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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과 계시록
성경에는 두 사람의 요한이 등장한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거의 동일한 시기에 태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리고 그의 성역과 역할에 대해 간증하다가 헤롯에 의해 목베임을 당한 침례 요한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름받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게서 사랑을 받은 사도 요한이 있다. 요한 그는 지금도 죽지 않고 세상 어딘가에 살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들 필멸의 존재 속에 섞여 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신약성경 기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저자로서 우리 옆에서 숨쉬고 있다. 그에 대해서 간략하게 경전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가 기록한 사복음서 중의 하나인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와는 결을 달리하는,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영적 접근을 보여 준다. 특히 요한복음 1:1-3절은 그 시작을 알리는 압권의 구절이라 할 수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세간의 기독교라는 대부분의 종파에서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고 있다. 이른바 삼위일체라고 하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으나 신약성경을 조금만 더 자세하게 읽어 보면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은 별개의 개체임이 여실히 드러나는데도 굳이 두 분은 한 몸이라는 억지의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특히 요한복음을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 본다면 분명 삼위일체의 교리는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 교리를 신봉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 첫번 단초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위에 언급한 1절부터 3절까지의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창조주는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아버지의 위임을 받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작품임을 명확히 알려 주고 있다. 단순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창조주임을 밝히고 있다. 왜 그 사실이 혼동을 주는 구절이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다른 주석을 갖다 붙여서 오히려 혼동을 주는 구절로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영감어린 소개를 하고 있다. 복음의 명문들이 수두룩하다. 과연 주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도의 기술이라는 느낌이다. 그는 말년에 밧모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한 아주 특별한 주님의 종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갈릴리와 흙먼지 나는 유대광야를 걸었던 사도들 중의 하나였다. 주님 곁에 머물면서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역에 동참하면서 그의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를 지극히 사랑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는 것을 경전은 보여주고 있다. 그는 베드로, 야고보와 함께 언급되는 선임사도의 일원이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1829년에 미국 동부의 사스케하나 강변에서 당시에 열렬히 기도하던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나타나 복음의 회복에 꼭 필요한, 히브리서에 언급된 존귀한 신권을 부여하는 자리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있었다.
그는 요한 일서, 이서, 삼서를 기록하였다. 그의 품성에 맞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가 있다.
그는 가장 논란이 되기도 하는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죽지 않고 지금도 살아 있으면서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 거하면서 그의 성역을 베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교회의 선지자들 중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분도 있다. 십이사도들이 다 순교하는 중에서도 요한만은 죽음이 알려지지 않았음도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기록하였으나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록이 현대에 밝혀졌다. 현대의 계시집으로 알려진 교리와 성약 제7편의 서문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1829년 4월 펜실베이니아 주 하모니에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와 올리버 카우드리가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 육체로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를 물었을 때 주신 계시. 이 계시는 요한이 양피지에 기록하고 직접 감춘 기록의 번역문임(교회사 1:35~36)"
이왕에 그 계시의 전문을 읽어 보자.
"1 또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나의 사랑하는 자 요한아,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이는 네가 원하는 바를 구하면 네게 허락될 것임이니라 하시기로, 2 이에 내가 주께 여짜오되, 주여 죽음을 이길 힘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살아서 영혼들을 당신에게 데려올 수 있게 하시옵소서 하였더니, 3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이 일을 원하므로 내가 나의 영광 중에 올 때까지 너는 머물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앞에서 예언하리라 하시더라. 4 또 이 까닭에 주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이는 그가 영혼들을 내게 데려올 수 있기를 내게 원하였거니와, 너는 나의 왕국에 있는 내게 속히 올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였음이니라. 5 베드로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것은 좋은 소망이었느니라. 그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그가 이전에 행하였던 것 이상으로 장차 사람들 가운데서 더 많은 일, 곧 더 큰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하였느니라. 6 그러하도다, 그는 더 큰 일을 떠맡았은즉, 그러므로 나는 그를 타오르는 불처럼 되게 하며 성역을 베푸는 천사가 되게 하리니, 그는 땅에 거하는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하여 성역을 베풀리라. 7 또 나는 너로 하여금 그를 위하여 또 네 형제 야고보를 위하여 성역을 베풀게 하리라. 또 내가 올 때까지 너희 세 사람에게 이 권능과 이 성역의 열쇠들을 주리라. 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둘 다 너희 소망대로 얻게 되리니, 이는 너희 둘 다 너희가 원하던 바를 기뻐하는 까닭이니라 하신 것이더라."
위의 구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세 번 "내 양을 먹이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신 후에 이어진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요 21:20-23)
여기서도 보면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라고 요한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활 후에 나타나셨을 때, 그물을 던지라고 명한 예수님을 처음 알아본 요한에 대하여 언급한 구절도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21:7)라고 되어 있다. 그는 마지막 성찬 때도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사랑받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어머니를 걱정하며 그 어머니를 돌봐 주도록 부탁한 사람도 요한이었다.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 19장)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에 기록된 마지막 22장 19절이 논란 거리가 되었다.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장)
위의 단서가 성경의 마지막에 있으므로 성경 이외의 추가적인 말씀이 있으면 안된다는 일부의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라고 본다. 계시록 내에서의 단서인 것이지 성경 전체에 적용되는 구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 편집의 과정을 살펴본다면 성경 편집 초기에는 각 성경들이 당시의 기록 보존의 방법인 두루마리 형태였으며 각기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었던 것을 수집하여서 책으로 엮을 때 맨 뒤로 보낸 것임을 안다면 위의 단서는
계시록 내에서만 적용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신명기나 요한복음 마지막 절의 기록을 참작한다면 이해가 더 잘될 것이다.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장)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의 언급이 성경 전체를 아우른다는 주장의 허구성을 밝힐 수 있는 자료들은 수두룩하다.
우리는 그 구절을 비롯 몇몇 문제가 되는 구절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십사만 사천"이라거나 "육육육"이라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 신자들 사이만 아니라 비신자들 사이에서도 회자되고 있다. 그중 하나인 십사만 사천의 숫자에 대해서 현대에 회복된 복음의 선지자 조셉 스미스도 이에 대해 주님께 물었고 응답을 받았다.
11 문.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중에서 십사만 사천—각 지파에서 일만 이천을 인치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이까?
답. 우리는 이같이 이해해야 하나니, 곧 인 침을 받은 자들은 영원한 복음을 베풀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반차에 성임된 대제사니, 무릇 그들은 장자의 교회에 오고자 하는 자 모두를 데려오도록 땅의 나라들을 다스릴 권세를 받은 천사들에 의하여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 가운데서 성임되는 자들이니라.(교리와 성약 77편)
더 이상의 구체적 설명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처럼 계시록의 각 구절은 구체적 설명까지는 해주지 않고 있어서 수많은 억척을 낳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 저마다의 해석이 분분하여 급기야는 분파를 야기하기도 한다. 계시록 전체를 봐도 그렇다. 상징적 표현이 많다 보니 저마다의 해석, 즉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인용하여 연결하려는 시도를 통해 강조하다 보니 여러 주장이 대릾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같은 주님에 대한 서로 다른 접근을 보임으로써 분파를 야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계시록은 이 지구의 종말까지를 개괄한 위대한 서사시와 같다. 그 각 구절을 세심하게 읽고 해석할 사람은 없다. 계시록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시작과 종말까지의 주님의 서사적 대략을 이해하고 주님을 더욱 신뢰하여 신앙으로 마지막까지 견뎌 낼 용기를 얻으면 되는 것이다. 극히 소수만이 난해한 구절들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그 개인에게 한정될 뿐 일반에게 널리 공표되지는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금하시는 것들 중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어떤 형제님도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했으나 더이상의 언급은 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궁금한 것을 물을 수가 없었다. 경전 곳곳에서도 주님께 물었지만 더이상 알려고 하지 말라는 금지의 말씀을 볼 수가 있다. 계시록도 주님이 사랑하시는 종 요한에게 보여 주신 세상 끝날에 있을 것에 대해 보여주셨지만 오늘날 우리가 다 이해할 정도로 자세하게 일러 주시지는 않았다. 그저 신앙으로만 알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주의 영의 도움을 받아야만 보다 잘 알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은 결국 개인적 경험으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계시록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보다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구절들만 읽어도 큰 감명을 받는다.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장)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장)
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2장)
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2장)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장)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3장)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3장)
4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계 10장)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장)
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21장)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장)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계시록에 언급된 많은 구절에 대해 깁론을박하고 있다. 계시를 더 잘 이해하려는 것은 좋으나 전혀 검증되지 못한 독자적인 견해가 되기 쉽다. 그 견해는 오히려 계시의 진의를 혼돈으로 몰고 갈 수가 있다. 우리는 주님의 세상 다스림의 칠천년과 그 이후까지 연결되는 가공할 또는 기쁜 사실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에 경각심을 가지고 주님이 참으로 살아 계신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마음에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분의 우리 백성들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에 너무 몰입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주님의 영의 임재를 받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지나친 억측으로 인해 복음의 참된 의미에서 벗어나 분화적 논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작금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양평 스타벅스에서 바라본 남한강. 며칠 전 내린 눈이 언 채로 강물을 덮고 있다. (23.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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