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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역사 학습의 목적
Ⅰ. 역사(歷史)와 역사학(歷史學)
1.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역사(歷史. history)는 인간사회가 거쳐온 변천의 모습 또는 그 기록(記錄)(동아 새국어사전). 인류사회의 변천(變遷)・흥망(興亡)의 과정(과정) 또는 기록(記錄)(민중서림 한한대사전)을 말한다. 歷史(역사)는 歷(지날 력)과 史(사관 사, 사기 사)로 구성되어 있다. 歷은 사실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남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史는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가미된 기록을 의미한다. 역사는 다의적 개념이며 과거에 일어난 사건(역사적 사실, 史實)을 의미할 수도 있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narrative, 史話, 史談), 기술(account, 史記) 또는 기록(record, 史書, 史錄, 史籍, 史乘, 史策)을 의미할 수 있다. 사건에서 과거 그 자체와 인간과거(the human past), 하찮은 사건과 중요한 사건 및 연대기(chronicle, 단순한 사건의 서술)와 의미있는 사건의 서술 중 중요한 것은 인간 과거, 중요한 사건 및 의미있는 서술일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Rudolf Bultmann은 독일어Geschichte와 영어 history를 구별하였다. 영국 Oxford대학 John Macquarrie는 독일어Geschichte를 실존적・역사적(existential-historical)이라 하고 영어 history를 객관적・역사적(objective-historical)이라고 구분하였다.
1. 사실로서의 역사(객관적 의미의 역사) : 독일어 Geschichte
사실로서의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일 또는 역사적 사실로서 객관적 의미의 역사를 말한다.
2. 기록으로서의 역사(주관적 의미의 역사) : 영어 history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역사가에 의한 기록으로서 주관적 의미의 역사를 말한다.
구분 | 사실로서의 역사 | 기록으로서의 역사 |
한자 | 歷(지날 력) | 史(사관 사, 사기 사) |
뜻 | 과거에 있었던 사실(history as past) | 역사가에 의한 기록(history as historiograhy) |
의미 | 현재까지 일어났던 모든 사건 |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 |
성격 | 사실 자체를 복원하는데 목적 |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 개입. |
주객관 | 객관적 의미의 역사 | 주관적 의미의 역사 |
학자 | Leopold von Ranke, Lord Acton | Benedetto Croce, Edward Hallet Carr, Robin George Colingwood |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현재를 통해 과거를 보는 것과 갗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객관적 접근과 주관적 접근이 조화되어야 한다.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도 마찬가지이다.
History is systematically collected information about the past. When used as the name of a field of study, history refers to the study and interpretation of the record of humans, families, and societies as preserved primarily through written sources. History is thus usually distinguished from prehistory by the widespread adoption of writing in the area under study. Knowledge of history is often said to encompass both knowledge of past events and historical thinking skills.
Traditionally, the study of history has been considered a part of the humanities. However, in modern academia, history is increasingly classified as a social science, especially when chronology is the focus.
2. 역사학이란?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며, 인간 활동의 변화적 측면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역사학은 특히 과거가 인간에게 어떻게 관계되는지 과거의 연구이다. 역사학은 일련의 과거 사건들을 검토하고 분석하는 기술을 사용하고 그것들을 결정하는 원인과 결과의 모형을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학문적 분야이다. 역사학은 이들 사건들에 관한 정보의 기억, 발견, 수집, 조직 및 표현은 물론 과거사건과 관련되는 포괄적 용어이다.
3. 역사가의 올바른 자세
역사가(사학자, 史家)는 과거에 대하여 조사・연구・저술하는 사람이고 과거에 대해 권위가로 알려지고 있다. 사학자는 모든 역사의 연구는 물론 인류에 관계되는 과거사건의 지속적인 방법론적인 기술 및 연구에 관심이 있다. 역사가는 사료(史料)를 토대로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주관에 입각하여 서술하여야 한다.
Ⅱ. 역사 학습의 목적
1. 역사 학습의 목적
가. 역사를 학습 : 과거 사실에 대한 지적인 이해→과거의 사실을 바르게 이해.
나. 역사로서 학습 : 역사 학습을 통해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인간적 성숙을 뒷받침→역사적 문제를 의식하고 사고하여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양성. 영국의 역사학자 Robin George Colingwood는 역사의 목적은 인간의 자기인식(自己認識)이라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역사의 목적을 귀감(龜鑑, 본보기)에 두었는데 이것을 감계주의(鑑戒主義)하고 한다.
2. 과거와 현재의 대화 : 역사 학습은 과거 세계와 현재 인간의 대화에 의한 만남의 광장.
3. 역사 학습의 유용성
가. 현재의 올바른 이해
나. 삶의 지혜 및 방법 습득・터득
다. 역사에 대한 사고력과 비판력 배양
제2절 근대 한국사학의 전통
Ⅰ. 식민주의사관의 청산
1. 식민사관(植民史觀)
가. 식민사관
조선사를 편수하는 조선사편수회와 청구학회에서 한국사를 왜곡하였다. 식민사관은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에 대한 식민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한국사관을 말한다. 사관(史觀) 또는 역사관(歷史觀)은 역사적 사실・현상을 파악하여 고찰・판단・해석하는 근본적인 관점・견해를 말한다.
나. 목적
한국민족을 일본에 동화시키고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한국사의 독창성과 자율성을 부정하였다.
2. 내용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패배적 역사의식을 주입하는 식민사관을 강요하였다.
가. 지리적 결정론(타율성론. 반도적 숙명론)
한국이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반도였다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주체성이 없이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 임나일본부설, 만선사관
나. 정체성론
한국사회는 지방분권적 봉건제도의 부재로 사회・경제 구조의 내적 발전이 없어 고대사회의 단계에 정체되어 있는 논농사의 사회이다.
다. 당파적 민족성
한국민족이 선천적 또는 숙명적으로 당파적 민족성으로 민족적 단결을 파괴하고 분열하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 불가능하다.
라. 일선동조론
한국과 일본 조상은 같은 뿌리이다
미. 한국문화의 모방성
한국문화는 독자적 문화가 없고 왜래 문화를 차용하거나 모방했다.
Ⅱ. 근대사학의 전통
학파 | 입장 및 주장 | 역사적 구실 |
민족주의사학 | 한국사의 발전을 민족의 정신적 측면으로 설명하여 했고 한국사의 근원이 되는 것은 한국민족의 혼이고 정신이다. 박은식 : 韓國痛史(1915), 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 민족의 혼(魂) 신채호 : 대동역사(大東歷史, 1907) 필사본(1914). 독사신론(讀史新論, 1908). 朝鮮史硏究艸(1924.10.13~1925.3.16 동아일보 연재, 1929,) 朝鮮上古史(1931.6~103회 연재), 조선상고문화사 고유한 낭가사상(娘家思想). 정인보 :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 오천년간조선의 얼, 동아일보 연재). 민족의 얼 강조 최남선 : 아시조선(兒時朝鮮, 1927). 조선정신의 표현으로서 단군신화연구 문일평 : 한미오십년사(韓美五十年史). 조선심(朝鮮心) | 민족의 독립운동을 정신적으로 뒷받침 |
유물사관 | 민족속에는 경제적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대립이 존재해왔고 그 대립은 일정한 공식에 의하여 역사적으로 발전해왔다. 안확(安廓) : 조선문명사(朝鮮文明史) 백남운(白南雲) :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 19333), 조선봉건사회경제사(鮮封建社會經濟史, 1937), 조선민족의 진로(朝鮮民族의 進路, 1946) 1930년대 : 백남운(白南雲), 이청원(李淸源), 이북만(李北滿), 김광진(金洸鎭), 한흥수(韓興洙), 김태준(金台俊), 도유호(都宥浩), 박문규(朴文圭)· 1940년대에 김석형(金錫亨, 초기조일관계사), 박시형(朴時亨. 발해사), 전석담((全錫淡, 조선사교정, 조선경제사), 박극채(朴克采, 조선봉건사회의 정체적 본질 - 전결제 연구, 민족과 인민), 이진영 | 전통적인 양반사회의 개혁을 정당화 |
실증사학 | 한국사의 발전을 어떤 선입견을 갖고 맞추어 보는 것에 반대하고 실증적인 태도로 직관적인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 1934년 진단학회(震檀學會) 조직, 진단학보 발행 :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晉泰), 이상백(李相佰), 김상기(金 | 한국사학을 독립된 사학으로 정립 |
유물사관을 도입한 백남운은 우리나라 역사가 원시공산사회(고조선), 고대 노예제사회(삼국시대), 중세 봉건사회(통일신라)를 거쳐 근대 이식자본주의(일제강점기)로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유물사관이 우리 역사를 발전적으로 체계화하고 하층민의 각성을 촉구하고 사회경제사 연구를 촉발했다는 점에서 공을 인정할 수 있으나 우리의 역사발전을 무시하고 역사발전의 최종목표의 설득력이 없고 일제시대에 대한 해석에 문제가 있었다.
학파 | 단점 | 계승 및 발전 |
민족주의사학 |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나머지 지나치게 추상적, 관념적 및 국수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어 한국사의 실체를 외면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민족주의사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민족의 정신이나 사상을 민중의 토대로 이해하고 연구방법을 실증사학에서 취하려고 하였고 실증사학에서 출발하여 민족구성원 전체의 균등한 행복을 기준으로 하는 한국사의 체계적 이해를 꾀하였다. |
유물사관 | 서양사를 기준으로 하여 얻어진 특수한 역사이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하고 일방적으로 한국사에 적용하는 것이 한국사의 과학적 연구라고 생각하여 실제와는 다른 틀에 박힌 역사를 만들었다. | |
실증사학 | 개별적인 사실의 천착(穿鑿)에 골몰하여 한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체계적으로 인식하는데 소홀함으로써 학문이라기보다는 취미로 전락하는 경향을 지녔다. |
Ⅲ. 전통과 계승의 발전
안재홍(安在鴻), 손진태(孫晉泰), 이인영(李仁榮), 문일평(文一平)은 민족 내부에서 계급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외부적으로 배타성을 완화하여 국제적 민족주의로 전향하여서 신민족주의사학이라고도 한다.
제3절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
Ⅰ. 인간중심의 이해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고 한국사의 한국인의 역사이므로 한국사를 근본으로부터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에서 인간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Ⅱ. 보편성과 특수성
학파 | 단점 | 시정방법 |
민족주의사학 | 특수성을 강조하여 한국의 고유한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사의 이해 | 보편적 법칙을 다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
유물사관 | 보편성을 강조하여 보편적인 역사발전의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 한국사연구의 핵심문제 | |
실증사학 | 특수성을 띤 구체적인 사실의 인식을 통하여 보편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 |
한국민족과 인류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민족의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보천성과 특수성의 인식)이다.
Ⅲ. 북한의 주체사관
북한은 1970년대 이후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따르면서 김일성의 교시나 김정일의 지시를 기준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해석 틀도 고전적 유물사관과 차이가 있으며 근대와 현대의 기준을 대외항쟁을 주요변수로 간주하고 고조선, 고구려 및 고려를 중심으로 한국사를 체계화하고 1990년대 이후로 조선민족제일주의를 추가했다.
제2장 선사 시대 문화와 국가 형성
제1절 선사 시대
Ⅰ. 구석기문화
1. 시기 구분 기준
한반도의 구석기는 약 70만전부터 시작되었다. 구석기 시대는 돌을 다듬는 기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로 구분한다.
시기 | 연대 | 내용 |
전기 | 50~100만년전 | 하나의 석기를 다용도로 사용했다(一石器多用途). 주먹도끼(兩面核石器, hand ax), 뾰쪽찍개. 찍개(외날찍개, 打截器, chopper), 양면찍개(양날찍개, 兩面打截器, chopping tool), 긁개(搔器, scrapper) |
중기 | 10~4만년전 | 여러 석기를 만들어 용도별로 구별해서 사용했다(一石器一用途). 긁개(搔器, scrapper), 밀개(삭기, end-scrapper), 찌르개(尖頭器, point), 돌칼(石刀), 송곳(錐) |
후기 | 4~1만년전 | 돌에다 쐐기 같은 것을 대고 형태가 같은 여러 개의 정교한 석기를 제작했다(同種石器 大量生産). 잔석기(細石器)와 이음도구(모음연장, 複合道具). 슴베찌르개. 창(槍). 활(弓) |
2. 대표적 유적지
시기 | 유적지 | 내용 |
전기 | 평양 상원(詳原) | 검은 모루동굴(洞窟), 용곡리 동굴:화석으로된 사람뼈 출토 |
연천 전곡리(全谷里) | 주먹토기(Acheulean style) | |
제천 점말 동굴 | ||
단양 금굴 | 70만년 유적지로 가장 오래됨. 외날 긴찍개, 흰날 주먹도끼. Acheulean(아슐) 및 Levallosian(르발로와) 석기 발견, 동물화석 발견 | |
파주 적성면 | 주월리(舟月里), 가월리(佳月里)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좀돌날석기의 몸돌 부분 처음 발견, 불땐 자리(爐址)와 기둥 등이 있는 집터 | |
중기 | 함북 웅기 |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평양 상원 용곡리(龍谷里) | ||
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동굴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
평양 역포구 대현동(大峴洞) | homo sapiens(古人, 슬기인) 화석 |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
경기 연천(漣川) 남계리(楠溪里) | ||
경기 양평 병산리(屛山里)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
충북 제천 명오리(鳴梧里) | ||
충북 단양 수양개(垂楊介) | ||
제주도 빌레못 | ||
후기 | 함북 웅기 | 굴포리(屈浦里), 부포리(鮒浦里) |
평남 덕천 승리산(勝利山) | homo sapiens sapiens(슬기슬기인) 뼈화석 출초 | |
평양 만달리동굴(萬達里洞窟) | homo sapiens sapiens(슬기술기인) 뼈화석 출초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집자리 | |
충북 청원 두루봉동굴 | ||
충북 단양 수양개(垂楊介) | ||
충북 단양 상시리(上詩里) |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homo sapiens, 슬기슬기인. 新人) 머리뼈 화석 출토 | |
강원 양구 상무용리(上舞龍里) | ||
단양 금굴 | ||
함북 종성 동관진(潼關鎭) | ||
충북 보은 장내리(長內里) |
3. 구석기 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구석기인들은 동굴(평양 상원 검은 모루동굴, 충북 청원군 두루봉동굴), 바위그늘(충북 단양 상시리), 강변의 언덕 또는 평지(충남 공주 석장리 집자리)에 막집을 짓고 살았으며 기둥을 세워 만든 움막집에서는 8~10명 정도 가족이 살았을 것이다.
나. 식생활
주로 짐승을 사냥하거나(狩獵) 물고기를 잡거나(漁撈) 나무열매를 채집(採取와 蒐集)하여 먹고 불을 발견한 이후에는 음식을 익혀 먹었다.
다. 도구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기(打製石器)와 짐승의 뼈를 가공한 골각기(骨角器) 등의 연장을 사용하였고 사냥, 요리, 공작용으로 제작되었다.
라. 사회
구석기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가족단위(氏族社會)로 이동하면서(移動社會) 사는 무리사회(群社會, horde)를 이루었다.
마. 예술
충남 공주 석장리 움막 문앞에 석상, 사람, 새, 사슴 등이 새긴 선각화(線刻畵) 등 구석기인들은 예술활동을 보여주는 유물이 발견되었고 예술활동은 사냥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가 있었다.
Ⅱ. 신석기문화
1. 신석기 시대
한반도의 신석기 시대는 약 8000년전부터 시작했다.
시기 | 연대 | 내용 | 출토 |
전기 | BC 8000~BC4000 |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니토기(隆起文土器), 눌러찍기무늬(押印文土器) | 웅기 굴포리 서포항, 부산 동삼동, 평북 만포동, 강원 양양 오산리, 의주 미송리, 경남 통영 상로대도, 제주도 한경 고산리, 고성 문암리, 여수 송도와 안도, 신안군 흑산도 |
중기 | BC 4000~BC2000 |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 웅기 굴포리 서포항, 평남 청호리, 서울 암사동, 하나시 미사동, 부산 동삼동, 봉산 지탑리, 대동군 청호리 |
후기 | BC 4000~BC1500 | 납작빗살무늬토기(平底櫛文土器),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타래무늬토기(渦文土器, 螺旋文土器) | 청진 농포동(農圃洞), 온천 궁산리(弓山里), 봉산 지탑리(智塔里), 부천 시도(矢島), 춘천 교동(校洞), 굴포리 서포항(西浦港) |
2. 대표적 유적지
시기 | 유적지 | 내용 |
전기 | 부산 동삼동(同三洞), 다대포(多大浦) | |
함북 웅기 굴포리 송평동(松坪洞) 서포항(西浦港) | ||
강원 양양 오산리(鰲山里) | ||
제주도 한경면(翰京面) 고산리(高山里) | ||
서울 암사동(岩寺洞) | ||
경남 통영 상로대도(上老大島) | ||
전남 여수 돌산읍 송도(松島)와 남면 안도(安島) | ||
황해도 봉산 지탑리(智塔里) | ||
평북 의주 미송리(義州美松里) | ||
평북 만포동(滿浦洞) | ||
경남 고성 문암리(文岩里) | ||
경기 하남시 미사동(美沙洞) | ||
평남 대동군 청호리(淸湖里) | ||
함북 청진 농포동(農圃洞) | ||
평남 온천 궁산리(弓山里) | ||
경기 부천 시도(矢島) | ||
강원 춘천 교동(校洞) | ||
울산 서생포(西生浦) | ||
충남 공주 석장리(石壯里) |
3. 신석기 시대의 생활
가. 거주지
신석기인들은 원형 또는 방형으로 땅을 넓게 파서 지은 움집(竪穴住居, 土幕, 庴幕)을 만들어 살았다. 움 가운데 취사장 역할을 하였을 화덕이 있었고 화덕장소 옆에는 저장구덩이 있었고 4~5명이 살 수 있는 크기였다.
나. 식생활
구석시대와 마찬가지로 사냥, 고기잡이, 채집생활을 하였고 더하여 농경생활(조, 피, 수수 등)을 하고 목축(돼지 사육)도 시작되었다.
다. 유물
⑴ 토기
식선기시대의 토기는 전기에는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 덧무니토기(隆起文土器), 눌러찍기무늬(押印文土器), 중기에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그리고 후기에는 납작빗살무늬토기(平底櫛文土器), 물결무늬토기(波狀文土器), 번개무늬토기(雷文土器), 타래무늬토기(渦文土器, 螺旋文土器)가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⑵ 간석기(磨製石器)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화살촉(石鏃), 창(石槍), 갈돌판(갈돌, 갈판, 碾石, 磨石)
⑶ 기타
낙시도구(그물추(石錘), 작살(杈)), 조그마한 동물 토우(土偶, 암사동), 흙으로 만든 작은 얼굴(土面, 오산리), 조개껍데기 가면(貝面, 동삼동), 가락바퀴(紡錘車), 바늘통과 뼈바늘(骨針)
라. 사회
10가구 정도가 취락을 형성하여 씨족을 바탕으로 부족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족외혼(族外婚, exogamy)을 통해 보다 큰 부족을 형성했다. 지배자와 피지배관계가 없는 평등사회였으며 정착생활(定着生活, sedentary life)을 하였다.
마. 종교
animism(精靈信仰) | 자연현상에 영혼이 있고 풍요를 비는 의미에서 태양과 불 숭배 |
shamanism(巫覡信仰) | 인간과 영혼을 매개하는 무당과 주술을 믿는 사상으로 고조선의 단군 |
totemism(토템思想) | 씨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계해서 숭배한 것으로 단군신화의 곰, 호랑이 |
영혼불멸사상(靈魂不滅思想) | 사람은 죽어도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상으로 영혼숭배(靈魂崇拜), 조상숭배(祖上崇拜) |
태양숭배(太陽崇拜, sun worship) | 태양을 신격화하여 신앙하고 숭배하는 것. 환인(桓因). 일월성신과 천지신명(日月星辰과 天地神明), 연오랑과 세오녀(延烏郞 及 細烏女, 朴寅亮 殊異傳), 천부경(天符經, 81자의 대종교 경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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