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1절.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
그 후에(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음)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왕에게 범죄를 하여 옥에 들어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요셉의 나이 28살 때일 것입니다(41장 1절). 30세에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범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술을 맡은 관원장이라면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술을 맡은 관원장은 좋은 술을 내놓아야 하고, 특히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왕이 신뢰할 수 있어야 그 자리에 앉힙니다. 술 맡은 자나 떡 굽는 자는 모두 바로의 음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들로 왕의 얼굴을 대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왕 한 사람만이 아니라 왕의 가족들의 식사, 대신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타국에서 온 사신들을 대접하는 것 등도 책임을 졌을 것입니다.
2절.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
바로가 두 관원장에게 분노를 하였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이 왕의 분노를 일으킬 만한 범죄를 행한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왕궁에는 술과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인데 그들을 지휘하고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후에 요셉을 애굽 왕 바로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합니다(41장 9-14절).
3절.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
왕은 두 사람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둡니다. 그곳은 요셉이 갇힌 곳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갇힌 것입니다. 두 사람이 요셉이 갇힌 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갇혀 있는 동안 아마도 왕은 두 사람의 범죄에 대해서 조사를 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4절.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
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비록 옥에 가두었지만 요셉이 충실한 사람인 것을 인정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그들을 섬깁니다.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 되어 꿈을 꿉니다. 요셉과 두 사람의 만남은 요셉에게 약간의 빛을 비추는 것 같았습니다.
5절.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
옥에 갇힌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는데 그 내용은 각기 달랐습니다.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0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꿈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아비멜렉에게 나타났지요. 예수님께서 태어날 당시에 요셉도 꿈을 통해 말씀을 듣고 지시를 받습니다(마 1장 20절. 2장 13절. 19절). 계시가 완성된 지금 우리 시대에는 꿈으로 계시해주지 않습니다. 계시적인 꿈은 없습니다. 성경으로 기록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딤후 3장 16절). 두 사람은 그들이 꾼 꿈이 평상시 꾸는 꿈이 아니라 무슨 의미가 있는 특별한 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6절.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까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었습니다. 고대 애굽 사람들은 신들이 꿈을 이용해서 다가올 미래를 얘기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밤에 꾼 꿈이 그들의 미래에 무엇인가를 말해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7절.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지. 요셉이 성실하게 그들의 수종을 들었음을 보여줍니다. 얼굴의 빛을 살피고 있으니. 날마다 그들의 수종을 들었기 때문에 얼굴에 근심이 있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8절.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
그들은 자신들이 꿈을 꾸었지만 해석해 줄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고대에 꿈의 해석은 하나의 학문으로 배워야 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사람은 학문의 대가로 존경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학습된 꿈의 해석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이 꿈을 올바르게 해석해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내게 이르소서”라고 말합니다. 꿈은 하나님만이 해석해 주실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신이 그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듯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음을 요셉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참된 예언적 대변자”(메러디스 클라인)임을 나타냅니다.
9절.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
숱 맡은 관원장이 먼저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꿈에 보니까 자신 앞에 포도나무가 있다고 합니다.
10절.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
술 맡은 관원장이 본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가지에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습니다. 아주 빠르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꿈이니까 가능합니다. 실제로는 바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꿈이기 때문에 그것이 한 번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1절.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
술 맡은 관원장의 손에 바로의 잔이 있었고, 관원장은 포도송이가 익었기 때문에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바로의 손에 드립니다. 꿈의 내용이 그러합니다.
12절.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
요셉은 그에게 꿈을 해석해 줍니다. “그 해석은 이러하다”고 주저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말해줍니다. 요셉의 얘기대로 하나님께서 해석해 주신 것입니다(8절). 포도나무에서 난 세 가지는 ‘사흘’이라고 말해줍니다. 요셉의 얘기를 들으면 아무라도 할 것 같이 쉬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3’만 가지고 3일인지, 3시간인지, 3달인지, 3년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3이라는 수를 가지고 3일이라도 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13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
요셉은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 그 사람의 머리를 들 것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든다는 말은(왕하 25장 27절. 렘 52장 31절) 죄수와 관련된 문맥에서는 석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옥에서 나오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전직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전직이 술 맡은 일인데 그 일을 다시 회복한다고 말해줍니다. 그 사람에게는 기쁜 얘기이지요.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
요셉은 “당신이 잘 되시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잘 된다는 것은 전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 자신을 생각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자신의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자신을 건져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셉이 해석한 대로 그 사람은 옥에서 나갔고 전직을 회복했지만 2년이 지나도록 잊고 삽니다(23절. 41장 1절. 9-13절). 아직 하나님께서 요셉을 내보낼 계획이 없었던 것입니다. 메러디스 클라인은 “요셉이 옥 문안에 갇힌 것은 그에게 궁궐 문을 열기 위해 주께서 설계하신 일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요셉이 만난 두 사람은 감옥과 왕궁의 연결고리라고 합니다.
15절.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
요셉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옥에 갇히게 되었는지 말합니다. 자신은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이고 옥에 갇힐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옥에 갇힌 것입니다. 요셉은 이 기회에 자신의 억울함이 해결되기를 바랐습니다. 그 사람에게 자신을 변호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옥은 하나님의 학교입니다. 직접 들으면서 배우는 학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 처하면 죄절하고 원망하고 포기하는 길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심령에 지혜가 있습니다. 아주 낮은 위치에 처해 있을 때 배울 수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 하나님의 학교에서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 성숙해지고 하나님께 쓰이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학교이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비천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곳에 가야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서 그 진리를 배웁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하늘의 진리는 섬기는 자리에 있을 때, 비천한 자리에 설 때, 비참한 사람들이 서 있는 현장에 있을 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16절.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는 것을 떡 굽는 관원장이 듣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해석해 주는 것이 좋은 것도 봅니다. 사흘 있으면 전직이 회복된다고 하니까 좋은 일이지요. 떡 굽는 관원장은 요셉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해줍니다. 흰 떡 세 광주리가 자신의 머리에 있다고 합니다.
17절.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
세 광주리 가운데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어버립니다.
18절.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
요셉은 그 얘기를 듣고 즉시 해석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고 얘기합니다.
19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
요셉의 해석은 떡 굽는 관원장에게는 굉장히 좋지 않은 얘기였습니다. 지금부터 사흘 안에 당신의 머리를 든다고 합니다. ‘머리를 든다’는 말은 아주 섬뜩한 표현입니다. 머리를 끊어 매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몸은 나무에 달려 새들이 뜯어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몸이 새들의 고기가 됩니다. 요셉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해석해 줍니다.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절망을 하게 하는 얘기입니다.
20절. 제 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
제 삼일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바로는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그리고 옥에 가두었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머리를 들게 합니다(13절. 19절). 옥에서 나오게 합니다. 제 삼일이니까 요셉이 해석한 ‘사흘’입니다.
21절.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에 해석한 대로 전직을 회복합니다. 술을 잔에 담아서 바로 왕에게 드리는 일을 다시 합니다. 요셉이 말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2절.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
반대로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립니다. 목은 잘리고 몸은 새들이 먹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해석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
그러나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립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직은 요셉이 나갈 때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두 사람이 꿈의 해석대로 나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요 요셉이 옥에서 바로 나가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시편 75편 6-7절에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높아지고 낮추어지는 일은 모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잊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기억하지 못하고 잊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셨고 요셉을 하나님의 때에 세우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바로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석방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요셉의 인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가끔 사람들을 보면 ‘그 시간은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합니다. 무의미한 시간, 공허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시간은 없습니다. 자신이 그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것이지 하나님의 백성에게 무의미한 시간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