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뜨레
"모든 사물은 경계가 있어요.
어떤 방향이든 분명 경계가 있는데
대다수의 인간들은 그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 산다는 것이죠.
그러자면 그 안의 질서를 익혀야 하고
또 준수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관습이든,
정이든,
사랑이든,
미움이든,
증오든 간에 말입니다.
그것은 무한한 연민과 번뇌의 바다로 우리를 안내하죠.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바닷물의 침수에 대비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네 인간의 삶이겠지요.
하지만 그 경계를 뛰어 넘으면
그 모든 번뇌의 재료들은
단 하나로 귀결 되어지는 것이겠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의 세계,
어떻게 그 경계를 뛰어 넘을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경계를 지우는 것이죠.
기존의 모든 명칭,
기준,
선입견을 버릴 때
세상은 저절로 정립되어집니다.
인간도 한 사물에 지나지 않기에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것을 알게 되고
기존의 습관, 즉
내게 묻어 있는 습을 한 꺼풀씩 벗겨 내다 보면
거기엔 나도 없고 그대도 없는
공의 세계가 되는 것이죠
비로소 자연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말이예요.
공은 없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없다는 말이죠
설명하려니 너무 장황스럽고
저 자신이 건방진 듯한 느낌이라 좀 그러네요.
그냥 경계는 없는 거라고,
우리네 여정이
경계를 지워가는 과정이라 생각하며
우리 간절히 기도하며 살기로 해요.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마시고
있는대로 보고 즐기세요.
그래서 순간순간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시길 빌께요.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2019. 4. 27
-마산에서 J 드림-
카톡으로 편지를 보내고 나서 준수는 자신도 모르게 엷은 쓴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뭘 안다고 인생이 이렇네 저렇네 하는 꼴이 좀 우습게 여겨져서였다.
'저런 내용의 글을 쓸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한참을 기다리자 저 멀리
"자기야!"
함박꽃 미소를 담은 얼굴로 정주가 손을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 괜찮대?"
"어 관리만 잘 하면 좀 더 살 수 있다는데,
아직 수술한 지 얼마 안됐으니 두고 봐야지 뭐."
근데 기집애가 이제 지는 어떻게 사냐고 하면서 자꾸 울잖아.
나도 눈물 참느라 혼났어"
"그래도 수술이 잘 됐다니까 다행이지"
애써 차분하게 말하는 정주의 눈가에 살 얼음처럼 엷은 물기가 비쳤다
"우리 기분 전환도 할 겸 맛난거 먹으러 갈까?
준수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전환할 겸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내가 아는데, 바닷가 어디쯤"
"당신 따로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니 그냥-"
"그럼 됐어"
준수는 병원을 나와 고성쪽으로 차를 몰았다.
시내를 벗어나자 사월의 싱그러운 바람이 코 끝을 간지럽혔다.
'얼마만인가? 이 평일 오후의 여유를 만끽해 본지가'
그랬다.
준수는 여태껏 이런 여유를 누려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먹고 사느라 한 눈 팔 시간도 없이 앞만 보며 달려온 자신이 때로는 서글픈 적도 있었지만 준수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는 가족을 건사하는 일이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이 한 몸 불살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터였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 온 자신의 인생에 대해 불만은 없었다.
교외로 빠져 나온 차는 창포만을 지나 동진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예전에는 조각배나 통통배를 타고 건넛던 바다에 다리가 놓이고 한나절 걸리던 거리의 바다를 이젠 일 이분만에 건널 수 있게 되다니 물질 문명이 가져다 주는 순기능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편리함을 주는지 모른다.
준수는 요즘이 참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며 차를 몰았다.
남쪽바다에서 보기 드물게 시야가 확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 오자 정주는 기분이 좋은지
차창을 내리고 연신 감탄사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와!
"어떻게 자기는 이런데를 알아?"
"어, 전에 지나가다가 봤던 곳인데 한 번 오고 싶었어."
"너무 좋다 여기"
정주가 즐거워 하자 준수도 마음이 흐뭇해졌다
해안을 따라 한참을 가는 동안 평일인데도 목이 좋은 자리에는 낚시꾼들이 방파제를 따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이 청명한 해변의 바닷가는 마치 가을 하늘 마냥 푸르고 눈이 시렸다.
바다 한 가운데는 흰 부표들이 바다에 점묘화를 그리고 오후의 햇살이 수면에 비늘을 털어 내고 있었다.
바다를 끼고 한참을 더 달려 차는 레스토랑 '몽뜨레'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가게 안에는 두 팀의 젊은 연인들만 차를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준수는 바다가 잘보이는 창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급스럽고 감성적인 분위기의 인테리어와 호수같은 바다조망이 그만인 편안한 자리에 앉으니 밥 맛이 절로 날 것 같았다.
"아,"
"당신 생일이 내일이지?"
"그 때 올걸 그랬나? 하하하"
우리는 갈릭 안심스테이크와 씨푸드 라이스를 시켜먹고 아메리카노와 헤이즐렛 라떼도 후식으로 한 잔씩 마시고 레스토랑을 빠져 나왔다.
벌써 사위는 어두워져 있었고 잔잔한 호수같은 밤바다는 보석을 깔아 놓은 듯 불빛을 품고 황홀하게반짝거렸다
"오늘 기분 좋으네. 꼭 신혼 기분난다 그치?"
오랫만에 하는 외식이라 정주도 들떠있는 듯 종알 종알 말을 많이 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준수는 [폴킴의 모든날, 모든순간]을 틀었다.
-니가 없이 웃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
애절한 음악을 들으며 아름다운 밤의 해안을 미끌어지듯 돌아오는 준수의 차는 스피커 성능이 뛰어난 독일의 차라 그런지 음질이 깨끗하고 중후했다.
준수가 대쉬보드 속에 있던 생일 선물로 산 까르띠에 시계를 꺼내 정주에게 건넸다.
"뭐야?"
미소를 머금으며 정주가 눈웃음을 쳤다.
"맛 난 밥도 사주고 선물 까지"
"사실은 내일 내가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오늘 미리 생일 축하한다고."
"오 ~ 이쁜데"
"내가 이거 갖고 싶은 거 어떻게 알았어?"
"아니 저번에 얼핏 들었던 거 같아서"
"마음에 들어?"
"어, 너무너무"
"아이 고마워 자기야!"
"근데 내일 어디 가?"
"응, 부산에서 세미나가 있는데, 마치고 현수가 저녁에 좀 보자고 해서"
"본인이 여기 오면 되지 왜?"
"사정이 좀 있나 봐"
준수는 현수가 이혼을 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현수 한테서 다시 전화가 온 건 다음 날 오후 네시쯤이었다.
"이야! 준수 오랫만이다 임마 지금 뭐하노? 세미나는 끝났나?"
현수는 걸걸한 부산사투리를 던지며 반가워 했다.
"그래 지금 끝났어 오랫만이네. 어디야? 내가 거기로 갈께"
"우리 자갈치서 만나가 꼼장어 한사라 하자!"
"이슬이도 한 뱅 하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라 준수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네비로 검색을 해 보니 퇴근시간 앞이라 그런지 한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같이 온 동료한테 대충 자초지정을 말하고 자갈치 시장을 향해 출발했다
준수는 개인적으로 부산이 좋았다,
부산이라는 어감도 좋고 특히 준수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견디게 해준 곳이 부산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준수는 고2 때 인생의 전환점이 될 법한 사건을 접한 적이 있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던 밤, 시간이 얼추 열 두시 가까이 쯤 되었을 것이다.
대영학원을 나와 서도초등학교를 지나 골목에 들어섰을 때 한무리의 남자들이 여학생 하나를 강제로끌고 가는 걸 보았다.
순간, 머리끝이 쭈뼛섰다.
이를 어찌해야 하나.
평소 운동을 즐겨 합기도 3단에 킥복싱을 2년동안 배운 준수는 단신이지만 친구들이나 주변으로부터 대추방망이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그런 준수에게 그 때의 상황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체육 수업시간에 축구를 했던 탓에 신었던 축구화 끈을 재빠르게 바짝 다시 묶었다.
"어이! 그냥 놔두지!!"
난간대가 부러져 나뒹구는 쇠 파이프를 하나 들고 제일 덩치가 크다 싶은 놈의 뒷 덜미를 벽을 딛고 튀어 오르며 후려쳤다.
굵은 나무둥치가 무너지듯 거구는 사내는 그자리에서 꼬꾸라졌다.
다시 돋움닫기로 뛰어 창문의 방범창을 잡고 뒤 돌려차기로 다른 한놈을 제압하는 순간 뭉클한 무언가가 허벅지를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빠져나가 듯 준수는 털썩 그자리에 맥없이 주저 앉았다.
순간, 준수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세놈 중 한 놈이 부서진 방범창의 'ㄱ'자로 꺾어진 굵은 철근을 휘둘렀던 것이다.
날카로운 철근의 끝부분이 대퇴부에 꽂혔고
찢어진 추리링 위로 손을 대자 벌써 피가 검게 옷을 적시고 있었다. 순간, 준수의 눈빛에 살기가 돌았고 정신을 차리며 일어서려 안간힘을 썻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 앉아버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놈들은 준수가 맥없이 쓰러지자 죽을까봐 겁이 났는지 피묻은 쇠붙이를 내 던지고 두놈이 거구를 부축해 골목 입구로 재빠르게 빠져 나가는 모습이 흐릿하게 클로즈업 되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준수는 억지로 일어서려 했지만 몸이 맘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다행히 대동맥은 건드리지 않아 피가 그렇게 많이 쏟아내리지는 않았다.
가방끈을 풀어 상처 위쪽을 묶어 지혈을 하고 둘러보는데 아까 그 여자가 쓰레기통 뒤에 쪼그리고 앉아 바들 바들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한 스무살쯤 되어 보이는 그 아가씨는 그제서야 부시시 일어나 모기소리 만한 목소리로
"괜찮으세요? 괜히 저 때문에"
"어머나 피좀 봐!, 이를 어째"
바닥에 시커멓게 흘러내린 검은 피를 보고 소스라치는 그녀에게
"괜찮아요 지혈했으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더니 여자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여러명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여자가 청년 둘을 데리고 나타났다.
보아하니 여자의 오빠들 인 듯 했다.
"이 보세요. 괜찮으세요?"
두 청년은 번갈아 가며 준수를 흔들었다
몽롱한 상태로 준수는 청년의 등에 업혀 골목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준수는 긴 꿈을 꾸었다.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누군가에 쫒겨 산길을 내 달리고 있었다.
길도 없는 산 속, 잡목으로 뒤덮힌 산중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준수 앞에 거대한 바위 절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떨어지면 즉사였다.
망설임도 없이 준수는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우지끈!
침대 바닥으로 나뒹구는 준수를 처음 본 건 하진이었다.
꼬박 이틀을 잤다 했다. 혼자 자취를 하던 준수는 아무도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 토요일과 겹친 휴일이라 학교에도 별다른 조치가 필요하진 않았지만 학원엔 연락을 해야 하는데,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어느새 오른쪽 다리는 붕대로 친친 감겨있었고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육중한 통증이 온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부끄러웠다.
어제 밤의 그여자는 뜻밖에도 고3 학생이라 했다.
수성구에 있는 정화여고 3학년 이하진.
그렇게 준수는 하진이를 처음 만났다.
하진이는 이목구비가 아주 이쁜 미인은 아니었지만 얼굴 선이며 콧날이 전형적인 동양미인처럼 생겼다.
말수가 적어 한 시간을 같이 있어도 말 몇 마디 하지 않는 하진이는 귀품있는 조선시대 여인처럼 신비스러운 느낌이 돌기도 했다.
퇴원수속중 의사가 그랬다.
"학생은 천운을 타고 났나봐. 조금만 비켜찔렸으면 대 동맥이 끊어질 뻔 했어"
"그러니 앞으론 착하게 살아요. 학생"
앞 뒤도 모르는 의사는 준수가 거칠게 사춘기의 구간을 지나는 불량학생쯤으로 보였던 모양이었다.
응급조치를 하고 다음날 퇴원을 해서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추리링을 입으니 절뚝거리며 걸을 만했고 상처도 보이지 않았다.
준수가 자갈치 시장 엄마꼼장어 집에 도착한 것은 저녁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혀 티맵이 우회 길을 찾느라 땀을 흘릴 지경이었다.
가게 안에 들어서니 현수는 벌써 와 있었다.
"이야 준수!, 오랫만이다. 잘 살았나?"
"어 맨날 그렇지 뭐"
오랫만에 만나는 현수는 깊은 포옹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정말 오랫만이다. 현수야"
준수도 힘껏 현수를 안아 줬다.
그러는 사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사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일어서면서 가벼운 목례를 했다.
조금 색이 바랜 청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받쳐입은 여자는 현수와는 막역한 사이처럼 편안해 보였다.
"아, 아 우리 학교에 같이 근무하는 박선생인데 준수 니 이야길 했더만 평소 니 팬이라면서 잠깐 볼 수 있냐고 해서 모셔 온거야"
준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저 이준수라고 합니다."
"어머 알아요. 선생님 글 많이 읽었어요."
" 정말 좋던데요."
"최근에 쓰신 [거미의 방]도 너무 좋아요."
"에이 뭐, 부끄럽습니다."
"여하튼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준수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먼저 시켰는지 양념이 알맞게 베인 꼼장어는 벌써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다.
주거니 받거니 몇 순배 잔이 오가고 준수가 물었다.
"현수야 너 요즘 어떻게 지내?"
지난 겨울에 이혼을 한 현수는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짙게 묻어 있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풍체가 좋던 현수가 살이 빠져 보이기도 했다.
순간 준수는 현수가 안스럽게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