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Paysage) / 폴 고갱(Paul Gauguin)
오랑주리 미술관에 딱 한 점 있던 폴 고갱의 작품.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클로비 고갱은 이때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여객선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불행하게 시작되었다.
그가 리마에서 보낸 시기는 1849~1854년까지 였으며 리마에서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오를레앙에는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1865년 12월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
사관후보생)가 되어 상선(
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지구촌 여러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자리는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1873년에는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에밀(1874), 알린(1877), 클로비(1879), 장 르네(1881) 폴(1883) 5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의 영향이었다.
그는 미술품 수집뿐만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
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위해 이를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주식거래인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이사를 하게된 동기는 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
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P.
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퐁타방에서 알게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두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陶器) 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였다.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가다가 마침내 1891년 2월 그의 작품을 처분하여 원시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 1일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
타히티의 여인들》《
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고갱은 약 2개월간의 항해를 마치고 1891년 6월 9일 타히티섬 파페에떼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서양의 문명의 벗어나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원시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타히티 파페에떼는 그의
이상과 달리 척박한 곳이었다. 고갱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파페에떼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술주정뱅이 백인들이 득실거리는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고갱은 그해 9월에 파페에떼를 떠나 마타이에아 섬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고갱은 안정을 되찾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점차 가난과 빈곤, 고독에 시달려 가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갈망했다.
1893년 6월 4일 그는 타히티를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893년 11월 10일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고갱은 자신이 경험한 타히티섬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소개를 위해 그림을 목판으로 제작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절박한 것이었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깊은 좌절감만 쌓여갔다.
코펜하겐의 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고갱은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이 당시 파리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은
피카소 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히티 파페에떼에 돌아온 고갱은 병마에 시달렸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 겪었던 처절한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때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이곳에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쾌락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채를 든 여인》 《해변의 말 탄 사람들》등의 작품을 남겼다.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
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폴 기욤의 작품도 살짝 있었다.
그림 수집에 안목이 생기려면, 본인도 직접 그릴줄 알아야 할 듯.
섕 수틴 [Chaim Soutine ]
리투아니아의 화가.
민크스 근교의 스밀로비치 출생.
가난한 유대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극빈한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일찍이 화재(畵才)를 나타냈고
1910년 고학으로 빌나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그의 재능을 아낀 의사의 원조로 파리의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며 파리에서 거처로 삼은 곳은 방랑 미술가 라 뤼슈의 집합처로,
그 곳에서 A.모딜리아니와 M.샤갈 등과 우정을 다졌다.
1919년부터 3년간은 남프랑스의 세르에 체류하였는데, 그 곳 남국의 빛과 색채는 M.블라맹크에 심취하여 있던 그의 작품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는 일련의 풍경화를 그리는 동안 주황색 ·녹색 ·노란색과 같은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와, 대상을 강하게 왜곡시키는 주관적 표현을 개발하였다.
1922년 파리로 돌아왔으며, 이듬해 미국의 대수집가인 번즈 박사에 의하여 약 100점의 그림이 팔렸다.
그 후로 에콜 드 파리의 유력한 사람으로 화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여전히 수육(獸肉)이나 미친 여인 등을 주제로 삼았으며,
격정과 환각을 충만시켜 박해받는 인간이 품은 고독한 영혼의 절규라고 할 수 있는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만년에는 파리를 떠나 지방에서 생활하였으며, 불우한 가운데 절망과 빈곤의 생애를 마쳤다.
대표작에 《맥심식당의 급사》(1927, 버펄로 올브라이트녹스미술관) 등이 있다.
수틴의 작품은 네이놈 미술검색에서 나오지 않아서 해설 불가.
약간 이중섭과 같은 느낌이 나지만 훨씬 더 거칠고 색감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고,
대상 또한 약간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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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동물들의 모습같은데.... 너무... 그로테스크....ㅜㅠ
위트릴로 [Maurice Utrillo, 1883.12.25~1955.11.5]
파리 몽마르트르 출생. 모델 출신으로 훗날 여성화가가 된 S.발라동의 사생아로서,
주정뱅이로 무명화가였던 아버지는 그를 인지(認知)하지 않은 채 죽었으나,
8세 때 그의 딱한 사정을 동정한 에스파냐인 미구엘 위트릴로의 호적에 입적되었다.
10세에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그후 직장에서도 한곳에 오래 근무하지 못하였으며, 마침내 1901년 입원 가료를 받아야만 하였다.
병원에서 대증요법으로 그에게 과해진 회화제작이 계기가 되어, 독학으로 화가의 길을 걸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작품은 주변의 풍경화에 그쳤으며, 그림엽서에서 베낀 것도 많았다.
초기에는 몽마니 등 파리 교외의 풍경을 그리고(Montmany시절, 1901∼1907), 이어 인상파적인 작풍을 단기간 시도하였으나(인상파시절, 1907∼1908),
가장 충실한 위트릴로 독자의 조형세계(造形世界)를 구축한 것은 30세까지의 한 시기였다(흰 시절, 1908∼1912).
음주와 난행과 싸우면서 제작한 이 시절의 작품은, 오래된 파리의 거리묘사에 흰색을 많이 사용하여
미묘한 해조(諧調)를 통하여 우수에 찬 시정(詩情)을 발휘하였다.
그후 1913년 브로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으나,
코르시카 여행(1912) 후 점차 색채가 선명해졌으며(다채시절, 1912년 이후) 명성이 높아지면서 예전의 서정성이 희박해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만년에는 그의 작품의 찬미자인 벨기에 부인과 결혼하여 신앙심 두터운 평화로운 가정을 이루었으며,
프랑스 남서부의 다크스에서 폐충혈(肺充血)로 생애를 마쳤다. 주요작품에 《거리의 풍경》《파리의 골목길》《팔레트》 등이 있다.
노트르담 성당 (Notre-Dame) /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주제
성당이나 교회 건물은 몽마르트(Montmartre)를 비롯한 파리의 도시 풍경과 더불어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1883-1955)가 가장 빈번히 그려낸 주제였다.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노트르담 성당>이 손꼽히는데, 주제에 관한 작가의 몰입뿐 아니라 조형적인 관심 또한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의 시테 섬(Île de la Cité) 에 자리한 노르트담 성당은 12세기에 착공되었으며, 고딕 양식 특유의 웅장함과 견고함을 자랑한다.
그리고 프랑스와 파리를 대표하는 이 역사적인 대성당은 위트릴로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어왔다.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선구자인 요한 바르톨드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 1819-1891), 야수주의(Fauvism) 화가들인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와 알베르 마르케(Albert Marquet 1875-1947) 등이
저마다의 조형적 관심을 토대로 노트르담을 화폭에 담아내었다.
조형요소와 원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소장된 이 작품에서 화면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것은 대성당의 정면부인 파사드(façade) 이다.
오로지 캔버스 왼편에 아주 작게 묘사된 주택가 담벼락들만이 주변의 거리를 암시해 준다.
파사드 부분에서 조각적 디테일들은 결여되어 있지만, 둥글거나 타원의 형태들,
사각형들과 난간의 분할면과 같은 기하학적인 형태들을 통해 관람자들의 주목을 이끌어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푸른색과 녹색 톤의 조화 속에서도 붉은빛의 성당 정문이 매우 분명하게 포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위트릴로는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보다도 형태나 색채와 같은 기본적인 조형 요소들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오를레앙의 대성당(Cathédrale d'Orléans)>(1909-1913)에서도 동일한 양상을 볼 수 있다.
한편, 스위스 제네바의 프티 팔레 미술관(Petit Palais Musée d’Art Moderne)이 소장하고 있는
위트릴로의 작품들 중에도 <노트르담 성당(Notre-Dame)>(1917)이 있다.
거의 동일한 장면이 유사한 구도로 나타나고 있지만, 1917년 작품에서는 화면 전경에 검은 옷을 입은 인물들이 등장한다거나
왼편의 건물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파사드의 조각들이나 장미의 창(Rose Window)과 같은 성당 건축의 장식적 디테일들이
한층 뚜렷해진 검은 윤곽선들을 통해서 더 적극적으로 묘사되었다.
기법
위트릴로의 풍경화들은 화가가 직접 밖으로 나가서 실제의 풍경을 보면서 그린 것들이 아니다.
그는 당시 관광객들을 위해 널리 제작되었던 그림 엽서들을 참조하여 자신의 기억 속 장면들을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자를 이용하여 엽서의 그림들을 정확하게 옮긴 다음 이것을 확대해서 제작하곤 했는데,
많은 직선들이 교차하는 성당의 정면 부분을 보면, <노트르담 성당> 역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감수 유정아/서울대학교 강사
위트릴로의 나중 작품인 듯.
스타일이 전혀 달라졌다.
앙드레 드랭 [Andre Derain, 1880.6.10~1954.9.8]
파리 교외의 샤토 출생.
일찍이 회화와 기계에 취미를 느껴, 공과대학 입학준비를 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회화를 전공하였다.
처음에는 샤토에 살고 있던 M.de 블라맹크와 친교를 맺고 같은 아틀리에에서 제작하였다.
1905년 H.마티스와 알게 되어 그 해의 살롱 도톤에 출품, 가장 대담한 포비슴(Fauvism:야수파)의 화가로서 주목되었으나,
2∼3년 후에는 격정적 색채를 버리고 침정(沈靜)한 색조로 바꿨으며,
P.세잔과 흑인조각의 단순화된 형태와 긴밀한 구성에 마음이 이끌린 것이 큐비즘(Cubism:입체파) 탄생의 계기가 되었다.
이지적인 그의 기질이, 포브[野獸]의 분방한 원색의 범람에서 궁극적으로 형태의 엄격함,
화면질서나 구성을 바라는 원래의 방향으로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 근세 초기의 회화나 고딕 예술, 프랑스 옛 대가의 화풍 등에 심취하면서
독자적인 탐구를 계속하여, 전통을 현대로 계승시킨 신고전주의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은근한 어두운 계통의 색채를 기조로 뚜렷한 명암과 오묘한 세부적인 잔손질로 화폭에 뛰어난 내면성과 청신한 현대감각을 담았다.
작가의 질녀 (La nièce du peintre) /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아르장퇴유 (Argenteuil) / 클로드 모네
인상주의 / 1875년 / 유화 / 캔버스에 유채 / 56x67cm / 오랑주리 미술관 소장
모네의 추가 몇 작품이 아래에도 전시되어 있다.
눈 내린 풍경 (Paysage de neige)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거의 설경을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1868년 제작된 <불로뉴 숲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Les Patineurs au bois de Boulogne)>이라는 거대한 크기의 작품과
이 <눈 내린 풍경>은 다른 목적으로 그려졌다고 할지라도 르누아르의 작품 중 매우 예외적으로 눈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비록 이와 같은 몇 점의 설경을 그린 작품이 있긴 하지만,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눈에 대해 ‘자연의 전염병’이라고 비난하였다.
"저는 추위를 전혀 참지 못합니다. 또한 겨울 풍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 밖에 없습니다. … 습작인 소품 두세 점이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그는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에게 속내를 이야기했다.
눈을 그린 소품들 중에는 1933년 오랑주리 전시에 선보인 작은 크기의 <눈 내린 풍경(Paysage de neige)>(0.18X0.64m)과
발터-기욤(Walter-Guillaume) 콜렉션에 해당하는 <눈 내린 풍경(Paysage de neige)>이 있다.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이 작품은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르누아르의 작품이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바지유(Bazille), 모네(Monet) 그리고 시슬레(Sisley)가 제시한 소재를 야외에서 만들어낸 장면이다.
가늘고 신경질적이기도 한 작은 붓터치는 그만의 독특한 기법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루느아르에게 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눈은 푸르스름한 하늘을 반사하며, 작품의 넓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검붉은 나무들의 그림자를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눈 덮인 집은 아련하게 보인다.
/ 지엔씨미디어
편지를 들고 있는 여인 (Femme àla lettre)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긴 머리의 목욕하는 여인 (Baigneuse aux cheveux longs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다양한 방식으로 ‘목욕하는 여인(Baigneuse)’을 그렸다.
시인 말라르메(Mallarmé) 가 르누아르의 이러한 작품들에 대한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시를 썼을 정도로
그의 작품 속 여인들은 원초적인 자연미를 지니고 있다.
에덴 동산이 있던 평화로운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순박한 관능미와 빛나는 무지개빛 피부와 머릿결은 르누아르 작품만의 특성이다.
더하여 이러한 여인들은 명확한 형태는 없지만 따뜻한 색채를 지닌 배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작품 역시 유화로 그려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게 색칠되었다.
또한 붉은 기가 도는 진주빛 피부는 사랑스러움을 극대화시킨다.
이런 작품에 대해 마이클 후그(Micheal Hoog)는 르누아르가 인상주의 그룹 중 유일하게 여성의 누드에 관심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미켈란젤로 루포(Michelangelo Lupo)는 1982년 르누아르에 대한 전시에서
<목욕하는 긴 머리의 여인>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14개의 작품을 한 자리에 선보였다.
<목욕하는 여인>이라는 테마가 주로 그려졌던 시기는 르누아르에게 있어서 독특한 특성을 가졌던 때로,
“진주빛 시대(période nacrée)”라 일컬어진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들은 이미 인상주의적 이념과는 부합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상주의를 넘어서고 있었는데,
특히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미술관에서 접한 경험과 신고전주의자 앵그르(Ingres)의 작품 세계에서 얻은 영향을 작품 속에 투영하였다.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은 특히 작품 속 여인들의 자세에서 드러나는데, 특히 천으로 가슴을 살짝 가리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을 자주 표현하였다.
이러한 포즈는 이 작품에서도 잘 드러나며, <목욕하는 여인의 단장(La Toilette de la Baigneuse)> 등의 여러 작품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몇 년 후, 르누아르는 조각으로도 비슷한 자세의 여인상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과거 거장의 교훈과 인상주의의 현대적 감각, 그리고 자신만의 미감을 결합하여 독자적인 여인상을 창조하였다.
/ 지엔씨미디어
피아노 치는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Yvonne et Christine Lerolle au piano)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91년 말에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새로운 박물관을 위한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받는다.
이 박물관은 생존 예술가들의 그림을 주로 전시할 계획이었다.
르누아르는 이 계획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좋은 기회를 활용하고자 했다.
<피아노 치는 소녀들>이라는 그림은 이런 의도에서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에 더 이상 헌신하지 않았다.
로마를 여행한 뒤에 르누아르는 르네상스 화풍에 강렬히 경도되었고, 이런 변화가 이 그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그림에서 르누아르는 경계를 모호하게 흐려서 사물의 형태를 흐름과 운동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인상주의 기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윤곽선은 뚜렷하고 피부와 옷의 질감은 부드럽고 세밀하다.
투박한 붓놀림으로 사물의 인상을 표현하기보다 치밀한 세부 묘사를 통해 인물과 배경을 분리하고 있다.
‘피아노 치는 소녀’는 르누아르가 즐겨 그리던 주제 중 하나였다.
음악과 청춘이라는 주제는 프랑스와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에서 자주 출현했다.
음악은 천상의 질서이자 동시에 쾌락을 의미했다.
르누아르는 이런 전통적인 주제 의식을 부르주아 가정이라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에서 구현하고 있다.
이 차원은 상징적이면서도 세속적이다.
르누아르는 교양을 갖춘 순진 무구한 소녀들과 이들을 보호해 주는 따뜻한 가정의 정경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당시에 화목한 가정을 보여주는 지표는 부모나 손님들 앞에서 어린 자녀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는데,
이런 문화를 감안하면 이 그림의 소녀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의미는 자명하다고 하겠다.
이 그림은 <피아노 치는 두 소녀>를 위한 습작이지만, 완성작에 담길 요소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완성작을 위한 스케치라고 하기에는 인물 묘사가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 월간미술
피아노치는 소녀들 (Jeunes filles au piano)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크기는 세로 116㎝, 가로 90㎝이다. 르누아르의 1892년 작품으로,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르누아르는 전반기의 인상주의 화풍에서 벗어나, 후반기로 가면서 점차 데생과 구도에 중점을 두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특히 부드러운 터치와 고전적인 구도를 이용해 주로 부유층 여인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당시 파리의 부유한 가정의 평온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르누아르가 세잔의 집에 머물 때,
시인 말라르메의 추천으로 정부로부터 주문을 받아 그린 것이다.
소녀들의 밝고 건강한 피부와 화려한 옷차림, 커튼 너머로 보이는 그림들, 잘 정리된 집안 구조 등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묘사하였다.
인상주의적 특징인 점이나 면을 이용하기보다는 길고 가는 선이 겹쳐져 확산되는 터치로 밝고 온화한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그림 속의 두 소녀는 멜로디를 익히려고 악보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두 소녀의 양쪽 볼에 묘사된 부드러운 홍조로 인해 그림의 모든 것이 온화하고 따사로운 느낌을 준다.
피아노 건반 위로 가볍게 올라가 있는 소녀의 오른손과 다른 한 소녀가 음악에 몰두한 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는 왼손은 그림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고 있다.
전체적으로 빨강·노랑·파랑·초록 등의 원색을 기조로 한 색조의 통일성을 이루고 있으며,
다양한 색조의 부드러운 곡선이 조화를 이루면서 화면을 구성한다.
©두산백과사전 EnCyber & EnCyber.com,
마눌님께서는 눈에 익은 작품 위주로 폰카에 기록남기기 모드.
두 소녀의 초상 (Portrait de deux fillettes)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놀고 있는 클로드 르누아르 (Claude Renoir jouant)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자신의 아이들을 모델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세 아들 가운데 특히 1901년에 태어난 클로드를 가장 많이 그림 속에 담았다.
이 작품에서도 꼬마 병정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아들 클로드를 사랑스럽게 표현하였다.
르누아르 특유의 부드러운 터치와 색감은 소년의 귀여움을 더한다.
이 장면은 연출된 것이라기보다는 매우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클로드가 가지고 놀고 있는 꼬마 병정은 르누아르 부부가 수집했던 것이며
항상 그의 작업실에 흩어져 있었다고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는 진술하였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1905년에 그려진 <글을 쓰는 코코(Coco écrivant)>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F. 돌트(F. Daulte)가 쓴 “르누아르의 아틀리에”에서, <푸른 옷을 입고 놀고 있는 클로드 르누아르>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이 다시 등장하는데,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잘못 되었다. 실제로 이 아이는 붉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1910년이라는 날짜 역시 의심스러운데, 이는 1909년 그가 그린 클로드의 모습과 차이가 나며,
실제 이 작품 속 클로드가 9살이라고는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무렵에 루느아르는 여러 작품들을 마치 연작처럼 그렸다.
이 작품들의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하는 클로드는 화면을 생기 있게 만들곤 한다.
오랑주리 미술관(Musée d'Orangerie)에 소장되어 있는 발터-기욤 콜렉션(Collection Walter Guillaume)에는 많은 초상화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 역시 클로드가 등장하는 작품인 <코코의 작은 얼굴((La Petite Tête de Coco)>와 <글을 쓰는 코코>이다.
여기서 클로드는 <놀고 있는 클로드 루느아르>와 같이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또한 <여인과 아이, 코코(Femme et enfant, Coco)>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하는데,
<놀고 있는 클로드 루느아르>와 마찬가지로 약간 높은 시점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이는 마치 어른이 일어서서 아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은 어린 아이다운 활기있는 모습의 아들 클로드를 바라보는 아버지 르누아르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 지엔씨미디어
어릿광대 옷을 입은 클로드 르누아르 (Claude Renoir en clown)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자녀들은 아버지를 위해 마지못해 모델을 섰다.
르누아르는 아이들을 부드럽게 표현하고 사랑을 담아 보다 정성스레 그렸다.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아이들은 앉아 있다.
그런데 그가 1910년의 작품은 <사냥복을 입은 장(Jean en costume de chasse)>을 그리기 위해서 장에게,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막내 아들인 클로드(Claude)에게 이 같이 서있는 자세를 취하도록 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후에도 클로드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채 여러 번 모델을 섰다.
이를 위해서는 아침부터 분장을 위해 모직 스타킹을 신어야만 했는데,
간혹 클로드가 너무나 간지러워하면, 포즈 취하기를 중단하고 면 스타킹으로 갈아입히기도 하였다.
어쨌거나 1901년생인 어린 클로드는 8살 정도 된 아이였지만,
전혀 짜증을 내지 않고 아버지의 모델이 되기 위하여 학교를 결석하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 클로드는 눈에 띠는 장식이 없는 기둥 옆에, 고전적인 복장을 입은 채 서 있다.
이 소년은 마치 벨라스케스(Vélasquez) 나 고야(Goya)의 작품에 등장하는 어린 왕자나 귀족의 초상화를 연상하게 한다.
특히 고야가 1790년대에 그린 <돈 마뉴엘 오소리오 만리끄 데 주니가(Don Manuel Osorio Manrique de Zuniga)>의 초상을 상기시킨다.
고야의 이 작품 속에서 어린 소년은 목 부분에 넓은 흰 레이스가 붙어 있는 붉은 색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이와 대조되게 텅 빈 듯 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피에로 복장을 한 클로드의 이 전신 초상화는 1909년에 제작되었는데,
1875년에서 1890년에 주문을 받았던 많은 어린이 초상화와 다르게, 여성적인 장식이 있는 옷을 입고 있다.
‘광대’이기보다는 ‘붉은 옷의 피에로’로 보이는 이 어린 아이는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복장에서 빛나는 화려한 붉은 색으로 이목을 끈다.
이 붉은 색은 회화의 배경에서 반복되면서 조화를 이루는데,
<붉은 색 블라우스를 입은 가브리엘(Gabrielle en blouse rouge)>와 같이 루느아르가 ‘베네치아 풍’으로 주로 작품을 하던 이 시기에 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시기에 제작된 <클로드의 초상(Portrait de Claude)>은 3/4정도의 좌측면으로 앉은 포즈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서 머리의 무게감과 이마를 길게 덮은 머리와 대비되며 돋보이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발견할 수 있다.
/ 지엔씨미디어
장미꽃을 꽂은 금발여인 (Blonde àla rose) /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이 초상화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말년에 사용한 화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대체적으로 형상들을 희미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렬한 붉은색을 지배적인 색조로 사용했다.
하지만 캔버스의 표면 질감이 보일 정도로 얇게 칠해진 물감으로 인해, 이 붉은 색조는 다른 색상들에 강한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작품 속 모델인 젊은 여인은 앙드레 마들렌 헤슬링(Andrée-Madelaine Heuschling)이다.
‘데데(Dédée)’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던 이 여인은 르누아르의 마지막 모델이기도 했는데, 그는 이 여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나는 쇠약해진 눈으로 그녀의 탱탱한 피부가 닳아 없어질 만큼 그녀를 오랫동안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화가가 아닌, 어린 아이가 되어 있었다. »
카트린 헤슬링(Catherine Hessling)이라는 이름의 연극배우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그녀는
1920년에 르누아르의 아들인 장 르누아르(Jean Renoir)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후 영화감독이 된 장의 영화에 여러 번 출연하기도 했다.
그녀가 출연했던 장의 대표적 영화 작품은 에밀 졸라의 소설을 각색하여 1927년에 제작한 <나나(Nana)>이다.
작품 속 여인은 상반신을 3/4정도 좌측으로 돌린 채, 가슴골이 보이는 원피스 풍의 옷을 입고 있다.
이는 1915년에 제작한 <푸른 배경 위의 분홍색 옷을 입은 앙드레의 정면 초상> 속 모습과 매우 비슷하다.
그 외에도 이 작품과 유사한 여인의 모습이나 작품 구도를 띈 르누아르의 인물화가 이후에도 여러 점 제작되었는데,
이를 통해 이 작품이 이후의 르누아르의 초상화가 발전하는 데 많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화법은 르누아르가 숨을 거둔 해에 제작했던 작품들인 <꽃다발을 든 여인>이나 <만돌린을 연주하는 여인>,
또는 <연주회> 등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되었다.
/ 지엔씨미디어
점심식사를 마치고 튈르리 궁전으로 복귀~~
튈르리 정원은 완전 가을 분위기.
정원에선 꼬마아이들이 축구를 즐기고 있다.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입장이다.
기욤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인이 재혼한 건축가 장 발터(Jean Walter)가 수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랑주리에선 바로 1층으로 직진, 모네의 수련을 감상한다.
전시실 하나마다 타원형으로 모네의 작품이 4점씩 전시되어 있다.
가운데서 그림을 볼 경우 전체적인 그림의 관람이 가능한 구조.
마치 오래된 극장의 스크린과 같은 스타일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