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
김 용태 (대전교구 소속 사제 정의 평화위원장)
세상은 넓고 나쁜 놈들은 참 많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들 안 잡아가고!”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 나올 만큼 악인들 천지다. 근데 가만 보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악인들은 도통 사라지질 않는다. 나라를 빼앗겨도 나라를 다시 찾아도, 전쟁이 일어나도, 전쟁이 끝나도, 군부독재 때도, 군부독재가 아닌 때도, 예나 지금이나 악인들은 한결같이 활개를 친다. 사라지지 않고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모기마냥 지겹고 끈질기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악을 뿌리 뽑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1,31)는 그런 세상이지만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창세6,5-6)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쓸어버리신다. 그리고는 당신 눈에 들어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의 가족들로 하여금 방주에서 함께 살아남은 온갖 생물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게 하신다(창세6,5-7,24참조). 그러나 희한하게도 인류는 다시 타락한다. 노아에게서 시작된 새로운 세상은 하늘을 거스르는 ‘바벨탑’의 오만함에 이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으로 이내 더럽혀지는데(창세11,1-9;19,1-29참조), 그 죄악이란 것이 허물고 불살라도 끊임없이 되살아나 지금까지도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창세8,21) 홍수가 끝나고 노아의 제사를 받으며 하신 하느님의 다짐에서도 드러나듯이 악이란 한 번 쓸어 버렸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악은 우리가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최선을 다해 위축시키고 제어하고 약화시켜야하는 것이 아닐까? 마치 곰팡이처럼 말이다. 곰팡이를 멸종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어둡고 습한 곳을 밝고 쾌적하게 만들어 악을 완전히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나쁜 짓을 해봤자 잘 통하지 않는 공정한 환경을 만든다면 자연스레 악행은 위축되고 악인들은 줄어들 것이다. 그저 들키지만 않으면 되고 붙잡히지만 않으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나쁜 짓으로는 결코 행세할 수 없는 투명한 세상을 만든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그런 악행은 줄어들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해주신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참조) 안에서 더 선명해진다. 특히 이 비유에서는 ‘악을 위축시키는 환경’ 이란 본질적으로 ‘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부각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만연한 악의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선의 문제로 자리하는 것이다.
비유 말씀을 떠 올려보자. 어떤 사람이 밀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나중에 보니 밀과 함께 가라지도 자라고 있었다. 원수가 밤에 몰래 가라지응 덧뿌리고 간 것이다. 그러나 밭주인은 밀밭에서 당장 가라지응 뽑아내지 않고 수확때까지 기다린다. 가라지를 뽑다가 자칫 밀까지 함께 뽑을 수 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비유 말씀에서 밭주인의 처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밭주인은 잘 뽑히지도 않는 가라지를 제거하는 일보다 밀밭을 충실히 가꾸어 밀을 더 잘 자라게 하는데에 정성을 쏟는다. ‘밀밭’이란 그냐말로 ‘밀이 많은 밭’이다 가라지가 하나도 없지만 밀 역시 거의 없디면 그것은 밀밭이라 할 수 없다. 비록 가라지는 있지만 그와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밀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밀밭이다. 그래서 밭주인은 가라지보다 밀이 더 잘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서 단순히 ‘가라지가 없는 밭’이 아니라 가라지의 존재가 무의미할 정도로 ‘밀이 풍성한 밭’을 만드는 이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악행보다 선행이 더 유리한 환경, 악인보다 의인이 더 대접받으며 활약할 수 있는 조건들로 채워나간다면 자연스레 악은 점점 위축되고 선은 점점 풍성해지지 않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가라지의 비유’말씀 안에서 우리의 관심을 ‘악의 소멸’에서 더 나아가 ‘선의 증진’으로 이끌어 주신다. “귁신은 뭐하나!”라는 한탄에서 “나는 뭘 해야 하나?” 하는 성찰로 우리를 초대하기는 것이다. 세상은 악인이 없어야 좋은 것이 아니라 의인이 더 많고 더 잘 살아야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잇다. 가라지를 그냥 둔다고 한다면 이는 세상에 만연한 악행을 외면하고 악인들을 처벌하지 말자는 얘기인가? 그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대문호 알베르 카뮈는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사면하자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 그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이 말처럼 악인들에 대한 처벌은 대단히 중요하다. 처벌이란 마치 가라지를 뽑아내듯이, 발각되고 붙잡힌 악인들을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일이 아니라 내일의 범죄에 대한 경고가 되어 이 세상에서 암약하는 악을 위축시키고 상대적으로 선을 증진시키며 악인에게는 회개와 재생의 기회가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처벌이란 것도 가라지보다 밀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노력의 하나인 것이다. 우리 교회가 사형제도는 반대하지만 마땅한 처벌을 반대하지는 않는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수많은 국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람이 국가 원로 대접을 받으며 잘 먹고 잘 사는 세상, 독립운동가와 민주운동가 후손들은 가난하고 친일매국노와 독재자의 후손들은 부유한 세상, 라면을 훔치면 감옥에 가지만 회사를 훔치면 풀려나는 부조리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악하고 부조리한 것들에 대한 마땅한 처벌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군가를 적절히 처벌하거나 책임을 지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더 근본적으로 힘서야 할 것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의롭고 선한 구조로 꾸준히 바꾸어 나가는 일이다. 그래서 악하고 부당하게 살아가는 이들보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굴복”(로마12,21)시키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참된 ‘권선징악’인 것이다.
2021.7월호 생활성서에서 옮겨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