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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신학도 2009 학년초 신앙수련회, 2009년 3월11-13, 광림기도원]
주제: 소명의식과 공동체 영성
강사: 김경재 (명예교수/ 삭개오작은교회 전도목사)
[1] ‘소명의식’을 왜 다시 굳이 문제삼는가?
1. 기독교교육학이나, 신학이나 넓은 의미에서 ‘신학’이라는 학문에 발을 들여놓고, 복음을 위하여 일하려는 뜻을 가진 학도들에게 ‘소명의식’을 다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에 의하면 “모든 직업이 크리스챤에게는 소명받은 천직(Calling)”인데, 왜 굳이 ‘소명의식’을 강조하려 하는가? 신학도들로 하여금 특별한 소명을 받았다는 허위의식을 갖게하거나, 첨부터 목사직업에 종사하도록 강박함으로써 도리혀 인문학적 깊은 기초공부를 결여하게 만드는 부작용은 없는가? 목사 되려는 확실한 결단없이 청산학원에 들어가 3년동안 공부한 김재준은 진솔한 ‘성직자’로서 삶을 살았고, 교사양성하는 동경사범학교에 입학했던 것을 평생 후회하던 함석헌은 도리혀 20세기 한국사회에서 탁월한 ‘교사’가 되지 않았던가?
2. ‘소명의식’은 지금 당장 뜨겁게 충만하거나 확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겉으로 확인되는 일거리가 아니다. 신학교육 경험에 의하면, 학부 1학년 때부터 “저 학생은 확실한 목사감이야!”라고 본인과 주위사람이 확신하던 사람이 중도탈락을 하기도 하고, 본인자신이나 입학면담하던 교수단이 의심할만큼 소명의식에서 모호성을 보였던 학생이 묵묵히 성실하게 목회자의 길을 평생 걸어가는 모습도 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소명’은 ‘공개된 비밀’이어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고, 누구도 “난 지금 뜨거운 소명의식이 없는데...”라고 낙망 할 필요도 없다.
3. 그러나, 지내놓고 보면 “오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그 일을 내 일생의 본직으로삼고, 오직 할만한 일이란 그일 뿐이라고 확신하면서, “복음을 위하여” 모든 다른일을 뒤로 제쳐두고 전적으로, 궁극적 관심으로서 , 그 일을 기쁘게 살아가려는 사람에게 ‘소명’은 필수적이다. 소명(召命)은 내가 택한 길이 아니라, 부름받은 것을 의미하고, 택함받은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혁신했던 칼 바르트의 신학은 그의 『로마서강해』 제1장 제1절에 대한 뜨거운 체험고백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1:1)
4. 바울의 위 고백이 명실상부한 나의 고백이 되는 놀라운 사건, 그 고백적 사건을 일컬어 ‘소명’(召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고백이 없이 목사가 될 수도 없고, 절대로 되어서도 않된다. 위의 소명없이는 신학이라는 놀라운 학문을 기쁨과 긍지와 비밀스런 암호를 공유하는 자로서 끝까지 걸어갈 수 없고, 걸어가서도 아니된다. 그리스도교회에서 ‘소명’없이 일하는 것은 ‘세습무당’이 굿을 해주고 호구지책을 일삼는 것처럼, 가장 비참하고 구차한 직업을 갖는 행위이다.
5. 경험에 의하면, 일단 모든 신학도의 신학입문 자체는 ‘예비소명’을 받은 결과라고 본다. 소명과 섭리없이는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강권으로써, 니느웨로 가라는 명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하는 요나를, 선체바닥에서 찾아내고 고래 배속에 쳐넣었다가, 기어이 그가 받은 사명을 수행토록 만들 수 있는 강권적인 전능자이지만, 또한 설득하고 권고하고 유인하되 강제하지는 않는 하나님이시기도 한 것이다. 열두제자로 다 부름 받았지만, 배신자도 생기고 도중 탈락자도 생기는데,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기쁜맘으로 소명에 응답하며, 동참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6. 그러므로, 소명받아 이 길을 걷으려고 신학에 입문한 사람의 마음자세는, 겸손 ․ 감사 ․ 긍지 ․ 기쁨이라야 한다. 마지못해 의무감으로서 목회길을 걸으려 하거나, 재미없는 신학공부를 주위사람의 기대 때문에 한다거나, 철학, 역사학, 문학, 심리학, 물리학을 관심가지고 하듯이 신학도 내가 나의 지식적 관심거리로, 나의 이성적 지적 활동으로서 한번 해보려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성공을 거둘수 있고, 훌륭한 신학박사학위와 교수직도 가질수 있지만,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은자’로서 평생 따르는 그칠줄 모르는 겸손, 감사, 긍지, 기쁨을 누리지는 못한다. 진정으로 소명받은 사람만이 그의 생에 말년쯤엔, 그가 겉으로 보기엔 성공적이든 실패한 모습이든지 상관없이 “나의 나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고전15:10)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7. 소명받은 것인지 아닌지를 영적인 깊은 차원에서는 신비이고 하나님의 비밀이지만, 사람편에 나타나는 신앙적 체험현상은 ‘강렬한 거듭남’이다.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거듭나는 체험이다. 이전에 가치있다고 여기던 모든 것들과의 철저한 단절이며 ‘초탈행위’로서 나타나야 한다(빌3:7-8). 니고데모가 당대의 지식인이요 우국충정과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갈망과 역사의식에서 진지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눈에는 ‘거듭남을 모르는 지성인의 구도자적 자세 단계’ 였던 것이다(요3:3). 거듭남이란 종교학적으로 ‘통과제의’이며, 필수적인 단계이다. 한 사람 성직자의 일생이,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망녕’을 부리지 않고 깨끗하고 단아한 모습을 살아감으로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 그 일에 달렸다.
8. 한 번 소명받은자는 한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다. 사실 신학교육과정 전과정이(4년,3년,6년,7년), 알고보면 영성수련의 과정인 것이다. 영성과목을 전담하는 교수로부터 강의를 받거나, 학교채플에 참석하거나, 신앙수련 기간동안만 영성수련기간이 아니다. 신학의 전과정과, 모든 신학강의실, 세미나실, 기숙사 생활관, 도서관, 채플실등 모든 시공간에서 진행되는 과정이 영성수련 과정인 것이다. 신학과정의 전과정이 ‘얍복나루터에서 야곱의 영적 씨름의 밤’인 것이다. 성직자가 제도적 교회조직단체 안에서 권위 있는 자리에 오르고, 제법 목회에 성공(?)을 하게되면 처음의 단순하고 깨끗하던 심령에 탐심과 명예욕과 권세욕이라는 이끼가 끼게된다. 개혁파교회가 ‘항상 개혁하는 교회!’를 강조하고 표방하는 이유는, 영혼에 ‘기름끼와 더러운 때가 쌓이는 것’을 거두어 내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목숨에 낀 더러움을 거두어내고 생명 본 바탈로 돌아가는 일’이다.
9. 소명자가 철저한 ‘거듭남’을 거치지 않으면, 평생 목사직은 그의 영혼을 서서이 죽이는 무서운 ‘종교독’으로 작용한다. 흔히 신학자나 목사처럼, 겸손의 말과 겉행동을 거룩으로 치장한체 속에 위장된 최고의 교만이 그를 병들게하는 직업도 드믈 것이다. 소명받은자가 존귀하고 귀한 것이 아니고, 그가 위임받은 복음진리와 생명의 그리스도가 존귀한 것이다. 사람은 그것을 담고 있는 질그릇에 불과한 것이다(고후4:7). 그런데, 경험에 의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본말의 전도가 일어난다. 예수의 광야시험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천부님의 확인과, 그가 하나님나라 일을 시작한다는 거룩한 큰 뜻’을 품자 곧바로 유혹자가 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참 목자를 찾아 광야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울고 있는 양떼들이 많다. 직업종교인으로서 목사는 많되 참 목자가 귀한 시대가 되었다.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부르는 부르심에 소명의식으로 응답해야 할 것이다.
[2] 제자공동체의 영성수련
1. 20세기 순교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1935-37년까지 약 3년간, 어려운 나치 치하에서 핑겔밭트 목사학교를 이끌었다. 이 시절 본회퍼는 철저한 이론적 신학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영성훈련과 공동체 생활을 통해 변화되는 몸의 성화신학을 목사후보생들에게 훈련시켰다. 그 때 나온 열매들이 『제자직』,『나를 따르라』, 『신도의 공동생활』임을 우리가 알고 있다. 몸의 훈련이 동반되는 영성수련과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공동체의 축복과 영성에 깊은 통찰을 남겼다. 그러한 제자공동체의 영성수련 가운데서 본회퍼는 시편 133편을 사랑하여 노래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같고/
헬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 이로다. (시133:1-3)
2. 위 시편에서한국 목회자와 신도들은 2-3절을 더 좋아하지만, 본회퍼는 1절에 주목하였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소명받은 자가 혼자서 고독하게 그 길을 걷지 않고, 함께 소명받은 도반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 함께 영성수련을 이뤄가게하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3. 기숙사 생활공동체이거나, 기숙사 밖에서 통학하는 신학도이거나, 같은 길을 걷도록 부름받아 내 곁에 두게하신 동료 신앙동지들을 무관심과 경쟁대상으로 보는 사람은 영적으로 바보이거나 눈먼 맹인이거나, 자폐증 환자와 같아서 그의 영성은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적 인간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되 단독자로 지으시지 않고 ‘남자와 여자’ 곧 '사랑하고 자유하고 서로돕는 가운데서 기쁨과 성장’을 누리는 ‘더불어 있음의 사람’(Mitmeschlichkeit, co-humanity)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4.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신학교의 기숙사는 하숙비를 절약하기 위한 “밥먹고 잠자는 거주장소‘로 변해갔고, 신앙동지로서 깊이 사귀이고 서로도우며 희비애락을 같이 해가야할 도반들이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미 ‘거듭남’ 과정에서 철저하게 땅에 묻어버리고 죽어져야 했던 파벌의식과 개인적-집단적 이기심이 당연한 우리시대의 추세인양 신학교 기숙사와 캠퍼스에서 활개를 친다. 기쁨과 축복의 시간이어야 할 채플이 의무강제 출석제도로 변해도 부끄럽거나 창피한 줄도 모르는 철면피들이 되어가는 동안, 사탄은 신학교 천장에 박쥐처럼 붙어 영혼의 깊은 잠에 도취한 신학생들과 신학교수단을 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띈다.
5. 심지어 얼마나 강심장이 되고, 영성에 마비증상이 되었는지, 일부 신학생들 중에는 깨끗하고 정결해야 할 신학교 캠퍼스와 기숙사를 오물과 추태와 더러운 육욕으로 난장판을 이룬 적도 없지 않았다. 간밤에 먹고마신 짜장면 그릇과, 소주병이 기숙사 현관 계단에 딩구는 것도 내 눈으로 보았다. 그런 학생들은 양심이 화인맞은 사람처럼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여지기 않는 신성모독자가 되어간다. 규모가 크지 않은 신대원 기숙사 건물한 쪽에서, 아침 경건기도회가 열리는데, 고열로 몸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면. 아침기도회가 싫어도 나와 참여해야하건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배짱을 부리는 학생은 오늘의 신학교육기관을 이루기 위하여 혼신의 희생을 다하신 선배 어른들을 모독하고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 희생을 조롱하는 자기 행동에 대하여 통절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6. 장공은 87세를 살고가신 그리스도의 큰 종이었지만 그의 삶을 10가지 죄우명을 세워놓고 자기를 스스로 절제하고 훈련시켰다. (『김재준 평전』, 61쪽 참조)
하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둘, 대인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셋,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
넷. 버린 물건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다섯,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 다음에 생기는 일은 하나님께 맡긴다.
여섯,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일곱,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여덟, 사건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아홉, 산하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열,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7. 강연자는 짧지 않았던 신학교교육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신학의 길을 걸어가는 신학공동체 영성수련을 위하여 특히 신학교육기관에 재학하는 동안엔 다음같이 열가지 생활 좌우명을 제시하고 싶다.
(1) 자기에게 정직하고, 크고 작은 일에 임하여 자신에게 성실한다.
(2) 민족․인류를 보편적으로 사랑하기 전에, 내가 만나는 구체적 신학동료를 배려한다.
(3) 강의실, 채플실을 비롯한 정규모임에 충실하고, 시간을 엄수하여 지킨다.
(4) 주위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정돈하는 습관을 기른다.
(5) 평생 독서하는 학도로서 살되, 특히 신학교육시절 폭넓고 깊은 독서에 촌음을 아껴 집중한다.
(6) 경재생활을 검소하게 살되, 돈을 빌리지 않으며, 만부득이한 경우엔 돈셈을 분명이 한다.
(7) 음악과 시와 이름없는 들꽃들을 사랑하여 마음이 무뎌지지 않게 깨어있도록 한다.
(8) 가르치는 교수님들이 설혹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존경과 사랑으로 모신다.
(9) 병든교회의 현실에 공동책임을 느끼고, 갈릴리 복음의 참목자가 되리라고 다짐한다.
(10) 억울한 일을 당할 때나 결단을 내리지 못 할 때, 예수님을 생각하고 대화한다.
8. 한신신학공동체를 다시 부활시키시려고 성령께서 바람을 일으키고 계심을 느낀다. 신학부 교수단을 권고하시어 하나되고 하시고 새롭게하시고 있음을 안다. 신학교육의 건물이 새롭게 완성되고 있다. 지난 30년 한국신학공동체는 죽어있었다. 그러나, 이제 맘몬숭배와 극우파 정치권력세력의 충견처럼 가신집단(家臣集團)으로 전락해버린 한국교회를 다시 살리시려고 , 통일 민족과 동아시아 20억 인구를 복음화 시키시려고, 성령이 한신공동체를 다시 부르고 계신다. 한신의 신학공동체는 학문의 높은 봉에 오르고, 은혜의 깊은 골짜기를 내려가고, 선교의 불길에 다시 점화되어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라! 다시 거듭나서 한국 신학계와 동아시아 선교아카데미의 중심이 되라! 신학부가 새로워지면, 기장이 새로워 지고, 기장이 새로워지면 한국 기독교가 새로워지고, 한국 기독교가 새로워지면 동아시아와 지구촌에 ‘생명의 제3 길’이 열린다. 주님께서 긍휼과 은혜로서 한신 신학공동체와 함께 하실 것이다. (2009년 3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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