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수
2003년 04월 06일
나는 누구인가?
고린도전서12:22-27
2003. 4. 6 설교방송 (설교본문)
나는 누구인가?
고린도전서12: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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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4시가 되도록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며 술을 마시는 사람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해 보았으면 좋겠네.’라고 부러워한다면 그 집사님은 집사님이 아니라 잡사님일 것입니다. 잡사님은 아닐지라도 신앙에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믿음이 좋은 신앙인은 새벽 3시, 4시까지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는 사람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야 합니다.
콩을 먹으며 그 구수한 맛을 즐기는 비둘기는 썩은 고기를 파먹는 독수리를 절대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인도를 따라 좋은 초장에서 꼴을 먹고 맑은 냇가에서 물을 마시며 목자의 보호 아래 평화롭게 쉬는 양은 사냥해서 토끼를 잡아먹고 산돼지를 잡아먹는 사자가 부럽지 않습니다. 양은 꼴을 먹고 물을 마시면 만족해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을 부러워하며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저것도 못하고….’하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축복을 감사하며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수준의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즐기고 주님의 은혜를 즐기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제일 큰 기쁨(delight)은 말씀에 있습니다.
시편 1편 2절에 복 있는 사람, 주의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영어 성경에는 『…his delight is in the law of the Load, and on his law he meditates day and night.』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의 기쁨이 말씀에 있고 그는 낮과 밤으로 말씀을 즐기고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즐거워하는 것이 많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또 돈 벌 때 기쁘고 ….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즐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장 큰 기쁨, 가장 큰 축복은 역시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절정, 우리 기쁨 중의 클라이맥스가 주일에 드리는 예배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야! 참 좋다. 교회가 역시 좋다.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교회가 좋구나.’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돈을 잘 벌면 그 돈을 셀 때의 기쁨이 크지만, 그 기쁨보다 말씀을 듣는 것이 백 배로 좋다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교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그런 행복을 느끼는 시간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누가 부자 되기를 싫어하겠습니까? 누가 자식 잘 되는 것을 싫어하겠습니까? 누가 좋은 집을 싫어하고 좋은 자동차를 싫어하겠습니까? 누구나 다 좋은 집, 좋은 자동차, 자식 잘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돈을 좋아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무척 원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싶은 것이 그 손년의 꿈에도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습니다. 게다가 물고기를 많이 잡지도 못했습니다.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잘 사는 것이 꿈에도 소원이었지만, 부자가 되는 길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하루도 해가 지도록 물고기를 잡았지만 잡힌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달이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터덕터덕 걷고 있는 소년의 발에 무언가가 걸렸습니다. 살펴보니 자루가 하나 있는데 그 안에 돌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심술궂은 사람이 길가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려고 자루에 돌을 넣어두었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은 주저앉아 자루에 있는 돌을 꺼내어 하나씩 하나씩 깊은 강물에 던지며 “아!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하는데, 언제 부자가 되나?”라고 중얼거렸습니다.
이제 마지막 돌 하나가 남아서 그것을 던져 넣으려고 하는 순간 구름 속에 가리어 있던 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소년의 손에 있던 돌이 번쩍거려 자세히 보니 돌이 아니라 황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황금 중 소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개뿐이었습입니다. 부자가 되기를 그토록 소망했던 소년이 그 많은 황금을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입니까? 캄캄하니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황금과 돌의 가치가 천지 차이지만 빛이 없으면 분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장미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순결한 흰장미도 아름답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붉은 장미는 더 매력적이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캄캄한 밤에는 붉은 장미도 소용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붉은 장미라도 빛이 드러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참 빛이신 하나님의 빛 가운데 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 하늘에 별들이 왜 수놓아져 있는지, 바다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 이 세상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해서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낙엽이 지는지를 모릅니다. 철학박사라도 사람이 언제부터 생겨서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를 모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모릅니다. 철학 박사라도, 생물학 박사라도, 어떤 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사람이라도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답이 없습니다.
심지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낫 놓고 기역을 모르는 할머니, 지게 놓고 A를 모르는 할머니라도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빛 가운데로 나오기 때문에 저 별도 바다도 꽃도 이 삼라만상을 우리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달걀이 먼저 아니라 닭이 먼저인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닭부터 지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내가 누구인가(Who am I)?’를 예수님을 믿는 할머니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피조물 중 최고의 존재인 것을 압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공부를 해도, 생물학 박사가 되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윈의 학설처럼 원숭이가 진화되어서 사람이 되었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민이 될 것입니다. 원숭이가 우리 사람의 조상이라면 지금 사람이 다 되어 가는 원숭이가 있어야 하고, 원숭이 사는 모습이 사람과 비슷해야 합니다. IQ도 원숭이와 사람이 비슷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회의장이 사람이라면 국회의원 중 몇 명은 원숭이가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학교 교장 선생님이 사람이라면 선생님 중 몇 분은 원숭이라야 합니다. 사람인 우리가 종합병원을 지어 놓고 사니 원숭이는 마을 병원이라도 지어 놓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대학교를 지어 놓고 교육을 하니 원숭이들은 초등학교라도 지어 놓고 교육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파트를 지어 놓고 사니 원숭이들은 초가집이라도 지어 놓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숭이에게는 초가집 지을 아이디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만 창의력을 주시고, 시를 쓰고 노래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람과 다른 동물은 아예 씨가, 종자가 다릅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은 이것을 휑하니 아는데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사람이 어떻게 해서 생겼고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니 허무합니다. 그래서 그냥 하숙생 노래나 부르다가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
구름이 떠돌다가 바람 따라 흘러가듯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세월 따라 그냥 흘러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과 나를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뿐 아닙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제가 비행기를 자주 타서 마일리지가 많이 누적되어 있으니, 제가 늘 이코노믹 클래스를 타고 다니지만 비행기 회사에서 저를 업그레이드 시켜 비즈니스 클래스에 태워 줍니다. 그러면 의자도 크고 편안하고 비행기에서 내려도 어지럽지 않아서 비행기에서 내린 후 바로 설교해도 괜찮습니다.
우리 사람은 모든 짐승보다 귀합니다. 새보다 물고기보다 우리 사람이 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으면 업그레이드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시골 처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에 드니, 어제까지 시골 처녀였던 에스더가 오늘 왕비가 됩니다. 어제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어도 오늘 예수님을 믿으면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라고 성경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한국 시민권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권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보증해 주는 국민이라는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외무부 장관이 ‘이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귀국에 갈 때 잘 봐 주십시오.’하고 보증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느 나라에 가든 그 나라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봐서 우리를 대접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미국 시민권자는 어느 나라에 가든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요즘에는 테러 때문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러시아 우리 교회 선교사님도 미국 시민권자이니 러시아 정부가 도와주고 시장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시민권이 천국에도 있습니다. 할렐루야!
빌립보서 3장 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하늘에 우리의 시민권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 결국엔 3차 전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땅이 불타게 됩니다.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살 수 없습니다. 북한이 우리 나라를 공격하지 않아야 되고 일본이 우리 나라를 공격하지 않아야 되지만, 성경을 보면 이 지구촌에 3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불바다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날이 옵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비명을 지르면 안 됩니다. 놀라면 안 됩니다.
‘아, 성경대로 되는구나.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구나. 이제 지구의 생활을 접고 천국 시민권을 갖고 천국에 가서 살아야 되는구나.’하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 됩니다.
제가 첫 목회를 할 때 그 마을에 컬러 텔레비전이 있는 집이 저희 집뿐이었습니다. 다른 집에는 컬러 텔레비전이 없었을 때 저희 집에는 컬러 텔레비전이 있었으니 저희가 얼마나 부자였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월부로 샀었습니다. 어느 목사님과 장로님이 오셔서 팔아 달라고 해서 월부로 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학교 부장 집사님이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요즘 은하철도 999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컬러 텔레비전을 주일마다 교회에 갖다 놓으면 마을의 아이들이 다 모일 것입니다. 그것을 한 시간 보여 주고 예배를 드리면 전도가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정말 아이들이 400명이나 모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은하철도 999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주를 여행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천국 열차 999를 타고 천국으로 우주 여행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언젠가는 불타고 끝나는데 그때 우리는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천국열차 999를 타고 천국으로 우주 여행을 가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 건너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낙원 있네
믿는 이만 그 곳으로 가겠네
저 황금 문 들어가서 주와 함께 살리로다」할렐루야!
전쟁이 터지고 불이 나서 이 지구촌이 다 끝나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것이 우리입니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우리는 천국 시민권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더 진한 놀라운 말씀이 계십니다.
‘내가 누구인가(Who am I)?’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You are the body of Christ).’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나는 주님의 몸이다.”
지난 주에 제가 이 말씀을 읽다가 흥분했습니다. 이 천하고 무능하고 죄 많은 제가 주님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너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5절에도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었으니 얼마나 귀합니까? 주님께서 사용하시면 물건도 귀해지는데 말입니다. 미국에서는 링컨이 사용한 지팡이를 국보로 여깁니다. 링컨의 연설문과 일기장, 편지를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합니다. 링컨의 책상과 의자도 얼마나 귀하게 보관하는지 모릅니다. 귀한 분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귀하게 되어서 우리가 사용한 물건도 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귀하면 그 사람이 만진 것도 다 귀하게 생각됩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 오신 목사님은 제가 오늘까지 만난 목사님들 중에서도 경건이 뛰어나고 마치 유리처럼 맑은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제 방에서 양치질을 하셨는데 그때 사용하신 칫솔을 놓아두고 가셨습니다. 다른 손님들이 칫솔을 놓아두고 가시면 제가 그냥 버리는데 그분의 것은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너무 귀하니 그분의 칫솔도 그냥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같은 칫솔이라도 귀한 사람이 사용하면 귀하고, 더러운 사람이 사용하면 더럽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얼마나 귀하겠습니까?
그 더러운 십자가, 사람이 처형당하는 더러운 십자가를 주님께서 사용하시니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누우시니 마구간도 거룩한 마구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시니 시골 베들레헴이 거룩한 베들레헴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니 사람들이 나귀 앞에 겉옷을 깔아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만 되어도 이렇게 귀한데, 하물며 주님의 몸이겠습니까?
‘You are the body of Christ.’
우리는 주님의 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업그레이드 될 수가 없습니다.
변호사이던 노무현 대통령께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떨어졌다가, 또 이렇게 저렇게 왔다갔다하며 어려움을 겪다가 대통령이 되셨으니 사회적으로 가장 업그레이드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통령이 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대통령이라도 예수님이 없으면 불쌍한 나그네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예수님만 믿으면 주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천국 시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가도 값싸게 행동하면 안 됩니다.
내가 비록 월셋방에서 살아도, 내가 비록 형편이 여의치 못해 차 없이 걸어다녀도 우리는 값싸게 행동할 수 없는 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주님의 몸인데….’ 하며 주님답게 살며 주님답게 말하고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시골 처녀 에스더가 왕비가 되니 그 날부터 왕비처럼 걸었습니다. 왕비가 된 후에도 시골 처녀처럼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에 물 길러 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왕비가 되고 대통령의 부인이 되었으면 왕비답게 대통령의 부인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제까지는 아무리 형편없이 살았어도 오늘 예수님을 믿었으면 이제 주님의 몸답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9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darkness)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light)이라 빛의 자녀들(children of the light)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우리 생활에 착함이, 의로움이, 진실함이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거짓말하고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의하고 더러우면 그것은 주님의 몸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귀하게 살아야 됩니다.
귀하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십니다.
충청도의 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너무 약하니 장로님들이 사모님에게 가정부를 보내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정부가 ‘나는 목사님 댁의 가정부다.’하고는 목사님을 위해, 교인들을 위해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고, 살림을 얼마나 알뜰히 살뜰히 사는지, 사모님이 그만 반해서 가정부를 딸 삼았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귀한 집의 아들과 중매를 해주었습니다. 그 가정부가 지금 서울의 재벌 장로님 부인이 되어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 원장 집의 가정부도 집이 너무 가난하여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집에 들어왔지만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니 가정부로서 귀하게 살아야지.’하며 주인을 잘 섬겼습니다. 청소도 잘 하고 빨래도 잘 하고 밥도 잘 짓고 품위를 지키며 살았습니다. 아름다운 그의 모습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 집의 아들이 반해서 청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가정부가 병원 원장 집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나왔든 안 나왔든 말씀대로 귀하게 살면 어디에 가도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면 우리의 삶이 귀해집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4장 8절에 말씀하십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너를 높이 들리라』
우리가 주님을 높여 드리려고 주님 몸으로 살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본문 22절에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약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요긴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에 붙어 있는 우리, 주님의 지체인 우리는 주님에게 다 요긴합니다.
눈에 보이는 손과 발과 눈도 요긴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간, 심장, 폐, 위, 신장이 얼마나 요긴합니까? 만일 심장이 멈추어 보십시오.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내게 요긴하듯 교회에서 잘 보이는 목사님, 장로님, 어느 부서 부장님, 중간 지도자만 요긴한 것이 아니라 이름 없이 숨어 있는 것 같은 사람들도 다 요긴합니다. 노인들도 요긴합니다. 교회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시면 일을 많이 못한다고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계신 교회가 영성이 좋습니다. 교회가 뜨겁고 훈훈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기도를 많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청년들만 요긴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도 요긴합니다. 코흘리개 아기도 하나님 앞에 요긴한 존재입니다.
본당만 있고 부속 건물이라고는 조그마한 창고 하나밖에 없는 한 작은 교회가 있었답니다. 부속 건물이 없으니 교회학교가 따로 없었는데 뜻 있는 한 분이 창고를 손 봐서 교회학교를 열었답니다. 그런데 마을의 아이들이 거의 다 몰려와서 그 작은 창고에는 삼분의 일도 들어갈 수 없었답니다. 할 수 없이 아이들에게 번호를 주어 이번 주일에는 1번부터 50번까지, 다음 주일에는 51번부터 100번까지, 또 다음 주일에는 101번부터 150번까지, 이렇게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기로 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답니다.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 중 한 여학생이 자기 차례만 기다리다가 교회에 예배드리러 오라는 소식을 듣기 전에 병들어 죽고 말았답니다. 그런데 그 여학생의 베개 밑에 목사님께 보내는 유서가 있었답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를 원했는데 교회가 너무 작아서 교회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제 차례만 기다리다가 부름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죽습니다. 제가 먹고 싶은 것도 사먹지 않고 모아 놓은 돈 57센트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돈으로 큰 교회를 지어서 우리 마을의 아이들이 다 함께 예배드리게 해 주세요. 제발 큰 교회를 지어 주세요.’
목사님이 울면서 그 유서를 읽었답니다.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과 온 교우들이 모두 뉘우치고 헌금을 하여 큰 교육관을 지어서 온 동네 아이들을 다 불러모아 예배를 드렸답니다. 그 후로도 여학생이 드린 57센트 헌금의 뜨거움이 퍼져 모두 분발하니 템플 교회가 되고, 그 교회에서 대학까지 세웠습니다. 그 학교가 바로 템플 대학입니다. 또 극빈자를 무료로 치료해 주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 병원도 세웠습니다. 작년에 미국 우리 교회 목사님이 급한 병으로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비가 수천 불이 되어 걱정을 했는데, 목사님이라고 했더니 치료비 전액을 하나도 받지 않더랍니다.
한 작은 여학생의 헌신이 이렇게 큰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요긴하고 할머니도 요긴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면 부담이 됩니까? 아닙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지혜와 기도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분들을 통해 축복하십니다.
어느 집의 두 살 먹은 아이가 무서운 감기에 걸렸는데, 의사 선생님이 페렴이 될 염려가 있다며 약을 주었습니다. 꼭 그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아이가 절대로 먹지 않으려 했습니다. 엄마가 “얘야, 약을 먹어야 네가 건강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나. 그러니 어서 입을 벌려라.”하며 아무리 달래도 아이가 입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속상한 엄마가 약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침대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그런데 몇 분 후, 깔깔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이상해서 엄마가 아이 있는 곳으로 가 보았더니, 할머니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감기 약을 오렌지 주스에 타서 물총에 넣어 가지고 입에 대고 물총을 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너무 재미있어 입을 벌리고 그것을 다 받아먹으며 깔깔대었던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엄마는 그 방법을 몰랐지만 대학을 다니지 않은 할머니는 알았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십시오. 우리 교회에서 제일 약해 보이는 분이 누구입니까?
황옥녀 권사님입니다. 황옥녀 권사님은 20여 년 동안 구역장회에 나오고 계시지만, 구역장은 하지 못하시고 늘 부구역장만 하십니다. 권사님 이름을 부르면 대답만 겨우 하시지, 공중 기도도 못하십니다. 공중 기도를 하라고 하시면 아마 심장마비로 돌아가실지 모를 정도로 약하십니다.
그러나 그 약한 분이 얼마나 큰 일을 하시는지 모릅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집안 식구를 얼마나 많이 구원했는지 모릅니다. 황옥녀 권사님이 전도하신 집안 사람들 중에서 장로님이 나오고 권사님이 나왔습니다. 또 병원의 의사, 간호사 등 얼마나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스님을 만나면 전도하기 미안해서 가만히 있을 때가 많은데 권사님은 따라가면서 전도합니다.
“스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아, 나 중이오.”
“그래도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스님에게는 전도하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황 권사님은 그래도 전도하십니다.
우리 교회에서 제일 약한 분이 황 권사님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제일 강하십니다. 기도꾼이고 전도를 제일 많이 하십니다.
혹 여러분 중에서 ‘나 같은 것이 뭐 우리 교회의 일꾼이겠나?’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귀하고 요긴한 일꾼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 세포가 삐딱해지면 암이 됩니다. 여러분 중에 암세포가 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에 순종합시다. 일합시다.
한 유명한 성서학자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손 없이 일할 손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발 없이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발이 없으시고
하나님은 우리 입 없이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입이 없으시다.'
내 손이 아니면 주님께서 일을 하지 못하시고, 내 발이 아니면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러 가지 못하시고, 내 입이 아니면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언제나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입의 말 한 마디로도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대개 무당은 여자들이 하는데, 예전에 서울 장안에서 제일 유명한 무당은 백 무당이라는 남자 무당이었답니다. 그 무당이 얼마나 신통한지 무당 사업이 잘 되었답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굿을 하고 있는데 굿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 곳을 지나가시던 전도사님 한 분이 “여보시오, 자식 망할 짓 하지 말고 예수 믿고 자식 잘 되게 하고 천당 가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백 무당이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서 말했습니다.
“너나 예수 믿고 천당을 가든 백당을 가든 해라. 왜 남에게 예수 믿으라 마라 하느냐?”
그리고는 굿판을 엎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자식 망할 짓 하지 말고 예수 믿고 자식 잘 되게 하고 천당 가라’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무당 자녀도 예수님을 믿으면 잘 되겠지만, 사실 무당 자녀가 잘 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무당이 6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리고 그 자녀들에게 “너희 아버지 뭐하시니?”하고 물으면, “우리 아버지가 무당입니다.”라고 대답할 때 그 자녀들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전도사님의 말을 듣고 고민하던 백 무당이 결국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을 하시고 연세대학교를 빛내신 분, 교육부장관과 문교부장관도 하신 한국의 교육에 빛을 발하신 백낙준 박사님의 아버지가 무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구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지나가면서 “예수 믿고 자식 잘 되게 하고 천당 가시오.”라고 던진 그 말 한 마디가 그 사람을 구원하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입의 말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내가 입을 닫으면 그 사람이 죽고 내가 입을 열면 그 사람이 산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예수님을 대행하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되었으니 서로 분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칼을 들고 내 발등을 찍으면 안 되는 것처럼, 박 장로님이 노 장로님을 공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내 손으로 내 뺨을 치는 바보는 없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8절에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에서는 결혼식을 하고 나면 첫날 밤에 신혼부부가 특별한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그 문을 봉해서 사용하지 않고 다른 문을 사용합니다. 아내나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그 문을 사용하지 않는데, 그것은 결혼한 부부는 한 몸이니 죽기 전까지는 헤어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결혼은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여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를 생각해야지, 어떤 상황에서든 이혼을 생각하면 그것은 벌써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결혼해서 한 몸이 된 부부는 이혼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 것만 연구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번 이혼하면 삼혼, 사혼도 하게 되니 이혼은 아예 생각을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이혼은 생각을 말자.”
정말 그래야 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를 바로 세워야 됩니다. 부부가 이혼하면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 사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부간에 싸우는 것은 자기 몸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싸우면 안 됩니다. 다투면 안 됩니다. 절대로 다투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한 몸이니 절대로 다투면 안 됩니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감독 존 휴스턴은 인간 관계의 천재입니다. 적이 없고 모든 사람과 친구처럼 잘 지내는 그는 인간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았습니다. 미운 사람이라도 이해하면 친구가 된다는 사실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이들에게 “너희는 그 누구도 비판하지 말고 적을 만들지 말아라.”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그의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난 반 고흐의 작품은 정말 질색이야.”
“너 그게 무슨 말이니? 반 고흐의 작품은 다 질색이라고?”
“예.”
“그래, 말해 봐라. 반 고흐의 작품이 몇 개나 되고, 그의 작품이 뭐가 어떻게 좋지 않아서 네가 그렇게 질색하는지 한 번 설명해 보아라.”
딸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이 다른 사람에게 듣고 그런 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반 고흐를 모르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얘야, 그 사람을 모르거든 비판하지 말아라. 반고흐가 얼마나 훌륭한 화가인데 그런 말을 하니?”
미운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 사람을 잘 알면 그 사람에게서도 매력을 찾을 수 있고, 그 사람도 주님께 붙어 있는 주님의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몸이듯이 그 사람도 주님의 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분쟁하는 일이 없기를 축원합니다. 꿈에도 없기를 축원합니다. 제직회를 할 때도, 남녀 선교회의를 할 때도 웃음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화목을 깨면 그 말은 마귀의 말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예수님께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드리니 거룩한 향기가 진동을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위기를 깨뜨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 이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라고 가룟 유다가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께 서너 방울만 떨어뜨려도 되는데 병째로 깨어 향유를 다 부어드리는 것은 낭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마귀의 말입니다. 의로운 말이라도 교회의 화목을 깨면 그것은 마귀의 말입니다.
교회가 화목하지 못하면 이미 마귀의 밥이 된 것입니다.
왼손의 검지를 한 번 내어보세요. 이제 오른 손가락 두 개로 왼손의 검지를 꽉 잡아 보세요. 그런 다음에 왼손의 검지를 뽑아 보세요. 모두 잘 뽑힐 것입니다. 이제 세 손가락으로 꽉 잡은 다음에 뽑아 보세요. 이번에도 잘 뽑힐 것입니다. 이제 네 손가락으로 잡은 다음에 뽑아 보세요. 역시 잘 뽑힐 것입니다. 다섯 손가락으로 꽉 잡은 다음에 뽑아 보세요. 뽑힙니까? 잘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뽑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에 땀이 난 사람일 것입니다.
다섯 개의 손가락 중에서 네 개가 합하고 한 개만 따로 있어도 안 됩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하나 되어야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뭉쳐야 삽니다. 국론도 하나 되어야 나라가 삽니다.
요즘 학생들이 반미 운동을 하는데 그러면 안 됩니다. 과거를 알아야 됩니다. 미국이 아니었으면 우리 나라가 일본의 압제 하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6・25때 우리 나라가 빨갛게 공산화될 뻔했는데 미군의 도움으로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미군이 3만 명 죽은 줄 알았는데 5만 명이 죽었답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 때는 우리 정부 예산의 95%를 미국에서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차는 2만 대인데 우리는 미국으로 60만 대를 수출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수출하는 차의 60%를 미국으로 수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마운 나라에 대해 반미 감정을 가지면 안 됩니다. 따질 것은 따져야 하지만 다른 것까지 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투자하는 것은 미군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군이 철수하고 나면 위험한 우리 나라에 투자를 하는 외국인들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친미니 반미니 하는 것이 있으면 안 됩니다. 부모님이 혹 잘못하셔도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부모님을 섬겨야 하듯 미국은 우리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나라였다는 것을 생각하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구나 미국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워서 우리가 이렇게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미국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은 정당하게 따지고 요구하되 그것으로 반미 운동을 하는 것은 잘못하는 일입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바른 판단을 하고 우리 겨레가 바른 판단을 해서 우리 나라가 망국으로 가는 길이 없기를 바랍니다.
뭉치면 살고 분쟁하면 망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미래를 모르고 분쟁하면 안 됩니다. 하나가 되어야 나라가 삽니다.
가정도 화목해야 승리합니다. 가화만사성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딴 살림을 하면 그 집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산의 어떤 교회가 전국이 알도록 싸웠습니다. 총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을 그 교회에 가시게 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의 말씀에는 그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종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교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간곡하게 부탁하셨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하나가 되십시오.”
그러나 그분들이 한경직 목사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계속 우셨답니다. 그 교회가 한경직 목사님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고 한국 교회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소문이 이렇게 아름답게 퍼지고 있지만, 장로님들끼리 싸워 보십시오. 아름다운 소문이 끝나고 한국 교회에 걱정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화목을 깨는 사람은 마귀입니다.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말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지체가 된 우리는 한 공동체입니다.
내 손목에 수갑을 차면 손목에만 수갑을 찼지만 온 몸이 수갑을 찬 것처럼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왕관을 쓰면 머리에만 썼지만 온 몸이 빛이 나게 됩니다. 길을 가다 발에 큰 가시가 찔리면 온 몸이 절뚝거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갈 때 발이 가지만 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우리가 다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교회의 한 장로님이 스캔들을 일으켜서 그것이 방송에 나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인들이 다 부끄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카터 같은 사람, 링컨 같은 사람이 나와 보십시오. 온 교회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한 지체가 영광스러우면 교인 모두가 즐거운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록펠러 같은 재벌이 한 사람만 있어도 칠만 개의 의자를 놓을 수 있는 큰 교회를 짓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큰 교회에서 누가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록펠러는 미국의 유수 대학에 다 교회를 세웠을 뿐 아니라 장학 사업도 많이 했으니 록펠러 같은 사람이 나오면 우리 교회 식구들을 다 기르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 팽진섭 선생님이 좋은 국회의원이 되면 우리 모두 얼마나 좋겠습니까?
교인들이 잘 되면 교회에 영광이 되고, 교인들이 잘못되면 교회가 부끄럽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서로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 주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것으로 충성하며 살면 우리 미래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주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내 위가 배고파도 괜찮습니다. 배고픈 것만 알려 주면 내가 ‘비빔밥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를 결정하여 먹입니다. 겨울 추위가 오면 내가 발에는 겨울 양말을, 손에는 장갑을 끼웁니다. 내 몸은 내가 보호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몸이니 주님께서 우리를 살피시고 보호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내일과 미래를 영원히 책임지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 할렐루야!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가다가 한 아이가 막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얘야, 이 공동묘지에서 이렇게 뛰어 다니며 놀다니, 무섭지 않아?”
“뭐가 무서워요. 하나도 안 무서워요.”
“왜 안 무서워?”
“우리 아버지가 이 공동묘지 관리인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옆에서 일하고 계시니 뭐가 무섭겠습니까? 공동묘지는 으스스한 곳이지만 아버지가 관리인이니 뭐가 무섭겠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전쟁의 소문이다 뭐다 하며 힘든 것이 있어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관리인이시니 우리는 걱정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주님의 것으로 살면 주님께서 책임지시니 앞으로도 걱정 없이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전진만 있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모두 꿈에서라도 주님의 몸으로 사시는 크리스천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