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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7: 부르푸 - 밀람 - 밀람빙하 전망대 - 밀람
Burfu (3260)m - Milam (3450m) - Milam Glacier View Point (3500m) - Milam (3450m)
밀람을 향하여
3천 고지라 아침에는 춥다. 그러나 해가 뜨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히말라야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적어도 5천 미터 이하에서는 그렇다. 그러니 눈이 오거나 비가 내리면 그때부터 고행이 시작된다. 내가 트레킹 시기를 가을을, 그것도 늦가을 선호하는 이유다.
아침 먹고 해가 캠프를 완전히 비치는 오전 8시 20분에 출발. 오늘은 완만한 찻길을 오르는 여정이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17km를 별 재미 없는 찻길을 걸어야 한다. 찻길을 걸으면 이미 트레킹의 본질에서 벗어난다. 지금 네팔 트레킹 대부분 코스는 찻길이 연장되고 있다.
오자 중의 오지라 불리던 어퍼 무스탕과 돌포도 찻길이 뚫려 더 이상 오지가 아니다. 이제 그곳은 중국과 찻길이 연결되어 있다. 안나푸르나 서키트도 출발지인 베시사하르에서 마낭(+강사르)까지 찻길이 나 있다. 마낭에서 5406m의 토롱라를 넘어가면 나오는 좀솜은 이미 오래전부터 포카라까지 버스가 다닌다. 마나슬루쪽도 마찬가지로 아마 조만간 삼도까지 찻길이 나리라 예상한다.
현지인들을 위한 찻길은 당연히 환영받아야 한다. 예전부터 트레킹을 할 때 전기 통신, 도로 등 열악한 시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20여 년 전 트레킹 때는 밤이면 롯지에서 주는 촛불로 방을 밝혔다. 그 초도 너무 작아서 나중에는 굵은 초를 가지고 다녔다. 지금 트레킹 롯지에는(물론 선택사항이지만) 화장실, 샤워장, 전기, 인터넷 심지어 침대에 전기매트까지 갖추어져 있으니 아주 편리해졌다.
그래도 아직도 찻길이 나지 않은 코스가 있다. 랑탕, 다울라기리, 마칼루, 칸첸중가 그리고 에베레스트 쪽이다. 그곳은 트레킹 목적지까지 트레커들을 위한 롯지 외에는 자연부락이 별로 없어 찻길이 날 이유가 없다. 자연부락 역시 롯지와 연계하여 농산물을 판매하는 입장에서 찻길이 나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
찻길이 나면 트레커들이 차를 타고 그냥 지나간다. 그러면 롯지에 머물 손님이 없어지고 결국 롯지는 문을 닫고 만다. 지금 안나푸르나 서키트 초입 마을이 그런 형편이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베시사하르에서 차메(2650m)까지 차를 타고 직행한다. 현재 그 사이에 있는 대여섯 마을의 롯지는 거의 폐업 수준이다.
두 시간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길을 오르니 맞은편으로 강하르가 있는 파추계곡이 나타났다. 계곡 사이로 난다데비 연봉이 뚜렷하게 보인다. 10시 30분이다. 이 시간에도 하늘에 구름 한점 없는것이 신기하다. 이번 트레킹은 확실히 난다데비 여신의 축복을 받은 것 같다.
히말라야 트레킹의 역사
히말라야 트레킹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트레킹은 순례자, 군대, 상인들이 수세기 동안 히말라야를 오가던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지금처럼 조직적인 트레킹은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던 19세기 후반 인도에서 인기를 끌었던 사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영국인들이 휴가의 일환으로 스리나가르에서 레까지 트레킹을 하기 시작했다. 사냥, 낚시, 트레킹 등 스포츠 관련 활동을 전문으로 하기 위해 스리나가르와 심라에 기관이 설립되었거 많은 수의 짐꾼들이 거대한 천막과 접을 수 있는 침대를 들고 다녔다.
그러나 산으로의 모든 진출이 그렇게 대규모로 수행된 것은 아니다. 1930년대에는 에릭 쉽턴, 빌 틸만 및 프랭크 스마이스가 히말라야에서 좀 더 간편한 탐험 및 등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가르왈 히말라야에서의 그들의 탐험은 복잡한 물류 없이 가볍게 여행하는 것으로 대표되며, 종종 셰르파 한두 명과 함께 등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머메리즘(Mummerism)이라고 하며 영국의 등산가 앨버트 프레드릭 머메리(1855~1895)가 19세기 말에 재창한 등반 사상이다. 머메리즘은 "등산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정상을 오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있다"는 사상을 말한다.
이 사상을 '등로주의'라고 하며 틸만 이후 현재 살아있는 전설로 인정받고 있는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 길을 따라 8천 미터 14좌를 무산소로 등정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창호 대장이 등로주의의 대표적인 산악인이었다.
인도는 1947년 독립 이후, 높고 먼 히말라야 계곡 트레킹의 성격은 정치적 변화를 맞게 된다. 인도 파키스탄 분할로 더 이상 카슈미르에서 발티스탄까지 트레킹할 수 없게 되었다. 북쪽으로는 인도와 중국의 국경 대부분이 제한되었다.
이제 트레킹의 무대는 네팔로 넘어오게 된다. 프로젝트 히말라야(Project Himalaya)를 운영하고 있는 제이미 맥기네스는 그가 쓴 에베레스트 지역 트레킹 가이드북인 <Trekking in the Everest Region>에서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의 역사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네팔의 첫 트레커는 틸만(H. W. Tilman)이다. 그는 1949년 당시 네팔 왕에게 간청하여 트레킹 허가를 받아 냈다. 그가 트레킹 한 곳은 칼리 간다키, 헬람부 그리고 에베레스트 지역이었다.
그의 개척에 대한 이야기는 등산에 관한 고전의 하나인 <Nepal Himalaya>에 기술되어 있으며 그것은 시애틀 마운티니어즈에 의해 틸만장서인 <Seven Mountain-Travel>의 한 부분으로 재 발행되어 왔다. 또 다른 초기 방문자로는 1950년 프랑스 안나푸르나 원정대의 대장인 모리스 에르조그를 들 수 있다.
네팔의 트리부반 왕은 인도를 방문하는 동안 캘커타에서 클럽을 운영하고 있던 러시아 발레 무용수 보리스 리사니비치를 만났다. 보리스는 트리부반에게 사람들이 네팔을 방문하고 싶어하며 기꺼이 그들의 경험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임을 확신시켰다.
얼마 후 부유한 부인들이 인도의 다코타 항공을 이용하여 파트나에서 카트만두의 고처('목장') 비행장으로 날아 왔다. 보리스는 그들을 그가 새로 세운 로얄 호텔에 묵게 했다. 부인들은 보리스의 매력과 네팔의 이국적인 풍취에 매혹되었다. 이렇게 해서 네팔 관광이 시작되었다. 로얄 호텔과 야크 & 예티 바(bar)는 1950년대부터 로얄 호텔이 문을 닫은 1971년까지 등산가들의 모임장소였다.
로버츠(James OM Roberts) 소령은 트레킹이 관광객들에게 흥미를 끌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었다. '지미' 로버츠는 네팔에서 여러 해 동안 보리스의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틸만과 함께 첫 트레킹을 했다.
그는 1965년 부인 단체를 이끌고 칼리 간다키를 여행했으며 네팔의 첫 트레킹 여행사이자 모험적인 여행 산업의 시작을 암시하는 마운틴 트래블(Mountain Travel)을 세웠다.
외국인으로서 처음 쿰부를 방문한 사람은 틸만, 오스카 휴스턴과 그의 부인, 그리고 찰스 휴스턴 박사와 그의 일행 두 명이었다. 이것이 네팔에서 처음으로 행해진 진정한 트레킹이었다. 그것은 과학적인 조사나 등반보다 훨씬 더 즐거운 일이었다고 한다.
인도 히말라야
히말라야라고 하면 보통 네팔과 파키스탄을 떠올리게 된다. 파키스탄은 히말라야 고봉 베이스캠프를 다녀오는 일정이라 트레킹이라기 보다는 원정대 캐러밴이라고 할 수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부탄과 인도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부탄에도 6천 미터 이상의 고봉이 19개가 있고 유명한 스노맨 트레킹도 있다. 그러나 입국세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쉽게 가지 못한다.
부탄 입국료는 1인당 1일 200달러. 현재 호주에서 2024년 10월 출발하는 스노맨 트레킹을 패키지를 모집하고 있는데 참가비가 27일 일정에 16,990호주달러(=약 1500만 원)다. 그것도 국제선 항공료 불포함이니 웬만한 사람은 가기 힘들 듯하다.
부탄은 그렇다 하더라도 인도는 조금 저평가된 느낌이 있다. 그 이유는 일단 8천 미터급 산이 없다. 1975년 22번째 주로 편입한 시킴 왕국에 있는 세계 3위 캉첸중가를 네팔과 공유하기는 한다. 그러나 시킴에서 캉첸중가 등반을 불허하고 있고 델리에서 시킴까지 접근하는 것도 멀다. 트레킹 인프라도 많이 부족한 편이다.
카슈미르와 쿨루(Kullu) 계곡 지역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트레커와 등산가들을 끌어 모았다. 당시 라다크는 출입 금지 지역이었고 쿨루 계곡과 라하울(Lahaul)을 나누는 피르 판잘(Pir Panjal)은 히말찰에서 트레킹할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러다가 1962년 인도-중국 전쟁으로 인해 라다크, 히마찰프라데시, 우타르프라데시 및 시킴에서 내부선(Inner Line) 제한(파키스탄 및 중국과 민감한 국경 지역에 가까운 제한 구역)이 시행되었다. 난다데비가 있는 우타라칸드에서도 유사한 제한이 적용되었으며 상황이 호전되어 1992년 우타라칸드의 킨나우르(Kinnaur), 스피티(Spiti) 및 조하르 밸리(Johar Valley) 지역이 개방되었다.
인도에 트레킹 코스가 많기는 해도 라다크를 제외하면 네팔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력 있는 코스는 많지 않다.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 난다데비 이스트와 서뱅갈 다르질링의 산닥푸(우리의 다음 일정), 시킴의 고찰라(Gocha La) 트레킹 정도가 대중적이다. 트레킹 피크는 여럿 있지만 일반적인 트레킹은 대부분 일정이 짧고 빙하나 호수로 간다.
결정적으로 롯지가 없어 전 일정 캠핑이 필요하다. 유일하게(?) 산닥푸는 롯지 트레킹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설이 아주 소박하다. 난다데비 트레킹을 마치고 '드디어 텐트생활을 마쳤다!' 하며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20여 년 전 네팔 트레킹 때와 같은 분위기여서 본의 아니게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게 되었다. 전기가 없는 곳도 많으니 와이파이는 언감생심이다. 방은 대부분 다인실이다.
그런 형편이라 델리까지 와서 다시 트레킹 시점까지 가는 것도 힘들고 시설도 열악하니 외국 트레커, 특히 독립 트레커들에 인기가 없다. 그 결과 인도 트레킹은 대부분 내국인 트레커들이 차지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내국인 트레커 수가 그리 많지 않다. 인도는 반대로 대부분 내국인 트레커들이다. 그래서 비싼 롯지를 지어도 내국인 상대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현지인들은 오래전부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길가에 있는 식당겸 숙박이 가능한 '다바'를 이용할 수 있지만 외국인이 이용하기엔 너무 열악한 시설이다.
하지만 현재 성수기에는 너무 많은 트레커들로 인하여 숙소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붐비는 네팔 트레킹에 싫증 난 베테랑 트레커들에게는 마지막 남은 오지로 인도 히말라야가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겠다.
인도 히말라야는 크게 5부분으로 되어 있다. 북서부 잠무 잠무 카슈미르 / 라다크, 그 오른쪽 아래 히말찰프라데시와 우타라칸드,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를 지나 캉첸중가가 있는 서뱅갈의 시킴과 극동부의 아루나찰프라데시가 그것이다. 이 중 대부분의 외국인 트레커들이 찿는 곳은 라다크다. 라다크는 예전에 잠무 카슈미르에 속했는데 2019년 독립된 행정부서로 분리되었다.
라다크
'고개들의 땅'이라고 불리는 라다크는 티베트 극서부와 맞닿아 있어 지리적으로 티베트의 연장선에 있다. 역사적으로도 티베트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라다크 왕국을 세웠다. 라다크 트레킹은 네팔의 어퍼 무스탕이나 돌포 트레킹과 분위기가 비슷하며 규모는 훨씬 크다. 거대한 산 사이로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른 높은 고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코스만 20개가 넘는다.
6천 미터 이상 되는 트레킹 피크도 스톡 캉그리(6152m), 캉 야체(6400m), 멘톡 캉그리(6250m), 참세르 캉그리(6620m) 등 4개가 있다. 그 중 스톡 캉그리는 대중적인 트레킹 피크로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다 해서 나도 2018년에 오른 적이 있다(고생했다).
6천 미터 이상을 오르는 일은 초보자들에게는 아무래도 무리다. 기본적으로 고산 트레킹 경험이 있어야 하도 고소적응과 5천 미터 이상에서 10시간 이상 오를 수 있는 체력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우타라칸드 - 가르왈 히말라야
라다크를 제외하면 우타라칸드(Uttarakand) 주에 트레킹 코스가 가장 많다. 우타라칸드는 북쪽으로는 중국(티베트), 동쪽으로는 네팔과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서쪽 가르왈과 동쪽 쿠마온의 두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인도 내륙 최고봉인 난다데비는 가르왈 히말에서 동쪽 쿠마온 히말에 걸쳐 있다.
인도 현지 에이전시에서 제시한 트레킹 코스를 보면 우타라칸드에 29개의 다양한 트레킹 코스를 제시하고 있다. 5천 미터 이상 고개를 넘는 트레킹도 몇 개 있다.
꽃의 계곡
난다데비 국립공원 서쪽으로 바로 이어진 곳에 꽃의 계곡 국립공원(Valley of Flowers National Park)'이 있다. 꽃의 계곡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히말라야 고산 지대의 계곡이다. 이곳은 산악인들과 식물학자들이 쓴 문헌을 통해 1세기 이상, 힌두 신화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찬사를 받아왔다.
꽃의 계곡의 부드러운 경관, 놀랍도록 아름다운 고산 식물 초원, 접근 용이성이 난다 데비 국립공원 안쪽 분지로 유명한 험준한 산악 야생 지대를 보완해 주고 있다.
강고뜨리 빙하, 고무크
가르왈 히말라야에는 인도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갠지스 강의 발원지 중 하나에 강고뜨리(Gangotri) 빙하가 있다. 길이가 약 30km, 너비가 2~4km로 인도에서 라다크의 시아첸 빙하(76km) 다음으로 긴 빙하다. 빙하 주변에는 쉬블링, 탈라이 사가르, 메루, 바기라티 3봉과 같은 극도로 도전적인 등반 루트로 유명한 여러 봉우리를 포함하는 강고뜨리 그룹의 봉우리가 있다.
강고트리 빙하는 전통적인 힌두교 순례지다. 강고트리 빙하의 발원지는 소의 입을 닮았다고 해서 고무크(Gomukh)로 불리는데 고무크는 강고뜨리에서 바기라티 기슭의 해발 4255m 높이에 있으며 강고뜨리에서 약 18km 위로 올라간다. 그 사이에 타포반 초원이 있다.
독실한 힌두교도들은 강고트리 마을 근처의 얼음 물에서 목욕하는 것을 신성한 의식으로 여기며, 많은 사람들이 고무크로 순례여행을 떠난다. 많은 성자, 현자, 사두, 은둔자, 모험가, 종교인 및 모험가도 그곳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넬랑 밸리
강고뜨리에서 북동쪽으로 30km 올라가면 티베트 국경과 이어지는 넬랑(Nelang) 밸리가 나온다. 이 넬랑 계곡은 오늘 우리가 가는 밀람과 더불어 오래된 인도-티베트 소금무역 루트였다. 그 계곡에서 위로 45km 가면 1944년 5월 17일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일행이 넘은 창초클라 패스(Tsang Chok-la Pass, 5896m)가 있다. 그들은 그 고개를 넘어 티베트로 들어갔다.
하러는 오스트리아의 등반가로 1936년 동계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1938년 스위스 그린델발트의 아이거 북벽을 최초로 등정하였다. 1939년, 하러는 피터 아우프슈나이터(Peter Aufschnaiter)가 이끄는 4인 원정대에 합류하여 파키스탄 낭가 파르밧(8126m)의 디아미르 벽 정찰에 나섰다.
디아미르 벽으로 등반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후 그들은 8월 말 카라치로 내려와 그들을 집으로 데려다 줄 화물선을 기다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그리고 카라치와 아흐메드나가르 수용소를 거쳐 나중에 우타라칸다의 주도 수도인 데라둔에 있는 수용소에 억류된다.
몇 년에 걸쳐 하러와 아우프슈나이터 일행은 탈출을 시도한다. 1944년 5번째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티베트 서부의 카일라스산, 기롱 종을 거쳐 1946년 1월 15일 티베트의 수도인 라싸에 도착했다. 그들은 무려 2000km가 넘는 길을 걸었다.
하러는 티베트의 라사에서 7년간 머무르며 달라이라마와 인연을 맺었고 1950년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그동안의 경험을 쓴 《티베트에서의 7년》을 출간했다.
책을 보면 초반 30페이지가 반복적인 탈출과 체포에 관한 극심한 고생담으로 가득하다. 《티베트에서의 7년》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영화에서는 수용서 탈출과 체포 부분이 많이 생략되었다. 내용도 책과 다른 부분이 많다.
난다데비
난다데비는 캉첸중가에 이어 인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인도 내륙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1808년 다울라기리가 더 높은 것으로 입증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여겨졌다. 캉첸중가 위치한 시킴이 인도 공화국에 편입된 1975년 이전까지는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난다데비는 가르왈 히말라야의 일부로, 우타라칸드의 차몰리(Chamoli)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쪽의 리쉬 강가 계곡과 동쪽의 고리 강가 계곡 사이에 있다. "지복을 주는 여신"을 의미하는 난다데비는 우타라칸드 히말라야의 수호신으로 간주된다.
종교적 중요성과 취약한 생태계 보호를 위해 1983년 난다데비 지성소 주변의 높은 산들은 지역민과 산악인 모두에게 출입이 금지되었다. 난다데비 국립공원 주변은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난다데비는 2개의 봉우리가 동서로 2km 길이의 높은 산마루를 형성하고 있는 산괴로 서봉이 주봉이다. 동봉은 현지에서 수난다데비로 불린다. 두 봉우리는 난다와 수난다 여신을 의미한다. 이 여신들은 고대 산스크리트 문학에서 함께 나오며 쿠마온, 가르왈 및 인도의 다른 곳에서 쌍둥이로 숭배되어 왔다.
인도 히말라야에서 가장 높은 산들이(그들 중 12개의 봉우리는 6,400미터 이상이다) 반지 모양의 장벽을 이루어 둘러싸 보호하고 있는 난다데비의 모습은 인도 신화와 민속에서 히말라야의 딸로서의 신성한 지위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접근이 금지된 링의 내부는 난다데비 지성소로 알려져 있으며 난다데비 국립공원으로 보호되고 있다. 링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난다데비 이스트는 차몰리, 피토라가르 그리고 바게쉬와르 지역에 있다.
난다데비는 세계에서 23번 째로 높은 독립 봉우리 일뿐만 아니라 현지 지형보다 크고 가파른 상승으로 유명한데 다키니 난다데비 빙하의 남서쪽 기슭 위로 약 3,300미터 이상 솟아 있으며 빙하 위로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도 비슷하다. 이것은이 규모에서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피크 중 하나로 K2의 특징과 매우 비슷하다.
동쪽의 파추 빙하와 남동쪽의 난다군티와 라완 빙하가 라완 가드를 적시며 밀람 계곡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쪽 핀다리 빙하는 핀다리 강으로 흘러간다. 다키니 난다데비 빙하가 르완 가드를 분리하는 난다데비 이스트 바로 남쪽은 롱스타프콜(Longstaff Col, 5910m)이며 난다데비 지성소를 보호하는 가장 높은 고개 중 하나다.
난다데비를 둘러싸고 있는 20여 개의 봉우리들. 모두 6천 미터가 넘고 난다데디 두나기리, 수난다데비, 트리술 1봉, 하르데올은 7천 미터급이다. 6천 미터급 중 제일 유명한 봉우리는 창가방(Changabang, 6864m)이다. 창가방은 바로 옆 동쪽 칼란카(6931m)보다 낮지만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오르는 등정으로 난이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창가방은 힌디어로 '빛나는 산'이라는 뜻이다.
밀람빙하 전망대 방문
조하르 계곡의 마지막 마을 밀람에 도착하니 11시 40분. 3시간 20분 동안 넓은 길을 걸었으니 그리 힘들지는 않았지만 햇볕이 뜨거워 땀을 좀 흘렸다. 입구에서 이곳을 지키고 있는 ITBP(인도-티베트 국경경찰)에서 차례로 신원을 확인하고 통과시킨다. 오랜만에 보는 외국인이 반가운지 모두 친절하다.
밀람은 티베트 국경까지 2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밀람은 위에서 말한 넬랑 계곡과 더불어 1962년 인도-중국 전쟁 전까지 인도-티베트 주요 무역 경로였다. 1936년 난다데비를 등정하고 이 계곡으로 내려온 빌 틸만에 의하면 소금 뿐만 아니라 양모 등 엄청난 양의 물품이 거래되었다고 한다.
중국과는 여전히 긴장관계라 부대 규모가 크다. 부대 옆을 지나는데 큰 간판에 쓰여 있는 글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적에게 자비를 배풀지 않을 것이니, 신께서는 자비를 배푸시기 바랍니다."
부대를 지나 밀람 마을 초입에 있는 호텔(?) 주변이 캠프사이트다. 도시락 점심을 먹고 바로 밀람빙하를 보러 나섰다. 버려진 밀람마을 골목을 지나 설렁설렁 고리 강가 상류를 향해 1시간 오르니 해발 3500m라고 쓰여진 빙하 전망대 표지판이 나왔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실제 빙하까지는 3km 더 가야 하지만 굳이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다. 4년 전 그곳을 방문했던 인도 트레커들의 영상을 보면 그저 잿빛 얼음 아래에서 흙탕물이 나오고 있다. 잠시 머물며 다들 기념사진을 요란하게(?) 찍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단체사진은 어쩔 수 없다.
캠프로 돌아오니 오후 2시 40분. 각자 텐트를 치고 부지런한 대원들은 빨래를 한다. 바람이 세게 불어 잘 마를 것 같다. 곧 식당텐트에 준비된 차담시간을 가졌다. 오늘 운행은 17km의 제법 긴 거리였으나 넓은 찻길이라 일찍 마칠 수 있었다. 빙하 전망대 왕복 외에는 별 특징이 없는 길이라 조금 지루했다.
처음 제안된 일정은 오늘 밀람 도착, 내일 밀람빙하 방문 후 다시 밀람, 모레 라스파까지 가는 것이다. 며칠 전 하루를 줄여 내일 라스파로 가는 일정으로 조정했다. 실제로 와보니 원래 일정은 너무 느슨하다. 아마 미리 조정하지 않았더라도 여기에 와서 일정을 조정했을 것같다. ♣
저 다리를 건너 밀람으로 간다. 노란 원은 올라올 때 쉬었던 찻집.
해 뜨기 전이라 춥다.
아침 식사 전 차 한잔 들고 모닥불에 모여 잠시 몸을 녹인다.
간단한 아침식사
캠프사이트에 해가 들어왔다. 출발 준비 중.
8시 20분 밀람을 향하여 출발
햇볕이 뜨거워졌다. 30분 운행에 땀이 나 출발 때 입었던 자켓 탈의.
강 건너 마파 마을. 3일 전 마르톨리 가는 길에 점심을 먹은 곳이다.
무슨 내용인가 구글에게 물어보았다
शहीद स्मारक // इन पुण्यात्माओं की स्मृति में जो २६-१२-६८ को राजकीय सेवा में रत स्वर्गवासी हो गये अस्थाई खण्ड सा०नि०वि० डीडीहाट के स्टाफ द्वारा निर्मित (기념물 // 1968년 12월 26일 공직 중 세상을 떠난 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NIMHRD 직원인 디디하트(Didihat)가 임시 구역을 건립했습니다.)
난다데비가 보이는 파추 계곡. 왼편은 강하르 마을, 오른편은 파추 마을
오전 10시 20분. 다시 멋진 모습의 난다데비를 보다. 이 시간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신기하다.
7천 미터급 두 산이 나나탔다. 오늘의 목적지 밀람이 멀리 보인다.
그러나 아직 갈길이 멀다.
철교를 건너고
작업 중인 굴삭기를 지나
11시 40분 밀람 국경경찰부대 검문소 도착
경찰부대 뿐만 아니라 도로공사 공병부대도 있어 부대가 상당히 크다.
"우리는 적에게 자비를 배풀지 않을 것이니, 신께서는 자비를 배푸시기를...."
그리고 한참 더 걸었다.
힌두 사당
캠프사이트에서 점심 먹고 밀람빙하 탐사를 위해 출발. 이제는 버려진 마을 밀람으로 들어간다.
돌담길 돌아 있는 나렌드라의 고향집 . 나렌드라 부모님은 여름이면 이곳에 와서 사는 모양이다. 작년 6월 이곳을 방문한 팀의 후기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나렌드라는 밀람 마을 출신이었고 그의 부모는 그곳에 살았다. 그는 부모님에게 인사를 했고 그들은 우리를 위해 점심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그는 우리에게 자기 집에 방을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그 방은 우리 9명에게는 너무 작았다. 우리는 더 큰 방을 요청했지만 더 좋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나렌드라의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 외에 근처 들판에 텐트 두 개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 집은 한 방이 계단으로 올라간 전형적인 “쿠마온” 지역 집이었다. 나렌드라는 그의 조상들이 그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 집은 아마도 200년 이상 되었을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뒤 버려진 집이었고, 가이드이기도 한 그의 아버지는 매년 여름 밀람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나 둘 허물어져가는 집들
마을을 지나니 한가한 오솔길
이런 길은 즐겁다.
밀람빙하 전망대(3500m) 도착
난다데비 여신의 북쪽 호위무사인 두 거봉. 밀람빙하의 수원지다.
힌두교도가 아니어서 굳이 3km를 더 걸어 빙하까지 갈 이유는 없다.
4년 전 갔던 팀이 유튜브에 올린 밀람빙하 수원지 모습. 이거 보려고 추가로 2시간 투자 할 생각은 없다.
기념 겸 증명사진을 찍고
다시 하산
밀람 마을에서 마을 주민인 한 사나이를 만났다.
기왕에 만났으니…
오후 2시 40분. 호텔(가운데 건물) 앞 캠프사이트 도착
부지런히 텐트 설치 (선암님 사진)
한가한 오후의 밀람 풍경(선암님 사진)
산이 높으니 일찍 해가 진다. 해가 지면 추워져 모두 패딩자켓을 입는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1962년 인도-중국 전쟁 이전 대규모 마방들은 저 언덕 넘고 골짜기를 지나 큰 고개를 세 개 넘어 티베트를 오갔다. 지금은 경찰초소가 엄중하게 경비를 서고 있다.
▶인도 난다데비 이스트 BC 트레킹 문시야리 에이전시◀
India Nanda Devi East BC Trekking Munsiyari Agency
www.himalyantreks.com (CEO Narendra Kum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