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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바울은 또 다시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한 집에서 유업을 얻을 자는 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업을 받을 때까지는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있게 된다. 그러나 정한 때가 되어 아버지의 상속을 받게 된다면 그들로부터 자유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께서 오기 전까지 율법 아래 있었지만 주님께서 오신 후부터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성령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합당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신다. 아들은 종이 아니다. 비록 성년이 되기까지 부모 또는 후견인의 통제 아래 살지라도 자유한 자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것 자체가 자유 한 자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도 세상의 정신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의 무지로 인하여 여전히 세상에서 종노릇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무지를 일깨워 주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지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어리석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들의 신분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해 준 것이다.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4:7)”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후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말해 준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때 우리의 신분은 종이 아니고 아들이다. 아들이면 우리는 자유자이며 또한 유업을 받을 자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가?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임을 알게 해 주시고 이 축복을 누리며 살게 해 주옵소서.
4:8-20.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또는 내가 정당히 너희를 대접하므로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무지로 인하여 자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이전의 종노릇하던 때로 돌아갔다. 그들은 또 다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킨다. 여기 그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켰다는 것은 율법으로 돌아갔다는 의미로서 외적으로는 은혜를 떠나 의식적 종교로 돌아갔다는 의미다. 그들이 이처럼 쉽게 복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율법의 의식들이 그들이 전에 숭배하던 자연종교 의식과 일치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하여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신 날들(절기들)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새롭게 하도록 하려 하심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도록 해 주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통하여 달과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식(儀式)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심령을 각성시켜 주심으로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해 주려 하심이다.
그러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떠나 달과 절기를 지킨 것은 거짓교사들(유대주의자)의 유혹에 의해 이루어진 일로서 외형적으로는 율법으로 돌아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이처럼 쉽게 복음을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것은 율법에서 명하고 있는 날과 달과 절기 그리고 해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과거 우상숭배 시 행하였던 종교 의식과 일치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복음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율법에 따라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문화와 일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교 세계에 복음이 처음 증거 된 곳에 복음으로 인하여 그들의 문화가 그리스도교의 문화로 변화 되어 정착되기 전까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그곳에 그리스도교는 순전성을 유지할 수 없고 혼합종교 형태로 변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진리 안에서 바르게 성장 할 수 있도록 세속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로 변혁시켜 정착시키는 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날과 달과 절기 그리고 해를 지킨 것은 그들 스스로를 어리석음에 빠지게 한 것이었고 또한 바울에게는 그들을 위해 수고한 모든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이었다. 믿음 안에 있을 때에 그들은 영적 부모인 바울을 자신들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존경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후부터 바울을 멀리 했다. 바울은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수고하였으나 거짓 교사들은 그들의 영혼을 파멸 시키는 일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말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3:16)”고 묻고 또한 그들에게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4:19)"라고 말했던 것이다.
4:21-31.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다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하여 구약의 한 예를 들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계집종으로부터 난 자이고 또 다른 아들은 자유 하는 여자로부터 난 자다. 바울은 이 두 아들은 율법과 복음을 예표 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4:24-25)”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하여 날 자를 약속의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사라는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없었고 또한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을 수 없었다. 물론 사라는 아직 아들을 잉태하지 못했지만 장차 그가 낳을 아들은 약속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그를 통하여 이루실 것이다. 그는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어 복의 원천이 될 것이고 그의 후손들은 한 민족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림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 것을 미리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4:27)” 특별이 이 말씀에서 우리는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지금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보다는 ”지금 우리는 어떤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은 언젠가 다 소진 되지만 하나님이 약속은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약속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말한 후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을 받고 그 은혜 가운데 사는 것 자체가 놀라운 축복이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4:28)"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결코 거짓교사들의 유혹을 받아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그 은혜의 어떠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축복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허락해 주신 축복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인 됨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딤후3:14)“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은혜들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배워야 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바울은 계속하여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4:30)” 이 말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떠나 계속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따라 율법을 쫓아 행한다면 하나님의 집으로부터 쫓겨날 것을 경고한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하는 여자의 자녀라는 것을 알아야 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바른 교리를 통하여 자신의 신분을 알고 그것을 지켜가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자신의 신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은 거짓 가르침에 미혹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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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갈라디아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받은 은혜와 자유의 구원을 다시금 율법주의 아래에서 제한당할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들이 주님께 받은 구원의 자유와 은혜를 다시 한 번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다(1-7절)
(1-3)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유업을 이을 자’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든 것을 상속받고 다스려야 하는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가 성인이 되어 참 상속자로 인정을 받기 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곧 3장의 초등교사처럼 아버지가 택한 훈련자 아래에서 상속자 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 과정은 때로 매우 고되고 엄격하여 종의 생활과 다름없이 강한 훈련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예전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 노릇 하였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주의로 변질된 유대교요, 이방인들에게는 각 종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큰 구원의 때가 이르기까지 율법주의로 대표되는 스스로의 힘과 불완전한 우상의 힘을 빌어 구원에 이르려 몸부림 치며 종처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두움의 시기를 거쳐 드디어 큰 은혜의 때가 임하였습니다.
(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주셨고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창세기 3장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메시아로서의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의미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임하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된 명분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함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는 것이 왜 우리의 속량과 자녀 됨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우리와는 다르게 모든 죄의 유혹을 이기시고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시사 하나님 앞에 온전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율법의 요구로 인해 발견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지시고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는 주님께, 주님의 의는 우리에게 전해지며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들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을 믿고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6-7)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하셔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확신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살아생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심에 주저함이 없으셨기에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 또한 담대하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장 49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부모에게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 고백하시며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 되심을 고백하셨고 또한 누가복음 23장 4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거하실 때에도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앞두신 순간까지 한결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고 담대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자녀이기에 또한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때로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불순종하다 돌이키기도 하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여 실망시킬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고 그 집의 상속자로 인정하여 주는 것은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닌 내가 부모님의 자녀라는 관계 때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때론 우리가 실수와 연약함속에 넘어질지라도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때로는 징계하셔서 혼내실지언정 그 자녀된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세워 가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닌 그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가운데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지 말라(8-11절)
(8-11)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고 또한 유대교의 그늘아래에서 율법주의적인 신앙의 뿌리를 가질 수 밖에 없었겠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음에도 어찌하여 다시 그 율법주의의 그늘아래 거하려 하냐며 그들이 유혹에 흔들리는 것이 어리석은 선택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다는 것은 그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단순히 신과 인간, 주인과 종의 관계를 넘어선 인격적 관계 곧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까지 깊어졌음을 알려주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그 좋은 자녀의 자리, 상속자의 자리에서 다시금 두려움의 종의 자리로 내려가려 하는지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들이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율법적으로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 것에 빠져 있는 것을 염려합니다.
(10-11)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율법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인인 것을 깨닫도록 주신 거울 같은 이 율법을 통해 오히려 자신의 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그 거울 뒤로 숨어버렸고 또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하며 그리스도를 통한 참 구원의 사건을 소망하도록 주신 유월절 절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 안식일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요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자유를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은 오히려 다시 그 유대교의 절기 속에 자신을 가두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을 보고 자신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미 골수 바리새인으로 하나님의 뜻을 쫒지 않고 율법 그 자체로 의로움을 추구했던 삶의 끝이 그리스도의 원수 된 자리였음을 경험했던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 자리에 서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습 속에도 전통을 따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날과 시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전통의 길들을 따라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복음의 정신을 잃어버린 채 화석화된 습관의 길만 남아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준 이 간절한 권면은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을 그 자녀로 부르시기 위해 그 아들을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율법 아래에서 이루신 모든 의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가 지키지 못한 율법의 모든 죄 값을 지고 십자가에 죽으사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사 우리 주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 신앙생활의 결점을 찾으며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지 두려움 속에 더욱 견고한 신앙의 공로를 쌓으려 애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려는 우리의 구원의 여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확신 없이 율법주의와 같은 자기 의의 그늘아래 자신의 신앙의 뿌리를 두는 것은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헛되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돌아보며 그 은혜에서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복된 주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앞서 걸어가는 우리들이 믿음의 후손들에게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한편에서는 자신감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간절함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에도 바울은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는 말과 함께 권면을 이어갑니다. 이는 오늘 본문을 기록한 목적을 아주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 선동자들의 주장에 휩쓸려 바울의 복음을 저버리고 그들을 따라가려는 상황에서 바울은 그들과 맺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자신과 같이 참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맺었던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기를 소망한다는 간절함을 담아 편지를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12-16절)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바울은 앞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많은 책망을 했지만 다시 그들을 ‘형제’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지금 그들이 걸어가고 있는 그릇된 신앙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며 호소합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바울은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선민의식에 둘러싸여 살아갔던 유대인 바울이 이방인 갈라디아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임을 증거하는 행위들, 곧 율법이나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하지도 않고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 바울이 유대인처럼 살거나 할례나 율법을 강조함으로써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의 삶의 풍습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과 동일시되어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이방인처럼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유대인으로의 삶이 아닌 이방인으로의 삶을 기꺼이 살았던 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20-21)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행했던 것처럼, 율법 없는 자를 위해서는 율법 없는 자와 같이 행했다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얻고자 자신도 이방인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분적으로 유대인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바울은 많은 곳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저마다 반응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다름의 간극도 매우 심했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허다한 무리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목숨이 위협받기도 했습니다. 그 중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에 대해 호의적이었습니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으며 바울이 육체의 약함으로 인해 시험받는 것이 있었음에도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신의 육체의 약함에 대해서 성경은 정확히 밝히지 않지만, 그가 가진 육체의 약함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업신여기게 하거나 버리게 할만큼 눈에 띄는 질병이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위축될수도 있는 질병이었지만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자신의 약함을 도리어 드러냈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질병 혹은 육체의 약함이 복음을 전하는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도리어 바울의 육체의 약함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수 있는 교인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5-1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눈이라도 빼어 바울에게 줄만큼 바울을 지극히 섬겼다고 말합니다. 우리말에 ‘몸이 10할이면, 눈이 9할’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의 소중함을 나태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 그렇게까지 섬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특심은 한 때의 이야기였던 같습니다. 눈을 빼어 줄 수 있을 만큼 섬겼던 바울을 이제는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원수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처음으로 복음을 들었을 때는 극단적인 희생까지도 감수하려는 희생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의 태도를 가졌었는데, 이제 그들은 선동자들의 끈질긴 선동에 흔들려 바울이 전해 준 복음에 대한 기쁨과 열정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향한 사랑마저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위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바울이나 바울의 설교적인 논리에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올바르게 깨달은 교인들이었다면, 율법주의 선동자들의 선동에도 부화뇌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복음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했었는데, 그들은 탁월한 변증가인 바울을 따르는 바울의 추종자들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기 좋은 목회적 신념을 가진 교회를 찾거나 듣기 좋은 설교나 논리적인 설교를 잘 하는 목회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하지만, 결국은 한 목회자나 교회를 따르게 되는 경우를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환경에서는 그것이 더욱 쉽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문제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믿음 가운데 믿음의 푯대가 변하지 않는 주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가를 먼저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어떠한 선동자들의 달콤한 선동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17-20절)
바울이 이렇게 메시지를 쓴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심을 얻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들이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를 원하는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 역시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당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는 바울은 간절함 때문에 어조가 매우 고조되어 있습니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이 ‘언성을 높이려 한다’는 표현에서 바울의 강한 어조와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의 높아지는 언성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하여 의혹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한글성경에서 ‘의혹’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레오’는 ‘어쩔 줄을 모른다’, ‘당황스럽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바울의 격앙된 감정은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너무 간절해서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하는데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들이 교회학교 교사가 되어, 어린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아이들의 믿음이 잘 자라나, 청소년, 청년의 시기를 믿음 안에서 잘 성장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외발령이나 군대, 유학 등으로 몇 년간 그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는데, 몇 년 뒤 다시 돌아온 교회에 그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다른 아이들을 통해 그 아이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서 차근차근 복음을 다시 전하고 싶지만 그도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인 감정, 좋았던 추억에 호소해서라도 그를 설득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도 큰 변화가 없다면, 어쩔 줄 몰라 당황스러워, 그 아이에게 격앙된 표현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마음이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을 담은 바울의 메시지는 바울 자신을 위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을 선동하는 율법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접근하여 열심을 냈지만, 그 열심의 동기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인들로 하여금 율법과 관습을 따르도록 이끌었고, 바울과 교인들의 사이를 이간시켰으며 그들의 최종적인 목표는 자신들을 열심히 따르도록 인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율법주의자들의 열심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열심의 동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열심을 낸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나 교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릇된 열심에 미혹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바울과 율법주의자들은 강력한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뤄가는, 곧 성전된 신앙을 이어가기를 바라며 그들을 가꿨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강도의 소굴에 필요한 희생양이 되어주기를 바라며 그들을 선동했습니다.
바울과 율법주의자들의 대조를 보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가게 권하고, 또한 각자를 성전으로 세워가도록 돕는교회와 목회자를 만나 신앙생활을 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좋은 교회나 시스템, 혹은 강력한 목회자에게 절대 충성을 요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자신을 가꿔갈 것을 권면하며, 주님께로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교회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날마다 스스로를 가꿔간다면, 우리들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 그리스도인, 맛을 잃을 세상에 맛을 내는 소금 그리스도인으로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의 여정 속에 우리의 인생은 물론이거니와, 우리가 속한 가정과 찢어질대로 찢어진 우리 사회에 생명과 회복의 빛으로 비춰가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갈라디아 교회에 퍼져있는 잘못된 복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1:6). 우리가 계속 보고 있다 시피, 잘못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율법도 지켜야 하고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6:1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유로 박해를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어떤 박해를 당했는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베드로 조차 그 박해를 피하기 위해 외식적으로 행동했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그러기에 또한 이 문제는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할 만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2:12). 유대인이었던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피하려고 복음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들은 왜곡된 복음을 자신만 믿을 뿐아니라,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4:17).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가진 자기모순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자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1-23)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율법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음 질문을 통해 드러내려고 합니다.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말은 그들이 율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주장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21절에서 넓은 의미의 율법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하며 모세오경을 의미는데, 유대인에게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님의 언약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을 의식과 예식을 위한 법조문으로 취급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순은, 율법을 주장하면서 율법의 취지를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주장하면서도 율법의 취지를 간과하는 이유는, 율법을 자기의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과 취지를 소홀히 하고, 그 율법을 이용해 자기의를 주장하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율법의 바른 의미를 설명합니다.
(22-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바울은 창세기 16-21장의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해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기초가 되는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칭한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처의 아들까지 총 여덟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에게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고 불리리라고 하셨습니다(롬9:7).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을 출생 방식에 따라 대조합니다. 대조되는 두 아들의 차이점은 그들의 능력이나 자질이나 성품이 아니라, 그들의 출생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약속을 따라 났으며, 다른 하나는 약속과 관계없이 육체를 따라 태어 났다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85세가 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을 첩으로 들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내 사라를 통해 아들을 낳게 하겠다고 하시고, 100세 때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스마엘은 여종에게서 육체를 따라서 났고, 이삭은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고 합니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인간의 방법과 수단으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약속을 따라 났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음이 분명한 것은, 사라는 불임이고 이미 늙어 출산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삭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주장하는 유대이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정체성이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그 근원이 있음을 논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없었고 의로움도 없는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종과 자유자(24-27)
(24A)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바울은 이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합니다. 두 여자는 두 개의 언약이라고 합니다. 앞서 3장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셨고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그 언약을 폐기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그 ‘언약’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4장 22절에서, 두 종류의 언약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약속을 따라 난 언약이며, 하나는 육체를 따라서 난 언약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언약이지만 약속과 육체로는 그 의미가 대립합니다. 육체를 따라서 난 언약은 율법을 의미하며, 일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 율법언약입니다. 약속을 따라서 난 언약은 일한 것과 상관없이 주는 은혜언약입니다.
바울은 두 중류의 언약에 대해서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24b~25)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첫 번째 언약에 대해서 먼저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름을 먼저 말하지 않고 종을 낳은 자라고 하고, 또한 그 아들을 종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어법을 쓰는 이유는 ‘종’이라는 신분과 그 의미에 대해서 말하려는 것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종은 노동력이나 그 쓸모로 가격이 매겨졌습니다. 노동력이나 쓸모가 좋은 종은 비싼 가격으로 매매가 되기도 했습니다. 종은 일을 해야만 값어치가 있으며, 일하지 못하는 종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을 종이라고 하며, 그를 낳은 하갈을 시내산과 예루살렘과 같다고 합니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곳으로, 율법이 기원된 곳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현재도 성전에서 의식과 제사가 드려지는 율법의 중심지를 가리킵니다. 바울이 이를 통해 하는 말은, 율법과 시내산과 예루살렘은 그 기원이 종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그 자손을 종노릇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언약 중 하나인 율법언약은 일한 댓가로 보수를 받는, 종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따라서 난 아들은 종과 다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다음 구절에서 설명합니다.
(26-27)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다른,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대해 말합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율법의 중심지로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또한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중심지였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 그리스도인과 어떤 관계인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명확하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관련이 없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해 있다고 설명합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달리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희생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율법에서 정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며 율법으로 부터도 자유한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이사야 54장 4절의 말씀으로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사라를 가르킵니다. 출산하지 못한 사라에게 외쳐 노래하라고 한 이유는, 구원이 잉태하지 못하는 사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을 얻는 것은, 율법언약에 따라 우리의 노력과 행위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하신 은혜언약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즉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4:28-5:1)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삭과 같이 언약을 따라서 났습니다. 이스마엘은 자기의 방법과 노력으로 육체를 따라서 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불가능한 상태에서 은혜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고, 불가능한 죄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29-30)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바울은 더 노골적으로 이삭과 이스마엘을 대립시키는데,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난 자라고 하고 이삭을 성령을 따라 난 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삭과 같이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라서 났습니다
육체를 따라서난 종과 달리 더 이상 할례와 같은 외적인 율법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한 자들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하갈이 사라를 학대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다 쫓겨난 것과 같이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두 상황에 영적인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두 상황의 비교로 인해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을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어 고발합니다.
율법주의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격이 미달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있지만 율법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들를 낳은 하갈이 불임인 사라를 박해했지만, 하갈로 부터는 종이 나고 불임인 사라로 부터는 약속을 따라 자유 있는 아들이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울사도가 하고자 한 말입니다.
(31-5: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것이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서 하려고 한 말의 결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입니다. 곧 우리는 일을 하고 그 보수를 받는 종이 아니라, 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자녀입니다. 그러나 자녀라고 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일은 하지만 댓가를 받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이기에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속박되고 종이 되게 하지만, 은혜는 온전히 자유한 자녀가 되게 합니다. 이 자유는 강도의 소굴처럼 자기의 탐욕과 욕심대로 행할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단에 마음껏 복음자리를 틀고 오를 수 있는 자유입니다. 오늘도 믿음위에 굳건하게 서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져오신 자유를 누리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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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던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바울의 연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눈을 빼어서 바울의 사역을 돕겠다는 마음을 품을 정도였습니다. 본문 19절은 바울은 갈라디아교회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다시금 복음 안에서 해산의 수고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교회설립 후, 바울은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교인들에게 바울의 공백이 컸습니다.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보이지 않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빈자리는 유대인들의 가르침으로 채워졌습니다. 유대인의 전통 속 지켜온 성경(당시 구약)과 방대한 해설과 가르침, 심지어 할례, 제사, 절기 등의 수많은 종교의식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잠식했습니다. 종교제의가 주는 질서정연함과 엄숙함은 사람을 쉽게 압도합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 사람은 쉽게 현혹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3장을 통해 논리정연하게 복음에 대하여,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두 가지 목적을 둡니다. 첫째, 인간이 죄인임을 인식하게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폭로하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형편없는 존재임을 드러냅니다. 둘째, 율법은 우리를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24절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형편없음을 인정한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초등교사 역할을 합니다. 본문 4장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1,2절입니다.
“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성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믿음을 통해 공유합니다. 바울은 이 복을 유업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당시 미성년자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 상속받을 권한이 없습니다. 후견인과 청지기는 미성년이 성인이 되기까지 돌봅니다. 바울은 율법이 후견인과 청지기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역할은 한시적입니다. 한 존재가 예수의 복음 앞에 나와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율법은 효력을 잃게 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본문 4~7절입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구약시대 감히 부르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가장 친근한 호칭, 아빠로 부릅니다. 그리고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모든 권위와 존귀를 함께 나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속은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약속을 잊고 다시 종이 되기 위해, 율법 아래로 들어가곤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종결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여정을 떠납니다만 광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의 물,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하나님의 돌봄의 증표였으나,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형상이라 믿는 헛된 시도를 합니다. 성도의 신앙여정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닮았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율법은 당장 눈과 삶에 보이기에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보다 율법을 따릅니다. 율법을 다시 따른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8, 9절입니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율법을 따르는 것은 종노릇하는 것이랍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 자유해진 이들이 삶의 주도권과 자유권을 잃은 채, 한 인간의 권리를 상실한 종으로 회귀하는 것을 가슴 아파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쉽게 보이는 것, 자신을 압도하는 것에 삶의 자리를 내어줍니다. 그렇다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가시적인 유혹이 있을까요?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교회조직과 제도, 훈련프로그램, 신학과 교리 등을 주의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재발견했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해진다는 교리는 말씀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깊고 또한 넓혀주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신칭의 교리를 믿기에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정돈한 교리만을 믿는다고 성도가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교회가 잘 포장해놓은 수많은 교육과 훈련프로그램, 신학과 제도들을 신봉한다고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도구들이 하나님 앞에 우리를 데려다주는지 반드시 점검해야 합니다.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물질과 시간, 가르침으로 열심을 냈던 이들의 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17절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교인들이 예수가 아닌 자신들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열심도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를 향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다 헛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종교적 열심이 예수가 아닌 어떤 또 다른 것을 향하는 것은 아닌지 주의해야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주와 피조물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는 반드시 해산하는 수고를 통해 얻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친히 피를 흘렸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해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얻은 우리는 참으로 존귀합니다. 하나님은 존귀한 자녀들을 쉬지 않고 돌아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보이지 않기에 그분의 존재를 대체하고 싶은 수많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늘 우리 속에 계시며, 우리의 삶을 그분의 손으로 친히 관여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것을 비유함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21)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율법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지키려는 자들”처럼 보이지만, 바울은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9)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율법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율법주의자들을 비꼬며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즉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통해 복음(자유)과 율법(종)을 구체적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으니”(22),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외에도 후처 그두라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들이 있었지만(창25:1-2), 바울이 여기에서 두 아들만을 언급한 것은 이들의 탄생의 근원이 상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3-24)
아브라함에게는 원래 아내 사라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후손이 없자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폐경이 되어 임신이 불가능한 사라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들, 즉 이삭을 얻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의 방법에 의해 얻은 것이지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았습니다. 반면 이삭은 이미 석녀가 되어버린 노쇠한 부부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그들의 태를 여셨기에 태어난 자식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여종” 하갈에게서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본처 곧 “자유있는 여인”인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이삭을 낳아 두 아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24절에서 두 언약이란 율법의 언약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언약, 즉 율법과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25)
하갈은 육체를 대표하여 이 세상의 것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갈"과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과 "지금 있는 예루살렘" 그리고 "종"을 동일선상에 위치시키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란 유대의 율법주의자들이 본부를 삼고 있는 당시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혈통적으로 순수한 사라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저주를 감당하고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기에 그들은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분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순수한 사라 혈통의 유대인들이 율법을 고수함으로 이처럼 종의 신분을 지니게 되었지만, 반면에 이방인들은 믿음을 통해 자유자의 후손이 되는 것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를 이루어 천상의 예루살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8)
"위에 있는 예루살렘"과 "자유자"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동일선 상에 있는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영적인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이삭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율법주의자들로 인한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바울은 구약을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29)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그 때의 상황과 현재 율법의 종 노릇하고 이는 율법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의 상황을 동일하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들은 언제까지 이렇게 핍박을 받고 있어야 할까요?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7)
바울은 구약의 이사야 54장1절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한 결과, 주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주전 586년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슬픔과 고통과 멸시와 천대 속에서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과 번성의 말씀을 선포하셨는데, 바로 그 말씀을 인용해서 현재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한 자”, “산고를 모르는 자”를 "사라"와 동일시하였는데, 결국 사라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 이삭을 주셨고 그의 후손들이 모래알 같이 많아지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어필함으로 현재 핍박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을 핍박하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에 대해서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30)는 구약의 내용을 인용해서 율법과 복음(믿음)은 공존할 수 없기에 믿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의 정죄 아래 머물러 있는 자들은 육체의 신분에 따라 죄의 종으로 머물러 있게 되기에 하나님의 유업에게 제외되게 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31)
바울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비유적인 해석에 대해 자신을 비롯한 갈라디안 교인들 모두가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 아브라함의 약속의 자녀(3:6-9)임을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5:1)
학자들에 따라 5장 1절을 4장 31절과 연계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따로 분리해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 데, 저는 5장1절을 앞서 3장과 4장의 결론 부분이자 동시에 앞으로 전개해 나갈 나머지 장의 도입부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이 자유를 굳게 지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앞서 서두에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자유가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생각해보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추구해야할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단순히 정치적, 사회적, 개인적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자유함이 없다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와 북한의 차이, 즉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차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자유”입니다. 그러면 민주주의 표방하는 나라는 자유가 있기에 범죄가 없나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범죄는 존재합니다. 사람이 세상적 관점으로 추구하는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말씀으로부터의 자유 또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하나님 말씀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자유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즉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자유를 만끽하듯이, 피조물인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을 때만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근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보혈로 나를 율법의 멍에로부터 구속해주셨다는 이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억압이나 구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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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해산의 수고를 통해 얻어졌다고 말합니다. 또한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었으리라” 말할 정도로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는 인간적 깊은 교감과 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훼손되었을 때 마치 아버지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수술을 감행했던 것처럼 그는 엄하게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v.9-11)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의 부재중에 그 진리에서 떠나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을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고대시대의 종은 한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주인의 명령과 결정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했습니다. 종에게는 삶의 주도권과 자유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삶은 항상 고되고 척박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상태가 이와 같다고 진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종이 아닌 주인으로서 자유의 삶, 풍성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에도 그들은 또 다시 율법의 종이 되어 고되며 억압받는 죽음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율법의 참된 기능과 목적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하고 거룩하며 의로운 율법을 그들은 오용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가 오용하고 있었던 율법의 참된 목적과 기능은 무엇입니까?
먼저,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십계명, 모세오경(토라),구약의 율법이 인간에게 더해졌을 때, 그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지키려 하면 할수록 인간이 죄에 대하여 얼마나 무능한지, 인간에게 죄가 얼마나 편만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웠고 그 율법을 지키려했던 자들입니다. 당연히 그들은 죄 된 자신으로는 그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 감성, 의지 모두는 의롭지도 선하지도 못하는 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럼에도 일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으며 그들의 삶이 의롭고 거룩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보고 “회칠한 무덤” 이라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바리새인들의 내면은 율법을 통해 드러난 자신의 죄 된 실체로 인하여 시체가 썩어나는 고약함 냄새로 가득한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자신들은 의롭고 거룩한 것처럼 멋지게 자신들을 흰 색으로 덧칠해 놓았던 것 입니다. 반면, 삭개오를 포함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악 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 된 존재를 바라보며 심령이 가난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 된 실체를 결코 숨기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죽음과 사망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부활을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은 또한 죄를 드러나게 할 뿐만 아니라 죄 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3:24)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어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 율법의 요구를 넉넉하게 이루게 합니다.(v.6,롬8:4)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은 이 율법의 원래의 목적을 바울을 통해서 알고 경험했음에도 또다시 그 율법을 오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해서 풍성의 삶, 생명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죽음의 멍에를 메고 허덕이며 거친 광야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행위적 삶에 집착하여 자신들의 의지로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을 자신의 의로 드러내기를 즐겨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갈라디아교회에게 말합니다. “너희의 복이 어디 있느냐?”(v.15) 바울은 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을 잃어버리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율법에서 속량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기계적 노력과 복종으로 율법을 이뤄내며 그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우리에게 허락된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님은 오늘 본문을 설교하시면서 회중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자유로운 정신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또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성결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기뻐하십시오. 이것은 단순하고 외적인 명령이나 위협적인 채찍보다 훨씬 더 큰 힘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고 여러분을 보다 내적인 의미와 진리의 본질로 인도합니다.”
우리에게 진리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거하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즐거워하며 오묘하고 달콤한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진리의 영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기쁨으로 넉넉하게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조상 대대로 유대교를 신봉해오던,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었던 이들도 자신들의 한계를 분명히 보았기에, 자신들이 믿어왔던 유대교의 한계에 제대로 부딪혔기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여전히 그들은 개종이후에도 유대교의 율법을 고수한다는 것입니다. 할례, 정결예식, 절기 등. 율법준수에 여전히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야 조상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그 율법에 인이 박혀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 교우들 대부분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이방인 교회입니다. 이방인이었던 갈라디아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을 전해 들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고 자신들의 한계를 자각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와서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설파한 것입니다. 율법의 준수가 함께 뒤따라야함을 주장한 것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 정결예식법도 준수해야한다. 절기도 지켜야한다.”는 가르침에, 그 많은 율법조항이 분명 거북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교우들이 동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매이고 묶이는 것이 부자유스럽고 불편할 텐데도 어찌 그렇게 순순히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충동에 갈라디아 교우들이 끌려간 것입니까?
오죽했으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6절을 통해 다음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우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때는 참으로 꾸물꾸물 받아들이더니, 어찌도 그렇게 다른 복음은 낼름낼름 잘 도 받아 먹느냐. 참 이상하다.”고 탄식했습니다.
바울의 이 탄식은 호소로 이어져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음을 갈라디아서를 통해 간절히 호소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21절에서도 “율법 아래 살고자 하는 자들아”라고 호칭하며 호소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본문의 호소는 비유입니다. 여종 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육체를 따라 난 이스마엘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을 따라 난 이삭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시내산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상징하고,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이요, 은혜요, 자유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찌하여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육체를 따라 여종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고 만 것입니까? 순간적인 충동이었습니까? 방심으로 인한 실책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의도적인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99세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아들을 허락하겠다고 하자, 아브라함은 비웃음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8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을 선택하기로 합니다. 10년을 약속이라고 기다렸지만, 은혜를 아무리 기다려도 열매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은혜만 기다리다가는 속이 타 죽을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는 해야 될 듯싶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행위를 붙듭니다. 하갈을 선택했고, 그에게서 난 아들 이스마엘로, 자기 자신은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준수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도, 갈라디아 교우들이 율법 준수에 대한 요구에 그토록 쉽게 수용하게 된 경위도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사상 이면에는 과연 무엇이 담겨 있는 것입니까?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무엇을 해야만 하는 행위, 율법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율법 준수를 고집하는 유대인들은 과연 율법을 온전히 준수했습니까? 아니 율법의 참 정신대로 살았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안식일을 준수한답시고 손 마른 자가 회복되어지는 것을 진정으로 축하하고 축복하기는커녕 왜 안식일에 일을 행하느냐며 노여워했습니다. 율법조항대로 약한 자들을 위해 구제한답시고 추수 때에 보리 이삭을 떨어내던 그들은 강도만난 자를 못 본채 했습니다. 십계명은 토시도 안 틀리고 외우던 그들은 ‘고르반’(막7:11)하며 부모 공경을 손수 짓밟았습니다. 그렇게 금식하고 기도하고 율법을 달달 외며 하나님 사랑을 노래하던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그들의 행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율법 준수의 애씀과 힘씀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만족, 자기 의였습니다.
기독교는 행위의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전재합니다. 연약한 우리는 공로, 없습니다. 힘, 없습니다. 능력, 없습니다. 무지, 무능, 무력한 우리를 죽도록 사랑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 그 사랑, 그 한량없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긍휼을 구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 입니다. 다시 말해 의로움의 조건, 구원의 조건은 나에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게, 자기 자신에게 자기 흔적을 새겨 넣으려 합니다. 자기 애씀과 힘씀으로 자기 흔적을 수놓으려 합니다. 할례, 자기 자신의 표피를 좀 잘라내는 것으로, 자기 흔적을 남겨 두는 것으로 무슨 의로움의 조건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흔적, 예수 십자가의 흔적 하나로 충분합니다.
로마서 7장을 보면, 자기 흔적을 위해 몸부림치던 바울이 탄식합니다. ‘이 사망의 몸을, 이 죽음의 존재인 나를, 이 죄 공장 같은 이 몸을, 썩을 존재인 나를 누가 건져내랴.’ 그 탄식 중에서 바울을 무릎을 치며, ‘아하’를 외치며 이렇게 선포합니다. “아하, 그렇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지. 누가 건져내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8:1,35).
이 진리를 깨달은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을 통해 이렇게 통탄합니다. “참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교우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누가 너희를 충동질 하느냐. 누가 행위로 의롭게 된다며, 누가 자기의 흔적을 새기자고 하더냐.”
바울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흔적을 새기려 혈안이 되어 있는 저들이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바울에게는 예수의 흔적,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어부 베드로이든, 석학에다가 탁월한 능력의 사람 바울이든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직계 제자요 수제자였던 베드로이든, 탁월과 지성과 영성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중의 사도인 바울이든 상관없이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 앞에 엎드려 온 몸을 내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두 사람 모두 똑같이 자기 자신의 흔적을 치장하는 것에 열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흔적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의 흔적만을 새기고, 예수의 흔적만을 나타내고, 예수의 흔적만을 전하며 산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 나의 애씀과 힘씀으로 인정과 평판의 자기 흔적을 잡으려 애를 쓰는 것을 내려놓으십시다. 나의 열심과 최선으로 자기 의와 자기 자랑의 자기 흔적을 못 잡아 안달하는 것도 내려놓으십시다. 대신에 우리 모두 예수의 흔적으로 사십시다. 못나고 부족한 나를 위해 아낌없이 십자가의 죽음을 온 몸으로 끌어안은 예수의 흔적에만 주목하며, 오직 예수만을 기다리며, 오직 예수만을 뒤좇아 걸어가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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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자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인데, 유업을 완전히 상속받을 수 있는 성인이 될 때까지는 비록 상속인이라고 할지라도 후견인이나 청지기 아래 있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1~2). 유대인 신자들이라면 그들은 율법 아래 매여있었고,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라면 그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이교적인 모든 규정과 방식들?아래 매여있었다(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그리스도를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4). 이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고 성도들로 하나님의 아들들?상속자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5).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이나,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매여있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아들의 명분을 얻은 아들이다(6~7). 하나님은 이들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을 주셔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다(6).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이전에는 세상의 초등학문에 매여서 종노릇했을지라도 이제 그리스도를 안 후에는 더 이상 그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9). 신앙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아신 바 되는 것이다(8~9).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의 진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볼 것을 도전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어 은혜를 받고 아들이 되었는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영향으로 옛날 종노릇하던 시절로 돌아간다면 이는 바울 사도의 수고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10~11).
2. 사도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처음에 복음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킨다. 그들은 바울 사도가 가진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천사와 같이 혹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를 영접해주었다(13~14). 왜 그랬는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서 바울의 연약한 시력을 대신하고 싶어할 정도로 바울을 사랑했다(15). 복음의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종을 어떻게 존경과 사랑으로 대했는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은혜 받는 심령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 거짓 교사들의 영향으로 바울을 원수로 여긴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떠났다는 증거가 아닌가(16)? 사도는 거짓 교사들이 선한 동기로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갈라디아 사람들과 바울 사이를 이간하려는 목적으로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말한다(17~18). 그러나 사도는 마치 자녀를 해산하는 어머니 같은 심정으로 지금도 갈라디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다고 말한다(19). 사도는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을 부모의 심정으로 엄히 꾸짖고 싶어한다(20).
3. 그가 꾸짖으려는 것은 비록 그들이 완전히 율법 아래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지금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21). 그래서 사도는 구약의 비유를 들어 두 언약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브라함이 두 아내가 있어서 그들로부터 두 아들을 낳았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다. 하갈은 종이고 사라는 자유인이다.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낳은 아들이었고(아브라함과 사라의 인간적 계획 하에 자기들의 노력으로) 이삭은 약속을 따라 받은 아들이었다. 하갈은 아라비아의 시내산, 현재의 예루살렘을 상징하고,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이 두 여인은 두 언약을 대표한다. 하갈은 율법언약을, 사라는 약속언약을 대표한다. 사도는 이 비유를 통해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만일 율법을 다시 지켜서 할례를 행하려 한다면 그것은 종인 하갈에게로, 그리고 육체의 방법에로, 지상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도는 자유인인 사라에게 속하여 천상의 예루살렘의 성도가 될 사람들이다. 갈라디아에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이다(28).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하였듯이, 언제나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게 되어있는데,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거짓 교사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29). 그러므로 사도는 이제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고 꼭 집어서 명령한다(30). 이는 거짓 교사들을 내쫓으라는 명령이다.
4.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율법과 복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우리의 본성은 언제나 율법 개념에 묶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계속해서 선명한 복음의 진리를 들어야 한다. 외면적 행위로 신앙을 확인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모든 태도가 사도가 여기서 배척하는 율법주의적인 경향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은 결코 복음의 은혜와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 복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제시하며 오직 그 약속과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고야 마실 것이라고 자녀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령을 주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고 자녀들에게 자녀됨의 확신을 누리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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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이 필요했든 일과 때가 차서 여자에게서 아들을 보내시어 그 아들로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언급해 준다.
1. 후견인으로서의 율법
바울은 1절에서 약속을 받을 자들의 어렸을 때의 위치를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후견인이란 어린아이를 책임지는 자를 말하고 청지기란 가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를 말한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모든 일을 어렸을 때의 일이라고 말하고 어렸을 때에 후견인과 청지기의 관리 아래 있었던 것처럼 율법 아래 있었다고 했다. 로마 시대의 관습법상 미성년자는 14세에 이르기까지 그의 아버지가 의뢰한 후견인 아래 있었으며 재산권은 25세가 될 때까지 청지기가 대신 관리했다.
유업을 이을 자들이 모든 일의 주인이기는 하지만 성년이 되기까지는 이처럼 후견인과 청지기의 돌봄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종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율법은 인류에게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구실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종의 기간은 무작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성년이 되기까지 즉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에 한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정한 때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실 그 때를 의미한다.
그러면 바울은 왜 율법을 후견인이나 청지기로 비유한 것일까?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류는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율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유대인들도 실인즉 후견인과 청지기에게 매인 자로 자유를 누리거나 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는 비유가 된다.
바울은 3절에서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라고 말한다. 세상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약속에서가 아닌 다른 모든 인간적인 의의 방법을 의미하는데 율법도 이 초등 학문 중에 하나요, 선행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거나, 또 다른 어떤 방법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종류, 인간의 철학이나 이방 종교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이전까지 바로 이 같은 초둥학문에 얽매어 그 종노릇을 해 왔던 것이다.
2. 때가 차매 그 아들을 보내심
4절에서 “때가 찼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범사에는 때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 때를 따라 역사 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실 시기가 된 것이다. 이처럼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자손으로 보내시는 메시야는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남이 아니라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셨다.는 뜻이다. 여자란 동정녀 마리아를 의미하며 이 여인은 요셉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잉태한 것이다. 이 같은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 아래 나셨다는 말씀은 율법이 지배하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왜 율법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하여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해석해 준다. 하나님의 아들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셔야 한다. 그래야 그 율법에서 해방할 수 있고 율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속량이란 말은 우리가 갚아야 할 대가를 대신 갚아 주므로 우리를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케 하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원래가 그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창세 전에 이미 택정 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인 율법 아래서 지내게 하시고 때가 이르매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아들로서의 유업을 이을 자로 결정하셨다.
1. 아들의 영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받은 그의 백성들에게 아들의 영을 보내시어 그의 신분에 알맞은 호칭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약속을 받은 백성들로 자신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말씀해 준다. “아바 아버지”에 있어서 아바란 말은 구약에는 나타나 있지 않은 생소한 말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처음 사용하신 말이다(막 14 : 36).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아바’란 말은 ‘압바’라고 읽는 아람 말인데 아버지와 아들과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처럼 부자 지간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아바 아버지’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아바 아버지’란 감격스러운 말로 부르는 일은 전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속에 아들의 영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 인고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아들의 영이란 성령을 의미한다. 성령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신 데 이 성령이 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아들의 영이신 성령이 임재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다. 우리에게 영적인 깨달음을 주시고 영적인 지식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아들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알게 하신다.
1. 종이 아니라 아들된 우리
7절에서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고 말씀해 준다. ‘이 후’라는 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들이 된 후를 말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법적인 언약 관계로 성립되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뿐이신 아들로 이를 독생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신분으로 이 법적 신분을 양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양자도 법적으로 유업을 이을 상속권의 자격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고 있었다. 율법의 종, 양심의 종, 세상 풍습과 세상 지식의 종노릇을 해 왔었다. 이 종의 멍에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 결과는 오직 사망뿐이었지만 그 짐을 벗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로 인하여 그 짐을 벗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유대교에 열심인 거짓 선생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나 순박한 믿음의 갈라디아 교인들로 유혹을 받게 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10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란 말씀에서 율법적인 절기를 지키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하나님을 알았을 때와 몰랐을 때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때’란 시기는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을 때를 말한다. 그 때에 우리는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해 왔었다.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양심이나 율법이나 인간 사회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지식이나 철학이나 습성을 가리킨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아래서 종노릇하는 생애를 보내 온 것이다. 율법이나 양심이나 어떤 종교적 경전에 끌려 다녔다.
그러나 바울은 9절에서 “이제는”이란 말로 이제 새로운 생애를 살아가게 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새로운 우리의 위치를 의미한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 같은 인간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었는데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들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말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로 삼으시려고 그의 아들을 보내사 우리의 죄를 대속시키신 그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아들이 없는 하나님을 알 뿐 아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요일 2 : 23절에서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며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고 말씀해 준다.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2. 왜 초등 학문에 얽매어 종노릇하려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상과 같은 바울의 복음적인 논증으로 그들의 위치가 분명해 졌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믿음에 굳게 서지 못하고 거짓 선생들의 꾐에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고 책망하고 있다. 그들은 이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에 얽매어 그들의 종노릇이나 하고 있을 그런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왜 다시 율법을 지키려는 생활을 통해서 다시 율법의 지배 아래 들어가 죄의 종노릇을 하려는 것이냐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갈라디아 교인들이 따랐다고 하는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이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10절에서 밝혀 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는 말씀에서 유대인들이 율법에서 지키는 구약적인 율법적 의식을 지키는 생활을 시도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날이란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로 금식일과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장로의 유전과 같은 율법적인 조항들을 가미한 것으로 보인다. 달이란 달마다 반복되는 여러 가지 율법적 행사를 의미하고 절기란 율법에서 지키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을 말한다. 해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 50년 만에 돌아오는 희년 등을 말하며 이 같은 행사에는 자세한 율법적 규례가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일에 대한 그림자로 이미 모두 성취되어 사문화뒨 것들이다.
(갈라디아서4:12-16)
바울은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에게 대접해 준 후의를 상기시키면서 복음으로 맺어진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과의 끈끈한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이 이곳에서 이 같은 말을 하는 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액면대로 받아 드림으로 그들에게 감사가 있었으며 바울에 대하여 마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한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이다.
1.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요 율법을 숭상하는 바리새인이며 학식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지냈으며 그들의 생활에 함께 어울려 형제로서의 교제를 가졌던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이라고 하는 특권 의식도 아무 것도 아니며 율법도 의로움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이런 것들을 모두 버리고 갈라디아 교인들과 더불어 믿음의 생활을 해 온 것이다.
바울이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고 한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입장을 이해해 달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바울이 유대인이었음에도 그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초등 학문인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자기처럼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으라는 권면이다. 유대인들조차 질 수 없는 힘겨운 율법을 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로 자유케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는 참 이스라엘이 되라는 권고인 것이다.
2.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을 대한 태도
지난날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에게 최상의 예우로 대접했다. 그것은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었기 때문이며 복음의 사자를 대접하는 예우에서였다. 바울이 12절 하반절에서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했는데 그것 그런데도 그들이 지금은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했을 당시, 그의 몸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었다”고 했다. 이 말은 바울을 오랫동안 괴롭힌 바울의 지병을 말하는데 바울은 이 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하고 있으며 고후 12 : 7절 이하에서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바울은 세 번씩이나 간절히 간구했지만 그가 받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이 응답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했노라고 했는데 갈라디아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도 이 같은 사탄의 사자가 바울의 몸에 있었든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이 같은 연약함을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했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다는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의 종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할 수만 있었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주었으리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복이라고 말하고 그 때 베풀었던 그들의 그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처럼 지난날 바울에 대하여 선히 대접한 사실을 잊고 지금은 어리석게도 마치 복음의 원수인 것처럼 거리를 두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된 일이냐고 따져 묻고 있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생활을 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종과의 관계가 사랑 가운데 원만하다. 그들이 바울의 말에 순종하고 바울의 허물을 감싸주고 눈이라도 빼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된 교리에 미혹되고 시험이 들었을 때는 그 사랑이 사라지고 오히려 원수처럼 여겨 싫어하고 떠나며 경원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두 가지 열심
(갈라디아서4:17-18)
열심을 낸다고 모두 좋은 일이 아니다.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이단자들의 열심은 사람의 영혼을 지옥에 집어넣는 열심이기 때문에 잘못된 열심에 미혹 받지 말아야 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갈라디아 교인들을 꾀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게 한 거짓 선생들의 열심은 대단한 듯 하다. 그들의 열심에 마음이 끌려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에 미혹 받아 결국 바울의 수고에 큰 손상을 주었고 바울의 분노를 사기에 이르렀다.
1. 나쁜 일의 열심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쁜 일에 열심 있는 자들의 그 열심을 경계할 것을 말해 준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열심 있는 행동에 대하여 “저회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른 열심만을 보면 안 된다. 사탄의 일꾼들은 양의 너울을 썼을 뿐 아니라 열심도 대단하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전도의 열심을 보라, 기성 교회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열심이 득심하다. 그들의 그 열심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나는 엊그제 발행한 들소리 신문이라고 하는 교계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통합측 교회의 김경선 장로란 분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책을 썼는데 그와의 대담에서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라 우리들보다 더 열심 있고 경건한 교리를 가진 교단으로 그들을 이단 시 하지 말고 한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을 쓰기도 했다는 것이다. 안식 교회에서는 율법에 있는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주장으로 기성 교회의 주일 안식일을 매도하며 토요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종말에 우상 앞에 경배하는 것이나 짐승의 표를 받는 일이 모두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협박하면서 기성 교회에 파고 들어와 많은 성도들을 현혹시켜 안식교로 유인하고 있다.
그들의 열심은 바울이 말한 대로 좋은 뜻의 열심이 아니며 진정한 복음, 구원의 성경적 도리를 흐리게 하려는 미혹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하며 제칠일 안식일에 미혹 받아서는 안 된다. 이단자들의 열심이나 경건은 위장된 것으로 겉으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한 율법주의 신봉자들의 다른 복음은 두 가지의 숨겨진 뜻이 있었다. 하나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이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함이라”고 한 것이다. 이단자들의 침투는 하나님의 교회로 이간시키는 일을 하므로 분열을 조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이간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바울과의 사이에도 선을 그어 놓았다. 그리고 이처럼 갈라디아 교인에게 열심을 내게 한 그 열심을 이제는 자신들에게 내게 하려는 것이다. 이단에 빠져 들어간 사람들을 보면 결국은 열심을 내어 그들의 충실한 종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성도의 열심
바울은 18절에서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언제든지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좋은 일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진리를 말한다.
㉠ 고린도 교인들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다고 말해 준다(고후 9 : 2).
㉡ 딛 2 : 14절에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은 우리들로 “선한 일에 열심 있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다하여 과실을 많이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 딤후 4 : 2절에서 말씀을 전파하는 일에 항상 힘쓰라고 하셨다. 하늘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전도에 힘 쓸 수 있다.
계집종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
(갈라디아서4:19-31)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계집종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와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아들의 경우를 대조시켜 비유적으로 해석해 준다.
1.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할 바울
바울은 19절에서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너희를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한 해산하는 수고란 그들의 중생을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그들을 양육하는 일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일로 구원의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고 여기면 안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 그들은 거짓 선생들에 의해 유혹을 받아 잠시 동안 진리에서 떠나 있게 되었으며 주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종들에 의해 끊임없이 양육 받아야 하며 자기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신앙과 은혜의 자리에서 잠시 동안 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바울은 그들을 다시 신앙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그런 일에는 하나님의 종의 해산의 수고가 따르는 것이다. “해산의 수고”란 복음으로 양무리들을 양육하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들을 위해 바울과 같은 심정으로 수고해야 하는데 기도로 수고하고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의 뜻은 바울은 아직도 갈라디아 교인들의 중심을 잘 모르고 있는 형편이며 또 그들이 바울의 권고와 책망의 말을 어떻게 받아 드릴는지 모르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스럽게 처신해야 할 입장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마땅히 책망할 일을 책망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받을지 모를 상처를 인하여 책망하고 싶으나 참고 권면 할 때도 조심성 있게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교인들은 주의 종으로 목소리를 변케 해서는 안 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해도 믿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주의 종이 무슨 말을 할 때, 받아 드리기를 싫어한다면 나에 대하여 그의 목소리를 변하려 할 것이다.
2. 비유로 설명하는 두 언약
바울은 21절에서 이제 복음을 멀리하고 율법을 따르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는 서두로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경우를 비유로 들어 해석해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있는 두 아들이란 이삭과 이스마엘을 가리킨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들 외에도 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이들만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이들의 출생이 하나님의 언약과 싶은 관계기 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경우는 계집종인 하갈에서 출생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육체를 따라 태어났다고 말씀해 준다. 육체를 따라 났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선택된 아들이 아니란 뜻이다. 이 아들은 바로 시내 산에 속한 아들로 율법 아래 속한 자란 뜻이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 평생을 지내야 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삭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사라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스마엘과 같은 시내산에 속한 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지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한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약속의 아들로 하늘의 약속의 유업을 이을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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