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원시인의 제3칼럼.수필집 '요양병원에서 삶의 길을 묻다' (2019년도 현대시조사 발행)중에서
얼마 전에 ‘꼰대학 개론’이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만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좀 더 세세한 개념으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보통 꼰대는 늙은이를 말하며 가끔 융통성 없는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이 말을 만들어 낸 어원의 동기를 살펴보면 보통 60대 이상의 노인세대를 가리키는 통칭입니다. 노인 중에서도 여자는 별로 해당이 되지 않고 남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들이대는 잣대입니다. 쉽게 말하면 장성한 아들딸들을 둔 이 시대의 아버지들입니다. 60대도 포함된다고 보면 됩니다. 헌데 이 ‘꼰대’라는 말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사건 이후 더 각광을 받는 듯싶습니다. 촛불시위의 주도세력이 20-40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억울하지만 60대까지도 싫던 좋던 이 ‘꼰대’에 포함될 수밖에 없습니다. ‘꼰대’라는 말은 보통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구분합니다. 그래서 고루하고 구시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즉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곧 ‘꼰대’가 되는 것입니다.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흔히 우리들이 무심코 일컫는 ‘수구꼴통이 곧 ’꼰대‘인 것입니다. 곧 기성세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비하적 표현입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이제, 또는 곧 현실무대에서 저절로 퇴장하는 세대이지만 한 편으로는 젊은 세대들에게 찍혀 인위적으로 강제로 퇴출당하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하여 자의가 아니라 억지로 밀려서 또는 강제로 밀어서 나가니 어이없고 억울할 수밖에 없습니다.
‘꼰대’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는 ‘꼰대리스트’라는 것이 신문지상과 온라인을 달군 적이 있습니다. 산성인지 알카리성인지를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입니다. 이 덫에 걸리면 자의 던 타의 던 ‘꼰대’라는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도 유효합니다. 한 동안 잠잠하더니 이번 최순실로 인한 촛불민심과 맞물려 개혁이라는 깃발 아래 고뿌라의 혀처럼 날름대며 외치는 구호가 곧 ‘꼰대 타도’입니다. 점령군처럼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언필칭 ‘꼰대’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허리케인을 무색하게 하는 이른바 서배스천 융거의 ‘퍼펙트 스톰(perpect storm)현상’이 쓰나미처럼 밀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신세대와 기성세대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인하여 기성세대로 몰린 ‘꼰대’들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타도의 대상으로 변방으로 밀려났습니다. 산업화세대의 태풍의 눈으로 1인당 국민소득 60불의 최빈국을 30000불의 선진국을 끌어올린 공과는 온데 간 데 없고 ‘꼰대’라는 이름표를 붙여 용도폐기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변방으로 밀려나는 이 세대 간의 구데타에 부질없고 슬프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하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언론에 보도되거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꼰대의 체크리스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친절하게도 20개의 항목을 설정하고 여기에 해당되면 ‘꼰대’라는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붙게 됩니다. 살펴보니 그 그물코가 어찌나 촘촘한지 늙은이들은 물론 이 리스트를 작성한 젊은이들조차 빠져나가기가 힘들 거 같아 보입니다. 크게 나누어 보면 6하 원칙에 의한 꼰대가 있고, 10개 항목에 의한 꼰대, 그리고 20개 항목으로 체크한 꼰대가 있습니다. 여기서 ’꼰대‘라는 개념을 정립하는 공통인수를 뽑아보면 첫째가 너 몇 살이야..와 어디서 감히..의 나이의 개념, 둘째가 ’내가 너만 했을 때..와 네가 뭘 안다고..의 능력의 개념, 셋째가 내가 왕년에..와 어디서 감히..의 직위의 개념으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내 스스로를 테스트 해보니 이미 자숙기간이 필요한 ‘꼰대’에 근접해 있습니다. 이미 좋은 ‘어른’의 단계는 분명히 지난 걸로 진단됩니다.
실제로 집안에서 아들 며느리나, 딸 사위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복창이 터져서 말소리가 높아지거나 아예 말을 이어갈 수 없을 만큼 감정의 골이 깊어갈 때가 많습니다. 아내나 나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림을 꾸려왔기 때문에 절약이 제1의 미덕이며 가치입니다. 싼 옷을 입고 덜 비싼 음식을 먹으며 물건을 고를 때 질 보다는 양에 치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늘 그 경험을 전제로 훈계하거나 동의를 구합니다. 하지만 아들딸 세대는 다릅니다. 없어도 입맛에 맞는 고급 레스토랑이나 맛 집을 찾고 입고, 들고, 신는 데 명품이 아니면 고르지를 않습니다. 부모는 경원시해도 제 자식들한테는 절절매며 사랑이 짙고 그윽합니다. “아버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라는 말을 전제로 대화합니다. 우리가 “왕년에는....”이라는 복고적 대사를 쓰면 고루하다고 합니다. 외손녀와 카톡을 하다 보면 대답은 늘 “예” 와 “아니오”로 간결합니다. 부연 설명이나 변명 같은 것도 없습니다. 꼭 단세포 동물들 같습니다. 중간 설명이 없고 결론만 얘기합니다. 분명히 세대 차이를 느끼고 허물 수 없는 벽 같은 장애물이 존재함을 실감합니다. 우리는 유교적 관점에서 효나 충성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데 비해 요즘 젊은 세대들은 소위 영미식의 실용주의 즉 프라그마티즘에 충실합니다. 이렇게 현격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내 스스로가 ‘꼰대’라는 울타리를 쌓고 그 가치에 따르라고 아들딸들을 겁박합니다. ‘시장(市場) 세대’와 ‘SNS 세대’ 사이에는 타협과 소통이 될 수 없습니다. 부모세대들이 서운해 해도 아들딸들은 괘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모들이 무시를 당한다고 불평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지난번 최순실 사태를 놓고 아들딸과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는 친구들이 없습니다. 심하게는 전투적(?)으로 싸웠다고 말합니다. ‘촛불’이 이념의 시위라면 ‘태극기’는 애국의 상징입니다. 이념이 애국을 당할 수 없음은 세계역사가 증명해 왔습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보아 ‘꼰대’여부는 상식의 잣대로 재어야지 나이나 이념의 자로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수박을 겉으로만 보고 “잘 익었다” “안 익었다”를 구분 할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사실은 그런 선입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저울질하는 사람이 진짜 ‘꼰대‘입니다. 우리 같은 보수도 나라를 거덜 내는 이 지긋지긋한 정치판의 대혁신을 원합니다.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는 깃발을 쳐들고 여기에 따르는 자만 혁신세력이고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꼰대’나 ‘수구 꼴통’이라고 몰아붙이는 독선적 행패에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분단과 전쟁, 가난과 산업화에 시달리며 살아 온, 그래서 노후생활도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60살 이상의 늙은이들을 ‘꼰대’로 몰아 풍요만 빨아먹고 내쫓으려는 이 오만, 이 독선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한데 요즘 차기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그 지긋지긋한 보수세대인 ‘꼰대’들에게 보수 진보할 것 없이 구애가 대단합니다. 그렇게 경원시 하던 ‘꼰대’들에게 통합을 외치며 화해의 제스쳐를 씁니다. 60세 이상 1000만 ‘꼰대’들의 표를 의식한 결과입니다. 그 ‘꼰대’들이 알짜 유권자요 높은 투표율까지 점하고 있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표의 등가성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탕발림 같아 입맛이 씁쓸합니다. 당장은 발등의 불처럼 표가 아쉬워 보수 진보 구분하지 않고 중용의 미덕을 내세우지만 막상 선거 후에는 일회용 소모품처럼 버려질 것이 뻔하니 어떤 후보를 찍어야할지 망설여지는 것입니다. 앞으로 20일 동안만이라도 목에 힘을 주며 표의 힘을 만끽해야겠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옷은 몸에 맞출 수박에 없습니다. 몸에 옷을 맞추려면 무리수가 따르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인간의 생각마저도 대행해 주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입니다. 과거의 습관과 행태에 젖어 있는 ‘꼰대’가 그 활동무대를 물려주고 역사의 뒤란으로 물러나는 것은 역사의 맥으로 진단하면 당연한 순서입니다. 다만 오늘의 풍요를 이룩한 산업화 세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법칙에 의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자부심 하나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후일 ‘꼰대 세대’의 논공행상은 반드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입니다. 기성세대라 불리는 늙은이들은 ‘꼰대’ 맞습니다. 그래도 6하 원칙의 ‘꼰대’, 10개 20개 원칙의 ‘꼰대’로 100점 만점을 맞는 것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가치 있는 ‘꼰대’로서의 좌표를 당당하게 지키고 비겁한 퇴장이 되지 않기 위해 오늘부터라도 ‘꼰대’라는 손가락질에서 벗어나는 묵언수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나 속에 감추어진 새로운 나를 발견하려 노력해야겠습니다. 나를 변화시키지 않고는 ‘꼰대’소리를 들어도 변명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반항하고 부정하고 싶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고 역사는 순환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60년 전에는 "기성세대 물러나라“ 외치며 4.19혁명을 주도하지 않았는가? '꼰대'라는 화살이 그리 겁나지 않는 이유입니다. 실력으로 행동으로 젊은 꼰대가 되어 받아들이며 극복하면 됩니다. '꼰대'가 아니라고 부정만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이 말한 것처럼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뿐이라는 명언을 후대들에게 남겨주고 싶습니다. (2017. 4. 17) 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