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합시다. 예레미야 22장 3절
대림절 설교를 준비하면서 올해 일어났던 두 가지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첫째는 쇳물 챌린지로 알려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운동입니다. 10년 전 한 노동자가 용광로에 떨어져 숨진 것을 이 일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2010년 당진의 한 철강공장에서 일하던 김아무개씨가 용광로에 떨어져 돌아가시자 한 누리꾼이 쓴 글인데 그 글에 가수 하림씨가 곡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정의당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발의하면서 이 노래 부르기 챌린지를 시작하면서 이 사건이 온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광염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을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을 만들지도 마라,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그 쇳물 쓰지 말고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 정성으로 다듬어 정문 앞에 세워주게.
가끔 엄마 불러와 내 새끼 얼굴 한 번 만져보자 하게”
실제 그 쇳물을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저 공장 한쪽에 산처럼 부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 청년만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공사장에서 안전장치망이 없어서 공사를 하다가 떨어져 한 인부가 돌아가셨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과중한 택배업무로 택배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도 절망에만 빠져있지 않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법제정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서명을 하고 집회를 하고 이런 사실들을 계속해서 알려내고 재단을 세우고 노동자의 인권 운동을 위해 고군분투 애쓰고 수고하는 수없이 많은 민초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얼마 전에 국회 앞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멸종반란한국>소속 청년 11명이 자신들의 목을 국회 정문 앞 창살에 자물쇠로 묶으면서 항의시위를 했습니다. 위험하니까 경찰들이 쇠톱으로 자르고 전원 연행해 갔습니다. 기후위기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동물들의 모습을 재현한 겁니다. 2050년 탄소중립선언이 아니라 당장 국가가 나서서 기후위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한다는 젊은 청년학도들의 절박한 호소였습니다. 겁 없이 무모해 보이기도 해보이지만 누군가는 고통받는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 그들의 아픔을 대신 표현하고 그들의 고통소리에 맘 다해 경청하고 그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양시의 산황산 싸움도 그렇고 지리산 산악열차 반대 운동도 그렇고 지구생태 위기를 지켜내기 위한 부단한 싸움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단식하고 호소하는 사람들, 그리고 크고 작은 고통에 함께 하면서 살아온 이들의 값진 시간들 안에 우리는 존재합니다. 참으로 고마운 마음들입니다. 모두에게 감사와 응원의 박수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코로나 시절을 보내면서 그리고 확진자들이 확산되면서 심신이 깊이 지쳐있을 여러분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애써온 세월들 시간들을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처한 현실은 더 절박한 어려움으로 내 몰리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파산하는 자영업자들은 한없이 늘어나고 노동자들은 더 열악하고 힘든 노동의 현실로 내몰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은 추방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더 열악한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코로나로 인하여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익부 빈익빈 관계로 치닫고 잇습니다. 관계가 풍성한 이들은 위로받고 격려 받으면서 더 관계가 깊어지고 관계가 열악한 이들은 가진 것도 빼앗겨 이혼과 파탄에 이르게 되는 통증을 경험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는 작은 생명과 희망의 촛불을 켜고 대림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대림절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이 땅의 고통과 가난과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입니다. 사도바울선생님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바울 공동체와 더불어 초대교회 공동체가 함께 합의한 것이 유대공동체를 넘어서 있는 이방인 공동체에게 더 이상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과 추운 시절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했던 공동체가 율법을 제정하면서 그들이 함께 고백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너희가 나그네 되었을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노예로 살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서럽게 통곡하며 울며 밤을 지새던 시절을 기억하면서 우리안의 고통에 침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시스템을 위해 고민했고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공동체가 책임지는 사회 시스템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림절 즈음하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에서는 교회 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면서 4가지를 선언했습니다.
1. 인간의 기본권이 실현되는 세상을 위해 교회가 앞장서겠습니다. 우리는 모든 폭력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인간 존엄과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억압과 차별에 반대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2. 차별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겠습니다. 우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기도합니다. 차별금지법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 정신을 반영한 기본 인권법입니다.
3. 노동자들이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연대하겠습니다. 노동3법이 개정되어 택배노동을 비롯한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이고 살인적인 노동현실은 반드시 개력되어야 합니다. 어떤 노동자도 죽거나 다치지 않으면서 노동의 권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기도하며 연대하겠습니다.
4. 양심의 자유를 위해 교회가 함께 하겠습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인간의 존엄과 평등, 민주와 평화가 완전히 실현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실천 속에 하느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성명문의 선언처럼 이 땅의 소수자들의 고통을 기억해 주십시오. 참담한 노동의 현실에 갇혀있는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여전히 창살에 목이 감기듯 신음하는 이 땅의 자연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차가운 길바닥에서 단식으로 노숙으로 고통 속에서 호소하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런 목소리를 기억해 주십시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 안에 있는 그리고 때때로 내 안에 있는 가난과 소외, 고독과 절망을 기억해 주십시오.
유학시절을 떠올려봅니다. 하루에 12시간씩 밤낮으로 일하면서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고 몸이 점점 더 어려워졌을 때 누군가는 따뜻한 밥을, 누군가는 시장에 찬거리를, 누군가는 호주머니 속에 100불짜리를 쥐어주며, 그 시절의 어려움을 기억하고 돌봐주고 함께 해주셨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흐르는 것이라 그분들을 일일이 다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는 못했지만 누군가의 속 모르는 아픔과 고통을 기억해 주는 손길들이 있었기에 저는 지금을 살아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스럽고 시린 세월을 살아가는 이들의 통증을 기억하는 것은 크게 보면 또 다른 나를 돌보고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톨스토이는 말합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은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타인을 위한 선행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고통과 고난, 가난한 저항의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곳을 기억해야하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빈 들녘의 목자들은 가장 구차하고 빈하고 가난한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유다왕실을 향한 예레미야의 매서운 말씀을 우리 시대로 옮겨옵니다. 내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의 고통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 우리 시대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며 대림절의 초를 밝히는 또 다른 몸짓이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