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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아픔 - 욕망의 교차점에 선 근대문화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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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 아내에게 수모를 당한 뒤 ‘주저앉아 지난 세월을 해부하던’ 자리. 박수근 화백을 모델로 한 박완서의 소설 ‘나목(裸木)’에서 화가 옥희도가 생계를 위해 미군 초상화를 그리던 곳.
서울 중구 충무로1가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건물은 1930년에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모던 보이’와 ‘모던 걸’, 룸펜, 문인, 예술가들이 방황과 훼절, 모멸을 겪은 공간이다. 지금은 거대한 빌딩들에 에워싸여 비교적 만만해 보이는 건물이 됐지만 일제강점기 경성 사람들에게는 충격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혼마치(本町)’로 불렸던 충무로와 명동에 몰려든 일본 상인들은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상업 중심가 종로를 빠르게 무너뜨렸다. 이들이 혼마치의 조선은행(한국은행) 맞은편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백화점 미쓰코시(三越) 경성지점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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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매장이 좌우로 펼쳐지고 그 뒤로 새하얀 대리석 계단이 4층까지 이어졌다. 엘리베이터는 경성을 찾은 시골사람들이 반드시 찾아가 보는 구경거리였다. 모던 걸들은 옥상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저마다 맵시를 뽐냈다. 힘겹게 달구지를 끌고 가는 일꾼 뒤로 높다랗게 버티고 선 백화점 건물의 모습은 흐릿한 흑백사진 속에서 얼핏 초현실적 세계처럼 보인다.
일본은 서양식 백화점을 통해 소비문화에 눈떴다. 1914년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들어선 미쓰코시백화점 본점은 영국 런던의 해러즈, 미국 뉴욕의 워너메이커, 프랑스 파리의 봉마르셰를 모델로 삼은 건물이다.
에밀 졸라의 소설 ‘여자의 행복’ 첫 장면.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시골에서 파리로 올라온 주인공은 봉마르셰 백화점 앞에 서서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이 장면처럼 백화점은 산업화, 도시화, 대량생산, 소비문화를 대변하는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자발적 성취가 부족했던 1930년대 경성의 미쓰코시백화점은 민간 상업자본을 앞세워 일제가 세운 전략적 ‘식민 건축’의 성격이 강했다.
일본은 1910년대 조선에 식민지 경영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6개 은행부터 세웠다. 1920년대에는 경성전기회사(한국전력)를 포함한 10여 개 업무용 건축물을 지었다. 1930년대에는 미쓰코시백화점과 조지야(丁字屋)백화점(미도파) 같은 상업건축물이 들어섰다. 혼마치에 대항해 조선인 박흥식이 자본을 대고 최초의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화신백화점도 이때 세워졌다.
백화점은 역사적 가치를 지닌 품격 있는 건축물로 남기 어렵다. 목적 없는 군중의 배회가 허용되는 세속적 공간 정도로 여겨진다. 1930년 미쓰코시백화점은 한반도의 전통적 공간이 해체되는 과도기의 중심에 있었다. 이 땅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은 전통적으로 하층민의 공간이었다. 500년 고도(古都) 한복판에 갑자기 솟아 오른 미쓰코시백화점을 선조들이 어떻게 느꼈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암울한 모멸감과 문화적 동경이 교차하는 근대도시 건축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광복 후 동화백화점으로 이름이 바뀐 미쓰코시백화점은 6·25전쟁의 포화에도 살아남아 박완서의 첫 작품에 배경 공간으로 등장했다. 조선 상인들의 자존심이었던 화신백화점을 1987년 도심 재개발 과정에서 우리 손으로 헐어 버린 것은 이와 비교해 볼 때 참으로 아쉬운 아이러니다.
김성홍·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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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자. 한눈에 들어오는 도심에서 특히 도드라지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묘와 퇴계로를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건축물 세운상가다. 1968년 완공된 개발시대 서울의 상징. 세운상가는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1km에 이르는 구간에 기다랗게 늘어섰던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다. 종로∼청계천 구간의 현대상가와 세운가동상가, 청계천∼을지로 구간의 청계와 대림상가, 을지로∼마른내길의 삼풍상가와 풍전호텔, 마른내길부터 퇴계로에 걸친 신성과 진양상가로 분할 건설한 것을 통칭 세운상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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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은 단지 안에 초등학교와 파출소 등을 보유한 ‘도시 속 작은 도시’를 계획했다. 3층의 돌출 데크는 보행자 이동로를 자동차와 분리하려 한 장치였다. 하지만 여러 민간 시공업체의 작업이 따로따로 진행되면서 근린생활시설이 누락되고 각 데크가 건물 전체로 연결되지 않아 그의 이상은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로 인해 도심 주거단지의 입지가 약해진 세운상가는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에 힘입어 서울 최대의 종합 가전제품상가로 발돋움했다. 한때 이곳은 3000여 업체에 2만여 명의 고용인구가 꿈틀거렸던 거대한 도시생명체였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 씨는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은 건축물로 세운상가를 꼽았다. ‘탱크도 조립한다’던 우스개에는 복합적 생산 네트워크를 가진 지역경제 생태계였던 세운상가의 당시 위상이 반영됐다. 하지만 1987년 용산전자상가가 만들어진 뒤 세운상가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걸었다.
세운상가의 뼈대는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다. 이곳은 공습 때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종로에서 필동까지 50m 폭으로 길게 비워 뒀던 지역.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섰다. 1966년 부임해 ‘근대화 불도저’를 자처한 고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곳을 재개발해 도시의 새로운 상징으로 만들려 했다. 시장의 개발 의지와 건축가의 이상이 만나 무허가 판자촌을 헐어내고 세운상가라는 거대 건축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2008년 12월 17일 세운상가 앞에서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사업의 1단계 착공식이 열렸다. 40여 년의 역사가 쌓였던 건물의 종로 쪽 일부가 올해 5월 우선 철거됐다. 세운상가는 2015년까지 완전 철거될 예정이다.
● ‘개발시대의 상징’ 역사 속으로
80년대 전자메카로 전성기
용산상가 조성 뒤 몰락의 길로
녹지축 사업에 2015년 완전철거
![]()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사업으로 올해 5월 철거된 세운상가 종로 측 건물 터는 주춧돌 흔적만 남아 있는 잔디밭이 됐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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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재개발을 마친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하이라인(Highline)’ 화물고가철도의 모습은 서울과 대조적이다. 이곳은 못쓰게 된 철도 위에 공원 등 보행자 편의시설을 꾸며 화제가 되고 있다. 청계고가도로를 보행자 전용의 하늘공원으로 만들어 청계천과 함께 즐기게 했다면 녹색도시 서울의 새로운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세운상가의 흔적도 현재의 서울 시민이 필요로 하는 생태공간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전면 철거한 뒤 백지 상태에서 도시의 역사를 새로 쓰는 방식에서 이제는 조금씩 벗어날 필요가 있다.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 조성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세운상가가 지닌 근대 서울의 역사적 가치를 반드시 송두리째 뽑아 버려야만 할까. 그렇게 애써 조성한 녹지축 주변으로 남산의 경관을 가리게 될 초고층 건물군을 조성한다면 세운상가 철거는 더욱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서울은 기억과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 거대 도시다. 시간의 자취를 지우고 매번 다시 쓰는 도시는 자신만의 색깔과 향기를 갖지 못한다. 도시의 정체성은 그 도시가 어떤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철거를 앞둔 세운상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이유는 그 때문이다. 낡고 오래된 도시의 역사성을 새롭게 살려 내는 ‘공간적 관용’을 가져볼 때가 됐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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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여의도공원은 여의도광장이 있던 곳이다. 그 이전에는 5·16광장이라 했다. 이곳이 광복 이후 한국 사회에서 번듯한 이름을 내걸고 등장한 첫 광장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무려 4만 m²에 이르는 땅을 아스팔트로 덮었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이 처음 마주한 현대적 광장의 모습은 그랬다. 좁은 골목 막힌 시야만 경험하던 나는 그 평평하고 광활한 아스팔트가 정말 신기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린 공간을 소망했던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발표된 해는 1960년이다. 5·16광장은 1971년에 만들어졌다. 공사 기간은 7개월. 아스팔트라는 재료는 당시에는 근대를 상징하는 첨단 소재였다. 그늘 하나 없는 이 순수 아스팔트 공간은 어떤 숭고함마저 느끼게 만드는 낯선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한가운데 서 있기보다 최인훈의 소설처럼 어쩐지 ‘밀실(방)로 숨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어마어마한 행사들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전도 대회를 열었을 때는 100만 명에 이르는 인파가 운집했다고 한다. 각종 궐기대회가 열렸으며, 국군의 날에는 군인 사열과 함께 수만 명 인파가 태극기를 흔드는 장관이 펼쳐졌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국풍81’이라는 거대 문화행사다. 이용이라는 가수가 국풍81 대학가요제에 바람처럼 등장해 ‘바람이려오’를 불러 대상을 받았다. 1983년 이산가족 찾기 행사는 78%라는 놀라운 시청률을 올리며 이 땅을 눈물바다로 만들고 분단의 아픔을 전 세계에 알렸다. 생각해 보면 이 광장은 거대한 집단문화를 경직되게 조성하는 장소인 동시에 억압된 집단무의식을 분출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이곳은 ‘일상의 생활공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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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초빙교수가 쓴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 여의도와 이 광장의 태생이 잘 나와 있다. 여의도 개발계획은 1968년 5개월 만의 7.5km 윤중제 완공으로 야심 차게 시작됐다. 건축가 김수근 씨와 도시계획가 박병주 씨도 참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양택식 서울시장을 불러 ‘여의도 지도를 가져오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붉은 색연필로 직사각형을 그리면서 ‘아스팔트 광장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5·16광장은 이렇게 탄생했다고 한다. 뒤에 알려진 대로 전시(戰時) 비상 활주로로 계획됐던 것이다. 1968년에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 사건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발견된 여의도 지하벙커는 전시의 대통령 피신용이 아니었겠느냐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여의도는 국회의사당을 정점으로 한 동서 축을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5·16광장이 남북 방향으로 조성돼 여의도를 두 조각으로 단절하고 기존의 개발 흐름을 어긋나게 만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국회의사당은 섬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모양새가 됐고, 여의도는 서울의 구심이 아닌 한강을 건너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장소처럼 돼버렸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여의도광장 아스팔트는 여의도공원의 녹지로 바뀌었다. 이 거대한 공원을 조성하는 공사도 1년 남짓한 시간밖에 안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를 모델로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이곳은 센트럴파크와 같은 상징성과 기능을 갖추지 못했다. 도시 사람들의 생활과 격리된 채 외따로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 공원에는 녹지만 있고 생활이 없다. 한강 둔치는 수십 번 가봤어도 여의도공원은 가보지 못했다는 이가 적잖다. 어린 시절 아스팔트 위에서 자전거를 타고 노닐던 광장의 기억은 있는데 공원이 조성된 뒤의 기억은 희미하다. 2002년 월드컵 때는 예전의 광장이 그립기도 했다. 아마 서울 시민 대부분을 그 광장에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서 광장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 듯하다. 여의도공원은 좋았건 싫었건 그 광장에서 벌어졌던 근대의 기억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공원으로서의 상징성과 역할이 미미해 그저 ‘망각의 기능’만을 제공한 것 같다.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목적의식보다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는 의지가 앞섰던 것은 아닐까. 도시는 생활을 담아내고 시간을 기억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도시는 그 자체로 시민 모두가 공유하는 삶의 교과서이자 소통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김광수·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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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비의 사회’에 살고 있다. 거리에 나서면 수많은 소비적 이미지를 공유하는 인파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다. 현대 도시 공간을 구성하는 그 행렬의 활동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이 ‘쇼핑’이다.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는 “쇼핑은 마지막으로 남겨질 공공 행위의 형식이며 그 거대한 중독성으로 인해 도시의 다른 모든 공간 프로그램을 잠식하고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바이러스 같은 프로그램”이라고 말했다. 현대 도시 공간이 복잡해질수록 ‘쇼핑 프로그램’의 구조는 크고 강해진다. 2000년 5월 개장한 코엑스몰은 도시의 구조를 바꿀 정도로 큰 규모의 쇼핑 공간을 만들어 낸 국내 첫 사례다. 전철역, 무역센터, 아셈타워, 호텔, 백화점, 공항터미널을 연결해 거대한 지하공간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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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몰이 위치한 삼성동의 이름은 봉은사, 무동도, 닥점의 세 마을을 합쳐 ‘삼성리’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1960년대까지 이곳은 갈대밭 무성한 수도권 농촌이었다. 그랬던 곳이 정책적으로 조금씩 개발되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한국종합무역센터 개발계획으로 정점을 맞았다. 1990년대 후반의 벤처 붐, 테헤란로 금융기관 및 정보통신업체 발전과 맞물려 이곳은 다양한 성격의 소비자를 포용하는 대단위 쇼핑공간으로 발전했다.
코엑스몰의 생장(生長) 분기점은 2000년의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아셈) 서울 개최였다. 세계적 행사를 계기로 국가브랜드 이미지를 신흥공업국에서 첨단기술국으로 바꾸기 위해 기업 자본과 정부 권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구현됐다. 본관과 신관을 더한 넓이는 여의도공원의 절반, 잠실종합운동장의 14배에 이른다.
도시를 이루는 요소는 단순하지 않다. 복잡한 프로그램의 연속적 결합으로 공간이 구성된다. 코엑스몰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집적된 대도시 서울의 속성을 축약판으로 한눈에 보여준다. 갖가지 식음료시설이 설치된 성큰(sunken·지하) 공원, 영화관, 수족관, 의류상가 등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상점의 행렬은 ‘쇼핑의 무력(武力)’을 느끼게 한다.
코엑스몰은 대자본이 투입된 소비공간이지만 불특정 다수에게 평등하게 개방된 공간으로서 도심 광장과 비슷한 역할도 수행한다. 복합적인 엔터테인먼트 쇼핑공간이자 보행자 통행로를 중심으로 다채로운 쉴 거리와 이벤트를 제공하는 문화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 방문한 사람은 이곳이 하나의 거대한 미로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미로의 느낌은 공간의 신비감을 더하고 이를 통해 더 큰 소비욕구를 이끌어낸다. 특히 젊은층의 ‘소비적 배회’를 유도하고 그것을 습관적으로 즐기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여기가 단어의 뜻처럼 실제로 길을 잃게 만드는 미로는 아니다. 코엑스몰은 공간의 방향성을 유지하기 위해 통로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지루한 느낌을 덜어냈다. 이름에 따라 각각 인테리어를 달리해 보행자가 시각적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독일 출신 공간연출마케팅 전문가 크리스티안 미쿤다가 이야기한 ‘제3의 공간’ 사례를 보여주는 특징이다. 상업적 공간이 소비를 유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의 상업적 공간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소비와 판매가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의 장소가 되는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소비재처럼 작용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상품 소비의 본질은 사용가치의 획득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 안락, 성공, 풍요, 권위 등 사회문화적 가치를 획득하는 데 있다”며 “사람들은 상품을 구입하고 사용하면서 사회적 권위와 삶의 여유를 얻고 문화적 욕구를 해소한다”고 했다. 한국의 코엑스몰도 극단적 소비공간으로서의 기능성을 뛰어넘어 더욱 생산적인 문화적 코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도심 속 오아시스로의 변신을 모색할 때가 됐다.
장윤규 국민대 교수·운생동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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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중심’이 희미한 도시다. 아니, 중심은 많다. 골짜기마다, 그럴듯한 해변마다 중심이 있다. 다원적 민주주의를 닮은 도시. 바다는 모든 분열의 엔트로피를 매일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부산에 내려진 축복이다. 이 바다를 육지로 잇는 관문인 부산역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개통과 함께 시작됐다. 세월이 흘렀다. 17시간 넘게 걸리던 서울행 철길의 여정은 5시간대에서 3시간대로 줄었고 머지않아 2시간대가 된다. 남인수가 1950년대 ‘이별의 부산정거장’에서 노래했던 ‘피란살이 설움’이나 ‘이별에 슬피 우는 경상도 사투리 아가씨’의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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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기억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기억을 만든다. 그런 기억이 어떤 특정한 공간에 쌓여갈 때 ‘특별한 장소’가 하나둘 만들어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부산역은 수많은 문물과 사람을 경험했다. 연락선 부두까지 이어져 있던 철로는 한반도를 근대의 세계와 만나게 하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부산역은 지금의 부산역과는 다른 위치에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옛 부산역은 일본 도쿄 신역사보다 4년 앞선 1910년에 문을 열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외벽을 감싼 르네상스 양식의 이 두 건물은 모두 일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설계했다. 오늘날의 중구 중앙동4가 부산무역회관 근처에 세워졌던 옛 역사(驛舍)의 상층부는 호텔로 쓰였다. 하지만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가 발표된 해인 1953년 역전 동네에 난 대화재로 옛 부산역은 40년 넘는 세월의 기억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우편국과 세관 등 많은 근대 건축물이 이때 함께 폐허로 변했다.
이후 부산역은 임시역과 부산진역을 전전하다가 1969년 지금의 동구 초량동에 새 자리를 잡았다. 새로운 세대의 기억이 쌓이기 시작했다. 건물을 나서면 산비탈을 빼곡히 채운 집들이 마주 보였고, 드넓은 경사로를 따라 분수가 치솟는 광장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 부산 시내에서 보기 드문 여유로운 광장 위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 역사는 반대편의 바다를 잊어버린 건물이다. 철로를 사이에 두고, 도시와 바다는 교감을 잃었다.
고속철도 개통에 맞춰 2004년 부산역이 증개축됐다. 그나마 쌓였던 기억을 털고 다시 시작해야 했다. 어설픈 느낌의 역사 공간을 나설라치면 에스컬레이터가 눈앞을 막는다. 분수대는 놀이공원처럼 바뀔 모양이다. 부박하기 짝이 없다. 기차를 타고 내리는 기능만 남겨진 공간. 부산역은 기억이 자꾸 단절되면서 어지럽게 유전(流轉)하고 있는 공간이다.
최근 이 유전하는 풍경 속으로 북항 재개발이라는 거대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도시와 유리된 계획의 한계가 곳곳에 보인다. 개발 주체에는 부산시도, 철도공사도 보이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만을 허락할 듯한 커다란 소용돌이 속에 그 공간의 기억이 얼마나 남겨질지 의문이다. 새로운 시각에서의 논의와 검토가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최후의 부산역’을 한 번 더 계획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부산역은 이 땅의 종착역이다. 유럽 대도시의 많은 기차역처럼 열차가 역사를 관통하지 않기 때문에 지하도나 육교를 이용하지 않고도 모든 열차를 타고 내릴 수 있다. 따라서 역 광장이 바다를 향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도시가 성큼 바다를 만나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종착점 이후의 선로는 모두 필요 없어진다. 선로를 지하로 집어넣는 것과는 전혀 다른, 커다란 기회를 도시 전체에 제공할 수 있다. 이렇게 꾸며진 부산 종착역에서는 산과 바다를 매개하는 ‘부산다운 기억’이 쌓여갈 것이다.
기억만이 도시의 ‘특별한 장소’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본, 권력,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 등 여러 갈래의 욕망이 함께 작용한다. 욕망은 변화를 충동하고, 기억은 변화를 억제한다. 변화는 도시의 자연스러운 본질적 속성이다. 그러나 한국의 도시에서는 기억보다 훨씬 더 큰 욕망이 넘쳐흘러 변화를 조절할 틈이 부족했다.
그런 조절되지 않은 기운이 지금의 부산역 주변에 가득하다. 변화를 조절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부산역이 가진 오랜 기억들 속에서 찾아내 보자.
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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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도시에 역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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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교회나 시청처럼 도시를 상징하는 시설이다. 특히 한 나라의 수도에 만들어진 역사는 전국 각지로부터 모여드는 철도의 종착역이었기 때문에 수도의 ‘문(門)’이 될 수 있을 만한 장소에 자리 잡았다.》
유리로 치장한 새 驛舍 사람을 밖으로 내모는 듯
먼 곳 이어주는 철도처럼 단절된 도시 이어주길…
역사는 도시 안에 속하는 동시에 도시 바깥으로 확장을 시작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도시의 내부가 되는 한편 외부도 된다. 서울역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시작하는 얼굴이자 ‘문’이다.
![]() 옛 서울역사의 1960년대 모습. 1925년 준공돼 2003년 11월까지 사용됐다. 사진 제공 코레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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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부에서도 서울의 고유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훤하고 깨끗하지만, 그것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일 뿐이다.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쇼핑센터와 백화점 건물도 역사의 역할과 어울리지 않게 주변 공간을 장악하려는 듯 거북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상업용 건물은 역 안팎에서 사람들이 벌이는 다양한 행위의 드라마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런 까닭인지, 당연히 서울의 얼굴이 돼야 할 서울역사는 서울시가 2000년과 2007년 두 차례 같은 제목으로 발간한 ‘서울: 도시와 건축’이라는 책에 모두 빠져 있다.
철도는 문자 그대로 ‘철(鐵)의 길(道)’이다.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은 “철도역은 건물이기 전에 길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철도역은 교통 흐름은 물론 그 시설을 이용하거나 그 앞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길’로 설계돼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역이 그러하듯 서울역은 복잡하게 얽힌 길 위에 서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서울역사는 그렇게 얽힌 흐름을 하나의 잘 정리된 복합체로 만들지 못했다. 새 서울역사는 오히려 그곳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역은 원래 기다림의 목적으로 소비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도시 안에 존재하는 역사는 ‘역을 이용하는 승객이 아닌 사람들’을 전제로 계획할수록 좋다. 그러나 지금의 서울역에는 이런 운치나 여유가 없다.
사람들이 신속하게 타고 내려서 건물을 빠져나가도록 역사 건물을 계획한 것은 얼핏 합리적인 듯 보인다. 하지만 서울역은 결국 사람들을 거절하고 관리하는 단조로운 공간이 됐을 뿐이다. 역 앞 광장도 기차를 내리고 나와서 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만드는, 자동차 우선의 공간이다.
철도는 먼 곳을 빠르게 이어준다. 하지만 철도는 또한 그것이 지나는 좌우 공간을 단절시켜 지역의 균형 발전을 저해하기도 한다. 지금의 서울역사는 그렇게 생겨난 동서 간의 오랜 단절을 해소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는 철도로 분단된 도시 공간을 복합적 프로그램을 갖춘 대형 상업 건물을 통해 연결하려 하고 있다. 역사 건물은 철도로 나뉜 두 지역을 이어주고 활기를 되찾게 하는 ‘도시 커넥터’로 부각되고 있다.
서울시는 옛 서울역사의 북쪽 공간을 국제컨벤션센터와 복합문화공간을 갖춘 국제교류단지로 개발할 예정이다. 경부고속철도 2단계 건설이 마무리되고 인천국제공항철도가 서울역까지 이어질 2011년을 전후해 서울역을 국제도시 서울의 관문으로 부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서울역이 지금과 같은 여러 건물의 단순 집합에서 벗어나 분단된 도시를 연결하는 커넥터로서 다양한 기능을 한데 모은 진정한 ‘도시의 얼굴’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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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건물들은 타지에서 온 관광객이 찾는 곳이지 서울 사는 사람들의 삶을 아우르는 구심점은 아니다.
급하게 성장한 거대 도시 서울의 랜드마크는 다양한 문화 활동을 촉발하는 ‘방아쇠’ 같은 건축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덤덤한 외양이어서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 종로구 혜화동성당은 이런 가치를 품고 있는 건물이다.》
“비울수록 채워지나니…” 聖所의 말없는 가르침
‘지친 삶’ 품에 안으려는 듯
내부는 기둥 없애
외부엔 육중한 화강석 부조
모던함과 수수함 조화
매주 일요일 정오 무렵. 혜화동성당에서 동성중고등학교 앞을 지나 대학로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서는 이색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필리핀 출신 신부가 집전하는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몰려든 이 나라 노동자들과, 이들에게 음식이나 일용품을 팔러 온 노점상들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들을 위해 일요일에 문을 여는 길 건너편 은행은 고향에 돈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가득해 발 디딜 틈도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에서 온 사람들의 주말 시간을 풍성하게 채우는 삶의 공간이 서울 도심 한복판에 형성되는 것이다.
혜화동은 필리핀 출신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다. 이곳은 이국땅에서 자신들의 연대를 확인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시적 이방 공간’이다. 그 공간 프로그램의 자생을 이끌어낸 구심점이 바로 혜화동성당이다.
본당 건물은 건축가 이희태(1925∼1981)가 설계해 1960년 완공했다. 기둥이 없는 장방형의 내부 공간, 볼트(반원형의 지지 구조물) 없는 평천장, 간결한 제단의 모습은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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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보면 교회인지 알아채기 쉽지 않을 정도로 입면 디자인이 모던하다. 조각가 김세중이 만든 육중한 사각형의 화강석 부조가 시선을 압도한다. 한국 가톨릭교회 건축을 폭넓게 연구한 김정신 단국대 건축학과 교수는 “혜화동성당 건축의 혁신성은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천명한 ‘내적 쇄신과 현대화’ 정신에 부합한다”고 했다.
이희태는 같은 시기에 활동한 김수근과 김중업에 가려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한 건축가다. 절두산성당(1967) 국립극장(1972) 공주박물관(1973) 등 그의 작품은 ‘한국 전통 건축 요소의 현대화를 시도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디테일에 편중했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그의 초기작인 혜화동성당에는 관습적인 양식을 탈피한 과감성이 돋보인다. 가톨릭교회는 대개 고전적 형태를 따른 공간 디자인을 선호하는데, 아마도 당시 혜화동성당 성직자들은 대단히 혁신적인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형태미를 넘어서는 이 건축물의 커다란 힘은 이방의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형성한 공간 프로그램에 있다. 일요일 오후 열리는 종교 의식은 흩어져서 생활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불러 모아 서울이라는 도시에 독특한 거리 풍경을 더했다. 불과 반나절 동안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것은 틀림없이 도시 문화의 한 갈래 신선한 파생물이다.
국내 거주 외국인이 인구의 2%인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단일 민족 문화의 성격이 강하다. 혜화동성당이 일요일마다 만들어내는 ‘필리핀 장터’는 다문화 정책이 나아갈 색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건축물 하나로 발생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활동이 거리와 도시 전체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건축의 본질은 외양에서 드러나는 물질적 형태가 아니라 잘 비워낸 공간에 채워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가는 사용자의 삶을 조율하는 ‘공간의 안무가(按舞家)’다. 49년 전 이희태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이 훗날 이런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으리라고 상상했을지 궁금하다.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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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은 1982년 재미 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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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경쟁 제안을 받고 급히 귀국한 김태수는 친구의 사무실 한쪽을 빌려 밤낮없이 혼자 모든 드로잉 작업을 했고, 결국 당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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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 직전 대지에 가서 느낀 그의 감상과 스케치가 이 건축물의 시작이자 종점이었다고 본다. 그것은 청계산 자락에 위치한 대지의 풍광과 산세였다. 미국에서 오래 머문 그에게 한국의 자연 풍경은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너무 익숙하다 보면 가까이 있는 소중한 가치를 잊는 법이다. 익숙한 아름다움을 세련되게 잡아낸 김태수의 설계는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강석 외장 마감도 참신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져 이 건물 완공 이후 전국적으로 화강석 외장재가 유행했다.
산세와 부응하기 위해 건축물의 드러남은 최소화했다. 방문객은 건물에 다가가면서 능선의 흐름에 따라 외부 공간이 순차적인 변화를 보이며 전개되는 것을 경험한다. 3만4000m²에 이르는 방대한 연면적을 생각하면 정말 훌륭한 성취다. 김태수는 이런 공간 구성을 위해 ‘단(段)’을 만들었다. 그는 “경북 영주 부석사가 산세를 다루는 좋은 가르침이 됐다”고 했다. 부석사 일주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는 산세와 더불어 대지의 단이 높아질 때마다 새로운 풍광과 건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구성이 설계의 주요 모티브가 됐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부석사처럼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하며 감상해야 제맛이 난다.
건축 설계는 공간의 ‘영역’을 설정하고 다른 영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개념이 현대의 건축에서는 거의 상실됐다. 우리는 늘 ‘건물’만을 쌓아올리기에 급급하다. 원래 건물은 공간의 영역을 구성하는 여러 관계 요소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대상과 배경의 구분이 모호한 동양화를 볼 때 ‘관계’를 찾아내야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육중한 건물 자체’의 시각적 존재감에 몰두하는 요즘의 사고방식과는 상반되는 세계관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건축물의 존재를 최소화하고 산세와 부응하며 외부 공간의 전개를 서서히 드러냈다. 하지만 건축물과 외부 공간이 만나는 방식에서는 육중함과 무뚝뚝함을 버리지 못해 약간 어색해 보인다. 김태수는 미술관 건물에 대한 아이디어를 수원 화성(華城)에서 얻었다고 했다. 미술관 시설이라는 성격상, 사찰 건물처럼 벽을 열어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간의 진입 과정은 부석사에서, 건물은 수원성에서 착상했다. 지나치게 ‘한국적’이려 의식한 게 아니었을까.
사찰은 세속과 등진 곳이다. 반대로 성(城)은 그 안의 궁(宮) 때문에 폐쇄성을 전제로 하는, 선택된 자만이 출입 가능한 속세의 권위적 영역이다. 둘의 어울림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대지와 잘 어울리고 방문객에게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 준다. 하지만 현대성을 표방하는 미술관을 도대체 왜 산 속에 외따로 뒀을까. 방문할 때마다 놀이동산 좁은 뒤안길과 동물원을 지나 굽이굽이 한참을 넘어가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미술관이 동물원이나 놀이동산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언제나 그 여정은 ‘길 아닌 길’을 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심산유곡 유배지의 선비를 만나러 가는 듯해 마음이 혼란스러워진다. 이곳은 현대 미술의 유배지인가. 또는 박제가 된 현대 미술의 동물원인가. 그것도 아니면 어린이 단체 관람객이 방문객의 주를 이루는 현대 미술의 놀이동산인가.
도시의 일상과 격리된 공간에서 현대 예술을 얘기하기 어렵다. 현대 예술은 도시의 일상으로부터 배태(胚胎)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나 관람자는 사찰의 구도자나 성채 안의 귀족이 아니다.
서울 옛 국군기무사령부 자리에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생긴다고 한다. 이곳의 미술관은 어떻게 될까. 자칫 속세 한복판의 고립된 성지(聖地) 또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권위의 중심지가 되지는 않을까. 나는 새 미술관이 ‘일상을 품으며 일상을 혁신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예술 장르의 구태의연한 구분, 또는 딱딱한 전시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 같은 건물이 좋은 모범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 광 수 이화여대 건축학과 교수
한강변 개발, 강남 시대를 열다 《아파트는 1960년대 이후 경제성장에 힘입어 새롭게 쓰인 ‘서울 공간 역사’의 주인공이다. 현재 서울 전체 주택의 약 55%가 아파트이고, 새로 짓고 있는 주택의 80% 정도가 아파트다. 현대 서울의 역사는 아파트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파트 건설의 역사는 곧 한강 개발의 역사다. 인구가 집중되면서 주거시설이 늘고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강남’이라고 불리는 영동지구를 중심으로 도시 성장과 변화의 물결이 한강변을 따라 퍼져나갔다. 아파트는 고도의 경제성장과 공간 팽창을 널리 알리는 상징으로 작용했다.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고층 아파트는 성장의 흔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한강 공유수면 매립… 고급아파트의 대명사 자리매김 80년대 후반 로데오거리, 젊은층 소비 욕망의 해방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나 고급스러운 시설을 도입한 건물이 아니다. 이곳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아파트 단지로 자리 잡은 것은 1978년 7월의 특혜분양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건설사는 ‘50가구 이상의 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는 공개 분양해야 한다’는 주택건설촉진법을 무시하고 건설한 아파트의 상당수를 정부 관리, 국회의원, 대학교수 등 고위급 인사들에게 주변 집값의 50% 수준으로 특혜 분양했다. 분양과 동시에 약 5000만 원의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분양가는 3.3m²당 44만 원. 5000만 원은 당시 현대아파트 115m² 1채의 분양가에 해당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이 사건은 오히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고급 아파트’의 대명사처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160m² 이상의 대형 아파트를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 이 아파트 이후 건설회사의 이름을 따른 아파트 이름이 유행처럼 늘어났다. 1980년대 후반에는 현대아파트를 중심으로 압구정동 고소득층 주거지에 커다란 문화적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해외로 조기유학을 떠났던 ‘압구정 키드’와 함께 미국 교포 2세들이 모여들면서 이곳은 젊은이들이 소비적 욕망을 분출하는 해방구가 됐다. 명품 거리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로데오 거리가 형성되고 ‘오렌지족’이라는 신세대가 등장했다. 세월이 흘렀다. 명품 거리는 청담동으로 쏠려 갔고, 압구정동 한편을 메웠던 학원가는 대치동으로 이동했다. 비워진 거리에는 줄이어 세워진 성형외과들이 여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 사회 일상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이 지역의 변화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1976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지 못했던 시기에 지어져 고소득층 아파트의 상징이 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국내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 가운데 하나다. 서울시의 한강변 정비 계획과 강변 아파트 촉진 계획에 따라 재건축 논의가 한창인 이곳은 앞으로 어떤 변화를 맞을까. 그 향방에 따라 한강변의 풍경 전체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재건축을 통해 더 크고 높은 콘크리트 장벽을 한강변에 쌓아 올리려는 욕망이 도시 곳곳에 꿈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한강은 서울시민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공공 자산으로 남아야 한다. 한강변 아파트 재건축의 핵심은 민간 영역의 사업에 도시 공간의 공공성에 대한 책임감을 얼마나, 어떻게 지우느냐에 달려 있다. 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