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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약
"창조와 세계의 역사가 시작부터 현재까지 7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직 일곱 번째 장이 쓰이지 않았다."
(T. 수바 로우, “신지학자,” 1881년)
이 일곱 장 중에 첫 번째 부분이 시도되어 왔고 이제 끝났다. 설명으로써 아무리 불완전하고 미약할지라도, 하여튼 그것은 모든 후속의 우주발생론의 가장 오래된 토대인 그것의 근사치—수학적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하면—이다. 언제나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대법칙—보편 마인드에서 오는 똑같은 것을 반사한 존재들에 의해서 대의식을 부여받은 최초 인종의 유연한 마인드에 각인된—의 웅장한 파노라마를 서구의 언어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대담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언어도 신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제외하고, 그것을 어느 정도 적합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부족함이 있더라도 그 동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받아야만 한다.
전체적으로, 앞에 나온 것이나 뒤에 나올 내용은 어디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없다. 인도의 육파 철학 어디에서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육파 철학의 총합—일곱 번째, 즉 오컬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집트의 부서지는 파피루스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앗시리아의 타일이나 화강암 벽에서도 흔적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인류 지식의 결정판인 베단타 문헌들에서는 이 세계-우주발생론에 대한 형이상학 측면만 전해준다; 그리고 그것들의 값어치를 따질 수 없는 보고, 우파니샤드—우파-니-샤드(Upa-ni-shad)는 “비밀의, 영적 지식의 계시로 무지의 정복”을 의미하는 복합어이다—는 이제는 학생이 그것의 충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부가적으로 만능 열쇠가 필요하다. 그 이유에 대해 본인이 대스승으로부터 배운 대로 여기에서 서술해보겠다.
“우파니샤드”라는 이름은 보통 "비의적 가르침"으로 번역된다. 이 소론들은 스루티(Sruti), 혹은 "계시된 지식", 말하자면 계시록(Revelation)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그리고 세 번째 구분으로써 베다의[1] "브라흐마나" 부분에 일반적으로 붙어있다. 동양의 학자들에게 알려진 그리고 그들이 열거한 우파니샤드는 150개 이상 있으며, 그들은 가장 오래된 것이 아마도 기원전 600년쯤에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진본은 그 수의 5분의1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파니샤드와 베다의 관계처럼 카발라가 유대 성서와 비슷한 관계를 갖는다. 우파니샤드는 베다 본문의 비밀스럽고 신비한 의미를 다루고 설명한다. 우파니샤드는 우주의 기원, 신의 성질, 그리고 영과 혼의 성질, 또한 마인드와 물질의 형이상학적 연결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간략히 말해서: 우파니샤드은 모든 인간의 지식의 시작과 끝을 포함하지만, 붓다 시대 이후로 이제 그것을 더 이상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우파니샤드가 비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가 지금은 브라만 성전에 공공연하게 붙어있으며, 우리 시대에 심지어 “외부인(outcastes)”과 유럽의 동양학자들에게도 접근 가능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들 속에서 한 가지—그리고 이것은 모든 우파니샤드에 있다—가 변함없이 꾸준하게 그것이 고대의 기원이라는 것을 가리키며, (가) 그것 모두가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그런 것처럼 압제적인 제도로 되기 이전에 어느 부분에서 쓰였다는 것과 (나) 우파니샤드 내용의 반 정도는 제거되었고, 어느 부분은 다시 쓰여서 축약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상위 지식을 가진 위대한 스승들과 브라만들이 제자가 되기 위해서 크샤트리아 왕들에게 가는 것으로 계속해서 나타내어진다.” 코웰이 적절하게 말하듯이, 우파니샤드는 “(다른 브라만 저작물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 즉 “리그 베다 찬가를 제외하고 이전의 어떤 작품에서도 알려져 지지 않은 사상의 자유를 불어넣는다.” 두 번째 사실은 붓다의 생애에 관한 사본 하나 속에서 기록된 전통으로 설명된다. 그것에 의하면, 우파니샤드는 개혁 초기 이후에 브라흐마나에 원래 부속되었고, 그 개혁이 “두 번 태어난 자”가 인도를 침략한 이후 몇 세기가 지나서 브라만들 사이에서 현재의 카스트 제도의 배타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우파니샤드가 그 당시에는 완전하였고, 제자들의 입문을 준비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베다와 브라흐마나가 사원에 속한 사원-브라만들의 배타적 소유로 남아 있는 동안 지속되었다—반면에서 어느 누구도 성스러운 카스트 밖에서 그것을 공부하거나 심지어 읽을 권리를 갖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카필라바스투의 왕자, 고타마가 왔다. 라하시야(Rahasya) 혹은 우파니샤드에 있는 브라만 지혜 전체를 배우고 나서, 그 가르침이 눈 덮인 히말라야 영역에서 거주하는 "생명의 대스승들"의 가르침과[2] 거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브라만의 제자는 성스러운 지혜가 브라만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둬들여졌기 때문에 분개를 느끼면서, 그것을 세상에 알려서 온 세계를 구제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성스러운 지식과 오컬트 지혜가 “외부인들” 손에 들어가는 것을 본 브라만들은 베다와 브라흐마나 합쳐서 원래 세 배 정도를 포함하던 우파니샤드의 본문을 한 단어도 바꾸지 않고 축소시켰다. 그들은 존재의 신비 마지막 부분이 있는 가장 중요한 부분의 사본을 분리시켰다. 그때부터 브라만의 비밀 코드의 열쇠를 입문자들만 가진 채 남아 있게 되었고, 이렇게 브라만은 주요한 질문들에 대하여 영원히 침묵한 채 그들의 우파니샤드에 호소함으로써 붓다의 가르침의 정확성을 공공연하게 부정하는 입장에 있게 되었다. 그것이 히말라야 너머의 비의적 전통이다.
역사 시대에 살았던 가장 위대한 입문가, 스리 샹카라차리아는 우파니샤드에 관한 많은 바샤(주역서)를 썼다. 그러나 그의 원문들이 세속인의 수중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수도원(마탐)에서 아주 빈틈없이 보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라만의 비의 가르침에 관하여 브라만의 가장 위대한 해설가의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주역서가 스마르타바(Smartava) 브라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힌두인에게는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사문자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는 데는 한층 더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 종파는 샹카라차리아에 의해서 창시되었으며, (지금도 남인도에서 여전히 매우 강력하다) 주역서의 사문자를 이해하는데 충분한 지식을 보존해온 학생들을 배출하는 유일한 종파이다. 그 이유는 그들만이 수도원장으로 종종 진정한 입문가를 가진다고 들었다. 예를 들면, 마이소르 서부 가우트에 있는 “스링가-기리”에 있는 수도원 같은데 수도원장으로 진정한 입문가가 있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필사적으로 배타적인 브라만들의 카스트 안에서, 스마르타바 종파보다 더 배타적인 종파는 없다; 그리고 그들이 오컬트 과학과 비의 가르침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추종자들의 침묵이 그들의 자만심과 배움에 필적한다.
그러므로 현재 진술을 하는 필자는 상당한 반대와 심지어 본서에서 제시된 그런 진술들에 대한 부인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 한다. 여기서 말한 모든 것의 세부사항이 절대적으로 옳고 완전무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이 거기 있고, 그것을 거의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다룬 주제들의 내재적인 어려움 그리고 근대 서구 언어로 (다른 유럽 언어처럼) 어떤 개념을 표현하는데 넘어설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아마도 필자가 설명을 가장 명백한 형태로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어려운 환경 하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고, 이것이 작가가 누구이건 그로부터 기대할 수 최선일 것이다.
설명한 주제를 충분히 논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얼마나 어려운지 그 주제의 광대함을 보여주고 요약해보자.
(1) 씨크릿 독트린은 오랜 세월의 축적된 지혜이고, 우주발생론만으로도 가장 방대하고 정교한 체계이다: 즉, 심지어 대중적인 푸라나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세대의 입문한 현자들과 예언자들이 당혹케 하는 일련의 진화상의 발전 속에서 정리하여 적어 놓고 설명하는데 차지한 사실들이 모두 몇 페이지의 기하학 기호와 그림문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오컬트 상징학의 신비한 힘이다. 그 현자들의 섬광 같은 응시가 물질의 핵심까지 꿰뚫고 들어가서, 거기에 사물의 혼을 기록하였다. 한편 세속인은 아무리 박식할지라도 형태의 외적인 작업만 지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은 "사물들의 혼(soul of things)"을 믿지 않고, 그래서 고대 우주발생론의 전체 체계를 부정할 것이다. 이런 체계가 분리된 몇 사람의 공상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현자들의 수 천 세대를 망라하는 단절되지 않은 기록으로, 그들 각자의 경험은 인류의 요람기를 지켜보았던 고귀하고 높은 존재들의 가르침에 대하여 하나의 초기 인종에서 다음 인종으로 구전으로 전해진 전통들을 테스트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다섯 번째 근원인종의 “현자들,” 마지막 재앙이자 이동하는 대륙에서 구원된 인종의 현자들은 그들의 삶을 가르치는 데가 아닌 배우는데 보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하였는가? 자연의 모든 부문에서 위대한 초인들이 각자의 비전으로 오래된 전통을 체크하고, 테스트하며, 확인하면서 보냈다; 즉 그들은 그들의 육체적, 멘탈적, 심령적 그리고 영적인 기관들을 가능한 최대로 계발하고 완전하게 만든 사람들이다. 어느 한 분의 초인의 비전이 다른 초인의 비전—독립적인 증거로써 획득한—과 몇 세기에 걸쳐서 경험으로 확증될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그 체계 속에 있는 근본적인 대법칙, 중심점으로 그것에서 만물이 출현하였고, 만물이 그 주위를 돌고 그것으로 돌아가며, 그리고 그것 위에 나머지 철학이 걸려 있는 것으로, 그것은 하나의 동질적 신성한 질료 원리(Substance-Principle), 하나의 근본 원인이다.
. . . “그 등불이 더 밝게 빛났던 몇 분들이
원인에서 원인으로 대자연의 비밀의 머리로 안내되었고,
그리고 하나의 첫째 대원리가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 . .”
그것을 "질료-원리(Substance-Principle)"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현된 우주계에서 "질료"로 되고, 그래서 환영이지만, 반면에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볼 수 있고 볼 수 없는, 추상적 공간(Space)에서는 "원리"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편재하는 대실재이다: 그것은 모든 것과 만물을 포함하기 때문에 초월적(impersonal)이다. 그것의 초월성(impersonality)이 이 체계의 근본 개념이다. 그것은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 속에 잠재하고, 우주 자체이다. (2부 상징체계에 대한 여러 장에서 “원초의 질료와 신성한 생각” 참조.)
(3) 우주는 이 미지의 절대적 에센스(Absolute Essence)의 주기적 현현이다. 하지만 그것을 "에센스"라고 부르는 것은 철학의 정신 바로 그것에 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명사 "에센스(essence)"가 동사 esse, 즉 "있다"에서 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것(It)”은 인간의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존재(being)와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It)”은 영이나 물질이 아니고, 둘 다라고 가장 잘 묘사된다. “파라브라흐맘과 물라프라크리티”는 사실상 하나(One)이지만, 그럼에도 현현된 보편 개념 속에서, 심지어 그것의 최초 현현인 하나의 로고스(One Logos) 개념 속에서도 둘이다. 유능한 강연자인 수바 로우 씨가 “바가바드 기타에 대한 주석”에서 보여주듯이, 그것(It)은 하나의 로고스의 객관적 관점에서 파라브라흐맘이 아닌, 물라프라크리티"로써 나타난다; 즉 무조건적 절대적인 배후에 숨겨진 하나의 대실재가 아닌 그것의 베일로서 나타난다.
(4) 우주는 그 속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마야(Maya)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속에 있는 모든 것은 개똥벌레의 덧없은 생명부터 태양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One)의 영원 불변성과 그 원리의 무변화성에 비하면, 우주는 언제나 변하는 덧없는 형태와 함께 철학자의 마인드 속에서 필연적으로 도깨비 불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주는 자체처럼 비실재적인 만큼 그 속에 있는 의식적인 존재들에게 그것은 충분히 실재적이다.
(5) 우주 속에 있는 모든 것, 모든 왕국에 두루 걸쳐서 있는 모든 것은 의식적이다: 즉 그것 나름대로의 지각의 계와 그것 나름대로의 의식을 부여받았다. 우리가 예를 들어 돌 속에서 의식의 어떤 표시—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표시—를 지각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맹목적” 혹은 “무의식적” 법칙이 없듯이, “죽은” 혹은 “맹목적” 물질 같은 것은 없다. 이런 것은 오컬트 철학의 개념들 사이에 아무 데도 없다. 오컬트 철학은 표면의 겉모습에서 결코 멈추지 않는다. 오컬트 철학에서 본체의 본질이 그것의 객관적인 대응 부분보다 더 실재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세 명목론자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실재는 보편적인 것이고, 이름과 인간의 공상 속에서만 존재한 것은 특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6) 우주는 안에서 바깥으로 안내되고 작용한다. 위에서처럼 아래에서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인간—소우주이며 대우주의 축소판—이 이런 우주의 법칙과 그 법칙의 작용 방식의 살아있는 증거이다. 모든 외적인 움직임, 행위, 제스처는 그것이 자발적이건 기계적이건, 유기적이건 멘탈적이건, 내적인 느낌 혹은 감정, 의지 혹은 결단, 그리고 생각 혹은 마인드가 선행되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기능들 중에 하나를 통해서 주어진 내적인 충동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인간의 외적인 체 속에서 정상적일 때 어떤 외적인 움직임이나 변화가 일어날 수 없듯이, 외적인 혹은 현현된 우주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대우주가 거의 끝없는 유정의 대존재들의 하이어라키로 안내되고, 통제되며, 생명이 불어넣어지며, 각자가 수행할 사명을 갖고 있고 그들—우리가 그들을 어느 한 이름으로 부르건, 디얀-초한 혹은 천사들이고 부르건—은 대우주의 법칙과 카르마의 대리인이라는 의미에서만 “메신저들”이다. 그들은 각자의 의식과 지성의 정도에서 무한하게 다양하다; 그리고 그들을 "시간이 먹이로 삼지 않는” 어떤 세속적인 불순함이 없는 순수한 영들로 부르는 것은 시적인 공상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대존재들 각각은 현재는 아닐지라도 과거에 인간이었거나 다가오는 주기(만반타라)에 인간이 되려고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초기가 아닐 때 완성된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의 감정 성질과 개성의 느낌—두 가지 순전히 지상의 특이성이다—이 없다는 점에서만, 그들은 상위의 (덜 물질적) 영역에서 지상의 인간과 윤리적으로 다르다. 완전한 인간은 이런 느낌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왜냐하면 (가) 그들은 더 이상 육체적 체—혼을 언제나 마비시키는 무거운 짐—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순수한 영적인 요소가 속박되지 않은 채 더 자유롭게 남겨지기에, 그들은 인간이 언제나 영향받을 수 있는 것보다 마야에 덜 영향을 받는다. 만약 그가 두 개의 개성—영적 인간과 육체적 인간—을 전적으로 분리시킨 채 간직하는 초인이 아니라면, 그는 언제나 마야에 영향을 받는다. 시초의 모나드들은 결코 지상의 여러 체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개성의 느낌 혹은 에고-이즘(ego-ism)을 가질 수 없다. "개성(personality)"이 의미하는 그것은 어떤 제한과 관계로, 혹은 코울리지가 정의하듯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만 어떤 바탕으로써 성질을 가진 개체성(individuality)”으로, 이 용어는 당연히 인간이 아닌 실체들에게 적용될 수가 없다; 그러나 많은 세대의 현자들이 강하게 주장해 온 하나의 사실로써, 이 대존재들 어느 것도 상위 존재이건 하위 존재이건 분리된 실체들로써 개성이나 개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그들은 인간이 "나는 나 자신이며 다른 누구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의미에서 개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지상에 있는 인간과 사물처럼 구분하는 그런 분리성을 의식하지 않는다. 개체성이 그들 단위들이 아닌, 그들 각자의 하이어라키의 특이성이다; 그리고 이 특이성은 그 하이어라키들이 속한 계의 정도에서만 다양하다: 동질성이자 하나의 신성 영역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하이어라키 속에 있는 개체성이 더 순수하고 덜 강조된다. 그들은 그들의 상위 원리—보편적 신성한 불기둥을 반영하는 불멸의 불꽃—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유한하며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분화에 의해서 환영의 영역에서만 개체화되고 분리된다. 그들은 “살아 있는 하나들(Living Ones)”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적 대생명(absolute life)에서 환영의 대우주 스크린에 투사된 흐름들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불이 이 “대생명들(Lives)”을 감지하는 사람들 속에서 꺼지기 전까지, 그 존재 속에서 생명이 꺼질 수가 없다. 대생명의 강 기슭에서 방사하는 거대한 중심의 태양의 반영, 즉 창조되지 않은 광선의 재생시키는 영향 아래에서 존재하게 되었기에, 불멸의 물에 속하는 것이 바로 그들 속에 있는 내면의 원리이고, 반면에 그것의 분화된 외피(옷)는 인간의 체처럼 소멸될 수 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우세한 종류의 인간"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할 때 에드워드 영이 옳았다.
그들은 "보살피는" 천사도 아니고 "보호하는" 천사도 아니다; 그들은 또한 "지고한 분의 선구자들(Harbingers of the Most High)"도 아니고 인간의 공상이 만들어 낸 어떤 신의 "노여움의 사자들"도 더더욱 아니다. 그들의 보호를 호소하는 것은 어떤 종류이건 비위를 맞추는 것으로 그들의 동정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인간 자신처럼 불변의 카르마의 법칙과 대우주 법칙의 노예이자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의 본질 속에 어떤 개성의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중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기뻐하고 분노를 느끼는, 제물로 기뻐하며, 허영심에서 어리석은 유한한 인간보다 더 독재적인, 시기질투하는 배타적인 신—에 속하는 그런 개성적 특질들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2권에서 보여주듯이, 인간은 이 모든 천상의 하이어라키의 에센스의 복합체이기 때문에, 한 가지 의미에서 어떤 특정 하이어라키나 등급 또는 심지어 그들의 조합보다 자신을 더 상위로 만드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 "인간은 데바들을 명령하거나 달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하위 개성을 마비시켜서, 하나의 절대적 대아(One absolute Self)와 그의 상위 대아(Self)의 비분리성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 도달함으로써, 인간은 심지어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도 "우리의 하나(One of Us)"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인간은 무지를 떨쳐버리는 지식의 과실을 먹으로써, 엘로힘 혹은 디야니들 중에 하나처럼 된다; 그리고 일단 그들의 계에 있게 되면, 모든 하이어라키를 통치하는 연대성과 완전한 조화의 영이 그 위로 확장해서 모든 상세한 것에서 그를 보호해 준다.
과학자가 자연령 뿐만 아니라 신성한 영을 믿지 못하게 막는 주된 어려움은 그들의 유물주의 때문이다. 심령주의자가 떠난 자들의 “영”에 대한 맹목적 믿음을 유지하면서, 그가 자연령과 신성한 영을 믿지 못하는 만드는 주된 장애물은 어떤 오컬티스트들과 카발라 학자들을 제외하고 물질의 진정한 에센스와 성질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 때문이다. 죽은 자의 영 이외에 우리 주위에 다른 의식적 존재들의 존재를 믿거나 안 믿는 것은 궁극적 에센스로 대자연 속에 있는 만물의 통일성의 이론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에 주로 달려있다.
학생이 마인드 속에서 오컬트 우주발생론을 더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후속 연구를 안내할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실마리를 위하여, 그는 영-물질(Spirit-Matter)과 그것의 실재 에센스의 태초의 진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에 의지해야 한다.
지금까지 설명한대로, 실제로 소위 모든 "영"은 육체를 벗은 인간이거나 미래의 인간이다. 최고의 대천사 (디얀 초한)에서부터 마지막 의식적 "건설자" (영적 실체들의 하위 등급)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여기 구체에서 혹은 다른 구체에서 다른 만반타라에서 아주 오랜 억겁이전에 살았던 인간들이다; 마찬가지로 하위 단계의 반지성적 그리고 비지성적 엘리멘탈들도 모두가 미래 인간이다. 오컬티스트에게 그 사실—영이 지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존재가 인간이었고, 인간의 주기를 거쳐서 그의 지식과 지성을 획득하였음에 틀림없다는 증거가 된다. 우주에는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절대적 전지(Omniscience)이자 대지성(Intelligence)이 있으며, 이것은 어떤 경계를 갖지 않고, 사람들이 공간(Space)이라고 부르는 그 속에 담긴 것이 어느 것이건 독립적으로 여겨진, 그 유한한 전체 우주의 모든 원자와 무한하게 작은 점을 관통해서 고동친다. 그러나 현현된 세계에서 그것의 반영의 최초 분화는 순전히 영적인 것이고, 그 속에서 발생된 존재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어떤 관계를 갖지 않는 어떤 의식을 부여받지 않았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인간 의식이나 지성을 획득하기 전에는 그것을 가질 수가 없다. 이것이 신비일 수도 있지만, 비의 철학에서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고, 그리고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자연의 전체 질서는 한층 더 상위 삶을 향해서 점진적인 행진을 보여준다. 겉으로 보기에 가장 맹목적인 힘의 작용 속에는 디자인이 있다. 그 끝없은 적응을 하는 전체 진화 과정이 이것의 증거이다. 강한 종을 위한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 약하고 미약한 종을 뽑아내는, 그리고 당면한 작용에서 잔인할지라도, “적자생존”을 확실히 하는, 불변의 법칙—모두가 웅대한 목적을 향해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적응이 일어나고, 생존 경쟁에서 적자가 살아남는다는 바로 그 사실은, 소위 "무의식적 대자연"으로 부르는 것이 사실상 높은 행성영 (디얀 초한)에 의해서 안내되는 반지성적 존재들 (엘리멘탈)에 의해서 조작되는 힘의 집합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행성영들의 집합은 미현현된 "로고스(logos)"의 현현된 말씀을 구성하며, 동시에 우주의 "마인드"와 그것의 불변의 법칙을 구성한다.
비의 철학에서 세 가지로 구분되는 우주에 대한 표상을 세 가지 구분되는 측면으로 우리의 생각에 각인시키고 있다: 언제나 존재하는 것(ever-existing)에서 진화한 존재-이전의 계(pre-existing) 그리고 현상계—그것의 반영 그리고 그림자인 환영의 세계이다. 만반타라로 알려진 생명의 위대한 신비이자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에, 진정한 대우주는 마치 마법 환등기가 불러낸 그림자를 드리우는 흰색 스크린 뒤에 놓인 사물과 같다. 실제 형상과 사물은 보이지 않은 채 남아 있지만, 진화의 줄이 보이지 않은 손으로 당겨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과 사물은 대환영 혹은 마하마야의 올가미 뒤에 있는 실재들이 백색 판 위에 비춘 반영들에 불과하다. 이것은 대홍수 이전과 이후, 모든 철학과 모든 종교에서, 그리고 인도와 칼데아에서, 중국과 그리스 성자들에 의해서 가르쳐졌다. 인도나 칼데아에서는 이런 3가지 우주가 중심의 영원한 배아에서 발산하여 그것과 함께 지고의 통일성을 구성하는 세 가지 삼위일체로 대중 가르침에서 비유적으로 가르친다: 시초의, 현현된, 그리고 창조적 삼개조 혹은 하나 속의 셋이다. 마지막(창조적 삼개조)은 구체적인 표현에서 이상적인 처음 둘의 상징에 불과하다. 그래서 비의 철학에서는 이 순전히 형이상학적 개념의 필요성을 넘어가서, 첫 번째 존재를 언제나 존재하는 것(Ever Existing)으로 부른다. 이것은 인도의 모든 육파 철학의 견해이다—대지혜의 단위 체의 여섯 원리로, “그노시스”, 숨겨진 지식이 그것의 일곱 번째이다.
일곱 스탠저에 대한 주석들이 피상적으로 다루어졌을 지라도, 본서의 우주발생론 부분에서 태고의 가르침이 대중적 측면에서 판단하고 간주하도록 남겨진 어떤 다른 고대의 경전보다도 표면상에서 (근대적 의미로) 더 과학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충분하게 제시되었다고 필자는 기대한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본서에서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보류되었기 때문에, 학생이 자신의 직관을 사용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주된 관심은 이미 주어진 것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가끔 매우 부정확하게 주어진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가적인 재료로 언제 어디서나 가능할 때마다 암시된 지식을 보충하는 것이다; 또한 근대 종파주의의 너무 강력한 공격과 특히 너무 자주 잘못 불린 과학이라는 우리 시대의 유물주의의 공격에 대항하여 우리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다. 반면에 사실상 “과학자”와 “사이비 학자”가 세상에 제시한 많은 비논리적인 이론에 책임을 져야만 한다. 엄청난 무지에서, 일반 대중은 “권위자들”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과학자로부터 나오는 모든 언명을 증명된 사실로써 간주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느끼면서, 일반 대중은 "이방인"의 원천에서 제시된 모든 것을 비웃으라고 배운다. 그러므로 유물주의 과학자들이 논쟁과 토론이라는 그들의 무기를 가지고 싸울 수 있기 때문에, 각자의 견해를 대조하면서 심지어 위대한 권위자들이 어떻게 오류를 범하는지 보여주면서 1권, 2권에다 부록을 추가하였다. 우리는 우리 적의 약점을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그들이 너무 자주 주장하는—과학적 언명으로 통하게 된—궤변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것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보편적인 성격에서 헤르메스와 그의 "지혜"를 고수한다; 과학자들은 진리가 서구 세계의 독점적 재산이라고 착각하면서 직관과 오랜 세월의 경험에 반대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를 고수한다. 그러므로 그들과 불일치가 있는 것이다. 헤르메스가 말한 것처럼, "지식은 감각과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감각은 감각 위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것이지만, 지식(gyi)은 감각의 끝이기 때문이다”—즉, 우리 육체 두뇌의 환영과 그것의 지성의 끝이다; 이렇게 감각과 마인드(마나스)로 힘겹게 얻은 지식 그리고 영적인 신성한 혼, 즉 붓디(Buddhi)의 직관적 전지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는 것이다.
먼 미래에 실제 이 저작의 운명이 어떤 것이 되건, 우리는 적어도 지금까지 다음 사실을 입증하였다고 기대한다:
(1) 씨크릿 독트린은 힌두인이 “나스티카”라고 말하는 의미를 제외하고, 혹은 모든 인격신을 포함한 우상을 거부한다는 의미를 제외하고, 어떤 무신론도 가르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오컬티스트는 나스티카이다.
(2) 씨크릿 독트린은 우주의 집합적 “창조자(Creator)” 혹은 로고스를 인정한다; 데미-우르고스(Demi-urgos)—어떤 건축물의 “창조자”로서 “건축가"에 대하여 말할 때 함축된 의미이다. 반면에 그 건축가는 그 건축물의 돌 하나도 건드리지 않지만, 계획을 제공하면서 모든 노동을 석공들에게 맡긴다; 우리의 경우, 그 계획이 우주 개념작용(Ideation)에 의해서 제공되고, 건설하는 노동은 지성적인 권능과 힘의 무리들에게 맡겨 둔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인격의 신이 아니라—즉, 불완전한 우주 밖의 신이 아니라—디얀-초한과 다른 힘들의 집합체이다.
그 다른 힘에 대하여ㅡ
(3) 그들은 이중의 성격을 지닌다; (가) 물질 속에 내재하는 비이성적 야수적 에너지, 그리고 (나) 그 에너지를 안내하고 지시하는 지성적인 혼 혹은 우주 의식이자, 보편 마인드의 개념작용을 반사하는 디얀-초한의 사고로 구성된다. 이것이 만반타라 기간 동안에 지구에서 끊임없는 일련의 물리적 현상과 윤리적 영향을 낳으며, 전체가 카르마에 종속된다. 그 과정이 항상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 베일 뒤에서 안내하는 지성의 증거를 아무리 많이 나타내더라도, 그 과정은 여전히 갭과 갈라진 틈을 보이며, 심지어 매우 자주 분명한 실패도 낳는다—그러므로 집합적 무리 (데미우르고스)나 개별적으로 일하는 여러 힘 어느 것도 신성한 영예나 숭배의 적절한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인류의 감사와 경의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인간은 주기적인 작업에서 그의 능력 최대한 자연과 협력자가 됨으로써 "이데아(Ideas)"의 신성한 진화를 언제나 도우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언제나 알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카라나(Karana)"만이, 모든 원인들의 원인 없는 대원인(Causeless Cause)이 우리들의 심장의 신성한 미답의 땅에 그것의 사원과 제단을 가져야 한다—그 땅은 우리의 영적인 의식의 “작고 조용한 목소리”를 통하는 것을 제외하고,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며, 언급되지 않는 곳이다. 그것 앞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은 침묵 속에서 그리고 그들 혼의 신성한 고독 속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3] 이렇게 그들의 영을 그들과 보편 영(Universal Spirit)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로, 그들의 선한 행동을 유일한 사제로, 그리고 그들의 죄 많은 의도를 실재(Presence) 앞에 바치는 볼 수 있는 객관적 제물로 만들면서 그렇게 해야 한다. (2부, “숨겨진 신성에 대하여.”)
(4) 물질은 영원하다. 물질은 하나의 무한한 보편 마인드가 그곳에 그의 개념을 세우기 위한 우파디 (물질적 기초)이다. 그러므로 비의가들은 자연계에는 죽은 물질 혹은 비유기적 물질이 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에서 만든 둘 사이의 구분은 임의적이고 이치에도 맞지 않기에 근거가 없다.
그러나 과학에서 무엇이라고 생각하건—그리고 정밀 과학은 우리가 경험으로 알듯이 변덕스럽다—오컬티즘은 마누와 헤르메스부터 파라셀수스와 그의 후계자에 이르기까지 태고적부터 알며 다르게 가르친다.
이렇게 위대하고 위대하며 위대한 헤르메스 트라이스메기스투스가 말한다: “오, 나의 아들이여, 물질은 되어간다;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였다; 왜냐하면 물질은 되어가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4] 되어가는 것은 창조되지 않은 신의 활동 방식이다. 되어가는 씨앗을 받아서, 물질(객관계)이 태어났다. 왜냐하면 창조력이 그것을 이상적인 형태에 따라서 형성하기 때문이다. 아직 발생되지 않은 물질은 어떤 형태를 갖지 않는다; 그것이 작용하게 될 때 되어간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정의, 134페이지, “세계의 처녀.”)
“모두가 하나의 보편적 창조적 노력의 산물이다. . . . 대자연 속에는 죽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유기적이고 살아있으며, 그러므로 전체 세계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인다.” (파라셀수스, “아테네인의 철학,” F. 하트만 번역, 44페이지.)
(5) 우주는 그 이상적인 계획에서 진화되어 나왔고, 베단타 학자들이 파라브라흠으로 부르는 그것의 무의식 속에서 영원동안 유지된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최고의 서구 철학의 결론—지금은 본 하트만 철학에 반영된, 플라톤의 "타고난, 영원한 그리고 자존하는 이데아(Ideas)—과 동일하다. 허버트 스펜서의 "불가지자”는 "현상 뒤에 있는 힘"—만물이 나오는 무한한 영원한 에너지—의 인격화처럼 자주 보이는, 오컬티스트가 믿는 초월적 대실재(Reality)와 희미하게 닮았다. 반면에 “무의식 존재의 철학”의 저자 하트만은 이 점에서만 유한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위대한 대신비의 해결책에 근접한다. 고대 철학이나 중세 철학에서, 이 주제에 다가가려고 했던 혹은 심지어 그것을 암시라도 했던 철학자가 거의 없었다. 파라셀수스가 그것을 추론적으로 말했다. 그의 사상은 하트만 박사가 “파라셀수스의 삶”이라는 책에서 훌륭하게 종합되었다.
기독교의 모든 카발리스트들은 동양의 근본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활동력, "거대한 숨결의 영원한 운동"은 모든 새로운 주기의 새벽에 대우주를 깨어나게 하고, 두 가지 상반된 힘으로[5] 그것을 활동하게 만들어서, 대우주가 환영계에서 객관적으로 되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이중 운동이 대우주를 영원한 이상계에서 유한의 현현계로, 혹은 본체계에서 현상계로 옮긴다. 존재하는, 존재했던 그리고 존재할 모든 것이 영원히 있으며, 심지어 무수히 많은 형태들도 객관계에서만 유한한고 사라지지만, 그것들의 이상적인 형태 속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영원[6] 속에서 이데아로써 존재하였고, 사라질 때 반영으로써 존재할 것이다. 인간의 형태나 동물, 식물, 광물의 어떤 형태도 창조된 적이 없고, 우리가 있는 현상계에서만 그것은 '되어가기’ 시작했다. 즉, 가장 세련된 초감각적인 본질에서 가장 조잡한 겉모습으로, 현재의 물질성으로 객관화되어 갔다, 또는 내부에서 외부로 확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 형태는 영원 속에서 아스트랄 원형 혹은 에텔 원형으로써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객관적인 존재이자 지상의 생명으로 가져오는 것이 그 의무인 영적 대존재 (혹은 신)들이 그 원형에 따라서 그들 자신의 에센스에서 미래 자아들(Ego)의 원형질 형태를 진화시켰다. 그 후에, 이 인간의 우파디 혹은 기본 모형이 준비되었을 때, 지상의 자연의 거대한 힘이 저 초감각적 틀 (금형) 위에서 작업하기 시작하였다. 그 틀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요소 이외에, 그들 속에 이 구체의 과거와 미래의 식물과 동물 형태의 모든 요소들을 간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의 외적인 껍질은 그것이 인간의 형상을 취하기 전에 모든 식물 형태와 동물 형태를 지나갔다. 이것에 관해서는 2권에서 주석과 함께 충분히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파라셀수스의 헤르메스-카발라 철학에 의하면, 그것은 자체에서 대우주를 진화시킨 "일리아스터(Yliaster)”—윌리암 크룩스 씨가 화학에서 도입한 "프로타일(Protyle)"의 선조이다—혹은 원초의 프로토마테리아이다.
“진화가 일어났을 때, 일리아스터는 스스로 나누었다 . . . 녹아서 분해되었고, 각각 위대한 신비(Mysterium magnum), 일리아도스(Iliados), 림보스 메이저(Limbus Major), 혹은 원초 물질(Primordial Matter)로 부른, 이데오스(Ideos) 혹은 카오스를 그 자체 속에서 계발시켰다. 이 원초의 에센스는 일원적 성질이고, 자체를 활기 활동, 영적인 힘,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묘사할 수 없는 힘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들의 질료를 구성하는 활기 물질로써 현현한다.” 원초 물질의 이 이데오스 속에, 혹은 프로토-일로스(proto-ilos) 속에—창조된 만물의 매트릭스이다—만물이 형성되는 질료가 간직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카오스로 . . . 그것에서 대우주 그리고 나중에 미스테리야 스페셜리아(특정 신비)[7] 속에서 진화와 분할에 의해서, 분리된 개별 존재가 존재하게 되었다. “만물과 모든 기초적 질료가 그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되었으며 실제로 있다는 것이 아니다”—하트만 박사가 합당하게 다음과 같이 관찰하였다: “파라셀수스가 300년 전에 ‘물질의 잠재성’에 대한 근대의 발견을 예상한 것처럼 보인다.” (42페이지)
그러므로 이 메그너스 림버스 혹은 파라셀수스의 일리아스터는 스탠저II와 다른 여러 스탠저에서, 공간 속에 출현하기 전에, 내부에 있는 "아버지-어머니"이다. 그것은 대우주와 소우주 (혹은 우주와 우리의 구체)라는[8] 이중 성격 속에서 아디티-프라크리티, 영적 성질과 물질적 성질로 의인화된 대우주의 보편 매트릭스 (모체)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파라셀수스에서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매그너스 림버스는 모든 피조물들이 성장하여 나오는 탁아소이다. 마치 나무가 작은 씨앗에서 자라나오듯이; 하지만 차이점은 대(great) 림버스는 그 기원을 말씀에서 갖지만, 소(minor) 림버스 (지상의 씨앗 혹은 배아)는 지구에서 가진다.
대 림버스는 모든 존재들이 나온 씨앗이며, 작은 림버스는 그 형태를 재생하고, 그 자체가 대 림버스에 의하여 만들어진, 각각의 궁극의 존재이다. 아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소 림보스는 대 림버스의 모든 특질을 지니고 있다. (2권, 단락 iii 주석 참조.) “일리아스터가 용해되면서, 아레스(Ares), 분할하고 분화시키며 개체화시키는 힘(이미 알고 있는 포하트)이 작용하기 시작했다. 모든 생산이 분리의 결과에서 일어났다. 이데오스로부터, 화, 수, 풍, 그리고 지 원소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 탄생은 물질적인 방식으로 혹은 단순한 분리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복잡한 결합이 아닌 영적인 그리고 역동적인 결합으로 일어났다—예를 들면, 화학적 결합에 반대로 기계적 혼합처럼. 마치 원래 조약돌 속에 불꽃이 없고, 씨앗 속에도 나무가 없지만, 불이 조약돌에서 나올 수 있거나, 나무가 씨앗에서 나올 수 있듯이. 영은 살아있고, 생명은 영이며, 생명과 영 (프라크리티-푸르샤)(?)은 만물을 만들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 . 원소들 각각도 자신의 일리아스터를 가진다. 왜냐하면 모든 형태 속에 있는 물질의 모든 활동은 똑같은 샘에서 나온 발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에서 섬유를 가진 뿌리가 자라나고, 다음으로 가지와 입을 가진 줄기가 자라나며, 마지막으로 꽃과 씨앗이 된다;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이 원소들에서 태어나고, 그들의 부모의 특이성을 간직하면서, 다른 여러 형태들이 존재할 수 있는 기초적 질료로 이루어진다.” (번역자가 말한다: “이 가르침은 300년전에 전해진 것으로, 다윈에 의해서 상세하기 설명되고 새로운 형상을 취한 후에, 근대 사상에 혁명을 일으킨 사상과 동일하다. 그것은 상기아 철학에서 카필라에 의해서 한층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다.”) . . . 원소들은 모든 피조물들의 어머니로서 볼 수 없고, 영적인 성질이며, 혼을 가지고 있다.[9] 그것들은 모두 "미스테리움 매그넘(Mysterium Magnum)"에서 솟아나온다. (아테네인의 철학)
이것을 비쉬누 프라나와 비교해 보라.
“크쉐트라그냐(Kshetrajna) (육화된 영?)가 주재한 프라드하나(Pradhana) (원초의 질료)에서 여러 특질의 진화가 진행된다. . . 거대한 원리 마하트(Mahat) (보편 지성 혹은 마인드)로부터 섬세한 원소들의 기원이 진행되고 이것들에서 감각 기관들이 나온다. . .” (1권, ii.)
이와 같이 자연의 모든 근본적인 진리가 고대에는 보편적이었고, 그리고 영, 물질, 우주, 혹은 신, 질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동일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두 가지 종교 철학인 힌두교와 헤르메스 철학을 인도와 이집트의 성전에서 가져오면, 두 가지의 동일성이 쉽게 인식될 수 있다.
우리의 친구인 고(故) 안나 킹스포드 박사가 가장 최근에 번역한 “헤르메스 단편”을 읽어본 사람에게 이것이 명백하게 된다. 종파적인 그리스인과 기독교인을 통해서 그것의 구절이 왜곡되어 뒤틀려졌기 때문에, 역자는 아주 훌륭하게 직관적으로 그 단점을 잡아서 설명과 각주로 그것을 치유하려고 하였다. 그녀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 “지고의 신(Supreme God)의[10] 대리인으로서 타이탄 혹은 ‘일하는 신들’에 의한 볼 수 있는 세계의 창조는 철저히 헤르메스 개념으로, 모든 종교 체계에서 인식할 수 있고 근대 과학 연구와 일치한다. 근대 과학 연구는 모든 곳에서 신성한 힘이 자연의 여러 힘을 통해서 작용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저 보편 존재, 모든 것을 포함하는 그것, 그리고 모든 것인 그것이 자연이 구성하는 모든 것, 혼과 세계를 움직이게 한다고 헤르메스가 말한다. 보편 생명의 다양한 통일성 속에서, 그것들의 여러 변형들로 구분되는 무수히 많은 개체들이 전체가 하나이고 모든 것이 통일성에서 나오는 그런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1부.)
“신은 마인드가 아니지만, 그 마인드가 존재하게 된 원인이다; 영은 아니지만, 그 영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다; 빛은 아니지만, 그 빛의 원인이다.” (신성한 피만더, IX권, v. 64.)
위 내용은 기독교인의 “만지기(smoothing)”로 어떤 구절에서 아무리 많이 왜곡되었더라도 "신성한 피만더(Divine Pymander)"가 진정한 철학자에 의해서 쓰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한편 소위 “헤르메스 단편” 대부분은 인격화된 지고의 존재를 향한 성향을 가진 종파적인 이교도들의 산물이다. 하지만 둘 다 비의 철학과 힌두교 푸라나의 메아리이다.
두 가지 기원을 비교해보자. 하나는 헤르메스학파의 "지고의 전체(Supreme All)"에 대한 기원이고, 다른 하나는 후세 아리아인들의 "지고의 전체"에 대한 것이다. 다음은 수이다스가 인용한 헤르메스 단편의 일부이다 (킹스포드 여사의 “세계의 처녀” 참조):
“나는 위대한 신의 성스러운 작품, 하늘, 당신에게 간청한다; 나는 우주 세계가 형성되었을 때 시초에 말한, 아버지의 목소리, 당신에게 간청한다; 나는 만물을 지탱하는 아버지의 독생자, 말씀으로서 당신에게 간청한다; 호의를 베푸소서, 호의를 베푸소서.”
그 이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이렇게 이상적인 빛(Ideal Light)이 이상적 빛 앞에 있었고, 빛나는 지성의 지성(Intelligence of Intelligence)이 항상 있었으며, 그것의 통일성은 우주를 감싸는 영에 불과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신이나 천사나, 어떤 다른 본질도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그것)는 만물의 주이고 힘이며 빛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그(그것)에 의존하고 그(그것) 속에 있기 때문이다, 등.” (암몬에 대한 헤르메스 글의 단편.)
이것은 똑같은 트라이메기스토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반박된다: “신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물질적인 것은 비물질적인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 . 어떤 체나 겉모습, 형태나 질료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감각으로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해한다. 오, 타시오여! 이해한다.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것, 그것이 신이라고.” (육체적 윤리적 발췌, 스토베우스의 명문집.)
위 두 구절 사이의 모순은 명백하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을 보여준다. (가) "헤르메스"는 모든 단체의 신비가 세대들이 사용한 포괄적인 필명이었다는 것이고, (나) 어떤 단편이 부정할 수 없게 고대의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의적 가르침으로써 받아들이기 전에 큰 분별력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위의 기원문과 힌두 성전에 있는 비슷한 기원문을 비교해보자. 그것은 단편보다 훨씬 더 오래되지는 않았더라도 단편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여기서 마이트레야를 가르치는 아리안 “헤르메스”가 파라사라(Parasara), 즉 인도의 아스클레피오스이며, 삼위일체에 있는 비쉬누를 부르고 있다.
“만물을 지배하는 강력한 자, 변할 수 없는, 신성한, 하나의 보편적 성질의 영원한 지고의 비쉬누에게 영광이 있으라; 히란야가르바, 하리(Hari) 그리고 삼카라 (브라흐마, 비쉬누, 시바)이며, 세계의 창조자, 보존자, 그리고 파괴자인 그에게; (그의 숭배자들의) 해방자, 바수데바에게; 그 본질이 하나이자 다양한 그에게; 정묘하며 물질적이고, 지각없고 지각 있는 그에게; 궁극의 해방의 원인, 창조, 존재, 세계의 끝의 원인인 비쉬누에게; 세계의 뿌리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비쉬누에게 영광이 있으라.” (비쉬누 푸라나, L권.)
이것은 근저에 풍부한 철학적 의미가 놓여있는 장엄한 기원이다; 그러나 세속적인 일반인에게, 그것은 인격화된 존재의 최초를 암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둘 모두를 받아쓰게 한 그 느낌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내적 의미와 온전한 부조화 속에서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말한 똑같은 헤르메스 소론에서 발견되는 그것과도 모순이 있다:
트라이스메기스토스: “나의 아들아, 실재는 지상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거기에 있을 수가 없다. . . 지상에 있는 것은 어느 것도 실재가 아니고, 겉모습일 뿐이다. . . 나의 아들이여, 인간은 인간으로서 실재가 아니다. 진정한 것은 오직 그 자체 속에 있으며 그리고 있는 그대로 남아 있다. . . 인간은 일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실재가 아니다. 그는 겉모습일 뿐이고, 외형은 지고의 환영이다.
타시오스: 그러면, 나의 아버지, 천체들도 변하므로 실재가 아닙니까?
트라이스메기스토스: 탄생과 변화를 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다. . . 천체도 또한 변화가능한 것을 보면, 그 속에도 어떤 허위가 있다.
타시오스: 그러면 무엇이 원초의 실재입니까?
트라이스메기스토스: 오, 타시오스야, 하나이자 혼자인 그것; 물질로 만들어지지 않고, 어떤 체 속에도 없는 그것. 색깔이나 형태도 없고, 변화지 않고 전달되지도 않지만 항상 있는 그것이다.”
이것은 베단타 가르침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주된 사상은 오컬트적이다; 그리고 씨크릿 독트린에 속하는 많은 구절이 헤르메스 단편 속에 있다.
처음부터 언급했듯이, 전체 우주는 지성적 그리고 반지성적인 힘과 권능들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씨크릿 독트린은 가르치고 있다. 기독교 신학은 그런 믿음을 인정하고 심지어 강요하지만, 독단적인 구분을 해서 그것들을 “천사”와 “악마”로 말한다. 과학은 그런 것의 존재를 부정하고, 바로 그 생각을 비웃는다. 심령주의자들은 죽은 자의 영을 믿고, 이것 밖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 등급이나 종류가 무엇이건 그것들을 완전히 부인한다. 오컬티스트와 카발리스트만이 이렇게 한편으로는 독단적인 도그마로, 다른 한편으로는 독단적인 부정으로 이제 최고점에 다다른 고대의 가르침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는 유일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믿음과 불신은 영적 그리고 물리적 현현의 무한한 수평선 각각의 작은 한 모서리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 다 그들 각자의 관점에서 맞고, 둘 다 그들이 그들 자신의 특별하고 협소한 장애물 속에 전체를 둘러쌀 수 있다고 믿어서 틀리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과학, 신학, 그리고 심지어 심령주의조차도 타조처럼 발 밑의 모래에 머리를 박고 숨어서, 어리석은 머리가 차지한 그 제한된 영역과 관찰 지점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지혜가 거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구의 “문명화된” 인종의 세속인의 손에 닿을 수 있는 검토 중인 주제에 대하여 현존하는 유일한 문헌은 위에서 언급된 헤르메스의 서 혹은 오히려 헤르메스 단편이기에, 현재 그것을 비의 철학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있다. 이런 목적으로 어느 다른 것에서 인용하는 것은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대중은 아라비아어로 번역된 그리고 수피 입문가들이 보존한 칼데아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지학회 일원이었던 안나 킹스포드 여사가 최근 편집하고 해설한 “아스클레피오스의 정의”에서 어떤 것이 동양의 비의 가르침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며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적지 않은 구절에서 후대 기독교도 손에 들어갔다는 강한 인상을 보여주지만,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수호신 (지니)과[11] 신들의 특이성은 동양의 가르침이며, 다른 것들에 관해서는 우리의 가르침과는 상당히 다른 구절들이 있다. 다음이 그 몇 가지이다:
지금까지 비밀이었던, 비공개 주석에서[12] 발췌: -
(xvii) “(브라흐마 시대 각각 다음에 오는 마하-프랄라야 후에) 마하-만반타라의 최초 여명 속에서 시초의 대존재(Initial Existence)는 의식적인 영적 특질이다. 현현계(태양계)에서, 그것은 객관적 주관성에서 도취된 투시가 시야에 신성한 숨결에서 나오는 얇은 막과 같다. 그것은 라야에서[13] 나와서 무색의 영적인 유액처럼 무한으로 두루 퍼져 나간다. 그것은 일곱 번째 계에 있고, 우리 행성계 속에서 일곱 번째 상태에 있다.[14]
(xviii) “그것(시초의 존재)은 우리의 영적 시력에는 질료이다. 인간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질료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지에서 그것을 "신-영(God-Spirit)"으로 불렀다.
(xix)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하고 우리의 세계(태양계)가 세워진 최초 우파디(토대)를 형성한다. 우리의 세계 바깥에서 그것은 (태양계들 혹은) 우주의 별들, 이미 형성된 혹은 형성되고 있는 세계들 사이에서만 원시의 순수성 상태 속에서 발견된다; 라야 상태 속에 있는 그것들은 한편으로 그 가슴 속에서 쉬고 있다. 그것의 질료가 지상에서 알려진 질료와는 다른 종류이기에, 지상의 거주자들은 그것을 통하여 보면서, 그들의 무지와 환영에서 그것이 텅 빈 공간이라고 믿는다. 무궁한 (우주) 전체 속에서 손가락 하나 길이의(앵귤라) 텅 빈 공간이 없다. . . .
(xx) “물질 혹은 질료는 우리의 세계를 넘어선 세계에서처럼 우리의 세계 속에서도 칠중이다. 게다가 그것의 상태 혹은 원리 각각은 일곱 단계의 밀도로 변화된다. 수리야(태양)는 볼 수 있는 반사 속에서 일곱 번째 상태, 보편적 실재의 가장 높은 상태, 순수의 순수, 영원히 미현현한 삿트—있음(Be-ness)—의 최초로 현현된 숨결의 가장 낮은 상태 혹은 첫 번째 상태를 보여준다. 중심의 물리적 혹은 객관적 태양들 모두는 그것의 질료에서 숨결의 최초 원리의 가장 낮은 상태이다. 이것들 어느 것도 디얀 초한을 제외하고 모두의 시야에서 숨겨진 그들의 근원적 최초의 반영이상이 아니다. 디얀 초한의 체의 질료는 어머니-질료의 일곱 번째 원리의 다섯 번째 구분에 속하며, 지금까지 태양이 반영된 질료보다 네 등급 높다. 일곱 다투(Dhatu) (인체 속에 주요 질료)가 있듯이 마찬가지로 인간과 모든 대자연 속에도 일곱의 거대한 힘이 있다.
(xxi) “숨겨진 것(태양)의 실재 질료는 어머니-질료의 핵이다.[15] 그것은 우리의 태양계 우주 안에서 살아 있고 존재하는 모든 힘의 심장이자 매트릭스이다. 그것은 원자들이 그들의 기능상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움직이게 만드는 모든 힘(Powers)을 주기적인 여행에서 퍼져가게 만드는 바로 그 핵심이고, 그것들이 매 11년마다 일곱 번째 본질 속에서 다시 만나는 내면의 초점이다. 그대에게 태양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 마치 그가 태양이 실제로 일간 경로로 움직인다고 말한 것처럼, 그를 비웃어라.[16]
(xxiii) “태양의 칠중 성질 때문에 고대인들은 태양이 베다의 운율과 같은 일곱 말에 이끌려간다고 말한다; 혹은 다시 태양이 자신의 구체 안에서 일곱 “가이나(Gaina)” (존재 등급)와 동일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진실로 그것들이며, 그것들과 구분된다고 말한다;[17] 그리고 또한 그가 진실로 가지고 있듯이, 그는 일곱 광선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한다. . .
(xxv) “태양 속에 있는 일곱 대존재들은 성스러운 일곱 존재들로, 어머니 질료의 매트릭스 속에 내재하는 힘에서 스스로 태어난 존재들이다. 바로 그들이 광선으로 불리는 일곱 주요한 힘(Seven Principal Forces)을 내보내며, 이것들이 프랄라야의 초반에 다음 만반타라를 위하여 일곱의 새로운 태양 속으로 집중할 것이다. 그들이 모든 태양 속에서 솟아나서 의식적 존재로 되는 바로 그 에너지가 어떤 사람들이 비쉬누라고 (각주 참조) 부르는 것으로, 이것은 절대성의 대숨결이다.
우리는 그것을 현현된 하나의 생명—그 자체가 절대자의 반영—이다. . .
(xxvi) “절대자는 단어나 말로 결코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그 상태를 향해서 열망하는 우리의 영적 에너지의 어떤 부분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전체 물질 우주가 그것의 현현된 센터를 향해서 (우주적으로) 이끌리듯이, 우리의 영적 에너지가 그것을 향해서 영적으로 언제나 이끌린다.
(xxvii) “이 존재 상태에 있는 동안에 하나의 대생명(One Life)으로 부를 수 있는 전자—시초의 존재—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창조적 목적 혹은 형성하는 목적을 위해서 하나의 얇은 막(Film)이다. 그것은 일곱 개 상태로 현현하고, 그것들의 칠중 하위구분으로 성전에서 언급된 49개 불이다. . .[18].
(xxix) “최초는 . . ‘어머니’ (프리마 마테리아)이다. 자체를 일곱 주요 상태로 분리시키면서, 그것은 주기적으로 내려간다; 자체가 조밀한 물질로써 그것의 마지막 원리 속에서 굳어졌을 때,[19] 어머니는 자전하고, 마지막 원리의 일곱 번째 발산으로 첫째이자 가장 낮은 원소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뱀)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하이어라키 혹은 존재의 순서에서, 그녀의 마지막 원리의 일곱 번째 발산은: —
(a) 광물 속에서, 그 속에 잠재하고 있고, 그리고 음극성(Negative)을 일깨우는 양극성(Positive)에 의해서 그것의 덧없는 존재로 불려 나온 불꽃.
(b) 식물 속에서 그것은 씨앗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을 풀잎이나 뿌리 그리고 묘목으로 계발시키는 활력의 지성적인 힘이다. 그것은 그것이 안에 거주하는 그 사물의 일곱 원리의 매개체로 되는 씨앗으로, 그 식물이 성장하고 발전하면서 일곱 원리를 뻗어 내보낸다.
(c) 모든 동물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동물의 생명 원리이자 활력이다; 동물의 본능이자 특질이다; 그것의 특이성이자 특별한 성향이다. . .
(d) 인간에게서, 그것은 자연 속에 현현된 단위들 나머지 모두에게 나누어주는 모든 것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속에서 49 개 불 모두의 반영을 계발시킨다. 인간의 일곱 원리 각각은 "위대한 어머니"의 일곱 원리의 완전한 상속자이자 참가자이다. 어머니의 첫째 원리의 숨결이 그의 영(아트마)이다. 그녀의 두 번째 원리는 붓디(혼)이다. 우리는 그것을 일곱 번째로 잘못 부른다. 세 번째는 인간에게 (a) 물질계에서 두뇌 재료와 (b) 인간의 유기적 역량에 따라서 두뇌를 움직이게 하는 마인드를 제공한다. (이것이 인간 혼이다ㅡH.P.B.]
(e) 그것은 우주 원소와 지상의 원소 속에 있는 안내하는 힘이다. 그것은 잠재 상태에서 촉발되어 나와서 활동하는 존재로 된 불 속에 거주한다; 왜냐하면 * * * 원리의 일곱 하위 구분 전체가 지상의 불 속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풍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허리케인처럼 불며, 공기를 움직이고, 그 공기도 그 원리들 중에 하나에 참여한다. 주기적으로 나아가면서, 그것은 일곱 번째 원리가 생명을 불어넣는 혼인 그것의 고정된 법칙에 따라서, 그것은 물의 운동을 조절하고, 파도를[20] 끌어당기며 밀친다.
(f) 그것의 상위 4개 원리는 우주의 신들로 계발하는 씨앗을 간직한다; 그것의 하위 3개 원리는 원소의 생명들(엘리멘탈)을 낳는다.
(g) 우리 태양계에서, 하나의 대존재(One Existence)는 하늘과 땅이고, 뿌리이자 꽃이며, 행동이자 생각이다. 그것은 태양 속에 있고, 땅반딧불이 속에도 실재한다. 단 하나의 원자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고대의 성자들은 그것을 대자연 속에 현현된 신이라 현명하게 불렀다. . . .”
이런 맥락에서, 수바 로우 씨가 신비적으로 정의한 힘에 대하여 말한 것을 독자에게 환기시키면 흥미로울 것이다. “황도대의 12개 사인”과 “5년간의 신지학”을 참조하라. 그가 이렇게 말한다: “칸냐 (여섯 번째 사인, 혹은 처녀궁)는 처녀를 의미하고, 샤크티 혹은 마하마야를 나타낸다. 이 사인은 . . . . 여섯 번째 라시 혹은 구분이고, 대자연 속에 있는 여섯 가지 1차 힘 (일곱 번째에 의해서 통합된다)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 . .
이 샤크티는 다음과 같다:
(1) 파라샤크티(Parasakti). 글자 그대로 위대한 혹은 지고의 힘 혹은 권능. 그것은 빛과 열의 힘을 의미하고 포함한다.
(2) 그냐냐샤크티(Jnanasakti) . . . 지성, 진정한 지혜 혹은 지식의 힘. 이것은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그것이 물질 상태의 영향이나 통제 하에 놓였을 때 그것의 몇 가지 현현이다. (a) 우리의 감흥을 해석하는 마인드의 힘. (b) 과거의 생각(기억)을 불러와서 미래의 기대를 일으키는 힘. (c) 근대 심리학자들이 "연상의 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나타난 힘. 그 법칙은 다양한 그룹의 감흥과 감흥의 가능성 사이에서 지속하는 연결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해서, 외적인 대상에 대한 개념이나 생각을 발생시킬 수 있게 해준다. (d) 기억이라는 신비스러운 연결고리로 우리의 개념들을 연결시키고, 자아 혹은 개체성의 개념을 생기게 하는 힘; 그것이 물질의 구속에서 해방될 때 그 힘의 현현은 (1) 투시력, (2) 싸이코메트리이다.
(3) 이차하샤크티(Itchasakti)—의지의 힘. 그것의 가장 일상적인 현현은 원하는 대상의 성취를 위해서 필요한 그런 근육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신경 흐름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4) 크리야샤크티(Kriyasakti). 그것의 내재하는 에너지로 외부에서 지각가능한 현상적 결과를 만들 수 있게 하는 사고의 신비한 힘. 고대인들은 만약 관심이 어떤 생각에 심오하게 집중된다면, 어떤 개념이건 자체를 외적으로 현현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강렬한 의지는 원하는 결과가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기는 보통 이차하샤크티와 크리야샤크티로 기적을 행한다.
(5) 쿤달리니-샤크티(Kundalini Sakti). 곡선 모양의 길로 움직이는 힘. 그것은 자연의 모든 곳에서 현현하는 보편적 생명-원리이다. 이 힘은 인력과 반발의 두 가지 거대한 힘을 포함한다. 전기와 자성은 그것의 현현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허버트 스펜서에 의하면 생명의 본질이라는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연속적인 조정," 그리고 고대 힌두 철학자들의 가르침에서 혼의 이주의 토대인 “내적 관계에 대한 외적 관계의 연속적인 조정”을 일으키는 힘이다. 요기는 그가 모크샤을 성취할 수 있기 전에 이 힘을 완전하게 복종시켜야 한다.
(6) 만트리카-샤크티(Mantrika-sakti). 문자, 말 혹은 음악의 힘. 만트라 샤스트라는 그 주제로 이 힘이 모든 현현 속에 가지고 있다. . . 멜로디의 영향은 이것의 보통 현현 중에 하나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름의 힘이 이 샤크티의 극치이다.
근대과학은 위에서 언급된 (1), (2), (5)의 힘을 부분적으로 조사하였지만, 나머지 힘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6가지 힘은 그것의 통일성으로 “다이비프라크리티” (일곱 번째, 로고스의 빛)으로 나타내어진다.
위의 내용은 똑같은 주제에 대하여 힌두교의 진정한 생각을 보여주기 위하여 인용된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의 10분의 1정도를 커버하지 못하지만, 그것 모두가 비의적이다. 우선, 언급된 여섯 가지 힘의 여섯 가지 이름은 디얀 초한의 여섯 하이어라키들의 힘으로, 그들의 최초(Primary)인 일곱 번째에 의해서 통합되며, 그들은 신비한 의미에서 “어머니” 혹은 우주 성질의 다섯 번째 원리를 인격화한 것이다. 요기의 힘만 열거하는 데 10권 정도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힘 각각은 그 꼭대기에 살아 있는 의식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힘은 그 존재의 발산이다.
그러나 방금 인용된 주석과 "삼중의 위대한" 헤르메스의 말을 비교해 보자:
“태양에 의한 생명의 창조는 태양의 빛처럼 연속적이다; 아무것도 그것을 제한하거나 제지하지 못한다. 태양 주위에, 위성들의 군대처럼, 수없이 많은 지니(수호신)들의 성가대가 있다. 이들은 "불멸자들" 이웃에 거주하고, 그래서 인간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은 폭풍, 폭풍우 그리고 불의 이동과 지진으로 신의 의지(카르마)를 수행한다; 마찬가지로 불신에 대한 처벌로, 기근과 전쟁으로 신의 뜻을 수행한다.[21] . . 모든 피조물을 유지하고 자양분을 주는 것이 태양이다; 그리고 심지어 감각의 세계를 둘러싸는 이상적인 세계가 그 감각의 세계에 다양하고 풍부하게 형태를 채우듯이, 태양도 그 빛 속에 만물을 감싸면서 모든 곳에서 피조물들의 탄생과 발전을 성취한다. . .“ “태양의 명령아래 수호신의 성단 오히려 성단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양하게 많이 있고, 그들의 숫자가 별들의 수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모든 별은 성질상 혹은 오히려 그들의 작용으로 선과 악의 수호신(지니)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작용이 수호신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 이 모든 수호신들은 세속의 일을 주재하고,[22] 그들은 국가와 개인들의 구성을 흔들고 뒤엎는다; 그들은 그들의 유사성을 우리 혼에 각인시키며, 그들은 우리의 신경 속에, 골수 속에, 정맥, 동맥, 그리고 바로 우리의 뇌의 물질 속에 존재한다. . . . 우리 각자가 생명과 존재를 받자마자, 탄생을 주관하는,[23] 그리고 아스트랄 힘 (초인간의 아스트랄 영) 아래로 분류되는 지니(엘리멘탈)가 책임을 맡게 된다. 그들은 끊임없이, 항상 똑같지 않게 변하며,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24] 그들은 혼의 두 부분이 체에 스며 들어가서 체가 각자로부터 자신의 에너지의 각인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혼은 이성적인 부분은 지니에 영향받지 않는다; 그것은 신을[25] 수용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며, 신이 그것을 태양 광선으로 일깨운다. 이렇게 환하게 밝혀진 사람은 그 수가 적으며, 지니는 그런 사람을 피한다: 왜냐하면 지니나 신들은 단 하나의 신의 광선이 있는 곳에서는 아무 힘도 없기 때문이다.[26]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은 혼과 체가 지니에 의해서 안내되고, 그들은 지니에 달라붙어서, 지니에게 영향을 미친다. . . 그래서 지니가 세계의 사물에 대한 통제를 가지고 우리의 여러 체가 그들의 도구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 .”
위의 인용문은 몇 가지 종파적인 요점을 제외하고 약 1세기 전까지 모든 나라에서 보편적인 공통의 믿음이었던 것을 나타낸다. 소수의 유물론자와 과학자를 제외한다면, 그것은 이교도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폭넓은 윤곽과 특징에서 여전히 정통적이다.
헤르메스의 지니와 그의 “신들”로 부르건, 라틴 교회와 그리스 정교처럼 “암흑의 힘(Powers of Darkness)”과 “천사(Angels)”로 부르건, 혹은 심령주의처럼 "사자의 영" 또는 다시 인도와 이슬람 국가에서 여전히 부르듯이, 부트(Bhoots)와 데바(Devas), 샤이탄(Shaitan) 혹은 진(Djin)으로 부르건, 그것들 모두가 똑 같은 하나이다—환영이다. 하지만, 베단타 학파의 위대한 철학 가르침이 서구의 학파에 의해서 최근에 왜곡되어왔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자로부터 발산하고, 절대자는 그의 절대성만으로, 유일의 실재로 있다—그래서 이 절대자에게 이질적인 모든 것, 발생의 요소와 원인의 요소는 가장 부인할 수 없게 환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순수한 형이상학적의 관점에서만 그렇다. 자신을 멘탈적으로 온전하다고 여기며, 그의 이웃들도 그렇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미친 형제의 비전—그의 환상이 경우에 따라서 그 희생자를 행복하게 혹은 지독히 비참하게 만든다—을 환영과 환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의 혼란된 마인드 속에 있는 끔찍한 그림자, 즉 그의 환영이 당분간은 그의 의사나 그의 관리자가 볼 수도 있는 사물만큼이나 실제이며 사실이 아니라는 그 미친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것이 이 우주 속에서 상대적이고, 모든 것이 환영이다. 하지만 어느 계에서의 경험은 의식이 그 계에 있는 지각하는 존재에게는 실재이다; 말한 경험이 순전히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객관적 실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나 비의 가르침이 싸워야 하는 상대가 형이상학자들이 아니라, 물리학자들과 유물론자들이다. 그리고 이런 활력, 빛, 소리, 전기에 대하여, 심지어 객관적으로 사물을 끌어당기는 자성에 대해서 조차도, 어떤 객관적 존재가 없으며, 단순히 "운동의 방식," "물질의 감흥과 감성"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오컬티스트들과 신지학자들은 근대 과학자들의 관점과 이론이 신지학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지학회의 첫 번째 규칙은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지학생이 과학의 본질적인 가치를 인식하는 첫 번째이다. 그러나 고위 사제들이 의식을 두뇌 회백질에서 나온 분비물로 귀착시키고, 그리고 자연 속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을 운동의 방식으로 귀착시킨다면, 우리는 그 가르침이 과학적 관점에서 그리고 심지어 비의적 지식의 오컬트 측면보다 그리고 심지어 그 이상 더 비철학적이고 자기모순적이며 간단히 터무니없는 것으로 반대한다.
조롱받는 카발리스트들의 아스트랄 빛은 진실로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이상하고 기묘한 비밀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교란된 파도ㅡ 속에 숨겨진 신비, 유물론자와 조롱하는 사람들 전체가 거기에 있다.[27] 다른 많은 신비들과 함께, 이 비밀들은 우리 시대의 유물론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마치 중세시대 초기에 미국이 서구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반면에 스칸디나비아인이나 노르웨이인들은 여러 세기 전에 매우 오래된 “신세계”에 실제로 도착하여 정착했었다. 하지만 콜럼버스가 태어나서 정반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재발견해서 구세계가 믿도록 만들었듯이, 현재 오컬티스트들이 다양한 여러 형태의 거주자들과 의식적인 실체들과 함께 에테르 영역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신비들을 발견할 과학자가 태어날 것이다. 그러면 싫든 좋든, 과학은 몇 가지 다른 것들처럼 오래된 “미신”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판단해볼 때, 일단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박식한 교수들은 아마도 메즈머리즘과 자성의 경우처럼, 이제 최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듯이, 그것의 창시자라고 하면서 그 이름을 거부할 것이다. 몰레스코트가 더 오래된 "(과학적) 두뇌의 신경 섬유 사이에서의 자동적 물리적 과정"의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듯이, 새로운 명칭의 선택은 “운동의 방식”에 달려 있을 것이다; 아마도 명명자의 마지막 식사에 좌우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물질 이상주의 체계의 창립자에 따르면, “대뇌 기능은 총칭적으로 유미와 같기 때문이다.”[28] 이런 터무니없는 명제를 믿는다면, 고대 것의 새로운 이름은 시험삼아 명명자의 간장의 영감에 맡기는 것이고, 그래서 이런 진리들이 과학적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일반적으로 맹목적인 대중에게 아무리 불쾌하더라도, 진리는 그녀를 위해서 죽을 준비가 된 투사를 항상 가졌으며, 새로운 이름이 무엇이건 과학이 그것을 채택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오컬티스트들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오컬트 진리가 과학자들의 수용과 주목으로 절대적으로 강제될 때까지 심령주의자들의 현상과 다른 심령 현상들처럼 금기시될 것이지만 결국에는 이전의 중상자들이 최소한의 인정이나 감사 없이 채택하게 될 것이다. 질소의 발견은 화학 지식에 상당한 것을 추가시켰지만, 그것의 발견자인 파라셀수스는 오늘날까지도 "돌팔이"라고 불린다.
훌륭한 저서인 “문명사” (1권, 256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H.T. 버클의 말이 매우 심오하게 맞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정 때문에 (카르마 규정—H.P.B) 가끔 위대한 사상가들이 나타나며, 그들은 그들의 삶을 단 하나의 목적에 전념하면서, 인류의 진보를 예상할 수 있고 결국에는 중요한 영향을 일으키는 어떤 종교나 철학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조사해보면, 새로운 의견의 기원이 단 한사람 때문일지라도, 그 새로운 의견이 만든 결과는 그것이 전파된 사람들의 조건에 달려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볼 것이다. 만약 어떤 종교나 철학이 국가에 비해서 너무나 앞선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봉사를 주지 못하고 사람들의 마인드가 그것을 받아들일 정도로 익을 때까지 그것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29] 모든 과학, 모든 신조는 그것의 순교자가 있어왔다. 사건의 보통 흐름에 따르면, 몇 세대가 지나가서, 그러면 이런 진리들이 상식적인 사실로써 간주되는 시기이 오며, 좀 더 지난 후에는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선언되는 또 다른 시기가 와서, 심지어 가장 둔한 지성조차도 그 진리가 어떻게 거부되었을 수 있을까 의아해하게 된다.”
현재 세대 사람들의 마인드가 오컬트 진리를 받아들일 정도로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거의 가능하지 않다. 오컬트 철학을 충분히 무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역사가 여섯 번째 근원인종의 진보한 사상가들에게 제공된 회상이 그럴 것이다. 한편, 우리의 다섯 번째 인종의 세대는 편견과 선입견으로 계속해서 빗나갈 것이다. 오컬트 과학은 모든 거리 골목에서 조롱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며, 모든 사람이 유물주의와 소위 과학이라는 더 큰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그 이름으로 오컬트 과학을 조롱하고 뭉개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본서를 완성하는 부록에서는 몇 가지 과학의 반대에 대한 예상되는 답으로 과학과 오컬트의 상호 입장이 제시된다. 신지학자와 오컬티스트는 귀납적 과학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는 대중 여론에 비난받고 있다. 그래서 귀납적 과학도 조사해봐야 한다; 그리고 자연 법칙 영역에서 과학의 발견과 성취가 우리의 주장이라기보다 자연속에 있는 사실과 얼마나 대조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근대 여리고의 성벽이 너무 난공불락이어서 오컬트 트럼펫 소리가 그 성벽을 무너지게 만들 수 있을지 확인할 때가 되었다.
빛과 전기를 앞세우는 소위 여러 힘과 태양의 구조가 주의 깊게 조사되어야 한다; 또한 중력과 성운의 이론도 그렇다. 에테르와 다른 원소들의 성질도 논의되어야 한다: 이렇게 과학의 가르침과 오컬트 가르침을 비교하면, 지금까지 비밀이었던 오컬트 가르침의 비밀 원리를 드러낼 것이다. (부록 참조.)
약 15년 전에, 필자는 카발리스트들 다음으로 비의 교리문답에 있는 현명한 계율을 따른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대 입을 다물어라, 그대가 이것(신비)에 대하여 말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대의 가슴을 닫아라, 그대가 크게 생각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대의 가슴이 그대로부터 도망갔다면, 그것을 원래 위치로 데려와라,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동맹(결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세페르 제지라, 창조의 서.) 그리고 다시: “이것은 죽음을 주는 비밀이다: 그대 입을 다물어라 그대가 그것을 세속인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그대 두뇌를 꽉 눌러라, 어떤 것이 두뇌에서 도망쳐서 바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입문의 규칙.)
몇 년 후에, 아이시스의 베일의 한 모퉁이가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더 큰 틈이 만들어졌다. . .
그러나 오래되고 유서깊은 잘못—날마다 점점 더 현란하고 자명해지는—이 그때처럼 지금도 전투 태세로 정렬해서 서있다. 맹목적 보수주의, 자만 그리고 편견으로 집결된 채, 그것들이 이제 오랜 잠에서 깨어나서 들어가려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진리를 질식시키려고 준비한 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로 된 이후 언제나 그러했다. 이것은 모든 경우에 오래된 고대 진리를 밝히는 계시자들에게 도덕적 죽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또한 얼마 안 되는 적은 가르침을 드러내는 것만으로서도 혜택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에게는 생명과 재생을 가져다주는 것이 확실하다.
[1] "베다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하나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베다의 생명 같은 스바라(swara)—음조—와 운율(metre)로 나타낸 것이다. 박식한 학자와 언어학자들은 당연히 "스바라"는 철학이나 고대 비의 가르침과는 관련 없다고 부인한다; 그러나 스바라(swara)와 빛(light) 사이의 신비스러운 연결 고리가 가장 심오한 비밀들 중에 하나이다. (T. 수바 로우, “5년간의 신지학,” 154페이지.)
[2] 또한 "지혜의 아들들(Sons of Wisdom)"로, 그리고 "불 안개(Fire-Mist)의 아들들"로 그리고 중국 기록에서는 "태양의 형제들"로 불렀다. 복건성 지방의 신성한 도서관에 있는 사본에서 티베트(Si-dzang)가 붓다 이전 태고 시대부터 오컬트 학습의 위대한 중심지로 언급된다. 위대한 유(Yu) 황제 (기원전 2,207년), 경건한 신비가이자 위대한 초인은 그의 지식을 티베트에 있는 “눈 덮인 능선의 위대한 교사들”로부터 얻었다고 말하고 있다.
[3] "그대가 기도할 때, 그대는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고 . . . 그대의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비밀 속에 있는 그대 아버지에게 기도하라." (마태복음 6장 5-6). 우리의 아버지는 “비밀 속에” 우리 속에, 우리 혼의 인식의 “내면의 방” 속에 있는, 우리의 일곱 번째 원리이다. "천국"과 신의 나라는 밖이 아닌, "우리 속에 있다"고 예수는 말한다. 왜 기독교도들은 그들이 기계적으로 반복하면서 즐거워하는 지혜의 말의 자명한 의미에 그렇게 절대적으로 눈이 멀었을까?
[4] 그것에 대하여 헤르메스 단편 (“세계의 처녀” 참조)의 유능한 번역가이자 편찬자인 고(故) 킹스포드 여사(박사)는 각주에서 말한다; "메나드 박사는 그리스어에서 똑같은 단어가 '태어나다'와 '되다'를 나타낸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여기서 세계의 재료가 본질에서 영원하지만, 창조 전에 혹은 ‘되어가기(becoming)’ 전에 그것은 수동적이고 운동하지 않는 상태 속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것은 작용하게 되기 전에 '있었다'; 이제 그것이 ‘되고 (생겨나고), 즉 그것이 움직이며 진행한다.” 그리고 킹스포드 여사는 헤르메스 철학의 순전히 베단타 철학의 가르침을 추가한다. "창조는 이렇게 신의 활동기간 (만반타라)으로, 헤르메스 사상에 따르면 (혹은 베단타 사상에 따르면), 신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지고 있다—활동 또는 존재, 신이 진화시켰다(Deus explicitus); 존재의 수동성 (프랄라야), 신이 끌어들였다(Deus implicitus). 두 방식은 인간이 깨어 있는 상태와 수면 상태처럼 온전하고 완전하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다양한 것으로의 존재(Daseyn)를 통해서만 아는 하나(One)로서 존재(Seyn)를 구분하고 있다. 이 견해는 철저히 헤르메스적이다. '이상적 형태'는 신플라톤 학파의 원형 개념이다; 사물의 영원하고 주관적인 개념이 '되어가기' 전에 신성한 마인드 속에서 존속한다. (p. 134.)
[5] 원심력과 구심력은 남성과 여성, 양과 음, 물질과 영으로 둘 다 하나의 원초의 힘(Primordial Force)이다.
[6] 오컬티즘에서 그 이상적인 유형이 주관계에 존재하지 않으면, 어떤 형태도 자연이나 인간이 형태를 부여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 이상이다; 어떤 형태나 형체도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최소한 근사치라고 원형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인간의 의식 속으로 혹은 그의 상상력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7] 이 단어는 하트만 박사가 그 앞에 가지고 있는 파라셀수스의 원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위대한 장미십자회원에 따르면: "미스테리움(Mysterium)은 거기에서 어떤 것이 계발되어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으로, 그 안에 씨앗처럼 간직되어 있다. 씨앗은 식물의 ‘미스테리움’이고, 알은 살아있는 새의 미스테리움이다, 등등.”
[8] 소우주(Microcosm)라는 용어들 인간에게 적용한 사람들은 유대인과 한 두 명의 신플라톤학자들을 따르는 중세 카발리스트들 뿐이었다. 고대 철학은 지구를 대우주의 소우주로 그리고 인간을 그 둘의 산물이라 불렀다.
[9] 동양의 오컬티스트가 말한다—“원소는 영적 존재들에 의해서 안내되고 활기가 채워진다”—영적 존재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오컬트 자연의 베일 뒤에 있는 작업자 혹은 비밀 속에 있는(in Abscondito) 자연이다.
[10] 말한 단편에서 빈번하게 나온 표현을 예외로 한다. "보편 마인드(Universal Mind)"는 어떤 존재(Being) 혹은 “신(God)”이 아니다.
[11] 헤르메스 철학자들은 우리가 데바, 디얀 초한, 취트칼라(Chitkala) (불교도가 관-음으로 부름) 그리고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그런 실체들을, 테오이(Theoi), 신(gods), 지니(Genii) 그리고 데몬(Daimones) (원본에서)으로 불렀다. 데몬—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심지어 동양과 라틴 신학 의미에서도—은 인류의 수호령이다; 헤르메스가 말하는 것처럼, “불멸자들 이웃에 거주하며, 인간사를 지켜보는 존재들이다.” 비의철학 용어로 그들은 취트칼라로 불리며, 그들 중에 어떤 존재들은 그들 자신의 본질에서 인간에게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원리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다른 존재들은 소위 피트리(Pitris)들이다. 우리가 완전한 인간의 생산을 다룰 때 이것이 설명될 것이다. 그 이름의 어원은 치티(Chiti)이다. "지식의 작용과 종류의 결과 및 영향이 그것에 의해서 혼 혹은 양심, 인간 속에 있는 내면의 목소리가 사용하도록 선택되는 것이다." 요기들에게, 치티는 마하트, 즉 첫 번째이자 신성한 지성과 동의어이다; 하지만 비의 철학에서는 마하타가 치티의 뿌리이고, 그것의 씨앗이다; 그리고 치티는 붓디와 연결된 마나스의 특질로, 그것이 인간 속에서 충분히 계발할 때 영적 친화력으로 자신에게 치트칼라를 끌어당기는 특질이다. 이것이 치티가 신비적 생명을 얻어서 관-음이 되는 목소리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12] 이 가르침은 우리의 작은 우주 경계선 넘에 있는 프라크리티-푸루샤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13] 궁극의 고요 상태: 일곱 번째 원리의 열반 상태.
[14] 그 가르침이 우리의 의식계에서 주어진 전부이다.
[15] 혹은 “과학의 꿈,” 어느 인간도 이번 인종 혹은 라운드에서 객관화시킬 수 없는 원초의 실제로 동질적 물질.
[16] “비쉬누는 태양의 활동 에너지 형태로 상승하지도 고정되지도 않고, 칠중 태양이면서 그것과 구분된다”고 비쉬누 푸라나에서 말한다. (2권, 11장.)
[17] “어떤 사람이 스탠드 위에 놓인 거울에 다가가서, 그 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마찬가지로 비쉬누 (태양)의 에너지 혹은 반사가 결코 분리되지 않고 거기 있는 거울 속에 있듯이 태양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비쉬누 푸라나)
[18] “비쉬누 푸라나”와 다른 푸라나에서.
[19] “그녀가 ‘천상의 인간’을 만날 때 주기적으로 물질 속으로 하강하는” 헤르메스의 “대자연” 참조.
[20] 위 내용의 필자는 파도와 조수 등등의 물리적 원인을 완전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전체 우주 태양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이고, 그런 표현이 신비적인 관점에서 사용될 때마다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21] 스탠저 3과 4 그리고 그것의 주석을 참조하라. 특히 스탠저 4에 있는 카르마의 대리인, “리피카와 마하라자 넷”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22] 그리고 “신” 혹은 디야니스, 수호신(지니) 뿐만 아니라 “안내된 힘”도.
[23] 이것의 의미는 인간이 모든 위대한 원소들—화, 풍, 수, 지 그리고 에테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원소들에 각각 속하는 엘리멘탈은 그들의 공동-본질 때문에 인간에게 끌린다. 어떤 구성요소에서 우세한 바로 그 원소가 평생에 걸쳐서 지배하는 원소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만약 어떤 사람이 땅의 원소가 우세하다면, 놈(땅 요정)이 동화시키는 금속—돈과 부 등등—으로 그를 이끌어줄 것이다. "동물 인간은 동물 원소의 아들이고, 그 원소에서 그의 혼(생명)이 태어났으며, 동물은 인간의 거울이다"라고 파라셀수스가 말한다 (“지혜의 근본”). 파라셀수스는 신중했고, 그가 말한 것과 성서가 일치하길 원했으며, 그래서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24] 발전에서 주기적인 진보.
[25] 인간 속에 신 그리고 자신의 일곱 번째 원리의 실재뿐만 아니라, 인간 속에서 고도로 영적인 디얀 초한, 즉 신의 화신.
[26] 그러면, 여기서 “신(God)”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격화된 소설의 "성부"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은 집합적으로 엘로힘이고, 그 무리와 분리된 존재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신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여기서 “적은 수”의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은 높은 입문자들과 초인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람들이 “신들(gods)”을 믿고, “신(God)”이 아닌 하나의 보편적 무조건의 말하지 않는 신성(Deity)을 안다.
[27] 카발리스트들의 아스트랄 빛이 “아이테르(AEther)”로 아주 잘못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 아이테르가 과학의 가설적인 에테르(Ether)와 혼동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신지학자들이 이 두 가지가 아카샤(Akâsa)와 동의어로 말한다. 이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합리적 반박”의 저자는 "아카샤의 특징을 묘사한다면, 그것을 에테르로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 보여줄 것이다” 라고 쓰면서,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오컬티즘을 돕고 있다. “차원 속에서 그것은 무한하다; 그것은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지 않았고, 색이나 맛, 냄새 그리고 촉감이 그것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공간, 이쉬바라 (“주(Lord),” 오히려 창조적 효능이자 혼—애니마 문디)에 정확하게 상응한다. 그것의 특수성은 소리의 물질적 원인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그것을 텅 빔(vacuity)과 하나로 여길 것이다" (120페이지.)
의심할 여지없이 합리론자들에게 그것은 텅 빔이다. 하여튼 아카샤가 유물론자들 두뇌 속에서 분명히 텅 빈 상태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샤가 과학의 에테르도 아니고, 심지어 오컬티스트의 에테르가 아니더라도, 오컬티스트는 에테르를 아카샤의 원리들 중에 하나로만 정의한다. 그리고 에테르는 결코 물질적 원인이 아니라, 물리적 영적 원인으로 아카샤와 함께 확실히 소리의 원인이다. 에테르와 아카샤의 관계는 아카샤와 에테르 두 단어가 모두 베다에 있는 신에 대하여 말한 단어에 적용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자신이 진실로 자기자신의 아들이다." 하나가 다른 것의 자손이면서 그럼에도 자체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 어려운 수수께끼일 수 있지만, 신비가가 아니더라도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것이다.
[28] 1887년 1월 9일 내셔널 리포머. 르윈스 박사의 “정신-우주-생물학(Phreno-Kosmo-Biology)”.
[29] 이것이 주기적 법칙이지만, 이 법칙 자체가 종종 인간의 완고함으로 거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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