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諱)는 상충(尙哀)이요, 자(字)는 성부(誠夫)며 성(姓)은 박씨로서 나주(羅州) 반남인(潘南人)이다. 증조부의 휘는 의(宜)니 급제(及第)하였고 조부의 휘는 윤무(允茂)니 진사(進士)며 선고(先考)의 휘는 수(秀)니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밀직공이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김정(金晶)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공이 그 가운데 장남이다. 원조(元朝) 지순(至順) 임신년(1332, 고려 충혜왕 2년)에 공이 공암현(孔嚴縣) 마산리(馬山里)에서 출생하니 성품이 박실(樸實)하고 중후하며 도량이 크고 민첩하였다. 그리고 경전과 역사에 정통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또 시를 잘 지어 재명(才名)을 크게 떨쳤다. 지정(至正) 계사년(1353, 공민왕 2년)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니 사람들은 모두 공이 장원할 것으로 기대하고 공 또한 자부하였다. 막상 과거 방문(榜文)을 쓰는데 공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아 시관이 자못 놀라 낙권(落卷)을 찾아보았으나 찾지를 못했다. 사람들은 이 일이 반드시 공과 명성을 다투는 자의 소행일 것이라고 하였다. 밀직공이 기뻐하지 않으며 “너는 내게 불효를 저질렀다”고 하니 공이 “진사(進士)는 향역(鄕役)을 면하고자 하는 자가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일 뿐이고 사족(士族)이 찬양하고 부러워하는 것이 되지 못하니 저는 장차 바로 과거에 급제를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 해 을과(乙科) 제이인(第二人)으로 급제하니 밀직공이 기뻐하며 “효성스럽다. 내 아들이여”라고 하였다. 다음해에 성균관으로 들어가 학유(學論)가 된 뒤 세 번 자리를 옮기더니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었다. 무술년에는 상서도사(尙書都事)로 옮겼고 신축년에는 대부시승(大府寺丞)으로 승진하니 품계는 선덕랑(宣德郎)이었다. 임인년에는 봉거서령(奉車署令)으로 옮겼고 계묘년에는 전의주부(典儀主簿)에 제수되었는데 품계는 모두 승봉랑(承奉郎)이었으며 다시 전교시승(典校寺丞)에 임명되어 예복을 하사 받았고 품계는 조봉랑(朝奉郎)이었다.
그해 가을 7월에 지금주사(知錦州使)로 나가서 삼 년 만에 치적(政績)이 이루어졌고 을사년 2월에는 들어와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보임되었다가 판관으로부터 예의정랑(禮儀正郎)이 되고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하였으니 품계는 모두 통직랑(通直郎)이었다. 이 때가 정미년 12월이다. 전해 병오년에 국학(國學)을 마암(馬巖) 북쪽으로 옮기니 이에 이르러 공자 사당과 학사(學舍)들이 이루어졌다. 경전에 정통한 명유(名儒)들을 뽑아서 다른 관직과 함께 학유(學諭)를 겸직하게 하여 인재를 교육하고 문치(文治)를 진작시켰는데 공이 맨 먼저 뽑혔고 그 후로는 매 관직마다 반드시 성균관 직책을 겸하였다. 기유년에는 정랑(正郎)에서 뽑혀 조열대부(朝列大夫) 성균사예(成均司藝)가 되었다. 명 홍무(洪武) 신해년(1371, 공민왕 20년 )에 중의대부 태상소경 보문각응교(中議大夫太常少卿寶文閣應敎)에 제수되었고 임자년 겨울에는 봉상대부 전리총랑(奉常大夫典理摠郎)이 되었는데 모두 성균직강(成均直講)을 겸하였다. 계축년 가을 7월에는 어머니 상을 당했고 이해 12월에는 다시 중현대부 전교령(中顯大夫典校令)으로 승진하였다. 고려 말에는 부모의 상에 백일이 되면 상복을 벗고 벼슬에 나아갔는데 공은 어버이에게 차마 박하게 하지 못해서 삼년상의 제도를 따르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직책을 맡았던 것이다. 그래도 육식은 하지 않고 삼년을 지냈다. 사예(司藝)에서 전교령(典校令)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갑인년 겨울에는 지왕부인(知王府印)으로 들어가서 국정에 참여하여 등용한 인재가 많았는데 모두 당시의 명현이었다.
을묘년 4월에는 판사 우문관직제학(判事右文館直提學)이 되었는데 품계는 봉순대부(奉順大夫)를 더하였다. 그 전해 가을 9월에는 나라에 큰 변이 있었고 그해 겨울에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무신 김의(金義)에게 그 일행을 호위하여 국경을 나가게 하였다. 김의가 압록강을 건너자 사신을 마음대로 죽이고 북쪽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였고 바로 남쪽 명을 섬기자는 논의와 북쪽 원을 섬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머뭇거리고 결정하지 못했는데 공이 순역(順逆)의 의리와 화복(禍福)의 기미를 환하게 보고 드디어 글을 올려 남쪽 명나라를 섬기는 것이 순리에 맞고 종사와 백성들에게 복이 된다고 힘을 다해 역설하니 그 말이 매우 충직하고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화를 입고 돌아가시니 향년 44세요 때는 을묘년 가을 7월 5일이었다.
공의 덕행과 문학(文學)은 당시 인사들이 모두 받들고 복종하였으며 또한 정사(政事)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무릇 국가의 제사지내는 시기는 다 예의사(禮儀司)가 주관하여 정하는 것이나 제사 의례를 기록한 책이 어지럽고 순서가 없어 여러 번 포고하는 시기를 잃었다. 예무(禮務)를 관장하는 관원들이 모두 살펴 바로잡아 예전(禮典)을 개정하려고 했지만 해내지 못했다. 공이 예무(禮務)를 담당하자 옛 전적을 참고해서 앞 뒤 순서에 따라 편차하여 서책을 만들어두니 그런 후로는 이 책에 의거하게 되어 착오가 없었다. 임효선(林孝先) 선생이 예무(禮務)를 행할 적에 나를 보면 공의 공로를 칭송하여 “박선생이 만든 책이 없었더라면 내 어찌 예무(禮務)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정통한 정도가 대개 이러했던 것이다. 전조(前朝)에서는 인재를 선발함에 미리 지공거를 임명하였는데 기유년에 와서는 옛법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대로 하여 시험 하루 전에 주문(主文)과 고시관(考試官) 등이 비로소 임명되었기 때문에 출제하기가 어려웠다. 갑인년 봄에 과거 시험 때에 동정(東亭) 염선생(廉先生, 염흥방)이 사적으로 어떤 이에게 “박상충과 정몽주가 아니라면 누가 출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 동정공이 그해 주문(主文)으로 임명되고 이 두 공이 고시관이 되니 공의 문장이 존중 받음이 이와 같았다.
공이 가정에서는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국가에 있어서는 충성스럽고 의로웠으며 관직을 맡을 때는 부지런하고 삼가해서 가는 곳마다 치적이 있었다. 한가로이 있을 때는 반드시 책을 읽고 재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공이 서거하자 나라 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사림은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공은 가정(稼亭) 선생 이문효공(李文孝公)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으니 모두 어려서 아직 이름이 없었다. 부인은 공보다 일 년 전에 작고하여 송도(松都)의 동문 밖에 장사지냈는데 공이 돌아간 뒤에 부인 묘의 남쪽에 장사지냈으니 송림현(松林縣) 제비현(齊飛峴)이다. 그 후에 자녀가 장성하여 딸은 안성지사(安城知事) 김기(金芑)에게 출가하여 좋은 처가 되었고, 아들 은(訔)은 어려서 독서할 줄 알더니 16세에 을축과(乙丑科)에 진사로 합격했는데 밀직제학(密直提學) 윤취(尹就)가 시관이었다. 19세에는 다시 무진과(戊辰科) 회시(會試)에 3등으로 합격하고 전시(殿試)에 5등으로 급제하였는데 삼봉(三峯) 정선생(鄭先生)과 양촌(陽村) 권선생(權先生)이 주문(主文)이었다. 급제한 뒤에 여러 번 높은 지위에 올라 내직으로는 대성(臺省)의 이조 병조의 직책을 지냈고 외직으로는 주목사(州牧使) 관찰사를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위엄과 은택이 있었다. 무인년 가을에는 정사(定社)의 계책에 참여하여 결단하였고1) 경진년 겨울에는 좌명(佐命)의 공훈을 세워2) 반성군(潘城君)으로 봉해졌다. 건문(建文) 신사년(정종 원년)에는 공신이 되어 선친은 특별히 숭정대부 문하시랑 찬성사 판호조사 수문전학사 지춘추관사 반남군(崇政大夫門下侍郎贊成事判戶曺事修文殿學士知春秋館事潘南君)에, 선비(先妣) 이씨는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에 추증되었다.
이제 주현(州縣)을 통폐합하는 정책으로 인하여 반남(潘南)이 나주(羅州)로 합쳐졌기 때문에 반성군(潘城君)에서 금천군(錦川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금천군은 처음 노씨(盧氏)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었고 다시 주씨(周氏)에게 장가가니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따님이다. 이 부인은 여경택주(餘慶宅主)에 봉해져서 특별히 전답 30결과 노비 약간 명을 하사받았다. 금천군은 딸 몇 명과 아들 몇 명을 낳았는데, 큰딸은 윤구(尹救)에 출가하니 바로 시관(試官) 제학공(提學公)의 아들이고 나머지 딸들은 출가하지 않았다. 장남 모(某)는 학문을 시작했고 차남 모는 아직 어려서 학문을 배우지 못했으며 외손이 약간 있다. 사위인 안성지사(安城知事)는 딸 몇 명과 아들 몇 명을 낳았는데 큰 딸은 내시별감 전사복직장(內侍別監前司僕直長) 김윤덕(金潤德)에게 출가하고 나머지 딸은 출가하지 않았으며 장남은 혼(渾)이고 차남은 어려서 아직 이름이 없다.
아아, 하늘이 영재를 태어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그 인재가 쓰이기를 기약한다. 그러나 쓰이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또한 사람에게 달린 것이기에 사람에게 신임을 얻어 쓰이면 몸이 복록을 누리고 백성이 이익을 얻고, 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해서 버려지면 몸은 비록 곤궁해도 자손은 그 음덕에 의지하게 된다. 공의 자손이 번성하고 문벌이 빛나는 것을 보면 하늘의 뜻이 공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석하도다, 공의 재주와 덕성이 세상에 크게 쓰이지 못하여 이 백성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함이여. 그렇다면 하늘에는 얻고 사람에게 잃었던 일이 또한 공에게 무슨 한이 되겠는가. 공이 내게는 처남이라 공을 잘 알기로는 나보다 나은 이가 없기에 금천군이 내게 행장을 요청하니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어서 삼가 그가 관직을 역임하며 했던 일과 의를 실천하고 문장을 짓던 일의 실상을 취해다가 그의 행장으로 삼는다.
태종 13년 계사년 4월에 전통훈대부 사간원직사간 보문각직제학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前通訓大夫司諫院直司諫寶文閣直提學知製敎兼春秋館編修官) 유백유(柳伯濡) 지음.
첫댓글 문정공 상충 선조님에 관해 알려진 사실들이 그리 많지않는 상황이라 가까운 분이 쓰신 행장이라 귀한 글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문정공 선조의 행장을 지으신 분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감찰공 선조의 고모부이신 저정 유백유 선생께서
지으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문정공 선조의 행장 전문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을 보람있게 생각합니다.
운영자님께서 관심을 보여 주시고 좋은 댓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4년 6월 5일(수)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