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이 여름 방학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재회의 기쁨은 컸고, 아이들도 고향집을 그리듯 자그레브로 돌아왔다.
성인이 된다 해도 집이란 늘 소중하고 그리운 곳이다.
가족이 모두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고 당연한 일상의 일이지만, 흩어져 사는 가족에겐 일상이 아닌 소중함이다. 그것은 참 행복한 시간이다.
대학이란 곳은 학업을 성취하며 내외연을 확장 시키고, 지식적 관계적 사회적인 면에서 성장케는 하나, 동시에 스트레스와 경쟁과 생존, 인간 관계, 등에서 주는 압력과 압박으로 방전케 하고 갉아먹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한 권을 정해서 아이들과 독서 토론회를 하기로 했는데, 이는 우리에게 회복과 성찰, 그리고 다시금 방향성과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 그 책은 오래 전 IVP에서 출판한 기독교 서적의 고전 중에 고전으로 꼽히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고든 맥도날드)이다. 매일 한 chapter씩 읽고 저녁에 묵상하고 나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외면에 치중되어 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신자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여성이 자신의 얼굴화장을 잘 하는 것 같이 우리 또한 외면을 꾸미는 것에는 천재적인 재능 아닌 본능적인 기질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내면을 가꾸는 일을 소홀히 한다. 아니 정말 소홀하다.
외면은 출세, 성공, 명예, 학업, 경력, 인정, 등을 말한다. 우리가 외면에 대한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런 외면의 성취를 위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에 따라 그들의 기쁨과 좌절도 결정되어진다. 많은 외면을 소유한 자는 긍지와 만족, 자존감을 느낀다. 돈, 직업, 명예, 경력, 인정을 얻으면 성공한 자라고 믿는다. 반면 상대적으로 외적 소유가 적은 자는 자기연민과 피해의식, 그리고 무능함을 느낀다. 이것은 일반적인 견해지만 신앙적 견해와는 전혀 다르다. 현대 교회 안에서는 외적 결과(성공, 출세)가 마치 내적 결과(영성, 거듭남)의 완성인 것 같이 치부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면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외면의 타이틀로 사람을 인정하게 되면, 위기 시에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홍수의 현장이 되고 만다.
외면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불안과 경쟁, 시기와 열정으로 이끈다. 더 좋아지고 싶은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므로, 끝없는 목표와 만족을 위해 자신을 채찍질 한다. 그것은 개인의 발전과 성장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반면 내면에 지탱할 힘이 없는 외적 성장은 언젠가 방향타를 읽은 배와 같이 표류하게 되고 만다. 싱크홀과 같이 언제간 인생의 무게에 푹 꺼져 무너지게 되고 만다. 돈 벌고, 성공하고, 인정받고, 출세하며, 당당한 것 같이 행동하는 자들이 갑자기 삶의 의미를 잃고 무너지는 것은 싱크홀과 같이 내면에 공허한 자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들은 가진 것은 많고 외적으로는 뛰어나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텅 비었고 곤고하며 평안과 만족과 기쁨이 없다. 요한 복음 3장에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처럼, 외적 화려함에도 갑갑하고 곤고하다. 만약 신자라는 자가 외면에만 만족하여 살고 내면을 살피지 않아도 곤고함이 없다면 그는 신자가 아닌 세상인이다.
그들의 배는 세상이요, 우상은 소유이기에 육신과 함께 사라질 먼지와 같은 허무한 존재일 뿐이다.
외면이 있듯이 내면도 존재한다. 또한 외면을 지탱하는 힘은 내면의 동력이다. 내면은 정신수련이나 정신통일도 아니다.
내면을 가꾸는 것이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리는 것, 불안하면 성경읽고 기도하는 것 정도 수준도 아니다. 내면의 능력은 급작스럽게 자라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하고 은밀하게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며, 사모하고 준비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열매이다. 그 열매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와의 친밀한 교제에서 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책을 20여년 전에 처음 읽었던 것 같다. 그때 기억으로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단숨에 몇 장을 읽고 마음에 뜨거움이 가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 나 자신이 이 책에서 말했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을 도모하며 살았는가?' 하는 질문에 나 스스로 '아니요'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나 또한 어쩌면 내면이 아닌 외면에 치중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나의 건강이 이를 증명해 준다. 나는 내 육신의 병이 불신앙과 내면질서의 파괴로 인한 열매라고 믿는다. 그렇게 본다면 20년 전에 그토록 감동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모든 유익한 가르침들을 놓쳐 버린 것이다. 하지만 잊어 버렸다고 해서, 잃어 버린 것은 아니다. 망각의 기억은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은 다시 찾을 수 있다.
만약 스스로가 버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드라크마를 잃어 버린 여자가 그것을 다시 찾아 이웃을 불러 그 기쁨을 함께 나눈 예수님의 예화를 기억한다. 나 또한 잊었고 잃어버린 그것을 다시금 찾아서 기쁨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은혜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