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필자의 제3 칼럼.수필집 "요양병원에서 삶의 길을 묻다(2019년 현대시조사 발행)에 실린 글을 전재한 것입니다.
백치(白痴)라는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정상적인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나애심이 주연한 .'백치 아다'가 기억 나시나요? 백치는 2살 이하 아이정도의 지능지수를 가진 것을 말한다고 하니 글자 그대로 바보라는 뜻입니다. 쑥맥이 더 나은 근접한 정답인가요?
그런데 백치(白痴)에 미(美) 한자를 더한 백치미(白痴美)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뜻을 풀이합니다. 즉 백치미란 “지능이 낮은 듯하고 표정이 멍한 사람이 풍기는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겨우 접미에 미(美)자 한자를 더 붙였는데 느끼는 뜻은 엄청 차이가 많습니다. “야~ 이 백치야” 하면 욕으로 들리지만 “너는 백치미가 있어” 하면, 듣는 경우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귀엽다는 뜻을 담고 있어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배우 얼굴에서는 어쩐지 백치미가 느껴 져”라고 표현하면 백치미가 여자로 특정지으며 아주 귀엽다는 뜻으로 받아드려져 오히려 좋아하는 경우가 많을 거 같습니다. 백치미를 뜻하는 영어단어는 bimbo입니다. bimbo는 매력적이지만 지능이 없는 여성을 비방하는 속어입니다. 이 용어는 1919년 미국에서 처음에는 지성이 없거나 짐승 같은 남성을 위해 사용되다가 21 세기 초반에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종종 금발 머리로까지 약진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젊었을 적에 ’blonde라는 연재만화를 어느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blonde는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는 좋지 않은 여성을 가리키는 추상명사로 종종 사용됩니다. 한국어나 영어나 백치미가 ‘멍청한 아름다움’, ‘매력적인 여성’으로 설명되는 것을 보아 부정 속의 긍정의 힘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백치미는 동양적인 여성에서 사용되고 금발미인은 서양여성에서 사용되는 어수룩하고 맹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아름다움이 보이는 멍청스러운 미(美)의 개념입니다. 나에게 여배우 중에서 백치미가 풍기는 여성을 꼽으라면 한국에서는 최진실씨를, 서양에서는 산드란 디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콩깍지처럼 톡 티는 연기자인 최진실은 어느날 ’남자들은 여자 하기 나름이라구요‘라는 명대사로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면서 일약 톱스타로 점프했습니다. 예쁘면서도 어딘지 늘 한 구석이 비어 보이는, 그래서 TV속에 들어가 그녀의 맹한 부분을 채워보는 백기사가 되고 싶도록 남성들의 시선을 고정시킨 신데렐라 최진실. 1959년대 초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명화에서 ’키스만 해도 임신이 되나요? 라는 광고카피와 함께 유명해진 요정 산드라디는 인형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되는 미모와 도톰한 입술, 어딘가 맹해 보이고 나사 풀린 듯한 표정으로 만인의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16세였고 나는 그 해에 대학1학년이 되어 이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사람은 너나할 거 없이 자기보다 좀 덜 똑똑하고 어수룩한 사람을 좋아하는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빈틈이 없는 인격의 소유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지성, 영화배우 같은 미모, 소설가 같은 달변, 어찌 보면 부족함이 없이 온 몸이 꽉 찬 이 완벽한 사람을 만나면 사실 즐겁기보다 피곤을 느낍니다.
카페에 올라와 있는 ‘빈틈’이라는 글이 내 관심을 꽉 잡아버렸습니다.
‘틈이 있어야 햇살이 파고들고, 틈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고, 틈이 있어야 이미 들어온 사람을 편안하게 합니다. 많이 배우고 말을 잘한다 해도 빈틈이 없는 사람은 정이 가질 않습니다. 틈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서로 통하게 하는 창입니다. 틈은 허점이 아니라 여유입니다. 그러므로 굳이 틈을 가리려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열어 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 빈틈으로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들이 친구가 되어 당신의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도 마음의 문을 열고 유연한 생각으로 여유로운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백치미가 있다는 말, 금발의 미녀라는 말, 모두가 좀 모자라는 듯한 표현의 대명사이지만 사람사귀는 맛은 일품입니다. 좀 모자라야 내 말을 들어 주는 아량이 있고, 좀 부족해야 들어갈 수가 있는 여유가 있고, 좀 덜 예뻐야 나를 지탱할 명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사람이라면 그 냉정함에 진저리치게 마련입니다. 장사는 어수룩해야 잘 됩니다. 장사꾼의 허풍 중에 ‘밑지고 판다’는 말은 몽땅 거짓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 한마디로 사는 사람은 싸게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좋고 파는 사람은 공인(?)된 거짓말 속에서 이문을 챙겨서 좋습니다.
침어낙안(浸魚落雁) 이라는 고사가 있습니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절세미인입니다. 미인을 보고 물 위에서 놀던 물고기가 부끄러워서 물속 깊이 숨고 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가 부끄러워서 땅으로 떨어졌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용모를 이르는 말로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글귀는 물고기나 기러기가 미인을 보고 물속에 숨거나 땅위로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무서워서 피했다는 해석이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라면 미인을 피할 일이 없겠지요. 사람은 미인을 좋아한다는 간접광고와 같은 비유의 말입니다.
내 안식구는 백치미가 좀 있습니다. 내 눈의 안경으로 보면 처녀 적의 얼굴, 대학 졸업반인 23세의 그녀 얼굴은 허벌나게 예뻤습니다. 한 눈에 뿅 갔으니까요. 예쁜 얼굴에 덧대어 맹한 심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맹하다는 말은 꾸밈이 없는 순진성을 의미합니다. 헌데 정작 나를 반하게 한 본질은 속물의 눈으로 본 얼굴의 아름다움보다도 사랑의 눈으로 본 맹해 보이는 착한 마음씨와 꾸밈이 없는 순수함이었습니다. 나를 한 방에 훅 가게 만든 것은 좋은 의미에서의 백치미를 갖춘 미모의 소유자라는 점에 있었습니다. 아직도 시조단에서는 착하고 순하며 눈물 많은 할머니 미인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 말에 잘 속습니다. 내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면 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일단 믿어 줍니다. 연애할 적에 입술을 대보기만 하자고 했더니 그러라며 눈썹을 아래로 깔고 통째로 향기 나는 머리를 내민 여자입니다. 허지만 나는 사기꾼도 아니면서 감은 눈을 피하며 멋지게 입술에 도장을 찍고 심장에서 뿜어나오는 사랑의 더운 입김을 한없이 불어 넣었습니다. 그 훔쳐낸 입술을 작용과 반작용의 지렛대로 삼아 성공한 연애를 촉발, 2년간의 열애 끝에 드디어 결혼에 꼴인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치미는 믿음과 속임의 덧셈 뺄셈을 통해 가벼운 하나의 영혼으로 남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역사는 성공한 자의 기록이라고 하던가요? 백치미가 울림으로 다가오면 그건 거대한 사랑의 파도가 됩니다. 그리고 그 파도에서 영영 헤어나오지 못하게 강열한 자석의 힘을 발휘합니다. 로미오와 주리엣처럼 원수의 벽을 넘기도 하고 크레오파트라처럼 권력을 유혹하는 화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뉴턴의 만유인력처럼 서로 끌어다니는 강한 자성을 띠게 됩니다. 남과 북, S와 N이 만나면 떨어지지 못합니다. 떨어지게 할수록 더 떨어지지 아니하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래서 사랑은 떼려하면 할수록 더욱 강렬하게 달라붙는 마법의 자석이 됩니다. 어느 수필가는 "인류최초의 거짓말쟁이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거짓말쟁이는 신이다"라고 자문자답했습니다. 금단의 열매를 먹었지만 죽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비록 뱀이 이들을 속여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했지만 결국 최초의 거짓말쟁이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거짓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지만 그만큼 거짓말은 인류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해 왔던 가장 큰 능력으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필자가 여기에서 거짓말쟁이는 신이라고 부언하는 것은 "내가 입술만 대보자고 했는데 결과는 서로 혀를 교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짓말을 했지만 둘이는 결코 입술을 떼지 않고 오래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죽었다고 가정하면 사랑을 나눈 나와 그녀의 입술도 그대로 달라붙어 죽어야 하는 데 한참을 지나니 저절로 떨어지더라는 우스개소리를 하고 싶어졌습니다.
최근 국정파탄의 중심에 박근혜대통령이 서있습니다. 박대통령은 순한 용모의 소유자는 아닙니다. 고집불통으로 보이고 혁명가 같은 카리스마의 눈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보아왔지만 대독대통령으로 국민들에게 답답한 느낌을 주어왔습니다. 그래서 지(知)적 백치미를 가진 여성대통령으로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최순실 같은 일개 촌 아낙네에게 국정을 농단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순진한 대국민사과로 백치대통령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닉네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비록 독재자 소리를 듣지만 5천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인 아버지 박정희대통령의 명예에 흙탕물을 뿌렸습니다. 허지만 어느 편이 진실이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입니다. 리처드 탈러가 말한 이른바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이 지금 탄핵의 중심에 섰습니다. 후대의 역사가에 의해서 '죄와 벌'의 양면성이 새롭게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리겠습니다. (2017. 2. 18)시조시인 지산.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