 적이 있었다. 쉼터와도 같은 미술관 오랑주리가 리노베이션을 하느라고 한동안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파리에 갈 때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상파 미술을 보려면 오르세에 가도 되지만 오랑주리에는 웅장한 오르세와는 다른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락하고 편한 느낌이 드는 곳이 오랑주리 미술관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미술관을 가득 채우는 것처럼 거대한 <수련> 연작 여덟 점이 두 개의 전시실에 나누어져 걸려 있기 때문이다.
오랑주리미술관 정문
파리에 갈 때마다 느끼는 욕망은 오랑주리에 있는 두 개의 ‘수련의 방’에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는 것이다. 그 안에 있으면 평화롭다. 전체를 감싸는 자연, 혹은 연못 혹은 우주에 빠져 있는 듯하다. 세상의 다른 어느 미술관에서도 느낄 수 없는 모네의 따사로운 세계가 전해주는 푸근함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두 번의 거대한 기증을 통해서 만들어진 미술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층을 장식하고 있는 <수련> 연작은 모네의 기증으로 이루어졌고, 지하에 있는 폴 기욤과 장 발터 컬렉션 역시 유증을 통해서 이곳에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랑주리 미술관 수련의 방. 사람들이 이 전시실에서는 편안한 표정들을 짓고 있다. 엄청나게 큰 수련 그림 앞에 앉아서.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클레망소 총리와 모네는 친구 사이였다. 클레망소는 <수련>이 승전의 기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모네는 자신의 대형 그림들을 국가에 기증하기로 결정했다. 1926년 12월 모네는 8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지만, 이듬해 5월 17일 오랑주리 미술관을 개관하면서 거대한 화폭에 그려진 <수련> 연작은 세상에 자연의 빛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취지에 걸맞게 미술관 1층은 <수련> 연작이 각각 네 점씩 걸려 있는 두 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는 폴 기욤이라는 천부적인 컬렉터이자 화상이 만들어낸 세계이다. 간송 미술관이 전형필이라는 개인의 열정에 의해서 이룩될 수 있었듯이, 오랑주리 미술관에서는 폴 기욤이라는 인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후기 인상파, 신인상파 그리고 20세기 초반 미술에 걸쳐서 높은 심미안을 과시했던 화상이었다. 예를 들면 그가 소장했던 르누아르의 작품만 16점에 달한다. 전시실을 둘러보기 전에 만나게 되는 것은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폴 기욤의 아파트이다. 실물들을 축소해 놓은 작은 세계에 불과하지만, 잠시 부러움에 젖게 만든다. 이토록 엄청난 예술품에 둘러싸인 채 책을 읽고 식사를 하면서 일상을 보냈다는 상상을 하면 더욱 그렇다. 다른 미술관에 비하면 작품 숫자가 많지 않지만 삶의 질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본질적으로 느끼게 만들어준다.
폴 기욤이 죽은 후 부인인 도메니카는 장 발터와 재혼했다. 그러나 장 발터마저 자동차 사고로 죽고 말자 부인은 미술품들을 국가에 유증하게 된다. 도메니카가 두 사람을 죽였다는 설도 있다. 추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고 미스터리에 싸여 있는 컬렉션 역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국가에 기증하는 것을 전제로 도메니카를 무죄로 풀어주었다는 후일담이 있을 정도다. 그렇게 해서 오랑주리에 전시되어 있는 인상파 작품들은 그녀의 ‘남편들’인 폴 기욤 & 장 발터 컬렉션이 되었다.
잔뜩 찌푸린 날씨에 콩코르드 광장에서 멀리 보이는 에펠 탑.
오랑주리 미술관은 튈르리 정원이 끝나면서 콩코르드 광장과 맞닿는 곳에 위치해 있다. 오벨리스크 앞에 서서 개선문 쪽으로 향할까, 마들렌 쪽으로 갈까, 아니면 센 강을 따라 걸을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어디로 향해도 가까운 사통팔달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는 것만으로도 파리의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요즘 같은 계절이면 마로니에 가로수 길은 더욱 깊어가는 가을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에펠 탑에서 내려다본 센 강 풍경
미술관이 되기 전 이곳은 오렌지 나무를 재배하는 온실이었다. 오랑주리라는 말 자체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럽 왕실이나 귀족들은 따뜻한 지방에서 나는 오렌지를 직접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오랑주리 미술관 1층은 지금도 넓은 유리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를 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미술품을 많이 보면 볼수록 눈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해서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자연의 빛과 더불어 살고 있음이 행복하게 느껴진다. 그것이 천변만화하는 날씨의 인상을 담은 인상파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는 오랑주리라서 더욱 그렇다. 마치 오렌지 나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1. 모네의 ‘수련, 석양’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Water Lilies, Setting Sun, 1914~18, 200×600cm
모네는 250점 정도의 수련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말년은 수련을 그리는 데 모든 시간을 보내고 정성을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석양이 지면서 노란 빛깔을 띠는 수련 꽃 그림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다. “수련 꽃 이야기를 하셨는데, 클로드 모네가 그린 수련 꽃들을 당신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정말 천재적이에요!” 오랑주리에 있는 여덟 점의 <수련> 연작 중에서 ‘석양’은 가장 강렬하다. 다른 그림에 비하면 훨씬 현란하고 화려하다는 느낌이 든다. 노란색으로 인해 다가오는 느낌이 무척이나 크기 때문이다. 연못의 어느 한 부분에 떨어지는 석양의 태양빛. 그것은 눈이 점점 보이지 않는 모네에게도 강렬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형체를 알 수 없어도 색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게 모네의 <수련>이 보여주는 세계다.
2. 모네의 '수련, 구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Water Lilies, The Clouds, 1903, 200×1275cm
바다를 보고 있으면 하늘이 그 안에 들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모네의 그림은 연못 속에도 드넓은 하늘을 담아낸다. 날씨에 따라서 하늘은 언제나 다른 형상을 띤다. 어느 날 하늘엔 뭉게구름이 떠 있다. 그 구름이 연못에 투영된다. 구름이 흘러갔다가 다시 몰려온다. 그런 변화 속에서 모네는 순간을 포착한다. 그 순간은 구름인가, 수련인가. 구름이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는 것처럼 수련도 여기저기 피어오르고 있다. 중앙에 있는 붉은 꽃 몇 송이를 제외하면 그림은 전반적으로 푸르고 산뜻하다. 모네는 이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 “수련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식물을 심은 것은 즐거움 때문이었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연못의 마법이 나에게 나타났다. 나는 팔레트를 들었다. 그 이후부터 다른 모델은 찾지 않았다.” 모네는 자신이 빠져들고 바라본 세상의 진실을 수련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3. 르누아르의 '가브리엘과 장'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Gabrielle and Jean, 1895~1896, 65×54cm
인상파 화가 중에서 폴 기욤이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던 작가는 르누아르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르누아르의 아들 장 때문이다. 그림 속의 귀여운 꼬마 장 르누아르는 20세기 초반 프랑스 영화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성장했다. 그런 거장에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장 르누아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을 인상주의적인 영상으로 담아낸 영화들을 보면 더더욱 이 그림은 20세기 초반과 19세기 말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장 르누아르는 하녀인 가브리엘과 그림 속 광경처럼 놀이를 하다가 영화를 보러 따라가기도 했다. 위대한 미술가의 아들인 위대한 영화감독. 아마도 영화 팬이라면 이 앞에서 부자 간의 순수한 시선에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지 않을까. 영화나 미술의 세계가 아니라 순수한 동심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4. 세잔의 '사과와 비스킷'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
Apples and Buscuits, 1895년경, 45×55cm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고 한다. 아담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다. 각각의 분야에서 이 사과들은 과거와의 연결성을 끊고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미술사에서 세잔이 위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미술의 시대가 열리니 이를 준비하시오”라고 세잔 자신이 예언했던 것처럼 때로 미술사는 세잔 이전과 세잔 이후로 나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잔은 인상파들이 보여주었던 세계에서 더 나아가 현대미술이 보여줄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단순한 정물화를 보고 있으면 세잔이 바라본 세상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그의 테크닉이 숙성된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 개의 단순한 사과 안에 어쩌면 이렇게 다양한 시선들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생트 빅투아르 산과 같은 풍경화와는 다른 묘미가 정물화에도 숨어 있다. 단순하지만 이 사과들에는 하나의 대상을 깊이 관찰하면서 결론을 얻어낸 세잔의 모든 노력과 삶에 대한 치열함이 담겨 있다.
5. 앙드레 드랭의 '만돌린을 든 흑인'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
Black Man with Mandolin, 92×73cm
어떤 악기를 연주하든 간에 흑인 연주자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카사블랑카>에서 샘이 연주하는 “As Time Goes by”가 울려 퍼지는 듯한 환상에 빠진다. 드랭의 그림 또한 그처럼 이국적인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흑인 청년이 만돌린을 연주하고 있다. 커다란 눈망울, 흰자위가 더욱 하얗게 느껴진다. 하얀 셔츠의 밝은 색채는 피부색과 만돌린과 강한 대비를 이룬다. 갈색과 흰색 사이에 초록 빛깔의 굵은 선들이 자리 잡아서 두 컬러 사이를 이어주는 느낌이 든다. 굵은 붓질로 만들어낸 팔뚝과 손, 그리고 악기. 만돌린을 들고 있는 젊은이가 앉아 있는 단순한 그림이지만, 그 앞에 서면 경쾌한 연주를 듣고 있는 듯하다. 청년과 눈이 마주치면 활기 찬 연주에 성원을 보내고 싶다. 오랑주리에 갈 때마다 드랭의 그림 앞에 서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가 보는 세상과 공감하게 되는 감정들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6. 마티스의 '만돌린을 든 여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Woman with Mandolin, 1922, 47×40cm
전시실을 차분히 산책하다가 마티스와 마주치면 갑자기 완전히 다른 색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왜 야수파라는 표현을 쓰게 되었는지, 색채가 얼마나 원초적인 감정들을 상기하게 만드는지 몸으로 느끼게 된다. 오랑주리라는 한 군데의 미술관에서, 혹은 폴 기욤이라는 한 명의 컬렉터가 수집한 작품들을 보면서 동일한 감정선 상에 머무르게 되는 이유는 드랭의 <만돌린을 든 흑인>과 마티스의 <만돌린을 든 여인>처럼 느낌을 이어주고 공감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폴 기욤이라는 컬렉터가 갖고 있던 취향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있다. 드랭과 마티스의 작품은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도 세트처럼 조화를 이룬다. 여인의 뒤, 넓은 창문을 통해 니스 해안의 이국적인 나무들과 푸르른 지중해가 보인다. 노란 옷을 입은 여인이 들고 있는 갈색 만돌린이 전체를 완결지어 주는 액세서리 같다. 마티스가 코트다쥐르의 해안가에서 작업하면서 쏟아지는 햇살을 한 폭의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7. 마리 로랑생의 '샤넬의 초상화'
마리 로랑생 (Marie Laurencin, 1883-1956)
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 92×73cm
20세기 패션의 아이콘인 코코 샤넬은 여류화가 마리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주문했다. 로랑생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는 샤넬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았다. 초상화를 본 샤넬은 자기와 닮지 않았다면서 초상화를 돌려보내 버린다. 20세기 초반 파리를 대표하던 두 여류 예술가의 팽팽한 자존심 싸움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파리 토박이인 마리 로랑생은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샤넬과의 타협을 용납하지 않았다. “샤넬이 괜찮은 여자이긴 하지만 오베르뉴 시골 출신일 뿐이야. 나는 절대 시골여자에게 양보하지는 않을 거야.” 파리지엔다운 도도함이 느껴진다. 로랑생의 그림 속 여인들은 연약해 보이기도 하고, 창백해 보이기도 한다. 우울하면서 외롭기도 하고, 디자이너인 샤넬의 고독함을 잘 묘사하고 있다. 로랑생은 샤넬의 외면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그녀의 무릎에 앉아 있는 강아지 한 마리, 그녀 곁을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가 있기에 그녀의 표정은 더욱 아련해 보인다.
8. 피카소의 '포옹'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The Embrace, 1903, 98×57cm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브로큰 임브레이스>를 보던 날, 갑자기 피카소의 <포옹>이 떠올랐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제목 탓도 있지만, 절망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의 강려한 이미지란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디에서나 연상되고 떠오르기도 나타나기도 하는 법이다. 영화와 회화라는 매체는 다르지만 두 작품 모두 보고 있으면 슬픔이라는 게 무엇인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 아니, 절망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남녀가 끌어안고 있을 뿐인데, 그들의 감정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밀려온다. 배경으로 채색된 푸른빛은 전체 공간을 더 우울하게 만든다. 오랑주리를 걷다가 이 그림 앞에 서면 잠시 침묵에 빠져든다. 몇 점의 피카소 작품이 함께 걸려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인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다.
9. 모딜리아니의 ‘폴 기욤의 초상’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
Paul Guillaume, Novo Pilota, 1915, 105×75cm
폴 기욤은 작품을 수집하면서 계약된 화가들에게 자신의 초상화도 종종 주문했다. 드랭은 폴 기욤은 물론 부인의 초상까지 그렸으며, 로랑생도 기욤 부인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몇 점의 초상화는 그들의 집을 장식했을 뿐만 아니라 오랑주리의 벽면에 걸린 채로 과거의 거장들과 컬렉터의 관계를 연상하게 만들어준다. 초상화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모딜리아니가 그린 <폴 기욤의 초상>이다. 두 사람은 1914년 에밀 자코브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고, 기욤은 몽마르트르에 모딜리아니의 스튜디오를 지원해주었다.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특유의 스타일이 드러나며, 화가와 컬렉터 사이의 친근감도 느껴진다. 우수에 젖은 눈, 입체파 스타일의 코, 잘 다듬은 수염과 살짝 벌린 입. 컬렉터의 고상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편안한 느낌으로 담아내고 있다.
10. 루소의 '아이와 인형'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
Child and Doll, 1904~5, 67×52cm
천진무구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 생각 없다고 해야 할까. 루소의 그림은 종종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큰 바위 얼굴’에 어른보다 더 ‘늙은’ 얼굴인 아이가 튀어나오면 더더욱 그렇다. 갑자기 시간과 형태에 대해서 알고 있던 모든 일반적인 상식들이 일거에 허물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기도 한다. 루소만의 놀라운 상상력은 그 혼자만이 살고 있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나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루소는 그림을 통해 현실과 상상 사이를 넘나든다. 그렇기 때문에 갑자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가다>처럼 기이한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세계는 추하거나 어둡지 않고 밝고 거리낌 없는 동화처럼 여겨진다. 수염이 난 것처럼 가뭇가뭇한 아이의 얼굴과 빨간 원피스, 태피스트리를 장식한 것 같은 귀여운 꽃들, 인형이라고는 하지만 아이한테 잡힌 어른 같은 인형. 이런 모든 것이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루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보면 볼수록 우습고 유쾌하다. 그림을 보는 즐거움, 그 자체를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