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망울 같은 우아한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깨끗해야 한다. 채영숙은 그렇게 결혼생활을 끝맺고 싶었다. 그녀가 이런 생각을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딸을 시집보낸 후부터였다. 결혼한 지 3년이 되면서부터 남편 백성남과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하나뿐인 딸 때문에 오늘까지 참고 또 참았다. 부모가 이혼한 자녀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다는 것을, 새엄마나 의붓아버지로부터 모진 학대를 당한다는 것을 자주 보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좀 더 참고 견디면 사랑하는 딸의 인생을 아름답게 단장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채영숙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부잣집 맏아들인 아버지가 그렇게 술독에 빠져 살고, 어지럽게 외도를 했으나 시부모를 섬기며 끝까지 참아내고 3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오빠는 미국으로, 언니는 프랑스로 유학을 해서 각기 그곳에서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젊은 시절 엄마의 무거운 짐은 보람찬 여생으로 보상을 받았다. 막내인 채영숙은 아무리 힘들어도 딸 지현을 결혼시키기까지는 견뎌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딸은 지난해 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캠퍼스 커플이었던 복학생 ‘오빠’와 결혼했다.
채영숙은 한 달 후면 결혼 25주년을 맞는다. 이때쯤 다른 사람들은 멋있는 은혼식을 자축할 준비를 하며 가슴이 부풀어 있을 것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오히려 어둡고 무거웠다. 그렇다고 기가 죽어 속만 태우는 비굴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혼 때와 같은 기분이라면 가족 친지를 초대해 잔치하고 친구들과도 즐거운 파티를 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누구에게도 은혼식이 다가온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백성남은 오늘까지 아내의 생일은 물론 결혼기념일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위인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산행을 좋아했던 채영숙은 남편과 함께 결혼 1주년을 기념하며 노고단에 올랐다. 그녀는 새벽 일찍 잠이 깨어 지리산의 밤하늘이 보고 싶어 잠시 산장 밖으로 나왔다. 샛별과 삼태성이 뚜렷하고 주먹만 한 무수한 별들이 팔을 뻗치면 손에 잡힐 듯 머리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억겁의 세월 속에서도 영롱한 그 빛을 잃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처럼 그녀는 남편과의 사랑을 그렇게 그려가고 싶었다. 미래의 꿈을 복사꽃처럼 화사하게 피우던 노고단의 밤은 참으로 황홀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생에 한 번뿐인 은혼식을 노고단에서 둘만의 석별연으로 치르고 싶었다. 그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하며 아내의 도리를 다해왔으나 작가인 백성남은 20여 년 동안 가장의 책임을 외면한 채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었다. 채영숙은 이때까지 가슴에 넘쳐나는 불만을 삼키며 큰소리 한번 치지 않았던 남편에게 ‘우리의 끝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라고 정중히 말하며 통쾌한 아듀를 고할 계획을 세웠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까지 함께 살 수는 없다.’ 서둘러 남편과 남이 되는 것은 서러운 일이지만 그녀는 언젠가 찾아올 인생의 이별을 조금 앞당기는 것에 불과하다며 자위하고 있었다.
은혼식 날을 보름이나 넘기고 두 사람이 화엄사 지리산 콘도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였다. 여름 성수기 때면 언제나 넓은 주차장이 가득 차 있었는데 오늘은 승용차 서너 대밖에 보이지 않았다. 프런트에서 4층의 침대방을 배정받고 여장을 풀었다. 호텔 그림자가 마당으로 스며들 즈음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니 승용차가 한 대씩 들어와 하얀 줄로 그어진 직사각형을 메우고 있었다. 둘이는 저녁 식사를 화엄사 입구 식당촌에서 하기로 했다. 왕복 2차선 도로 계곡 쪽에는 1킬로미터 정도의 인도가 데크로 만들어져 있었다. 소나기가 쏟아지는 것 같은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내려가는 동안 젊은 승려들이 5~6명씩 무리를 지어 마주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목욕 도구 같았다. 아마 아랫마을에서 단체 목욕을 하고 산사로 들어가는 모양이다. 짙어가는 녹음과 싱그러운 산촌의 공기는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길가에 늦게 핀 겹벚꽃의 시들한 자태는 밀려나는 봄의 끝자락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식당촌은 한산했다. ‘양지마루’ 간판이 붙은 집 발코니에 백성남은 아내와 마주 앉았다. 그는 아내의 해맑은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왜 그렇게 자세히 보세요?”
채영숙은 남편과 마주친 눈길을 건너편 산마루 쪽으로 돌렸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구려!”
그의 눈에는 아내의 모습이 신혼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돌아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없었다. 이름있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가장의 책임은 언제나 저만치 밀려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오늘까지 불평 한마디 내어놓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때로는 작가의 삶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든지 아니면 홀로 사는 것이 아내를 위하는 길이란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것은 남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삶에 대한 자책이었다.
“여보, 식사할 때는 여기 와서 하면 좋겠네요.”
백성남은 집을 나와서는 식사 준비를 하는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면 나도 좋겠지만 아침 식사는 아마 안 될 거예요. 디저트는 방에 들어가서 합시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산채비빔밥은 별미였다. 채영숙은 콘도에서 몇 끼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왔다. 둘은 땅거미가 짙어가는 길을 따라 숙소로 올라왔다. 숲이 뿜어내는 방향은 흡사 산소통을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여행은 언제나 자유를 선물로 안겨주었다. 생각을 깊이 할 것도 없고, 다른 이의 체면을 보며 부담스러워할 것도 없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면 되는 것이었다. 늦잠을 자도 탓하는 사람이 없고 제때 끼니를 준비하지 않아도 마음이 푸근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특히 산사로의 여행은 그런 힐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성남은 아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더블 침대에 기지개하듯 허리를 쭉 폈다. 아내와 합방한 기억이 언제인지 아득했다. 한집에 살면서 남남으로 살아온 것이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별거 상태나 다름없었다. 거의 매일 제때 함께 식사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아내를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리모컨으로 TV를 켜자 대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코로나19가 이제는 수도권으로 옮아가고 있다는 보도를 하고 있었다. 더욱이 해외에서 들어오는 내외국인들의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늘어나면서 방역 당국은 긴장하고 있었다. 중앙 재난 대책본부 사람들은 하루에 잠자는 시간이 세 시간도 안 될 만큼 밤낮으로 근무에 시달리고, 의료진들의 피로도 몇 겹으로 쌓이고 있었다. 백성남은 욕실로 들어가 먼저 세수를 하고 나왔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채영숙이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샤워를 하기위해 집에서처럼 세면장 안에서 옷을 하나씩 벗어 밖으로 내던졌다. 백성남은 스트립쇼를 하는 것 같은 아내의 벌거벗은 몸을 들여다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잠잘 때는 침대의 어느 쪽에 누울까? 창가를 택할까, 벽 쪽을 택할까? 백성남은 아내가 샤워하는 모습을 그려보며 오랜만에 신혼여행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혀있었다.
“아얏!!”
갑자기 세면장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함께 무엇이 넘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꿈을 깨웠다.
“여보! 왜 그래요?”
깜짝 놀란 백성남은 침대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나 세면장으로 갔다. 허연 살결의 벌거벗은 아내가 문지방에 다리가 찢긴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온 상을 찡그려 입을 벌리고 눈은 감은 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공으로 손을 내젓고 있었다. 백성남은 두 팔로 아내의 알몸을 안아 일으켰다. 몸이 그렇게 무거운 줄은 처음 느꼈다. 아내는 샤워를 마치고 세면장을 나올 때 발 받침 나무판이 없는 바닥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왼쪽 다리를 접질린 것이었다. 몸을 가누지도, 일어서지도 못했다. 병원도 약국도 없는 산속에서 채영숙은 밤새 앓으며 날새기를 기다렸다. 백성남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내가 화장실에 갈 때는 일어나야 했다. 백성남의 3박 4일 조용한 휴식의 꿈도, 채영숙의 은밀한 ‘노고단 계획’도 모두 흐트러지고 말았다.
백성남은 이튿날 아침 일찍 체크 아웃을 하고 와서 풀어놓았던 짐을 챙겼다. 움직일 때마다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아내를 어깨로 조심조심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내려와 차에 태우고 부산으로 향했다. 잠자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결혼은 생각조차 하지 않던 때에 착한 아내를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축복이었다. 그는 늘 두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언제쯤 글을 잘 쓰는 이름 있는 작가로 대우받을 수 있을까? 언제쯤 가장으로서의 온전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조수석의 아내는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곤하게 잠들어 있다. 아침나절의 남해고속도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채영숙은 캔디스 버겐처럼 지성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몇 차례 대학의 미팅에서 사랑을 가득 담아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으나 그녀는 마음을 열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산행도 하며 사귐을 가져보았지만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들은 왠지 어려 보였다.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흡사 몇 살 아래 남동생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미래를 약속할 짝 하나 만들지 못하고, 어려운 임용고시를 거쳐 고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교사 생활은 또 하나의 캠퍼스 같았다. 연령대도 다양하고 전공도 여러 분야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직책이 거리감을 좁혀주었다. 공휴 때는 함께 야외 나들이도 하고, 학교행사를 치른 뒤의 뒤풀이 시간도 즐거웠다. 3~4년이 금방 흘러갔다.
“채 선생, 부탁이 하나 있는데…….”
어느 날 몇 년 선배인 옆자리의 국어 선생이 퇴근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 말했다.
“무슨 부탁인데요? 선배님이 말씀하시면 들어드려야지요. 호호호.”
채영숙은 의자에서 일어서려다 다시 앉았다.
“다음 토요일에 친구가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축가 반주를 좀 해줄 수 있을까 해서.”
국어 선생은 축가는 자기 여동생이 부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채영숙은 처음으로 출판기념회 자리에 참석했다. 해운대 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달맞이고개 S 카페에는 100여명의 인사들이 모였다.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 낭랑한 트럼펫 연주가 끝나고, 채영숙의 반주에 맞춰 여동생이 축가를 불렀다. 그리고 K 시인이 정감 어린 인사말을 했다. 만찬장에서 채영숙은 국어 선생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여러 사람과 인사를 시켰으나 그녀는 그들을 다 기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이 채영숙의 시선을 붙들어 매었다.
“중견작가입니다. 서로 인사하시지요.”
국어 선생은 채영숙에게 마주 앉은 한 남자를 소개했다.
“백성남입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는 국어 선생의 대학 후배였다. 약간은 날씬한 몸매에 걸친 캐주얼웨어가 그렇게 멋이 있을 수가 없었다!
“반갑습니다.”
채영숙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 후 퇴근길에 차 한잔하자는 국어 선생의 말을 거절할 수 없어 따라갔던 다방에서 채영숙은 백성남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 만남은 국어 선생이 두 사람을 짝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주선한 것이었다. 그 후 한 차례씩 만날 때마다 백성남은 참으로 배려심이 있고 생각이 깊은 사람으로 보였다. 대학 시절에 미팅으로 만났던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언제나 담담하던 채영숙의 마음이 조금씩 부풀어 올랐다. 특별히 백성남이 작가라는 점에 더욱 마음이 쏠렸다. 채영숙은 어머님의 권유로 음악을 전공했으나 한때는 막연히 작가가 되고 싶었다. 시집이나 소설책을 즐겨 읽고 작품의 흉내를 내며 글을 써보았으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럴수록 그녀는 글 쓰는 사람이 존경스럽고 부러워지기까지 했다. 채영숙은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사랑하는 이를 통해 이루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백성남은 그런 아내의 기대를 오늘까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백성남은 생활비를 조달할 수 있는 직업을 갖지 못했다. 국어 선생의 말대로 단지 ‘기대를 모으는 중견작가’일 뿐이었다. 그는 어쩌다 원고청탁을 받는 것 외에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을 쓰고 있었다. 채영숙은 그가 쓴 칼럼을 읽으며 공감했고, 친구들에게 은근히 자랑하기도 했다. 채영숙은 백성남과 사귄 지 두 달도 되기 전에 친구들의 부러움과 축하를 한 몸에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서두른 것은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결혼하라는 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다. 백성남은 집이 가난해서 가정교사나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마쳤다. 채영숙은 시가에서 전혀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생활비는 그녀의 월급으로 충당했고 목돈이 필요할 때는 친정집에 손을 내밀었다. 외환위기 때는 기업체뿐만 아니라 출판 문화계도 불황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백성남은 신문사 논설실에서도 밀려났고 다른 잡지에서도 원고청탁을 받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시고 시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가 많았다. 채영숙은 작가인 남편이 하릴없이 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여보, 당신이 ‘글쓰기 교실’ 학원을 열어보면 어때요?”
채영숙은 어느 공휴일에 늦잠을 자고 일어난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았으나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어떻게 엄두를 내겠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학원을 열기만 하면 전망은 밝을 것으로 기대되는데요.”
“갈수록 대학입시에 논술의 비중이 높아가고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채영숙은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Y 로터리에 있는 빌딩 4층에 ‘글쓰기 논술학원’을 열었다. 백성남은 논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칼럼을 신문에 게재하며 선후배 교사들에게도 두루 알렸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중견작가 백성남의 학원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백성남의 논술은 눈앞의 입시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능력을 함양하여 성숙한 시민으로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격조를 달리하고 있었다. 백성남은 어려운 시기에 가장의 책임을 생각하며 논술과 일반인 글쓰기 지도에 열정을 쏟았다. 그로 인해 서울의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일반인들도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