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누정과 누정시의 사회 문화적 맥락을 찾아서~
라는 타이틀을 거창하게 내걸로 목포문인협회에서는 그 아름다운 답사를 시작했다.
여행이라는 설렘은 가기 전에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전날 저녁에 마실거리와 먹거리를 슈퍼에서 구입하고
시원해야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냉장보관해 달라 부탁하고는
그래도 빠진 것이 없는지 여러 가지 체크하는 시간!
그 시간이 아마 여행의 즐거움의 반절값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함께 할 식구들을 떠올리게 하고
또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궁리하게 하고
그 중에 특별하게 필요한 것을 챙겨야 함에는 그들의 식성이나 기호까지
알아야 하는 세심함이 함께 하는 것이어서 情이라고 하는
전라도 情理라고 하는 것이 흥건하게 느껴지는 시간이기에~~
원로 선생님들을 모시고 가야 하는 책임감이 있기에
이른 7시부터 서둘러 준비하고
슈퍼에서 전날 키핑해 둔 하루 간식거리를 챙겨
함께 할 일행들을 기다렸다.
이순애 선생님이 운전하는 차에 윤경관 선생님과 강해자 선생님이 동승했고
해양수산청에 도착해 보니 박경서 선생님과 김영천 선생님
그리고 도립 도서관에서 저의 시낭송 강의를 수강하는 송남순 선생님과 정순희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학래 선생님을 모시고
두 차에 나눠타고 룰루랄라 답사길에 올랐다.
장흥의 누정 중에 강진과 장흥 사이에 위치한 사인정이 그 첫 번째 답사 코스였다.
아무래도 목포에서 시작한지라 김영천 선생님께서 미리 짜 오신 코스대로 하나 하나
짚어가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그 준비의 치밀함에 박수를 보내며 좋아했다.
사인정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김필이 지낸 의정부 벼슬이름에서 따왔다.
장흥은 은둔의 땅으로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청렴한 고을로
예로부터 문인들이 많이 배출 되어 문향이라 불리며 느림의 미학으로 살아온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적지라고 생각한다.
조선 초기 이조참판을 지냈던 김필이 단종 폐위 후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은둔하던 정자다.
김필은 장흥 출신으로 임금 앞에서 시험을 쳐 당상관의 반열에 오르는
중시에 합격한 유일한 인물로 유명하다.
사인정은 은둔의 땅답게 높이를 탐하지 않고 제 모습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고즈넉하게 그냥 앉아 있을 뿐이다.
김필은 사인정에 머물며 매일 단종이 묻힌 북쪽을 향해 4번 절을 하고,
그 충정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정자는 사방으로 마루를 두르고 가운데 방을 들였다.
정자의 형식은 ㅁ자형으로 마치 대둔산의 일지암과 흡사하다
그러나 이고 있는 지붕의 형태가 다를 뿐이다.
민흘림기둥들이 지붕을 이고 있고 사방으로 난 문은 위로 열려
앉아 있노라면 청풍이 지나가고
또 달빛 또한 바로 와 앉을 만큼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내려다 보는 풍광 또한 좋을 뿐 아니라
올려다 보는 앙망도 아주 탁월하다.
방 안에 들어 서늘한 마루에 앉아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밖을 내다보면
보성강을 지나 장흥천으로 합류하여 사인정 아래를 흐르는 예양강이 펼쳐지고
그 예인강은 탐진강이 되어 또 구강포로 흘러 바다로 드는것이다!
이 물줄기가
그대로 전경이 되어 마당으로 들어오는 멋진 자리에 서 있다.
사인정 정자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는데
그중 글귀가 금색으로 칠해진 것이 눈에 띈다. 세종이 내린 ‘어제’다.
세종이 내린 글귀.
‘비가 내렸으나 반은 맑고 반은 흐리니 민심도 그에 따르는구나.’
이에 김필이 답하였다 한다.
‘날이 저물며 비록 구름이 일었으나 달이 돋아 오르니 걱정할 것이 없다.’
김필의 답이 걸린 주련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다.
또한 이곳은 생육신 김시습이 김필을 찾아와 십여 년 머문 곳으로 유명하다.
사인정 뒤편의 바위에는 ‘제일강산’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하이 망명을 떠나던 길에 사인정에서 하룻밤 묵어가면서 남긴 글씨다.
그만큼 정자 아래를 흐르는 맑은 물과 사인암의 절벽이 최고의 풍광이라는 뜻이다.
뚝뚝 떨어져 있는 이 글의 운치는 글로 느낄 수 없을 만큼 멋진 현장감이 있다.
정자의 사인정 차운기.
우뚝 서서 깊은 물에게 어느 해이던가 묻는데
안개 낀 골짜기는 깊고 깊어 별다른 세계구나.
추수하는 노인과 나무하는 아이는 산 그림자 밖에 있고
모래섬에서 나는 해오라기는 빗소리와 섞인다.
옛날에는 신선들이 노닐던 곳이었고
오늘은 원수가 그를 거두는 내가 되었네.
앞마을 머리 센 노인에게 묻노니
먼저 온 절도사 깃발 든 이 몇이나 되는가?
절도사 조우석이 적다.
사인정의 멋진 자태를 보기 위해서는
고즈넉한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계단을 뒤로 하기 다른 일정을 찾아 나서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우리는 우산자리를 하나씩 깔고 앉아 막걸리를 비웠다.
그리고 연곡서원에느 배롱나무 꽃이 흐들지게 피어 있었다.
배롱나무 꽃이 세번 피었다 질 즈음 가을은 온다는데
박경서 선생님은 벌써 가을을 느끼셨을까~!? 그 미소에서 가을 냄새가 난다.
사인정을 나와 장흥 연곡서원과 장흥향교를 들러
토요시장 안에 있는 한라네소머리국밥집에서 국밥 한그릇씩을 비웠다.
단돈 5000원
지금 그 어디에도 5000원짜리 밥 한그릇 찾기가 여간 힘들다는 것은~~
단백한 국물맛에 유명한 집이라고 김영천 선생님께서 예산을 고려해 선택한 집에서
맛있게 소머리국밥으로 마음의 점을 찍었다.
점심을 먹고 찾은 부춘정
富春亭은 선조 31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남평 문씨 淸潁 문희개 선생(1550 -1610)이 지은 고향에 돌아와서
본인의 호를 따 청영정이라고 세운 정자를
헌종 4년경(1838)에 淸風 김씨 令同正公波의 20세 후손인 金基成이 사들여 고쳐 짓고
부춘정으로 이름 하였다.
이후 세손 김길통(1408~1473)이 전라 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자주 이곳에 와서 산수풍경을 즐겼다고 하여 부춘리 춘정마을(春亭)의
전체 터와 정자를 사들여 오늘과 같은
면모를 자랑하고 있다.
주변의 송백림과 함께 서쪽 탐진강이 남쪽으로 흐르고 있어
그 경치가 수려한 장관을 이루고 있고
잠시 들르는 객들에게 고즈넉한 휴식을 준다.
때 마침 동네 김원식(75세) 어르신이 오셔서 부춘정의 유래와 현판시들을
설명해 주시고....
부춘정을 짓고서(富春亭原韻)
조 수 겸
정자를 푸른 산 앞자락에 지었으니
竹樹 고을 한 언덕이어라
여울물이 비었으니 명월이 찾아들고
고을은 궁벽하여 흰구름 쉬어가네
고기 잡고 나무하는 즐거움에 취하니
그 뉘가 숨어 즐기는 즐거움을 알리요
동대 천길이나 되는 돌이여
지난날 모든 자취 여기 있노라
부춘정에서 서로의 시를 읊조리고
부춘정 현판시들을 돌아가며 읊고
또 시낭송을 하면서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정자문화는
과거와 현재의 역사와 문화
는 매우 이질적이고 깊은 단절을 겪은 것이라는 것을
그 모습으로 보여준다.
정자의 위치나 모습 등을 보면 건축학이나 조경학을 전공하는 분들까지도
참여할 여지가 있는 분야가 정자를 중심으로 한 선비문화에 연구이다.
과거처럼 정치사 등의 거시 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가문이나 학통의 사승관계와 같은 미시 담론을 통해서도
우리의 과거를 해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고스라니 느끼게 했다.
특히 호남지역에서는 그 단서가 정자라고 하는 것이다.
담양에 가사문학을 탄생시킨 정자들이 많지만
장흥에 이렇게 많은 정자들이 선비문화의 잔재로서
남아 있다는 것도 이번 답사를 통해서 알게 된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이 밖에도 우리가 들르지 못한
창량정 수녕정 흥덕정 경호정, 영귀정 등 9개의 정자를 거느리고
탐진강이 도도히 흐른다고 하니 그 정자들을 안고 흐르는 탐진강을 따라
강길, 또는 강섶 답사를 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자전거나 도보로 말이다.
부춘정의 청풍은 정말 선물이었다.
아니 거만한 여름을 조롱하는 한낱 자연의 기품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용호정은 부산면 용반리 탐진강 상류에 용소라 불리는 곳의 벼랑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정자는 조선 순조 28년(1828)에 최규문이 부친 최영택을 위해 지은 것이다.
최규문은 강 건너 부친의 묘가 비로 넘쳐 성묘를 하지 못하고
용소 벼랑 끝에서 바라만 보며 아버지의 명복을 빌었는데
이에 내심 안타까워하다가 최규인이 형제들과 규합하여 부친을 위해 초정을 지어
부친에 대한 자식의 효성됨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부친을 바라보는 정자요”
“부친을 위로하는 정자”라고도 하였다.
용호정은 사방 팔각지붕이고 기둥은 밤나무와 귀목만을 사용하여 지었다.
특히 마루는 못을 사용하지 않은 특수공법으로 만들어졌다.
부춘정은 ㅁ자형인 사인정과는 달리 ㄷ자 형으로 되어 있고
이 용호정은 ㄷ가 뒤로 터진 형태여서 비교 분석하는 것도 재미있는 공부였다.
용호정 아래로 흐르는 탐진강과 해발 250m의 아담한 기역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바로 아래에는 남근석이 솟아 내려다보는 풍광이 아주 탁월했다.
특히 용호정은 용호정원림으로 더 알려진 곳으로
"원림(園林)은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멋난 주위 배경이 더 압권이다.
원림과 비슷한 용어인 정원은 일본인들이 명치 시대에 만들어 낸 것으로
도심 속의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 작업을 통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원림은 고려 시대 때 생겨난 것으로
한국 사람은 일본인과는 달리 자연을 거역하거나
자연을 훼손하면서 정원을 꾸미지 않았다.
동산이나 계곡, 하찮은 길이라도 인위적으로 바꾸지 않고 생긴 그대로 이용하고
용의 그림에 눈을 그려 넣듯 한 모퉁이에 건축물을 세워 자연 풍광을 한층 빛나게 하고
자연과 건축을 하나가 되게 했다.
그 기품이 더 멋진 곳이 용호정원림이다.
원림으로 장흥의 부춘정 원림, 담양의 독수정 원림·명옥헌 원림·소쇄원,
화순의 임대정 원림 등이 있다.
들어가는 길목이 섬 아이들의 가르마처럼 햇볕냄새를 풍기고
적당은 구불거리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각자의 느낌을 토했다.
용호정을 보고 바쁘게 가야 하는 사정이 생겨
보림사를 들러 사찰의 상징성을 공부하려던 우리는
마지막으로 근처에 있는 동백정을 찾기로 했다.
동백정은 장항마을의 백호등인 속칭 황새고개의 학등에 자리잡고 있다.
金麟이 장흥에 은거하면서 많은 선비들과 학문을 교류하고 시재를 겨루기 위해
정자를세웠다고 한다.
이 정자는 숙종 41년 1715년에 청주 김씨를 비롯한 호계리
상 하민이 참석한 대동계의 집회소와 별신제의 장소로 활용되면서
마을의 정자 역할을 하여 왔다.
눈여겨 볼 것은 민도리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앞뒤로 툇마루를 두고 방 한칸을 허락하였다.
동백정의 솔숲은 말로 형언하기 어렵다.
직접 가서 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아쉽지만 이렇게 우리는 누정문학의 답사를 마치기로 했다.
너무 행복했고 많은 공부를 했다.
樓, 閣, 亭, 齋, 軒, 堂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누정은
풍광을 완상하려는 지방의 토착 양반이나 은일의 정취와
풍류를 추구하는 사족들이 주로 세웠다.
그러나 건축물들이 단지 사대부들의 교유와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적 공간으로 세워지고 활용된 것만은 아니었다.
누정에 걸린 현판들은 그곳이 풍류를 아는 명사들의 유람 장소이자
지식인들의 교유 공간이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이러한 누정이 유독 장흥고을에 많다는 것은
바다와 맞닿아 있고 산수가 매우 수려한 고장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몇 가지의 이유들이 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예부터 문향으로 이름났던 곳이므로,
소인 묵객들이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기며 시문을 논하던 전통이
누정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 장흥 읍내로 통하는 탐진강 어귀는 왜구들이 다발적으로 출몰하는 곳이었기에
내륙에 있는 누정들과는 다른 기능도 했을 것이고
그런 역사적 흔적들이 현판에도 많이 남아 있었다.
더욱이 장흥이 서울로부터 먼 곳이었고 주요 유배지의 하나였기에
누정에는 유배자들의 자취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누정에 걸려 있는
장흥의 누정시들은 어떤 전형성을 지닌다.
원래의 운에 차운하는 형태로 나타나고,
주변의8경 혹은 10경을 읊은 시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내용상으로는 주인과 주변 경치를 찬양하는 경향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누정시를 쓴 문인들은 누정 주인이 가진
은일의식을 동조하는 합일을 지향하는 것도 큰 특징이다.
아무튼 이번 답사는 아주 많은 공부를 하게 했고
또 이 글을 준비하면서
논문과 지방사, 그리고 지방문화의 글들을 다시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회원들에게는 문학의 종자를 주워올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문학을 지향하든
학문을 추구하든
내가 하고 있는 이러한 작업들이 즐겁고
또 지속가능한 향학열을 가질 수 있게 한 시간으로
충분히 만족한 하루였다.
다 둘러보지 못한 누정들은 다시 찾기로 하고 우리는 목포로 향했다.
다시 한번 이런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래 본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같이 했으면 더 좋았을것을 하는 마음이 아쉽네요 내년을 또 기약해 보죠!
수고하셨어요,
준비하느라 고생하시고 또 운전까지 하시고.....
특히 오빠, 강남스타일.......은 압권이었습니다.
정선생님 후기는 우리 모두에게 누정에 관한 많은 지식을 줍니다.
다음에 다른 곳에 이런 기회가 많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더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회원들이 협조해 주시고 또 즐거워 하는 모습에 더불어 행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쁘게만 살아가는 삶이지만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희망과 기쁨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참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장흥 누정 답사 후기까지 써 주시고 참 고맙습니다.
늘 애쓰시는 사무국장님 파이팅~
수고하셨어요.
올려주신 후기를 보니
그날의 멋진 답사가 다시 생각나
보람되고 미소짓게 됩니다^^
함께 하는 시간 속에 정이 새록새록합니다.
늘 고운 모습으로 함께 하는 꿈을 꿉니다.
우와~구체성과 논리적으로 세심하게 꼼꼼히 답사일지를 써 올리신~역쉬! 서경샘 답씀다~
다시 누정 탐방의 확실한 공부가 됩니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함께여서 좋습니다. 항상~
다시 한번 복습 할수 있음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애타게 한번 불러보았습니다.^^*
예~~~~~~~~~~~~
저도 선생님의 애절한 목소리에 불러봅니다.
보고잡소
어휴~~정서경 시인님은 누정문학 해설사를 하시면
많은 방문객들이 감동을 받을 것 같습니다..^*^
가지는 못했지만 자상하고 머리에 쏘~옥 박힙니다..
고맙습니다..ㅎ
준=-
준~~ 감사허요 이렇게 좋은 댓글 남겨주셔서
뒷풀이가 고마웠소~~,,
더운디 일하실 때 유의하시고 몸보신허세요
참 뜻있는 문학답사가 되었군요^^.
꼼꼼하고 세밀한 정선생님의 해설은 가히 일품이네요^^ .
문협 가족들에게 이런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정서경 선생님 ,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회장님의 배려에 더 즐겁고 유이한 답사였습니다.
진중한 모습으로 늘 문협 회원들의 활동에 신경써 주시는 회장님의 후의로
행복한 시간 보냈습니다.
난리통에 피해는 없으셨지요?
좋은 모습 다음 모임 때 뵙겠습니다.
같은 그림이라도 다시 보니 새맛이 납니다.고맙습니다. 구경 잘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늘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