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바나나를 벽에 붙여놓고, 누군가 그것을 먹어치웠는데 그 작품이 1억 원 넘는 가격에 팔렸다면? 요즘 미술은 참으로 난해하고, 과연 이것도 예술인가 싶을 정도로 생소하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유명 작품들이 많고, 게다가 무척 비싸다. 관람자 입장에서 보면 요즘 미술은 ‘날로 먹는’ 것들이 많아 보인다. 도대체 현대미술은 왜 이런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현대미술은 맨 눈의 시각체계와 다른 것들을 보여준다. 근대미술까지는 사물을 캔버스에 최대한 비슷하게 옮겨 놓으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사진 기술이 등장한 이후 예술가들은 시각적 경험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화가처럼 멍청하다’는 표현이 있었다. 그 말은 옳은 표현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대로 옮겨 놓은 화가는 어리석은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마르셀 뒤샹의 말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현대미술(예술)가들의 관심이 크게 줄어든 것이 현대미술을 어렵게 만드는 첫 번 째 이유다.
이와 관련하여 둘째, 추상미술이 등장했다. 추상이란 대상에서 어떤 ‘본질’을 뽑아낸다는 뜻이다. 파울 클레라는 화가는 “추상미술은 가시적인 것을 재현(represent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여준다).”라고 했는데, 이처럼 추상미술가들은 눈앞에 보이는 어떤 형상을 그대로 시각화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추상화가가 산을 그렸다면, 화가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산이나 봉우리가 아니라 산의 특성 내지 속성을 표현하려 노력하고, 심지어 산이라는 대상을 이용해 화가 내면의 세계를 드러내려 시도한다.
셋째, 미(美)뿐만 아니라 추(醜)를 다룬다. 19세기까지의 미술이 표현(representation)하고자 했던 대상은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예컨대, 티치아노가 1538년에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신체 배설물도 신체의 개념에 편입시키고 신체에 대한 금기를 타파하고자 시도한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키키스미스(1945~)가 있는데 그는 똥, 오줌, 땀, 정액, 피, 뼈 등 사람들이 혐오하는 각종 배설물이나 신체의 파편들—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 신체의 또 다른 일부—을 소재로 삼아 세심하고 기분 좋다는 뜻의 캐니(canny)와 반대되는 의미의 언캐니(uncanny)한 감정을 전달하고자 했다.
넷째, 작품 평가의 기준이 달라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3~1506년에 그린 <모나리자>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스푸마토 기법으로 배경을 처리함으로써 주인공을 잘 돋보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스마트폰 카메라로 <모나리자>보다 훨씬 더 멋지게 배경처리를 할 수 있다. 인간이 카메라보다 표현 기술이 떨어진다면, 인간의 능력, 비교우위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아이디어다. 현대미술은 묘사 능력보다 아이디어가 좋은 작품을 더 높게 평가한다. 퍼포먼스 이론가 에리카 피셔-리히테는 좋은 작품의 평가 요소로서 “새로운 현실을 구성하게 하는 변환적 힘”을 강조했다. (참고 :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의 퍼포먼스, <예술가가 여기에 있다>(2010), <리듬 10>(1973), <리듬 0>(1974) 등)
이와 관련하여 다섯째, 개념미술의 경향이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란 시각 자체보다 ‘개념’과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미술(art)이다. 현대미술은 개념미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념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이디어와 발상이다. 개념 형태의 작업을 할 때는 전체를 계획하고 결정하는 일이 먼저고, 이후의 구체적인 제작은 그저 형식적으로 뒤따르는 확인 과정일 뿐이다.”라는 미국의 조각가 솔 르윗의 말처럼 개념미술은 아이디어와 발상이 가장 중요하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격인 마르셀 뒤샹은, 예술가에 의해 사물(오브제)이 ‘선택’되는 것 자체를 예술로 보았다. 1917년 뒤샹의 혁명적 작품인 <샘>은 남성용 소변기를 90도로 회전해 배치하고, 검정 물감으로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한 뒤 참가비만 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뉴욕 앙데팡당전>에 <샘>이라는 제목 하에 가명으로 출품했다. 뒤샹은 전시를 주관하는 협회의 심사위원이었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들은 <샘>을 전시장 한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방치했다. 뒤샹은 “선택은 미감에 의해 지배되지 말아야 하고, 취향을 떠남과 동시에, 시각적인 무관심에 기초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심사위원을 사임했다. (참고 : 뒤샹의 <자전거 바퀴>(1913), <샘>(1917),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사탕>연작, <사랑>, <무제>, 멜 보크너의 <Working drawings>, 온 키와라의 <오늘> 연작, <100년 달력>, 솔 르윗의 <붉은 색 정사각형, 흰색 문자들>, 조셉 코수스의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코미디언>, <L.O.V.E.>, <Him> 등)
마지막으로 여섯째, 현대미술에는 선배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조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현대미술 자체가 ‘이전 세대에 대한 이의 제기’이므로 선배 예술가들의 모티브와 재해석 역시 현대미술의 범주에 포함된다. 예컨대, 앤디워홀(1928~1987)은 현대 소비사회의 이면을 작품으로 구현한 예술가로 유명한데, 샤이먼 후지와라의 <Who's Identity Soup?(Four Options)>는 앤디 워홀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과거에는 미술에 접근하기 위해서 단지 감성을 가진 것으로 충분했다면, 오늘날 미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감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성적인 판단과 지식적인 기초도 중요하다.
벽에 단지 바나나를 붙인 작품으로 유명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트럭운전사인 아버지와 청소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정원사, 영안실 직원, 디자이너, 간호사 등으로 일했으며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갤러리 창문 너머로 작품을 보고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해 유명한 미술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바나나 전시작품인 <코미디언>(2019)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를 또 다른 각도에서 질문한 작품, 즉 “‘인증서’에 기재된 대로 정해진 설치 과정을 거쳐야만 진품이 된다.”는 ‘개념’미술의 한계를 지적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추신) 있는 그대로를 넘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혹은 새로운 관점의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현대미술은 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현대미술이 동시대미술(contemporary art)라고 불리는 이유가,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은 과거가 아닌 바로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현재를 바꿀 수 있는 오브제(예술가에 의해 ‘선택’된 대상)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의식은 금기시되고 오로지 답, 그것도 이전 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답이 강요‘되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현대미술이 싹트고 번성할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다음에는, 시차를 두고, 한국에서 직접 예술을 하는 분들을 한 두 차례 정도 더 모셔 보고자 합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첫댓글 오늘 아침 활짝 핀 벗꽃나무 가지에 검은 운동화 한 짝을 걸어 놓았습니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근사한 장면이 연출되었네요. 오후엔 휘날려 떨어지는 벗꽃 잎을 검은 운동화에 한가득 채웠습니다. 그 또한 근사한 연출이었습니다.
그럼 저녁엔 . . . .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전 현대미술을 하고 있는 예술가 맞겠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
저도 이제 옳고 그름, 맞고 틀리고에 대한 관심은 접고 어떻게 하면 예술적이고 창의적으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멋지게 살고자 합니다(만 얼마나 갈까, 가능은 할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 어떤 사심도 편견도 없이 바라보는 것이 우선 아닐까요.
물론 그 또한 정말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요. 그래도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을 잣대없이 바라보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멋지게 죽~ 가능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네요.
고주백님 ~멋진 삶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