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弓) ~ 박만엽(朴晩葉)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에게 애첩이 있었다
한여름에도 불가마 같은 안방
이불 안에 그녀를 숨겨두었다
밤이 되면 나뒹군 치약 뚜껑은 달이 되고
가위로 오려진 현란한 색종이는 별이 되었다
사주팔자에도 없는 달과 별이 된 그들은
그녀의 몸을 광내며 치장시키는 데 쓰인
인질이고 희생양일 뿐이었다
소뿔로 만든 몸통이라서 허리를 휘어 줄에 끼면
엄마 젖가슴보다 더 탄력이 있고 요염하게 변한다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산으로 들어가
다른 한량들과 내기를 했다
오십 미터 전방에 징을 달아두고
시위를 당기면 판돈부터 달라고 손부터 내민다
몇 초 후 징 소리와 깃발이 휘날리면 당연하다는 듯
돈을 뒷주머니에 벽지 바르듯 세워 넣었다
그 벽지가 우리 가족의 기둥 역할까지 했다
그런 아버지가 활만 달랑 들고 옥황상제와 겨룬다고
하늘로 가신 후, 지금껏 징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타국에서 부평초처럼 떠돌다가 보니
어제가 아버지 기일(忌日)이었던 것도 몰랐다
솟구치는 죄스러운 마음
무심코 베란다를 통해 하늘을 쳐다보는 찰나
쇠 구슬이 날아와 베란다 창이
낚시꾼에게 돌 맞은 얼음장처럼 쩍 갈라진다.
아부지, 하늘에는 새총 가지고
애꿎은 아파트 유리창 깨는 놈
활로 맞히기 대회는 없나요?
이놈아! 제사라도 지내면서 그런 소리를 해라.
[시학과 시 - 2020 봄호 - 78~79쪽]
첫댓글 궁(弓) (시:박만엽/낭송:방경희/영상:J)
https://youtu.be/pR8wtyKho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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