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더불어숲
by nona_me 2019. 8. 16.
책을 읽고 난 후의 독후감이라지만, 이번 글은 이 책에 대한 명상 정도로 남기고 싶다. 머리로 읽기 보다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명상 하나.
故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숲>을 읽다. 표지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무들이 서로 손을 잡고 숲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참 장관이고 압권이다. 그 밑에 보이지 않는 뿌리들까지 서로 얽히고 지탱하면서 숲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숲속에 만들어진 생태계는 햇빛을 받으면 받는 대로, 받지 않으면 받지 않는 대로 꾸려져 나갈 것이다.
거대한 바람이 떠오른다. 저렇게 나무들이 모여 숲을 이루게 되면, 바람들은 저 숲 안에 들어가 한동안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바람 한 결이 나무를 휘감고 돌아가는 것은 순식간이지만, 저렇게 울울창창한 숲에 바람이 들어가면, 길을 잃은 바람이 휘돌았던 곳을 또 돌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공기의 순환이 일어나는, 항구적 숨터가 생겨나고 이어지리라는 상상. 청량함과 시원함이 항시 끊이지 않아 그늘 아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 그 자체로 자족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리라는 상상.
꼭, 실질적 숲이어야겠는가. 나무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연대의 방법으로. 적극적 연대가 어렵더라면 한 번씩이지만 꾸준한 만남으로, 이야기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의미 없는 시간대'에서 촘촘한 수풀들로 의미를 엮어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사람이 상처를 받는 곳도 사람이지만, 또 위로를 얻고 치유를 얻는 곳도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상처받고, 주춤하지만 동시에 또 어루만지고 나아간다. 다만, 호흡이 필요하다. 가쁘지 않고 지치지 않게,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손을 내밀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조급함보다는 한 발자국 늦는 어수룩함으로, 남들보다 먼저 가기보다는 내 옆에 가는 이 허리춤을 살짝 밀어 그이가 덜 피로하게끔 하는 한 뼘의 악력으로, 때로는 다른 이 다리를 쉴 때 함께 멈춰서 아무런 주저 없이 다리를 주물러 줄 수 있는 뻔뻔하고도 대범한 그 거리낌 없음으로.
우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무로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내가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 어찌 비트적거리며 다른 이를 부축해주겠다고 어깨를 대줄 수 있을까.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튼튼한 마음으로, 그리고 단단한 체력으로 하루를 버티고 살아야,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고 또 같은 말이겠지만, 그 사람에게 힘을 얻어볼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제대로 서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지극한 외로움 속에서도 쉽게 쓰러지지 말아야 한다. 눈물을 흘릴 때도 분명 있을지언정, 그 외로움 안에서 곧게 빛나야 한다.
책에 관한 명상 둘.
이 책은 신영복 선생이 1997년 1년동안 중앙일보에 <새로운 세기를 찾아서>라는 기획으로 연재한 글들이다. ‘세계여행’이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 스페인의 우엘바 항구에서부터 중국의 태산을 끝으로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보고 느낀 것들을 편지 형식으로 엮어 놓았다.
편지 형식의 글들에는 어김없이 ‘당신’이 등장한다. 여기서의 당신은 저자가 설정한 가상의 수신인이이자 이 글을 읽는 독자를 말한다. 신영복 선생과 일면식이 없는 독자들 역시, 당신이라는 단어로 하여금 친밀감을 느끼고 편지에 빠져든다.
친밀감은 다정함이다. 신영복 선생의 편지를 읽으며 당신이 보고 느낀 것이 대륙과 대양 너머의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그 순간, 나는 불특정다수 중 하나가 아닌 정확한 나 자신이 된다. 그가 취하는 편지 형식에 빗대자면 그의 글들은 수취인불명의 낱장편지가 아닌 따뜻한 등기우편이 되는 셈이다. 모든 등기우편이 그렇듯, 제대로 편지를 수신했다는 일종의 확인 절차가 필요한데, 그 절차란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당신’으로부터 받은 마음, 그 전달받은 다정함을 내쪽에서 펼쳐보는 것이다. 매 편지가 끝날 때마다 독자인 나는 확인한다. 그로부터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등기우편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확인표들은 나로 하여금 그에게 답장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다. 그에게 보낼 수 있는 우표 역시, 다정함이다.
만일 그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하게 된다면 내 편지에는 어떤 이야기들로 채워질까. 신영복 선생이 그러셨듯이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가능성’을 균형있게 담아낼 수 있을까. 때로는 불균형할지라도 한 가지는 분명하게 담아낼 수는 있을 것 같다. 저 역시 신영복 선생님과 한마음입니다. 라는 문구를. 같은 의견이나, 같은 생각이 아닌 한마음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하고 싶은 수많은 잡다한 주변 이야기들을 잘 단속한 결말이라는 것을, 그 필요 이상의 디테일들 역시 기실 한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아주십사 하는 어린아이의 마음인 것이다.
그래도, 그 ‘한마음’ 이후의 이야기들에 대해 더 쓸 수만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들인지, 그들과 연결되어 있음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도 말씀드리고 싶다. 어쩌면 이 내용이야말로 ‘과거의 무게와 미래의 가능성’의 균형을 맞추는 중심추가 되지 않을까하는 변(辯)을 하면서.
책에 관한 명상 셋.
편지를 많이도 썼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는 이에게,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가 있는 편지가 어떤 내용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그들에게서 받은 답장 편지를 보며 어렴풋이 헤아릴 뿐이다. 혹여 내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리하여 나의 내용이 여하했는지 짐작조차 어렵다 하여도, 그때 보낸 편지가 정말 진심이었지. 하고 굳게 믿는다. 설령, 그 글들이 유치할지라도, 혹은 지금의 나와 빗겨 서 있을지라도, 그때의 하나뿐인 진심은 그때의 그 편지에 오롯이 담겨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쓴 편지들은 결국은 내 손을 떠나버린, 나의 박물관들일 것이다. 내가 들여다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는 내 지난 시절들의 따뜻한 진심들이 고이 모셔서 있을 것이라 생각되니 꼭 서운치만은 않다. 다만 그 순간 내 진심의 대상들에게 오래도록 소중히, 소장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진심의 박물관들이 오래도록, 한 번씩은 열려지길 소망할 뿐이다.
여전히, 나는 늘, 한 번씩 편지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