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황제(고종)로부터 의병들을 독려하는 서한 <애통조>를 받고 토적복수를 맹약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12%2F21%2F269%2F7px.jpg) 고광순은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 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 재기의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명분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실천을 우선시하는 강직한 선비로 성장하였다. 특히 촌수로는 집안 할아버지뻘이 되지만 오히려 한 살 아래였던 고제량(高濟亮)과는 의기가 상합하는 사이였다. 고제량은 어려서부터 기량이 활달하여 병정놀이를 할 때도 항상 주장이 되어 진용을 벌이거나 대오를 편성하곤 하였다. 말하자면 무인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이었던 셈이다. 한번은 고제량이 농담조로 고광순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건넸다.
“왜적들이 나라를 삼키려 하는데 그대 같은 유술(儒術)을 장차 어디다 쓴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고광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서생의 가슴 속에는 저절로 갑병이 들어있는 법이니 그대와 같은 호기(豪氣)는 다만 한 모퉁이를 감당할 뿐이외다.”
이 대답으로 미루어 고광순의 대쪽 같은 절의정신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대한식민지화에 박차를 가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러한 망국조약이 체결된 직후부터 그 동안 비교적 소강상태를 보이던 전국 인심이 크게 격동되어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호남지방에서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전선에 동참한 최익현이 의병의 상징적 인물로 부상되었다.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일어난 최익현 의병이 정읍을 거쳐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여기에 동참하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이미 주장 최익현 이하 참모들이 남원, 전주에서 출동한 진위대에 의해 체포 당하고, 의진이 해산된 뒤였다.
울분을 참지 못한 고광순은 그해 11월에 다시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장성의 기우만 등과 함께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의병을 일으켰다. 백낙구는 원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초토관(招討官)으로 실전을 치른 경험이 있었으며, 이 무렵 전남 광양 산중에 은거하던 중 동지 10여인과 함께 수백 명의 주민을 모아 의진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고광순은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진의 순천 공략전은 실패로 귀착되었다.
이후 고광순은 더욱 분발해 의병전선에 전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이 무렵 광무황제로부터 비밀리에 의병을 독려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감격해 하며 토적복수를 스스로 맹약하였다. 그는 드디어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인근지역의 장정들을 모아 놓고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이때 모인 인원이 모두 5백여 명에 이르렀고, 의병장에는 고광순이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음과 같은 편제를 갖추었다.
부장(副將) 고제량, 선봉장 고광수(高光秀) 좌익장 고광훈(高光薰) 우익장 고광채(高光彩) 참모 박기덕(朴基德) 호군(護軍) 윤영기(尹永淇) 종사(從事) 申德均(신덕균) 曺東圭(조동규)
고광순이 의진을 편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할 무렵, 때마침 남원에서 일어난 양한규(梁漢奎) 의병장으로부터 남원읍 공략을 위한 연합작전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이에 호응해 그는 즉시 부하 의병을 이끌고 남원으로 이동하였다. 양한규는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영, 호남지역으로부터 1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활동에 들어갔던 인물이다. 그 휘하의 정예병 1백여 명은 1907년 2월 13일 밤 남원성을 기습 공격하여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날이 설날이었으므로 진위대군은 거의 휴가 중이어서 경비가 허술하였기 때문에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남원성의 4대문은 의병의 파수 하에 들어가고, 진위대의 무기 군수품 일체를 접수하였다.
그러나 공성 직후 달아나던 진위대 군사들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의병장 양한규가 전사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의병은 이튿날 관군의 반격을 받고 참패를 당해 성을 탈출한 뒤 지리산 일대로 흩어지고 말았다. 나아가 양한규의 처남 박봉양(朴鳳陽)을 비롯해 참봉 박재홍(朴在洪), 상인 양문순(梁文淳) 등의 간부들은 체포되어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고 말았다. 고광순이 남원에 당도하였을 때는 양한규 본진이 이미 와해된 뒤였다. 그러므로 그가 거느린 의진은 남원읍 공략을 단념하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는 수 없이 고광순 의병은 비홍치(飛鴻峙)를 넘어 담양군 평창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 후 고광순은 능주의 양회일(梁會一),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고 전전하였다. 특히 4월 25일에는 화순읍을 점령함으로써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평소 원성이 자자하던 일본인 집과 상점 10여 호를 소각시켜 버렸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다시 동복으로 진군한 의진은 광주에서 파견된 관군과 도마치(圖馬峙)에서 교전한 끝에 사방으로 패산하고 말았다.
지리산 피아골을 거점으로 장기항전 태세를 구축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cc.phinf.naver.net%2Fncc02%2F2011%2F12%2F21%2F269%2F7px.jpg) 육순 노구의 고광순은 이처럼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10여 년간 고군분투하였다. 그 결과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그는 1907년 9월 의병전략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즉, 일제 군경과 임기응변식의 즉흥적인 전투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택한 것이다. 고광순은 지리산을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로 판단하고 있었다. 지리산의 여러 골짜기 가운데서도 피아골은 특히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花開洞), 서쪽으로 구례, 그리고 북쪽에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험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의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에 1907년 9월 11일 고광순을 도독으로 하고, 그 아래에 박성덕과 고제량을 도총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申德均), 윤영기 등을 참모로 정하는 등 편제와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행군길에 올라 곡성군 구룡산(九龍山) 아래에 당도하였다. 진용을 강화한 고광순 의병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항전할 것을 계획하고 그에 앞서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동복을 공략키로 하였다. 동복은 오래된 군현으로 효종의 아우 인평대군의 처척(妻戚)관계로 정치적으로는 얼룩진 고장이지만 보성에서 남원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의 요지였으므로 산중 도회지였다. 북쪽 옹성산은 험준한 바위산으로 자연동굴이 많고 동쪽 운월산도 순천과 경계되어 있어 우복동(牛腹洞) 같아 점령만 하면 당분간 견딜 만한 곳이었다. 이에 고광순 의진은 9월 15일 새벽에 헌병분견소를 공격했지만, 일제 군경의 반격으로 도포사(都炮士) 박화중(朴化中)이 전사하는 등 고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전투상황에 대해 일제 측 정보기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9월 15일 오전 6시 폭도(의병: 필자주) 약 60명이 동복분파소를 습격했는데 보조원 2명이 교전했으나 중과부적이라 광주로 철수하였다. 미야가와(宮川) 보좌관은 보좌관 6명, 순검 1명을 이끌고 특무조장 1명, 병졸 7명과 협력, 토벌했으나 적은 시체 한 구를 버리고 도주한 뒤였다.(전남폭도사)
의병은 그 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선봉장 고광수의 집이 있는 남원군 이백면 효기리에 숙영한 다음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갔다. 즉 남원에서 곡성, 광양,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즈음 그는 또한 지리산 부근의 영남, 호남 각지로 의병을 소모하는 격문을 연이어 발표하기도 하였다.
고광순 의병이 화개동을 지나 피아골 계곡 아래에 자리 잡은 연곡사(鷰谷寺)에 도착한 것은 9월 18일이었다. 신라 진흥왕 4년(543년)에 창건한 이 절은 임진왜란 때 한 번 불탔으나 그 뒤 다시 중수했었다. 하지만 일제가 의병을 탄압하던 당시에 사찰 건물을 불태웠고, 일부 중수된 건물은 다시 6․25전란으로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사찰 건물은 그 뒤 다시 복원된 것이다.
머지 않아 광복이 오리라…<불원복(不遠復) 태극기> 앞세우고 최후의 결사 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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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은 이곳 연곡사를 의진 본영으로 삼고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군영 앞에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채비를 갖추어 갔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