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나는 김의식 선생님이 연출한 '금고기'란 연극에 출연한 적이 있다. 궁궐 문지기란 원본에도 없을 성 싶은 단역이었다.여왕에 오른 할머니를 찾아가는 할아버지를 막아선 궁궐 문지기! 할아버지를 들여보낼 수 없다며 '안되오!'를 두 번이나 극장이 찌렁찌렁 울리도록 외쳤다. 그리고 무대를 내려왔다. 그게 모두였다. 하지만 나는 이 배역 덕분에 그야말로 신나는 세월을 보냈다. 말 그대로촌(村)도 대촌(大村)! 초등학교 연극팀이 승승장구하는 바람에 꿈에도 그리던 서울까지 올라가서 드라마센터에 섰고 당당히 입상을 했다. 이것은 1965년도 일간신문에까지 보도된 대촌중앙초등학교 역사상 기록에 남는 사건이다.
그런데 내 인생에 비상한 연출가 한 분이 나를 찾아오셨다. 그분은 나를 스카웃하셔서 독일 유학까지 시키시더니, 토론토에서 20년이 넘도록 교회 담임 목회자 배역을 맡기셨다.이번엔 단역이 아니었다. 특별히 서머나 교회에서 내가 맡은 사역은 주역이었다. 연출가이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과중하다싶은 배역을 맡기셨으므로, 주변에 계신 목회자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았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목회자는 이래야 한다는 롤 모델 자리에 서머나 교회와 나를 세울 때 몸둘 바를 몰랐다. 원주민 선교의 장을 열어가는 선두에 우리를 세우셨다. 캐네디언 교회로부터 예배당 건물을 넘겨 주셨다. 선교관을 열어주셨다. 묘지까지 마련해 주셨다. 하하! 재미있지 않은가! 세계에 흩어져 사역하는 탁월한 선교사님들과 나눔을 갖게 하셨다. 또한 동족 가운데 탁아소와 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해 집을 마련하게 하셨다. 그 어린이를 후원하는 나귀역에 우리를 수년간 사용하셨다. 나는 서머나에서 담임목사란 배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늘 그 영광스런 자리에 앞장서는 기쁨을 누리곤 했다. 그리고 내 배역 기간이 다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무대에서 가볍게 내려왔다.
서머나 교회 담임 목사 배역에서 내려올 때, 목사은퇴 감사패를 나는 받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아직 하실 일이 있다 하신다. 남은 인생을 더 사용하기 원하신다. 우리 민족을 살리는 배역 하나를 정하시고 그 무대에 나를 오르라 하신다. 분단 70년을 맞는 2015년, 동족 어린이를 후원하는 나귀역이다. 이것은 단역도 아니고, 주연도 아닌 조연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연출 속에 있기에 나에겐 이 배역이 아주 중요하다. 더구나 어린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또 나에겐 함께 가는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비록 이름없는 나귀일 뿐이지만, 통일의 날을 준비하는 밑거름으로 쓰임을 받았으면 좋겠다. 5월 19일! 난 그 무대에 오른다. 나와 함께 출연하는 자랑스런 배역들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