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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구간은 금남정맥 마지막 구간으로 진고개가 들머리이다.
진고개란 지명은 비만 오면 질척거려 진고개라 칭하는데, 이곳도 예전엔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없이는 못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탄천에서 논산, 강경으로 이어지는 645지방도가 지나는 이곳은 일제시대에는 중요한 군사도로였고, 6.25 당시는 미군 장갑차들이 고개가 높아 여러대가 고개 밑으로 굴러 사고가 났던 곳이라고 전해온다고 하는데, 주위를 둘러 보아도 그럴만한 곳은 없는듯하여 좀 과장이 심하게 전해오는 것 같다.
빨간 기와지붕집 옆 펜스 사이 옹벽 위가 오늘의 들머리이다.
들머리에 설치되어 있는 산행 안내도.
가파른 오름길을 잠시 오르면 이내 완만한 능선길을 가게 된다.
정맥길 좌측으로 콘크리트 흄관 제조업체가 정맥 산허리로 파 들어오고 있다. 깃대봉(161.4m). 산봉우리 이름 중 가장 흔한 이름으로 깃대봉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수탈을 위한 도구로 지도를 만들기 위해 측량용 깃대를 꽂아 사용한 것에 유래하여 봉우리의 이름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봉우리에는 화강암 삼각점과 그 옆에 삼각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안경 구덩이산(106m)이란 다소 생소한 이름의 봉우리에 도착이다.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얕은 봉우리로서, 금광이 많이 있어 안경을 쓰고 금을 발견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홍성산꾼들' 7명이 작고 예쁘게 만든 [금남정맥] 표지판이 인사를 한다.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와 삼각리를 잇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감나무골 고개(명덕재; 153m)에 도착이다. 우측 아래가 감나무골이다.
감나무골 고개에서 15분여 숨가쁘게 오르막을 쳐 올리면 오늘의 최고봉인 262봉에 도착하는데, 서래야 박건석님이 '감토봉' 코팅지를 붙여 놓았다. 공주시 지명유래에 따르면 멀리서 보면 감투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어 내려간다. 시그날 전시장을 방불케하는 곳을 지나 가자티고개(123m)에 내려선다.
충청남도 공주시 탄천면 남산리에 있는 고개인데, 도로 양쪽편으로 높은 울타리가 길게 이어져 있지만, 등로 따라 내려서면 철망 한칸을 통채로 열어놓고 옹벽을 통해 내려서기 쉽도록 시멘트 블록 계단이 놓여있다. 이 곳을 통해 도로로 내려서서 길 건너 철망 끝 옹벽을 올라서서 정맥길을 잇는다.
벌목지와 임도길이 훤하게 들어나는 신앙고개를 지난다. 이 고개는 부여군 초촌면 세탑리 신탑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돌정이 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로 아직도 고개이다. 오늘 처음 만난 이정표이다. 수자원공사 방향으로 진행한다. 벌목지 능선길이 선명하다. 좌측 아래 마을은 송곡리 마을이다.
87번 송전탑, 산성터봉(182.9m), 완만한 낙엽길을 걷다가 산성터였으나 허물어져 방치되어 있는 듯한 곳을 오른다. 봉우리에 올라서면 사방이 확트여 조망하기에 그만이다. 산성터봉을 내려서서 약간 진행하면 조석산(184.9봉)에 도착한다. 코팅지 표지판과 백제금동대향로, ↖용정리 2.3km, 송곡리↗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조석산은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산으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조석산과는 위치가 좀 다른 것 같다. 이후부터는 널찍하게 잘 정리된 등산로를 따르게 된다. 청마산 갈림길이다. 능선에 올라서면 왼쪽에 긴의자가 있고, 이정표는 ↖LPG 4.3km, 수자원공사 1.0km, 용정리 2.9km↗를 표시하고 있다. 산길 이정표에 LPG 4.3km가 표시되어 있다. 석목고개에 LPG주유소가 위치하므로 이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산죽밭 사이에 있는 목재 이정표에도 LPG로 표시되어 있다. 무인 산불감시탑을 지난다.
좌측으로 부여~논산간 고속도로와 산중턱을 뚫고 나온 부여 터널 입구도 보인다. 청마산성 01-04 구조목과 부여 청마산성 안내판을 지난다.
부여 청마산성(扶餘 靑馬山城) 안내판 내용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산 1-1 외에 있는 사적 제 34호의 산성이다. 이 성은 해발 118m 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백제시대 최대의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6.5km이며, 높이는 약 4~5m 가량 된다. 성을 쌓는 방법은 흙과 돌을 함께 쓴 토석혼축식(土石混築式)이며, 형태는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이다. 포곡식 산성은 내부에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넓은 공간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어서 많은 인원이 장기간 머물러 살기에 좋다. 청마산성은 유사시 사비도성 내에 있는 군·관·민이 모두 함께 도피할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 안에는 군창(軍倉)으로 추정되는 큰 건물터가 3곳이 있으며, 각시우물이라 불려지고 있는 우물터와 경용사(驚龍寺)라는 절터가 남아있다.』
청마산성 안내판을 지나 봉우리를 좌측으로 약간 우회하여 내려서면 '부여 청마산성' 표지석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서 있다.
오산고개
부여 사비나성(扶餘 泗沘羅城) 장대지(將臺址) 안내판이 있고 긴 대리석 돌의자가 놓여 있어서 쉬어가기 좋은 장소이다.
나성(羅城)이란 2중으로 구성된 성곽에서 왕궁을 둘러싼 성곽을 왕성 또는 내성으로 부르는데 대하여, 바깥으로 둘러싼 성곽을 말한다. 또한 장수가 지휘하던 장소를 장대(將臺)라고 하는데, 백제의 사비성에는 나성이 존재하였고 이 곳에서 장수가 성의 수비를 지휘한 곳이라는 뜻이고 그 흔적이 지금 이곳이다. 장대지(將臺址) 안내판이 있는 갈림길에서 왼쪽의 왕릉 1.0km는 능산리고분으로 가는 길이고, 정맥은 역시 LPG 0.9km를 가리키는 우측 방향이다. 장대지를 약간 지나면 좌측 산속에 십자가 형태의 나무틀을 세워 놓았다. 주위 전경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세여서 보기에 흉하다. 표고버섯 재배 비닐하우스 단지를 지나 내려선다. 비닐하우스 안에는 표고버섯 재배목이 가득 세워져 있다. 석목고개는 부여읍 석목리와 능산리를 잇는 왕복4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지나는 고개로, 지금까지 길을 안내하던 SK LPG 가스충전소가 위치하고 있다. 차량이 제법 많이 운행되는데, 횡단보도를 통해 길을 건너, 맞은편 통나무로 만든 계단으로 올라 선다.
표고버섯 노천 재배지, 통신시설, 이정표 안부. 금성산(조왕사) 0.9km 방향으로 진행한다. 팔각정 통수대(統帥臺)가 자리하고 있는 금성산(錦城山) 정상이다. 금성산(錦城山)은 해발 121.2m밖에 되지 않지만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다.
삼산에 대한 <삼국유사> 남부여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군중에는 삼산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 부산(浮山)이다. 백제국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 위에 신선이 살며 서로 날아 왕래함이 아침저녁으로 끊임이 없었다. 삼산 중에 일산은 부여 시가지의 동편에 있으며, 지금의 금성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오산은 현재의 오석산, 부산은 백강 마을 뒷산을 말한다. 이들 삼산은 금성산을 중앙에 놓고 서쪽에 부산과 동쪽에 오산이 3㎞씩의 간격으로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금성산 통수대(統帥臺)에 오르면 부여읍내와 금강, 부소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에는 백제 전역의 각 산성을 지휘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이 발생했을 때 군사 행동의 지시와 통제 및 총괄적 연락의 시작점이 되거나 종착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통수대는 말 그대로 장군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통수대에서 계백공원 방향으로 진행한다. 운동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삼거리에서 우측편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성화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이정표에는 통수대 250m, 성화대 250m, 조왕사 180m를 표시하고 있다. 좌측 밑으로 조왕사 기와 지붕이 숲 사이로 보인다.
계백공원에서 무로정(無老亭)으로 올라간다. 무로정을 둘러보고 우측으로 난 넓은 길을 간다. 5분쯤 진행하면 계백문 위 동물이동 통로(바닥에 큰 돌이 깔린 산책로)를 지난다. 무심코 바닥만 보고 지나가다 보면 아래가 도로인지, 계백문을 달고 있는 다리인지도 모르고 지나치겠다.
동물이동 통로를 지나와 돌계단을 올라선다.
정면 방범용 CCTV가 설치되어 있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서 문을 통과한다. 진행방향 우측에 '부여군민헌장'비와 조선시대 문인인 석벽 홍춘경의 낙화암이라는 詩碑가 초서로 새겨져 서 있다.
落花巖(낙화암) / 홍춘경
國破山河異昔時(국파산하이석시) 하니
獨留江月幾盈虧(독유강월기영휴) 오
落花巖畔花猶在(낙화암반화유재) 하니
風雨當年不盡吹(풍우당년부진취) 라
나라가 망하고 산천도 변했는데,
저 강물의 달빛은 홀로 몇 년을 지켰는가?
낙화암 바위틈엔 꽃이 아직도 피었으니,
당시에 핀 꽃이 아직도 시들지 않았는가?
좌측에는 '독립운동 애국지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GPS는 좌로 휘어지는 시멘트 포장길을 따르도록 안내하고 있으나, 우리는 반사경 직전 우측 숲으로 들어가 희미하게 나 있는 텃밭길을 통과하여 마을로 내려서는 길을 택한다. 부여여고 정문 앞 대로에 도착하여 신호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넌다.
부여여고 좌측에서 부소산성으로 들어가거나(입장료가 있다고 한다), 부여여고 정문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부여초등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하면 입장료 없이 부소산성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부여시민이 통수대에서 알려주었는데, 선답자들의 산행기에 여고교내에 있는 팔각정을 소개하고 있으므로 이를 보기 위해 정문으로 들어선다.
뒤뜰에 있는 팔각정(八角井)
팔각정(八角井) 안내판 내용.
『백제 왕국에서 이용하였던 우물이라고 전해온다. 바닥에 길게 다듬은 돌로 팔각의 우물을 만들고 위에는 할석으로 쌓아 올렸다. 이 주변에서는 잘 다듬은 백제시대의 주춧돌이 많이 나오고 집자리에 썼던 큰 판석들이 많이 나왔다. 또 조선시대에도 부여현의 관청건물이 들어서 있던 자리였다. 발굴결과 백제시대의 도로유적이나 연못자리도 확인되어 백제시대 이래 중요한 관청이 있던 터로 밝혀졌다. 주변에서 나오는 유물이나 유구들이 백제시대의 고급문화를 말해주고 있어 왕궁지를 추정하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담장을 올라서서 철판다리를 건너면 부소산으로 접어들게 된다.
산길을 약간 오르면 넓은 순환도로와 만나는데, 정맥길은 우측이다. 좌측에 120m 위치에 삼충사가 있는데, 선두가 바로 우측으로 접어드는 바람에 잠시 망설이다가 생략하기로 한다.
삼충사(三忠祠)
백제 말기 의자왕 때 삼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성충은 백제 의자왕 때 좌평으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가 투옥되어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충신이다. 흥수는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키라고 의자왕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계백은 신라 김유신장군의 5만군이 황산벌로 쳐들어오자 5천 결사대로 싸우다 황산벌에서 장렬히 죽은 장군이다.
영일루(迎日樓)
안내판 내용.
『백제 시대에 영일대가 있었던 곳으로 계룡산의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1964년 홍산에 있던 조선시대의 관아문을 옮겨와 세운 것으로 이름을 영일루라고 하였다. 누각을 옮겨 세우기 위해 땅을 고르게 다듬는 공사를 할 때 백제의 와편이 많이 출토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청마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계룡산의 연천봉(739m)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영일루의 기단은 정갈하게 다듬은 장대석을 1단으로 쌓고 주춧돌은 키가 큰 8각 장초석을 썼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으로 하고, 기둥 위의 공포는 화려한 다포식으로 싸 올렸다. 아래층의 기둥이 특히 높아서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건물 폭에 비해 키가 큰 건물이 되었다.
태자(太子)골 숲길. 옛 백제 왕자들의 산책로이다.
군창지(軍倉址)
『부여 부소산성(사적 5) 동쪽 정상부(해발 98m)에 있다. 1915년 이곳 지하에서 쌀·보리·콩 등의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됨으로써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의 규모가 상세히 밝혀졌다. 건물의 배치는 'ㅁ'자 모양으로 가운데 공간을 두고 동서남북으로 배치하였는데 길이 약 70m, 넓이 약 7m, 땅속 깊이 약 47cm 정도이다. 지금도 이 일대를 파 보면 불에 탄 곡식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주변에서 분청사기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조성연대를 고려말에서 조선초로 보고 있다. 』
부소산성(扶蘇山城)
『이 산성(山城)은 백제 성왕(聖王) 16년(538) 공주에서 이곳으로 옮겨 123년간 사용한 사비도성(泗沘都城)의 중심 산성으로 이중의 성벽(城壁)을 두른 백제식 산성이다. 성내에는 당시의 군창터로 전해오는 곳에서 탄화된 곡식이 나오고 있으며, 사자루, 반월루, 고란사, 궁녀사가 성내에 있고 유명한 낙화암이 있어 관광지로 이름나 있는 곳이다.』
해발 106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동쪽과 북쪽으로 두 봉우리로 나누어진 부여의 진산이다. 산의 정상과 능선을 흙으로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 부소산성으로 사적 제5호로 지정돼 있다. 백제 도성으로 추정되는 부소산성은 평시에는 왕궁의 후원으로, 전쟁 시에는 최후 방어성으로 이용했던 사비백제시대의 대표적 산성이다.
산성 안에는 식량을 저장하던 군창지(軍倉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진 낙화암, 고란사와 고란초, 해맞이 명소 영일루(迎日樓), 사자루 등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부소산이라는 산 이름은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처음 보이며, 부소(扶蘇)의 뜻은 백제시대 언어로 소나무(松)의 뜻이 있어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보는 학설이 유리하다 .
부소산성 수혈건물지 자료관, 산성터길
반월루(半月樓)
백마강(白馬江)이 반달모양으로 끼고 도는 부소산(扶蘇山) 南쪽 마루에 있으며 부여 시가지(市街地) 전경(全景)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
사자루(泗泚樓)
『1919년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06m)인 송월대에 임천면의 관아 정문이던 개산루를 옮겨짓고 사자루로 바꾸었다. 2층 문루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2층에는 누각을 설치하였으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건물 정면에 한말 의친왕 이강이 쓴 《사자루(泗泚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지역은 백제 시대에는 망대 역할을 하였던 곳으로 백제시대 초석, 장대석, 와편이 분포하고 있으며 땅을 고를 때 정지원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백제시대의 금동 석가여래 입상(보물 196)이 발견되었다.』
사자루(泗泚樓)의 泚자는 沘자와 비슷하여 옥편을 찾아보면 泚는 '강이름 자'이고 沘도 '강이름 비'인데, 부여의 옛 지명이 사비성(泗沘城)인 점을 감안하면 사비루로 통일함이 맞지 않을까라고 하는 이도 있다.
해강 김규진이 쓴 《백마장강(白馬長江)》
백마강은 <백제의 제일 큰 강>이라는 뜻으로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16km의 금강을 일컫는데, 백제 사람들은 이 강을 사비강, 백강이라고 불렀다.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리 신무내산 뜬봉샘에서 시작하여 장항, 군산앞 서해바다까지 401km를 흐르는 큰 강으로 금강을 지역에 따라 고유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는데, 금산군 제원 부근에서는 광석강(廣石江), 대전시 회덕에서는 부강(芙江) 또는 절강, 공주에서는 곰강 또는 금강(錦江), 금강천이 합류되는 천정대 부근에서는 창강(蒼江)으로 불리며, 백마강 이하 서해바다까지는 진포(鎭浦)라고 부른다. 원래 금강은 곰강(웅진熊津)의 음역이므로 공주부근에서는 한정하여 불렀으나 점점 확대되어 지금의 금강 전체를 지칭하게 된 것이다.
사자루와 궁녀사 갈림길을 지나자 구드래나루 갈림길에 이른다. 공원길은 이 곳에서 그대로 우측 내림길로 낙화암으로 이어진다. 구드래로 가려면 낙화암까지 갔다가 다시 여기로 되돌아 와야 되는 것이다. 일단은 낙화암으로 내려간다.
백화정(百花亭)과 그 우측 '낙화암 천년송'.
낙화암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한을 달래고자 만든 정자라고 하는데, 절벽에서 강물로 떨어지는 궁녀들의 모습을 꽃으로 표현한 것인가. 매년 10월 백제 문화제때 제사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백화정(百花亭) 안내판 내용.
『부여 부소산성 북쪽 금강변의 낙화암 정상부에 있는 육각의 정자건물이다. 1929년 당시 군수 홍한표의 발의로 부풍시사라는 시우회에서 세웠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 소동파가 혜주에 귀양가 있을 적에 성밖의 서호를 보고 지은 강금수사백화주(江錦水榭百花州)라는 시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부여 외곽을 감싸고 도는 백마강과 주변의 낮은 산들이 어울려, 내려다 보이는 풍광이 아주 일품이어서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대하는 듯하여 부여를 찾는 관광객이면 반드시 들르는 명소이기도 하다.』
낙화암(落花巖).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660년(백제 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백제 여인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알고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고 이곳에 이르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기록이 전하며 후세 사람들이 낙화암이라 불러 백제 여성의 절개와 고귀한 충려의 표본이 되고 있다. 암벽은 60m 정도이며 절벽 아래에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하는 '落花巖'이 새겨져 있다.』
고란사(皐蘭寺)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사찰의 유래는 암벽에 자라고 있는 고란초로부터 온 것이라 한다. 현 건물은 은산 승각사를 이건한 것으로 정조 21년(1797)에 개건한 것이다. 사찰 전면의 2개의 연화문방형초석은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본사인 공주 마곡사의 말사로서 백제 아신왕 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다.
고란사 뒷편 암반에 위치하고 있는 고란정(皐蘭井)에서 석간수 한잔을 시원하게 마신다. 재미있는 고란정 전설 이야기를 보았다.
고란사에서 되돌아 올라가 연리지 나무 있는 곳에서 우측으로 5분여 내려서면 구드래나루터인데, 우리는 백마강 나루배를 타고 구드래나루터로 가기로 한다.
나루터 우측에 있는 조룡대(釣龍垈)
『낙화암 아래 바로 앞쪽의 작은 섬 모양 바위이다. 옛날 당나라 군사가 백제의 왕이 있는 성을 공격하기 위해 백마강를 거슬러 오던 중 갑자기 풍랑이 일어 진군할 수 없게 되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수소문하여 그 연유를 알아내고는 수중 바위에 걸터앉아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강물 속에 백제 무왕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린 곳으로써 용의 조화를 막고 풍랑을 멈추게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바위에는 지금도 그 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선착장을 출발한다.
조룡대를 우측으로 보면서 약간 가다가 좌로 급회전하여 낙화암을 좌측으로 보면서 진행한다. 고란사와 송시열이 썼다는 붉은 글씨의 낙화암 바위, 그리고 전체 산세를 바라본다. 구드래나루터에 도착하여 금남정맥의 대미를 장식한다.
백마강과 구드래나루터
『백제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백마강은 부어 역사 유적지구를 지나는 금강 구간 16km를 부르는 이름이다. 금강이 상류에서는 적등강 중류에서는 웅진강이라 불린 것처럼 부여에서는 백마강이라 불린다. "백제에서 제일 큰 강"이라는 뜻의 백마강은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의 물줄기로 백제 부소산성을 반달 모양처럼 휘돌아 흐른다. 백마강은 일명 백강이라고 하기도 한다. 백제시대에는 부여의 옛 명칭 '사비'를 따서 사비수(泗沘水)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구드래'는 부소산(扶蘇山) 서쪽 기슭의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구드래는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강 건너편 왕흥사지(王興寺祉)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白馬江) 언덕 바위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되었고,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고지도에 이곳이 구암진(龜巖津:구돌나루)으로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한 구드래는 어원이 여러 가지다. '일본서기(720년 편찬)'에 나오는 '구다라'를 말하는데, 그 뜻이 대국, 섬기는 나라, 백제를 뜻한다. 일본 나라의 오류지에 있는 백제 관음상(구드래 관음상)이 구체적 예이다.』
1. 일시 : 2016. 1. 3(일)
2. 코스 : 진고개←<3.4km>→감토봉←<1.9km>→가자티고개←<2,1km>→신앙고개←<4.4km>→청마산갈림길←<0.7km>→청마고개←<4.75km>→금성산←<4.2km>→구드래나루
3. 도상거리 : 21.45km, 실거리 : 21.5km
4. 소요시간 : 7시간 전후
5. 중간탈출로 : 청마고개(오산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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