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1일
새로운 달을 맞이하는 아침에 답답한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잠을 잤는지 아니면 꿈을 꾸었는지 비몽사몽이다. 오늘부터 6월이 시작되어 아파트 입구에는 얼마 전부터 빨간 장미가 피어 있다. 오늘도 날이 덥다는데 아침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고 연일 피곤했는지 몸도 무겁다. 아내는 평소처럼 영어를 마치면 산에 다녀온다고 먼저 나가고 나는 방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맑은 하늘에 해가 금세 중천에 떠 있다. 체육관도 나가고 학원에 수업도 하러 다니기에 망정이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리며 지낸다면 대낮에는 말할 수 없이 무료할 것 같다. 체육관에 11시에 도착하여 열심히 운동을 하고 원고를 작성하러 PC방에 갔다가 점심이 지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산에서 내려와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왔다는 아내는 기분이 좋은지 동학이네 형이 부른다는 노래를 듣고 있는데 나도 컴퓨터 화면으로 들어보니 목소리가 좋다. 집을 나서 학원에 도착하여 원고 작업을 계속했고 중간에 신설동 임대 문의와 친구들 전화까지 바쁜 시간을 보냈다.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새벽까지 원고 작업에 매진하였는데 어머니의 내용이 아니었다면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2일 새벽 3시경 잠이 들었고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아침까지 어두워 늦도록 잠을 잤다. 식사를 마치고 체육관으로 가다가 원고 작업을 더 하려고 발길을 PC방으로 돌려 시간을 보냈다. 동학이 엄마와 산에 간 아내는 점심을 한다고 전화가 왔고 2시경 집에 들어온 나도 혼자 식사를 했다. 영식이한테 투자한 3천만 원에 대하여 사업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는지 2월 말에 들어온 원금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자가 오늘 들어왔다. 하지만 수시로 부산에 다니며 신경을 쓰고 고생하는 영식이에게 이자가 늦었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 무슨 일이든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후에 아내가 논술학원에 간 뒤에 원고 작업을 하면서 어머니와 함께한 지난 19개월을 뒤돌아보니 세월이 너무 빨랐고 순간순간의 장면들과 꺼져가던 어머니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비가 오다가 그치고 바람이 심하게 부는 오후에 신설동에 나갔다가 저녁에 집에 들어와 원고 작업을 하려는데 아내가 반포 큰 형수 이야기를 꺼내어 가뜩이나 예민하던 터에 큰소리로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갔다. 늦은 밤에 전화를 하여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는 여동생한테 넉넉한 위로를 못하여 오늘의 내 심정까지 괴로움이 많았다. 잠이 오지 않아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잠이 들었고 12시에 들어온 아들이 방으로 들어가라 독려도 했지만 아침까지 그대로 보냈다.
3일 어제 저녁에 아내가 큰 형수 이야기를 꺼내어 심하게 화를 냈는데 아내 입장에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소리라고 해도 가족의 문제가 대립되어 있는 현실이라 무슨 말을 해도 예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식사도 거르고 늦게까지 누워있다가 10시에 PC방으로 가서 원고 작업을 하다 보니 오후 3시가 지났다. 집으로 돌아와 4시에 식사를 하고 안산에 올라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걸으며 마음을 추스리고 6시에 집에 들어오니 아들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지난 번 신촌역 노래대회에서 탈락하여 조만간 보라매공원으로 다시 출전한다고 하는데 기대보다는 오늘도 걱정이 먼저 앞섰다. 학원에 가서 다른 날보다 재미있게 강의를 하고 밤에 집에 왔는데 아내는 어제의 감정이 남아 있는지 불만의 표정이라 학원에서의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혼자 식사를 하고 밤 12시가 지나 원고 작업을 하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거실의 시계는 새벽 3시를 지나고 있다.
4일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식사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금방 9시가 지났다. 오전 내내 원고 작업을 했지만 능숙한 컴퓨터 솜씨가 아니라서 당연 힘들고 작성된 분량에 비하여 시간도 많이 걸렸다. 원고 작성을 하면서 1년 전을 돌아보니 요양원에 다니며 어머니 뵌 것, 산에 다닌 것 그리고 강의하고 친구들과 술 마신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일이 없다. 물론 요양원이나 산에 다니고 열심히 강의한 것만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술을 마시고 늦은 밤이나 새벽에 들어온 날도 많아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하루를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쉬움이 많은 시간들이다. 오늘이 목요일이라 아내는 오전에 한글회관에 갔을 것인데 점심이 지나서까지 소식이 없어 혼자 식사를 했다. 오후에 안산에 올라 숲속을 걷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심호흡을 했더니 몸속의 균이 빠져 나가는 것처럼 신선하고 마음이 밝아 왔다. 정상에서 내려와 등산복 차림으로 곧바로 원고 작업을 하러 갔다가 밤 11시가 되어 돌아와 늦은 식사를 하고 다시 작업을 이어갔는데 이렇게 밤낮으로 원고를 쓴다는 사실을 가족들은 아무도 모른다. 밤 12시가 지나서 아들이 학원에서 왔고 반가움의 표시로 손을 내밀지만 악수는 윗사람이 먼저 손을 내밀 때 하는 것이고 그것보다 어서 철이나 들어갔으면 좋겠다.
5일 새벽에 신문을 보다가 다시 누웠다. 어제 늦은 시간에 속이 거북하여 집에 있는 소화제를 먹고 잤는데 그나마 속이 편하여 아침에는 된장찌개로 아들과 식사를 했다. 오늘 재량 휴일이라고 학교에 가지 않는 딸은 무슨 이유인지 아침부터 짜증을 내고 투정을 부려 얼굴을 부비며 대화를 하고 달랬다. 9시30분에 아파트 앞에서 아내와 딸을 포함하여 논술교실 6학년 학생들을 혜화동 과학관에 태워다 주고 신설동으로 이동하여 원고 작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조선일보 논픽션 응모기한이 있고 분량도 소설보다 많아서 집이나 학원 또는 PC방 등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작업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이 휴일이라 이번 주 처리해야 할 것들을 마무리하고 4시경 학원에 도착하여 강의를 했는데 날이 더워서 나도 학생들도 몽롱한 시간이었다. 강사료 문제로 장원장과 대화를 했고 고향 동창 총무는 오늘도 전화하여 나를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성경이야기를 설교하는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일 어머니 49제로 시골에 간다는 여동생이 동행을 부탁하는데 대화를 하는 중에도 슬퍼하는 여동생의 마음이 전해오는 듯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원고 작업으로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12시를 보냈고 새벽이 되도록 자리를 지켰다.
6일 새벽에 일어나 평소처럼 뉴스와 신문을 보다가 8시가 되어 아침식사를 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한다고 아내는 일찍 집을 나서고 잠실까지 가서 풋살을 한다는 아들도 이어서 나간다. 보충 강의가 있어 식사를 마치고 학원으로 일찍 출발하여 수업을 했고 남은 오전 시간에 원고 작업을 하며 보내다 점심쯤에 집에 돌아왔다. 오후가 되어 안산에 올라 2시간을 보내고 5시경 하산하여 PC방으로 달려가 원고 작업을 하다가 링컨선생과 만났다. 홍제역 인왕시장으로 빈대떡으로 막걸리를 마시러 가는 중에 아들이 다니는 수학학원에 들어갔더니오늘은 수업이 없다고 하여 원장하고 통화만 하고 나왔다. 아들을 지도하는 수고도 있지만 지난 번 어머니 장례식 때 부조금을 보내와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갔던 것이다. 인왕시장에서 막걸리 몇 잔을 마시면서 링컨 선생과 대화를 풀어나가다 보니 사회학과 출신이라 그런가 과격한 혁명가 스타일이어서 내내 불안했다. 밤 9시30분에 집으로 왔고 밥을 먹는 중에는 찌개가 밍밍하여 내가 다시 요리를 했더니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7일 아침에 날이 흐리다. 영식이와 오늘 산에 가기로 해서 새벽에 문자를 했는데 답이 없어 식사 후 등산복 차림으로 일단 학원으로 일찍 나갔다. 원고 작업을 하는 중에 우리 동네 안산을 오르자는 연락이 와서 시계를 보니 작업시간이 벌써 3시간이나 지나 12시가 가까워 온다. 친구와 약속을 지키려고 학원을 나와 집에서 점심을 먹고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비가 올 것 같다고 산행을 취소하여 그대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흐린 날씨에 혼자 안산에 올라 정상을 넘고 기구운동을 하는 중에 대학 친구인 재웅이 아버지께서 별세하셨다는 부고를 남석이가 알린다. 산에서 급히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이동하여 충주행 버스를 타고 장례식장인 충주의료원으로 향했다. 먼저 온 남석이와 이천에서 달려온 노훈이까지 함께 장례식장을 지키다가 늦은 시간에 친구들을 보내고 버스가 없어 나만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생각지도 않게 대학입시 학원에서 재수생들을 맡아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어서 고생과 노력을 동시에 많이 했다. 가까스로 1년을 보내고 도피하듯이 서울을 떠나 보은 속리산 골짜기 재웅이네 집에서 얼마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8일 충주 재웅이 상가에 있다가 새벽 2시경 근처 PC방에 들어가서 원고작업을 하다가 다시 장례식장으로 들어가 잠을 조금 자고 일어나니 새벽 6시가 되었다. 재웅이가 주는 커피를 마시고 충주를 떠나 8시에 구의동 터미널에 도착하였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가 모습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오전에 아내는 영어를 배우고 산에 간다며 나가고 나도 11시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했다. 집에 오후 2시에 들어와 아내와 점심을 하려고 통화를 했더니 강남까지 가서 단(丹)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다고 연락이 왔다. 틀림없이 누구를 따라 갔을 것인데 자신의 주장이나 뜻에 따라 생활해 나가는 주체적인 삶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 혼자 식사를 하고 신설동에 나가 서류를 정리하는 중에 대치동 마원장한테 수익금이 들어왔고 오후 5시에는 학원으로 가서 고등부 수업을 했다. 현재 경기학원은 월 8백만원 이상의 임대료가 몇 개월 미납되어 건물주가 명도소송을 신청한 상태이고 불안한 정황속에서 가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학원 규모를 줄여서 다른 곳으로 미리 이전을 하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인데 대책이 없는 장원장이라 한심하고 답답할 지경이다.
9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니 비가 내린다. 아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아들과 딸에게 잔소리를 심하게 하여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더니 흐린 날씨인데도 안산에 오른다. 혼자 된장찌개로 아침식사를 하고 원고 작업을 하다가 10시 30분에 산에서 내려온 아내에게 운전연습을 시키려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시내를 통과하여 왕십리까지 갔다가 여의도를 거쳐 2시간 연습을 했는데 신경을 많이 쓴 내가 먼저 지쳐 버렸다.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2시에 집을 나서 신설동 임대 문제로 갔다가 다시 동네로 돌아와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쳤다. 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로 방배동에 가서 영식이를 10여일 만에 만나 게장과 전복회 저녁식사를 했다. 밤에 매제의 전화가 불통이라 여동생과 통화를 했더니 내 목소리를 듣고 엄마가 온 것 같다고 울면서 전화를 받는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가 내리는 밤에 나도 심난하여 술을 더 마셨고 늦은 시간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0일 어제 전복회 등으로 술을 마셔서 그런가 속이 편하고 아침에는 김치찌개로 식사를 했다. 아들과 딸은 학교에 영어를 배운다는 아내도 동사무소에 간 뒤에 나는 원고 작업을 했고 요즘 직장일로 힘들어 한다는 매제에게 40대 후반은 누구나 어려운 시기이니 힘내라는 내용으로 격려의 편지를 썼다. 2년 전 내가 격어온 시간을 바탕으로 시련과 고통도 버티고 견디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생길 수 있으니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라고 했다. 12시에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에 산에 올랐더니 비가 온 뒤라서 후덥지근하고 습도와 기온이 높아 불쾌감이 매우 높았다. 산에서 내려와 남대문에 들러 양복 한 벌을 구입하고 신설동에 가서 옥상을 점검한 뒤에 학원으로 들어가 9시까지 수업을 했다. 저녁에 집 근처로 돌아와 PC방에서 원고 작업을 했고 매제에게 보내는 글을 마무리 하여 메일로 발송했다. 밤 11시에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다시 원고 정리를 새벽 2시까지 했는데 오늘은 날이 밝으면 어머니 49제라서 고향에 있는 산소에 가야 한다.
11일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다가 2시간이 흐른 5시에 다시 일어났다.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집을 나서 용산역에 도착하니 6시30분이고 49제를 지내기 위해 곧바로 KTX로 김제에 내려갔다. 2시간이 지나 도착하여 시원한 콩나물 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택시로 산소에 도착하니 49일 전 어머니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았다. 승용차로 온 여동생과 제를 올린 뒤에 무덤의 잡초와 휑한 사방을 둘러보니 과거와 다름없이 고요와 적막뿐이다. 어머니를 뒤로 하고 다시 읍내로 나와 목욕탕에 들어가 휴식을 한 뒤에 버스를 타고 전주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가는 전주는 엣날에 공부하면서 잠깐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가는 곳마다 어렴풋하다. 어제 비가 와서 깨끗한 전주터미널에 도착하여 고향 친구를 만났고 시래기 매운탕으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전주에서 오후시간을 보내다 밤에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고 홍제동까지는 택시로 집에 왔는데 들어와서 확인하니 핸드폰을 차에 두고 내렸다. 새벽부터 장거리 여행으로 피곤했고 자다가 깨다가 하면서 오다보니 정신이 없었다. 늦게까지 핸드폰에 연락을 하고 문자도 남겼지만 응답이 없어 그대로 밤을 보냈다.
12일 어제 피곤하여 머리도 어지럽지만 핸드폰까지 잃어버려 난감한 아침이다. 식사도 거르고 아침에 신설동 핸드폰 가게에 나가서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급한 대로 임대폰을 만들고 읽어버린 핸드폰에 대하여 위치 추적을 해보니 어제 잃어버린 폰이 대전에서 신호가 잡혀 이유를 몰랐다. 사례비도 주겠다고 또 중요한 문서가 있다고 여러 번 문자를 보내고 연락을 해도 소용이 없다. 체념을 하고 동대문구청에 가서 환경청소과 담당자와 신설동 정화조 과태료 비용을 16만원으로 조정하였다. 점심을 먹고 3시에 PC방으로 들어가 원고 작업을 하며 보내다가 6시에 학원으로 들어가 수업을 하는 중에 어제 기사로부터 핸드폰을 돌려주겠다는 전화가 와서 3만원을 지불하고 돌려받았다. 내용을 확인하니 신고된 것이라느니, 불법이라느니, 고발조치 하겠다는 내용까지 살벌한 내용으로 아내가 필사적으로 문자를 보낸 것들이고 아마 택시 운전자도 겁을 먹고 가져왔을 것이다.
13일 어제 새벽 2시가 지나서까지 원고 작업을 하고 아침 7시에 일어나 식사를 했다. 휴일 토요일이지만 시험기간이라고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들과 딸은 자신들의 생활이 있을 만큼 많이 자라 있다. 오전에 아내는 논술수업 하러 나가고 나도 원고 작업을 하다가 11시 지나서는 안산에 올랐다. 정상을 거쳐 기구운동까지 하고 내려오는 중에 동생 정환이 전화가 왔고 어머니(고모)께서 편찮으시어 병원에 입원했다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알린다. 집에 내려와 점심을 먹을 때는 아내가 배추를 들고 김장을 한다고 서성거려 맛은 어떨까 미리부터 걱정이 되었다. 오후에 신설동으로 나가서 오전과 마찬가지로 원고를 작성했고 오늘 처음으로 골프장에 갔다는 영식이는 라이스 샷을 했다고 자랑을 한다. 원고를 쓰다가 잠이 들기도 했지만 작업을 마친 7시에 집에 들어가니 비닐장갑까지 낀 딸이 낮부터 준비한 재료를 가지고 김치를 담근다고 열심이다. 집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또 원고 작업을 하다가 저녁식사를 했고 대치동으로 영어를 배우러 다닌다는 아들은 늦은 밤에 돌아왔다
14일 새벽에 일어나 원고 작업을 하고 있는데 도서관에 간다고 아들이 일찍 일어나 용돈을 달라고 한다. 자리를 잡겠다고 빨리 간다는데 할 말이 없었고 차비도 하고 아침과 점심을 사 먹으라고 1만1천원을 주어서 보냈다. 오전 10시경까지 원고 작업을 하다가 도봉산에 가려고 종로 3가에서 1호선을 갈아타고 도봉산 역에 내렸더니 여전히 사람들로 붐빈다. 신호등을 건너 산 입구로 향하던 중 길목에 있는 초원예식장 앞을 지나는데 고향 김제군 부량면 향우회를 개최하는 현수막이 눈에 띈다. 등산객들이 붐비는 사이로 현수막과 화환이 모두 고향의 모습이라서 반갑기는 했지만 일요일 대낮에 그것도 둥산로 입구에서 밴드까지 불러 단합대회 한다고 웅성거리고 있으니 어색하기도 했다. 고향의 형님들이 불러 가던 길을 멈추고 모임에 참석했고 200여명의 향우와 함께 점심부터 오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축의금과 찬조금은 약1천만원 들어왔지만 음식비와 유흥비 등을 제외하니 발전기금으로 남은 것은 5백만원이다. 회장이나 사무국장 등 모두가 한마음으로 성대한 고향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수고했지만 종로 5가에 위치한 종오약국 회장께서 2백만 원의 찬조금과 음료수 일체를 제공하여 많은 사람으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벽량초등학교 14회 선배로 과거에 약대를 졸업하여 현재는 제약회사까지 소유한 가장 성공한 동문이다. 향우회 단합대회를 마치고 8시에 집에 왔지만 오늘은 도봉산에 갔다가 입구에서 돌아온 날이지만 그래도 즐거움이 있는 하루였다. 저녁에 원고 작업을 하는 중에 논술을 마친 아내가 들어왔고 밥도 준비하기 전에 식탁에 있는 깍두기만 모두 먹어버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보기가 좋지 않았다.
15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거실에서 책을 읽던 아내가 6시가 되어 다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임무를 교대하듯이 내가 거실에 나왔고 바로 6시30분에 동네 PC방으로 가서 9시까지 원고 작업에 집중했다. 식사를 하러 집으로 왔더니 아내는 동사무소에 가서 영어수업을 마치고 산으로 간다며 나가고 식사 후 12시까지 다시 원고 작업에 매진하였다. 정신이 혼미하여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2시에 돌아와 아내와 통화를 했더니 동학이 엄마와 산에서 이미 점심을 하고 있다. 오후에 차를 몰고 동대문구청에 갔다가 엊그제 임시로 개통한 핸드폰을 반납하고 기존 것을 개통시켰다. 이어 신설동 PC방에 들어가 1시간30분 원고 작업을 했는데 컴퓨터 조작을 잘못하여 순식간에 화면이 사라져 버려 오늘도 90분을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학원으로 가서 장원장과 앞으로의 운영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했고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는 원고 작업으로 새벽 3시에 잠이 들었다. 어제 늦은 시간에 영식이가 방배동으로 나오라고 전화가 왔지만 원고 작업이 급하여 나가지 못했다.
16일 어제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아들과 딸을 불러 식탁에 앉게 했다. 처음으로 요즘 내가 어머니(할머니) 투병기록을 작성한다는 사실과 580일의 기록을 모아 조선일보에 응모한다는 것 나아가 책으로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도 알렸다. 모두가 놀라는 표정이었고 앞으로 자서전까지 쓸 계획이라고 했더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아들과 딸은 눈만 껌벅거린다. 아내만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어머니나 가정 그리고 아들과 딸을 생각한 것에 대하여 고맙고 수고한다는 말을 할 정도다. 오늘 새벽에 원고를 작성하려고 논술교실에 갔다가 상가 문이 잠겨 있어 다시 집으로 내려와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1차 내용 옮기기에 이어 2차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며 첨삭하는 과정으로 분량이 많기 때문에 6월말까지 완성하고 이어서 3차 4차 작업으로 글의 흐름이나 문맥을 또 잡아야 한다. 일반적인 글이라면 1,2차 정도면 되지만 신문에 응모하여 상이라도 받고 입선이라도 하려면 당연히 많은 정성이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작업을 어제 완성하면서 영식이에 대한 내용이 많아 감사 문자를 보냈더니 그도 놀라며 기억해 준 나에게 고맙다는 답이 왔다. 오전에 다시 원고 시작을 했고 오후에 체육관에 나가서 운동을 하고 지하철로 신설동으로 이동하여 정식이와 저녁을 함께 먹었다. 영식이는 어제 과음을 해서 자리를 못했는데 술을 마셔도 흐트러짐이 없는 친구라 이런 경우는 오늘 처음이다. 늦게 오면서 독립문에서 잘못 내렸고 걸어서 무악재를 넘어 집에 들어와 거실에서 잠이 드는데 아들이 이불을 덮어 주고 들어갔다
17일 새벽에 신설동 정화조를 청소한다고 전화가 와서 눈을 부비며 차를 몰고 갔더니 벌써 작업이 끝났고 3만원 비용만 지불했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오전에 원고 작업을 하는데 1차 작업보다도 시간이 더 걸리고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여 힘든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목표를 정하고 최선을 다해 매진하는 것은 의미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기에 심혈을 기울여 원고를 마무리 해 나갈 것이다. 점심때까지 집에서 원고 작업을 하다가 지루하여 오후에는 PC방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도 마시고 작업을 계속했다. 안양에 사는 친구 동선이가 회사를 그만 두고 집에만 있으니 무료하다고 전화가 와서 건강에 유의하고 힘내라고 격려를 해 주었다.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은 오디와 복분자를 가꾸어 이제 수확을 한다고 주변에 판매할 수 있는지 물어와 노력하겠다고 답변을 했다. 오후 2시에 점심을 먹고 핸드폰비용, 임대광고와 전기세, 자동차세, 임대부과세 등 잡다한 것들을 처리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안산에 올랐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올 듯하여 둘레길만 서둘러 걷고 내려와 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고 10시에 집에 돌아왔다.
18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거실에서 원고 작업을 시작했다. 2시간을 앉아 있었는데 집중해서 그런가 시간이 금방 흘러 공부를 이렇게 했더라면 전국 1등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7시30분 식사를 하는 중에 화장실에서 늦게 나오는 아들에게 샤워를 간단하게 하라고 아내가 지적하니 잔소리로 들렸는지 아들이 대들다가 밥도 먹지 않고 나가서 집안 분위기가 또 어두워졌다. 아들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용변이나 샤워를 할 때 너무 오래 시간을 지체하여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학교 가는 시간도 늦어 허둥대기 일쑤다. 식사를 마치고 4월에 했던 수업을 멈추었다가 6월에 다시 시작한 특례학생 과외를 하려고 논술교실에 올라가서 수업을 했는데 그 사이에 정신이 많이 회복되었는지 4월보다 훨씬 명쾌함이 있었다. 아내가 신사임당 모임으로 도곡동 민희네 집에 가서 혼자 점심을 먹고 오후에도 원고 작업을 이어나갔다. 장마 직전이라서 그럴까 기분이 찜찜하고 컨디션도 좋지가 않아서 4시경 안산에 올라 산을 돌고 기구운동까지 하고 내려왔다. 저녁에 조용하게 TV를 보다가 거실에서 잠이 들었는데 학원에서 돌아온 아들이 깨우는 바람에 안방으로 들어갔다.
19일 새벽에 눈을 떠 창밖을 보니 잔뜩 날씨가 흐리고 밤새 꿈까지 꾸었더니 오늘도 머리가 무겁다. 감자국으로 아침을 먹으려는데 날마다 늦게 나오는 딸이 오늘은 맨 먼저 식탁에 앉아 있다. 엊그제 늦게 나와서 계란찜을 먹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더니 오늘은 일찍부터 자리를 잡았는데 다른 사람보다 이기적이고 금전적인 욕심도 많아 덥다고 에어컨만 틀어도 돈이 나간다고 지적을 하는 초등학생이다. 이발을 하고 체육관에 가려다가 원고 작업이 급하여 방향을 틀어 pc방으로 들어갔다. 12시가 지나서까지 작업을 하고 결국 체육관은 포기하고 집으로 왔더니 마트에 다녀온 아내가 생오징어를 사 와서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더구나 아내가 날마다 모임이나 수업을 한다고 점심은 주로 나 혼자 먹었는데 오늘은 모처럼 따뜻한 밥으로 함께 먹었더니 순간의 행복이 있었다. 식사 후 낮잠을 자고 일어나 안산에 올라 숲속을 걸었고 중턱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내려왔다. 장마 직전이라 하루 종일 기압이 낮더니 저녁이 되면서 비가 내리고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현관에 10시에 들어서니 아내와 딸은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사극 프로그램 선덕여왕에 몰입해 있다.
20일 장마가 시작되었는지 비가 많이 내리는 새벽에 원고 작업을 열심히 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체육관에 가려다 오늘도 발길을 PC방으로 돌려 원고 작업에 매진하였다. 2차 원고 작업은 1개월분 40페이지를 문장의 연결과 접속사 처리까지 정리하는데만 국어를 했다는 나도 긴 시간이 걸린다. 원고 작업을 하다보니 글쓰는 일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고 작가들의 고충도 어렴풋하게 이해할 수가 있겠다. 오늘도 결국 운동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 또 원고 작업으로 컴퓨터 앞에서 2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비는 계속 내리고 오후 3시가 되어 기말시험 보충수업 하러 학원에 갔다가 강의를 마치고 오랜만에 남영동에 가서 영식이와 술을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2차로 미성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시간을 더 보냈는데 낮이 길고 밤이 짧다는 하지 무렵이라 밤 9시가 되어도 훤하고 11시가 지나서야 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21일 새벽에 들어와 8시에 일어났는데 정신이 얼얼하다. 어제는 비가 와서 습도가 많더니 오늘은 해가 뜨고 기온이 올라 숨이 턱턱 막히는 듯하다. 논술수업을 하는 아내는 일요일이라서 더 바쁜 날이고 아들과 딸은 시험공부를 한다고 각자 방에서 소리가 없다. 밤의 기온이 높아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컨디션이 좋지가 않아 산으로 가려고 밖에 나왔더니 산 입구 살구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한 무더기를 주워 담았다. 불쾌지수가 높아 산에 올라 걷는데도 흥이 나지 않아 바위에 기대고 앉아 음악을 들었더니 그제야 정신이 맑아 온다. 집에 2시에 내려와 원고 작업을 하려는데 잠이 쏟아져 2시간을 자다가 일어나 PC방으로 이동했다. 8시가 지나서까지 4시간 이상을 작업하고 집에 왔다가 아내와 엊그제 개업한 뚜레주르 제과점에서 신선한 빵을 샀다. 아파트 건너편 코너인데 집에서 가깝고 위치도 좋아 장사가 잘 될 것 같고 우리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 저녁에 제주도에서 올라온 삼겹살로 식사를 하면서 아내와 딸에게 식사는 가급적 천천히 해야 건강이나 보기에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초저녁에 일찍 잠이 들었다가 꿈까지 꾸고 일어나 시계를 보니 12시가 지나고 있고 아내는 아직까지 거실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22일 어제는 처음으로 어머니께서 꿈에 나타나셨다. 꿈속에서 내가 10년 전에 살인사건을 저질러 계속 도피하며 살아오다가 이번에 단서가 잡히어 고민을 하고 있는 중에 어머님이 나타나시어 위로를 했고 나로서는 죄송함과 고마움으로 어머니를 부르다가 잠을 깼다. 이른 아침에 북한산에 가자는 영식이가 우리 집 근처로 온다기에 바쁘게 준비를 했더니 30분이나 지체가 되었고 나중에 자기의 사촌 동생까지 동행하여 우리 아파트에 왔다. 홍제역 풍림아파트 뒤로 거쳐 사모바위에 오르기로 하고 집을 출발했는데 새벽에 뵌 어머니가 선하여 그리움과 뒤숭숭함이 계속되었다. 홍제역에서 5분쯤을 지나 아파트 끝지점을 벗어나려는 순간에 전깃줄 위에 앉아있던 비둘기가 똥을 누어 영식이와 그의 동생이 왕창 뒤집어썼고 나만 무사하였다. 웃음을 참을 수도 없었지만 오늘 어머니의 꿈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닌지 불현듯 생각이 되었다. 시간을 지체하여 12시가 거의 되어 사모바위에 도착했고 가져간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다시 내려왔는데 여름이 온 것처럼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다. 홍제동으로 와서 우럭탕에 식사를 했고 영식이는 운전을 하고 나는 저녁에 수업이 있어서 술은 마시지 않았다. 오늘부터 내가 무면허 기간이라 앞으로 1년간 운전을 할 수 없어 고등영어 선생이 내 차를 몰고 학원에 갔다가 수업을 마치고도 그렇게 돌아왔다. 밤이 깊도록 논술교실에 가서 공부한다는 아들을늦게까지 기다리다가 거실에서 잠이 들었다.
23일 맑은 날씨로 오늘의 낮 기온이 30도를 육박한다니 분명 무더운 여름으로 가는 것 같다. 아침에 현재의 나는 누구인가 2,3년 그리고 10여년 후에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반문해 보았다. 불쑥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도 성취감이 있거나 마음이 편할 때 말이지 지금처럼 할 일이 많고 불안정한 시기에는 이것도 쉽지가 않다. 청소를 하고 원고 작업도 하려고 신설동에 9시경 도착했는데 일정이 많아 원고 작업은 못하고 서점에 가서 책 한 권만 구입했다. 점심 이후에 장원장 전화가 와서 받으니 법원에서 집달관들이 나와 학원을 철거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건물주가 임대료가 미납되어 법원에 명도소송을 했고 해결이 안 되어 법원에서 집행을 하는 것인데 학생들도 걱정이지만 학원의 시설도 아까웠다. 결론은 대화나 금전적으로 해결을 못한 장원장의 책임이지만 시험기일인 내일은 당장 어찌해야 하는지 살다보니 별 일도 다 있고 시간이 없어 내일 학원에 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24일 어제 법원 집달관들이 철거를 시작했다는 경기학원으로 아침 일찍 나갔다. 학원에 들어가니 철거는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고 결과적으로 사전에 알리지 않아 학생이나 선생들만 피해를 보게 되었다. 사업을 하다가 돈이 없어 망한다는 장원장만 탓할 수는 없고 중등부 최선생이 일찍 나와서 길 건너편에 강의실을 얻어 놓았다고 연락이 왔다. 임시로 얻은 어학원에 가서 확인을 하니 책상이나 모든 비품이 초등학생 위주라 불편함이 많을듯한데 당장 급하여 어쩔 수 없이 월 200만 원을 입금하고 4층 전체 3개 강의실을 1개월 임대하였다. 학생들 숫자가 있으니 여기서 1개월을 보내며 새로운 학원을 구상하기로 하고 일단 저녁부터 수업을 하려고 집기와 교재 등을 옮기며 준비하였다. 저녁에 환경의 변화로 수업은 어수선했고 어린 학생들은 장소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들기만 하여 이래저래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25일 어제는 학원 이전과 수업으로 정신없이 보냈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과정이 사소한 일이지만 눈앞의 현실에서는 갈등이나 고민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1개월 계약을 했으니 열심히 운영을 하고 7월 이후에는 새롭게 출발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가 필요할 것 같다. 장원장이 대처를 못하여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학원이지만 그도 어쩔 수가 없었고 누구나 자금의 어려움으로 사업이나 가게를 정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pC방에 가서 며칠 만에 원고 작업을 하고 체육관으로 가서 땀을 흘리며 운동을 마쳤다. 낮에 집으로 들어가 삼겹살로 점심을 먹고 수업은 없는 날이지만 학원이 염려되어 3시경 지하철로 도착했다. 넓고 큰 학원에 있다가 좁고 낡은 강의실에 와 있으려니 답답한 면도 없지 않았는데 다행히 선생이나 학생들은 불평없이 수업을 열심히 한다. 현 임대료는 수강료가 들어오는 대로 받는 조건으로 내가 지불한 것이고 그 대신 고등부는 내가 운영하고 중등부는 최선생이 맡는 것으로 했다. 오늘 근처에 있는 sLs 학원에 가서 3층 강의실 전체 임대나 매매 그리고 합병까지 의논을 했지만 서로 간 이해타산으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오후에 영식이가 이정렬에게 받을 돈을 내가 대신하여 받아 준다는 내용으로 즉 채권자로서 권한을 나에게 일임한다는 채권자변경 서류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저녁에 방배동에 가서 영식이의 모든 채무는 내가 채권자로 나선다는 각서와 차용증을 이정렬을 만나 새로 확인받았다. 낮이 길다보니 어둠이 찾아오면 바로 늦은 시간이 되어버려 오늘도 영식이와 식사를 하고 막차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26일 요즘에는 일을 하는 것인지 놀고 다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내가 살아가는 방향이 어디인가 새벽에 오늘 할 일을 정리하여 보았다. 고향 친구가 복분자를 재배하여 원액으로 만들어 1병에 (패트병:1500cc) 4만원이라며 판매를 부탁하여 나도 2병을 샀지만 영식이는 10병을 구입하여 나의 체면을 살려 주었다. 시골에서는 1병 팔기도 쉽지 않은데 한 사람이 10병을 구입했으니 적지 않은 양이고 아무튼 고향이나 친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셈이다. 오전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특례학생 과외를 하고 1시에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 학원에 갔는데 수업하는 강의실만 3개라서 커피숍으로 내려가 시간을 보냈다. 평일에 하던 고3 수강생들을 주말반으로 보냈더니 평일에는 1,2학년들 수업만으로 한결 시간적인 여유가 많이 생겼다. 나와 함께 다니는 고등부 영어선생과 강사료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는데 서로의 생각이 달라 대립만 생겼고 하지만 관점이 다르니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친한 형제나 친구간에도 금전적임 문제로 감정이 상하고 금이 가는 경우는 언제나 생길 수가 있다. 엊그제 복분자 원액을 판매해 주었더니 고마움의 표시로 고향 친구가 복분자 열매를 6킬로 집으로 보내왔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27일 주말을 맞이했는데 오늘도 더운 날씨에 바쁠 것 같다. 어제 고향에서 올라온 복분자 열매 절반을 영식이에게 주려고 새벽에 방배동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두고 PC방에서 원고 작업을 했는데 진도가 느려 답답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내의 부탁으로 이웃에 사는 학생을 지도했는데 많은 분량을 짧은 시간에 요약하려다 보니 힘이 들고 어려웠다. 12시 30분에 신설동 2층 임대상담을 하러 갔더니 오후 4시에 계약한다고 다시 약속을 정하여 기다리는 중에 며칠 전에 다녀간 사람이 전화도 없이 불쑥 들어와 계약금을 주고 계약서를 작성하자고 한다. 그 동안 비워 두었던 가게를 거의 같은 시간에 두 사람이 동시에 찾아와 계약하겠다니 그것도 드문 일이지만 인연은 따로 있나 싶어 오늘 찾아온 사람에게 전화를 하여 상황을 알리고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서 작성을 마친 뒤에 새로 이전한 학원에 들어가 지난 주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고3 수업을 진행했다. 오늘은 낮 기온이 높아 서울은 32도 경북 영덕은 35도까지 오르는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날이다. 저녁에 집으로 오니 아내는 외식을 한다고 밖에 있고 아들은 현관문을 걸어 잠근 채 컴퓨터를 하고 있어 야단을 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환경이 다른 곳에서 강의를 한 것이나 계약서작성 등까지 신경을 많이 썼더니 스트레스가 쌓였는데 집에 와서도 아들 때문에 밥 먹을 생각도 없어졌다.
28일 새벽 6시에 일어나 pC방으로 가서 원고작업을 이어 나갔다. 머리가 맑아야 원고정리가 잘 되는데 아내가 늦게까지 TV를 시청하고 모기까지 윙윙거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침식사를 하고 논술교실에 올라가 예고학생 시험대비 수업을 마치니 12시가 지났는데 내일부터 장마철이라고 날이 어두워 왔다. 기온과 불쾌지수가 높아 산에 가기도 그렇고 원고 작업이나 하려고 학원으로 나갔더니 중등부 선생들이 시험대비 한다고 강의를 열심히 하고 있다. 공간이 없어 원고 작업은 못하고 초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외식이나 할까하고 집으로 전화를 했더니 아내는 8시까지 수업이고 오히려 딸이 밥을 해 놓았다고 하여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밖에 비가 내리는 중에 영식이는 수락산에 다녀온다고 문자를 보냈고 아들은 학원에서 새벽 1시에 왔는데 긴 시간 붙잡아 두는 만큼 실력 향상이 될지는 의문이다.
29일 거실에서 잠을 잤는데 모기도 있고 열대야도 심하여 고생을 했다. 새벽에 더워서 에어컨을 켜고 잠을 자는데 이번에는 장대비가 쏟아져 시끄러울 지경이다. 아침이 되면서 깊은 잠을 1시간 잤지만 늦게 온 아들 모기와 더위 그리고 빗소리까지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아침식사를 하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와서 점심을 한 뒤에 오후에는 신설동 임차인과 정식계약서를 작성하여 비워둔 호프집 계약을 완료했다. 가게에서의 주의사항과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고 열쇠를 건네주었더니 엊그제 2백만 원에 이어 나머지 보증금 1천3백만 원을 바로 입금시킨다. 임대료는 저렴하게 했지만 권리금으로 5백만 원을 받았으니 그 동안 비워둔 임대료와 모든 공과금까지 상쇄하고도 1백만 원의 이득이 생겼다.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고 1천만 원이 넘는 목돈을 주면서 처리과정을 아내에게 설명했더니 칭찬은 없고 돈 때문인지 표정만 밝다. 아들이 논술교실에 올라가 밤을 새워 공부한다고 늦은 시간에 나가는데 말릴 수도 없고 걱정이 더 많았다.
30일 아들이 밤새 공부를 한다지만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염려되어 자다가 일어나 새벽 1시에 전화를 하니 역시 불통이다. 거실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새벽 3시에 상가로 올라가 밖에서 전화를 하니 창문을 통하여 손을 흔든다. 상가는 오전 6시까지 입구에서 문을 잠가 누구라도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형편이다. 아들에게 열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PC방으로 새벽 3시30분에 들어가 7시가 되기까지 원고 작업을 열심히 했다. 돈도 안 되고 엄청난 시간 낭비를 하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지만 나로서는 결코 낭비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반드시 기록을 남기고 나아가 조선일보의 영광을 안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아침에 집으로 와서 식사를 하고 아들을 태우고 학교에 갔다가 돌아와 이번에는 집에서 원고 작업을 계속 하였다. 점심을 먹고 체육관에 나가서 운동을 마치니 금방 5시가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예고 학생 3차 시험대비 수업을 하는 중에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하루 종일 날씨가 흐리고 습도가 많아 불쾌하게 보내다가 저녁에 영식이를 만나 아구찜에 술을 마셨는데 그래도 낮의 기분과 달라지지 않았다. 밤 11시가 지나 방배동에서 집으로 오는 중에도 컨디션이 좋지 않아 결국 남영동 근처에서 구토를 했는데 6월과 함께 마음의 짐을 던지는 느낌이었다. 내일부터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 시작되어 날이 밝으면 태양은 더욱 뜨겁게 내리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