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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8: 밀람 - 릴코트 - 라스파
Milam (3450m) - Rilkot (3144m) - Laspa (3264m)
히말라야 교역의 쇠퇴
밀람은 인도-티베트 사이의 중요한 교역소였다는 사실은 이미 80여년 전에 틸만이 말했다. 무역상들은 밀람에서 당일 운타 두라(Unta Dhura) 기슭에 도달할 수 있었고, 운타 두라, 자인타 두라(Jainta Dhura) 및 캉그리 빙그리 라(Kangri Bingri La)를 넘어 다음날 저녁 티베트에 도착한다.
밀람 마을 사람들은 티베트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티아(티베트 출신 사람들)로 불리기를 꺼린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을 12세기에 인도 서북쪽 지방인 라자스탄의 지에(jie) 지방에서 이주해와 쿠마온에 정착한 라지푸트(Raj put)족이라고 한다.
어쩐지 나렌드라의 얼굴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히말라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티베트 몽골리안과 다른 인도인 얼굴이다. 나렌드라는 조상들의 땅 밀람에 올 때마다 이제는 황폐해진 고향 마을을 보고 어떤 느낌이 들 까?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그런데 '모든 것은 변한다'는 대명제에 따르면 옛날 무역로가 쓸모가 없게 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 이상 소금을 티베트에서 구할 필요가 없어졌고 티베트에서도 인도산 농산물을 힘들게 구할 이유가 없다. 중국에게 강제로 합병된 후 대륙의 식량이 기차와 도로를 통해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 굳이 5천 미터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된다.
네팔 히말라야에도 티베트와 오가는 여러 교역로가 있다. 중국과 네팔은 사이가 좋아 지금은 왠만한 곳은 도로가 개통되어 차로 물건을 실어나르고 있다. 랑탕에서 가는 키이롱, 에베레스트 쪽의 장무는 오래 전부터 찻길이 나 있다. 최근에는 돌포와 무스탕도 찻길이 났다. 세상은 그렇게 변하는 것이고 또 그렇게 변해야 주민의 삶이 덜 고달프게 된다.
빤디뜨(Pundit)
캠프에서 항상 저녁 식사 후 나렌드라는 다음날 일정에 대해 브리핑을 한다. 며칠 전 나렌드라가 자기 선대의 고향 밀람에 대해 말하는 중 밀람이 유명한 빤디뜨를 많이 배출한 곳이라는 말을 했다.
2006년 네팔 어퍼 무스탕 트레킹을 마치고 순례기 <무스탕 - 시간의 저편으로 떠난 여행>을 쓰면서 자료를 조사하다가 식민지 시절 영국의 인도인 스파이 '빤디뜨'들이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 지리 등 여러가지 조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나렌드라로부터 이곳 밀람에서 유명한 빤디뜨들이 많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들으니 새삼스럽다.
빤디뜨는 힌두교 베다 경전, 다르마 또는 샤스트라를 포함한 힌두 문학, 철학 및 의식의 교사 또는 학자를 칭하며 '지식 소유자' 또는 '학식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되었다.
시대는 제국주의 열강들이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인도의 영국 식민지 시절 빤디뜨는 영국 국경 너머의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영국인에 의해 훈련되고 고용된 인도 출신을 말한다. 영국은 인도 현지인을 훈련하여 빤디뜨라는 신분으로 위장하여 일종의 '스파이'를 티베트에 파견했다.
19세기 후반 티베트 정부가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여 네팔과의 국경을 통제함에 따라 티베트와의 교역 통로로서의 로 왕국의 지위가 상실되고 왕국의 경제력도 크게 저하되었다. 그 결과 무스탕 왕국은 네팔 왕국 내에서도 발전이 극히 정체된 특수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외국인의 출입은 19세기 말 이후로 전면 통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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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이후 무스탕에 들어간 외국인으로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1879년 무스탕을 거쳐 티베트로 들어간 인도인 학자 사라트 찬드라 다스(Sarat Chandra Das, 1849-1917)다. 그는 인도의 영국 식민지 당국이 1860년대부터 티베트에 파견하기 시작한 첩자들인 이른바 '빤디뜨(Pundits)' 중의 10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티베트 현지인들의 협력을 얻어 티베트를 널리 둘러본 뒤 1891년에 인도로 돌아갔다. 그는 다르질링의 고등학교 교장을 지냈고, 티베트에 관한 네 권의 책과 티베트어-영어 사전, 티베트어 문법책을 지었다. 그가 인도로 돌아온 직후에 그가 스파이였음이 티베트에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입국 경로였던 무스탕과 티베트 간의 국경은 완전히 봉쇄되었다. (2. 금단의 왕국 무스탕)
론리 플레닛 <인도 히말라야 트레킹> '밀람 빙하트레킹' 편에는 밀람의 빤디뜨들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조하르 계곡의 빤디뜨들 (THE PUNDITS OF THE JOHAR VALLEY)
1860년대 중앙아시아와 티베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가함에 따라 영국은 광활한 티베트를 포함하여 인도와 그 너머의 북부 장벽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수집하고 정치적 정보를 수집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영국 측량 장교는 티베트 측량은 커녕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데라둔(Dehra Dun)에 본부를 둔 인도 대삼각측량국(GTS)은 티베트 국경 근처에 살고 티베트 관습과 언어에 익숙한 인도인을 훈련시켜 그들을 대신하여 조사 작업을 수행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조하르 계곡(Johar Valley)의 밀람 마을 주민들이 이 계획에 적합했다. 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티베트와 무역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국경 지역을 잘 알고 있었다.
1863년에 나인 싱(Nain Singh, '대장 빤디뜨' 또는 코드명 'NO1')과 그의 사촌 마니 싱(Mani Singh)은 측량 기술 교육을 받았다. 2년 동안 그들은 육분의와 나침반의 사용법을 익히고 끓는 물의 온도를 기록하여 고도를 측정하는 법을 배웠다.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그들은 정확한 걸음 수를 내도록 훈련을 받았고, 100걸음마다 전통적인 108개의 구슬이 아닌 100개의 구슬을 포함하는 수정된 불교 마니차(기도 바퀴)에 구슬을 떨어뜨리도록 훈련받았다. 마니차도 메모와 계산을 숨기도록 개조되었다.
나인 싱은 1865년 3월 라다크 상인으로 위장하여 카트만두에서 출발했다. 그는 창포 밸리, 라싸, 카일라스 및 마나사로바를 포함한 남부 티베트를 조사한 후 1866년 6월 데라둔으로 돌아왔다.
1867년에 그는 마니 싱 및 또 다른 빤디뜨인 카일란 싱(Kailan Singh, 코드명 'GK')과 함께 티베트로 들어가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들은 말 상인으로 위장하여 바드리나트와 마나 패스를 거쳐 인도를 떠나 카일라스 근처를 헤매며 인더스강과 수틀레지 강의 수원을 조사했다. 이 주목할만한 성과는 인도와 영국의 전문가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1874년 7월 나인 싱의 마지막 여행 목표는 창포강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레에서 출발하여 티베트 남부와 창포강 하류를 거쳐 아삼까지 건너 2000km가 넘는 여행을 마쳤다. 비록 창포강의 하류를 완전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훌륭한 노력이었다.
조하르 밸리 출신 나인 싱의 또 다른 사촌인 키셴 싱(Kishen Singh, 'AK')도 조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1872년에 첫 번째 중요한 여행을 시작하여 시가체와 라싸 북부 사이를 탐사했다.
그는 창포 하류의 어려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돌아온 후 라싸로 돌아갔고 1882년 11월 다르질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창포강과 인도의 브라마푸트라강이 같은 강인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창포 강과 브라마푸트라 강 사이의 험난한 지형에 대한 조사는 뛰어난 킨툽(Kinthup)을 포함한 시킴의 많은 빤디뜨들의 목표였다.
1878년 10월 시킴을 떠난 킨툽은 티베트를 통과하는 장대한 여행을 떠났다. 이 여행에서 그는 두 번이나 노예로 팔리는 경험까지 했다. 이러한 가혹한 노력으로 그는 남체 바르와(7745m)의 거대한 봉우리와 깊은 협곡 지역을 인도 산기슭에서 가까운 거리까지 돌면서 창포의 경로를 설명했다.
4년 후 인도로 돌아와 제출한 그의 보고서는 정확한 세부 사항이 부족하여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12년 창포 협곡이 마침내 탐사되었고, 마침내 킨툽의 보고서는 그가 죽기 불과 몇 달 전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알렉산드라 다비드-넬 (Alexandra David-Néel, 1968~1969)
아침 먹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다가 오전 8시 45분 출발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찻길을 간다. 이런 찻길은 걷기 편하지만 이런 길을 걷기 위해 히말라야를 오지 않는다. 이런 길을 걸으려면 차라리 산티아고 순례길이 훨씬 의미가 있을 것이다.
평지가 힘이 들지 않아 걷기에는 좋으나 실제로 걸어보면 더 힘이 빠지게 된다. 만주벌판이나 몽골의 대초원을 트레킹 한다고 한 번 상상해 보자. 끝없는 수평선을 향하여 걸어 가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열 시간을 걸어도 풍경의 변화가 없으니 지칠 수밖에 없다.
나의 이런 생각을 확인해 준 사람이 이미 100년 전에 있었다. 프랑스의 여성 구도자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 여사로 <영혼의 도시 라싸로 가는 길>의 저자다. 1924년에 출판된 이 책은 그가 프랑스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거쳐 티베트로 향하는 여정과 그 과정에서 마주한 도전, 모험, 그리고 정신적인 탐구를 쓰고 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 탐험가, 페미니스트, 오리엔탈리스트, 철학자, 구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알렉산드라는 1924년 외국인 출입이 금지된 라싸로 들어간 최초의 서양 여성이었다. 그는 불교에 관한 수많은 책, 중국, 인도, 특히 티베트 여행, 티베트 소설을 썼다.
알렉산드라는 56세 때인 1923년 10월 양아들인 티베트 라마승 용덴과 함께 중국의 운남성에서 출발하여 4개월 동안 장장 3000km의 여정 동안 수많은 5천미터급 고개와 강을 건너고 길을 잃고 강도를 만나는 등 고생을 한다.
소박한 티벳 순례자 차림으로 식량은 참파 1끼분으로 동행한 용덴과 하루를 지탱하기도 했다. 잠은 산적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길에서 먼 나무나 바위 아래에서 잤고 간혹 운이 좋아 농가의 헛간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미 이전에 티벳의 홍모파에 정식으로 입문하여 동굴에서 3년 간 은둔수행을 한 경력이 있던 알렉산드라는 티벳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신비술에도 어느정도 조예가 있어 추위나 배고픔에 초연했다.
정작 알렉산드라를 가장 힘들 게 한 일은 히말라야의 고산준령 추위가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당시 티베트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은 외국인은 절대로 티베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만일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가차없이 추방되었다. 실제로 다비드-넬은 이전에 행했던 몇 번의 시도에서 번번이 발각되어 쫒겨난 전력이 있었다.
마침내 티베트 수도 라싸 입성에 성공한 알렉산드라가 1924년 추운 겨울 히말라야를 넘어 금단의 땅에 도착하기까지 모진 고생을 하며 5천미터 고개를 수 없이 넘으면서 한 말이 있다.
"만일 내가 가는 길이 이런 산길 고개가 아니라 몽골의 평원이라면 나는 절대로 가지 않을 것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말씀이다. 이보다 앞서 알렉산드라는 1917년 한국을 방문해 합천 해인사와 금강산 유점사 등지를 여행하기도 했다. 아래는 포스터(Foster) 부부가 쓴 알렉산드라의 전기 <백일 년 동안의 여행> 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알렉산드라와 용덴은 일본을 떠나 조선의 금강산에 있는 한 사원에서 수정처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라는 가구가 없는 독방에서 잠을 잤고 새벽 3시에 일어나 예불을 올렸다. 그리고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산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불교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보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주 동안 계속해서 비가 내리면서 류머티즘이 다시 말썽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혼아홉 살의 알렉산드라는 그 어느때보다 더 젊고 더 힘이 넘치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라스파에 추위에 떨다
하산길이지만 중간중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것이 산길의 특징이다. 부르푸 다리를 건너 모녀가 운영하는 찻집에 도착하니 11시 40분. 그곳에서 밀크티를 마시고 도시락 점심을 먹었다. 거작가님의 제인으로 어린 소녀를 위해 각자 남은 간식 중 일부를 모아 주었다. 금새 한보따리가 되었다. 소녀의 좋아하는 얼굴을 보고 모두들 기뻐한다.
다시 길을 나서 마르톨리 아래 철교 통과. 며칠 전 내려왔던 가파른 길이 보인다. 돌아가는 길은 계속 찻길로 간다. 구비구비 산허리에 나 있는, 빤히 보이는 찻길을, 가끔은 지름길을 이용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걸어 오후 2시 20분 릴코트에도착했다. 잠시 숨을 돌리며 밀크티 한 잔 마시고 다시 길을 나섰다.
라스파 캠프사이트에는 오후 3시 50분에 도착했다. 오늘 22km 넘는 거리를 걸었다. 이번 트레킹에서 제일 긴 거리다. 소요시간은 7시간30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보통은 말이 먼저 도착해서 짐을 풀어놓으면 각자 자기의 텐트와 매트리스, 짐가방을 찿아 선호하는 곳에 텐트를 친다.
그리고 짐가방을 열어 속옷를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겉옷(바지와 짚티)도 갈아입는다. 추운 날이면 상하 모두 우모복으로 무장한다. 젖은 옷을 빨리 갈아입지 않으면 감기에 걸리기 쉽고 적응이 되었던 고산병도 올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말이 도착하지 않았다. 오늘은 넓은 찻길인데 이렇게 늦는 것이 이상하다.
알고보니 말 한 마리가 다쳐 짐을 나누어 옮겨 싣느라 1시간 이상 지연되었다. 운이 좋은 사람은 먼저 온 말에 실려 온 텐트와 가방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텐트만 왔던지 짐만 왔던지, 아니면 아무것도 오지 않아 한참 기다렸다. 나는 텐트만 와서 일단 찬바람은 피했는데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지 못해 땀이 식으연서 추위에 떨었다.
그래서 배낭에는 항상 속옷 한 벌, 겉옷 한 벌(폴라텍 바지+짚티), 양말, 보온자켓, 방수자켓, 헤드랜턴, 물통, 간식, 간단한 응급처치키트를 지참해야 한다. 그래봐야 5kg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는 체력이라야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는 있지만 트레킹 후반에 들어서면 체력이 떨어져 배낭의 짐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마음이 생겨 짐을 덜어낸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하며.
트레킹 중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고 도로사정으로 야간운행을 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상황은 히말라야 트레킹 때만 아니라 국내 산행에서도 발생하는 일이어서 아무리 좋은 날, 당일치기 산행이어도 반드시 헤드랜턴, 방수, 방풍, 보온자켓은 배낭에 넣어가야 한다.
어쨌든 늦게나마 모든 짐이 무사히 도착하여 해피엔딩이 되었다. ♣
날이 밝았다. 텐트에 서리가 내렸다.
아침식사를 기다리며 잠시 모닥불에 몸을 녹인다.
오늘 아침도 짜파티, 오믈렛, 우유, 뽀리지로 아침을 먹고
식사 후 텐트 철수. 해가 비치면 텐트가 빠르게 마른다.
두툼한 매트리스. 아주 좋다.
갑자기 멀리 막사에서 양떼가 몰려와 풀을 뜯는다.
스태프들도 짐을 정리
우리는 먼저 출발. 이제부터는 쉬운 하산 길이다.
부대 앞에서 부대장의 요청으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일 오른쪽 선암님이 옆에 있는 부하에게 와서 같이 찍자고 불렀으나 상관이 어려웠는지 오지 않았다.
넓은 찻길은 편하긴 해도 지루하다. 히말라야 트레킹으로는 걷고 싶지 않은 길이다.
범퍼카 같은 차도 만났다.
난다데비가 보이는 파추 계곡 도착
오전 10시. 마지막으로 난다데비 여신에게 인사하고 간다. 기온이 오르니 구름이 생기기 시작한다. 강하르 마을에서 베이스캠프 가는 길이 보인다.
부르푸 마을을 지나
잠시 오르막을 오르고
다시 고리 강가 강을 향해 내려간다. 오른쪽 원은 이틀 전 야영했던 야영장, 가운데 원은 찻집, 그리고 왼편 원 오르막 길은 랄람 패스로 가는 서키트 길.
서키트 길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에서 밀람은 빼고 이런 서키트 코스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찻집을 지키는 모녀. 손님이나 있을까 궁금하다.
점심 먹고
각자 간식 중 일부를 모아 찻집 소녀에게 선물했다.
마르톨리 아래 철교. 마르톨리 오르는 가파른 길이 보인다. 우리는 아래 찻길로 간다.
산허리길을 돌고 돌아 간다. 멀리 릴코트가 보인다. 한참 더 가야 한다.
찻길을 버리고 아래 지름길 이용
슬슬 지치는 지루한 길의 연속
릴코트에서 휴식
릴코트에서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다.
다시 찻길로 올라
부지런히 걸어
오후 3시 50분 라스파 도착. 다리 건너 큰 바위 주변이 야영장이다.
그런데 짐이 오지 않아 한참 기다렸다. 아직 3천 고지여서 해가 떨어지니 기온이 급강하한다.
말 한 마리가 다쳐 짐을 나누어 옮겨 싣느라 1시간 이상 기다렸다. 운이 좋은 사람은 일찍 텐트와 짐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텐트만 왔던지 짐만 왔던지 해서 추위에 고생했다. 어쨌든 늦게나마 짐이 다 도착하여 해피엔딩이다. 오늘은 많이 걸었다.
▶인도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 문시야리 에이전시◀
India Nanda Devi East BC Trekking Munsiyari Agency
www.himalyantreks.com (CEO Narendra Kum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