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증 이조참판 정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兼 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贈吏曹參判鄭公神道碑銘 幷序).
절충장군 행의흥위 대호군 지제교 정사룡(折衝將軍行義興衛大護軍知製 敎鄭士龍)이 글을 짓다.
가정(嘉靖) 계사년(1533년) 겨울에 내가 병이 있어 집에 있었는데, 정매신(鄭梅臣) 군이 그의 선고(先考) 승지공의 세계(世係)와 이력(履歷)을 소매 속에 넣고 와서 말하기를 “선군(先君)께서는 폐조(廢朝) 갑자년(1504년)에 화(禍)를 당하셨고, 선비(先妣)도 신묘년(1531년)에 돌아가시어, 자식은 근심을 머금고 초토(草土)를 깔고 베고 살면서 겨우 생명만을 연장할 뿐이라네. 병이 고질이 되어 세상에 오래 살기를 기대하기 어려우니, 선인의 행적이 매멸(昧滅) 될까 두렵다네. 빗돌은 이미 완성하였으나 명서(銘敍)가 아직까지도 빠져 있다네. 그대는 나와 친구니 어찌 풀어 지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내가 응답하기를 “선공(先公)의 덕행은 공의(公議)에 퍼져있고, 국승(國乘)에 실려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을 붙일 필요가 없으나, 사람들은 말을 믿고 문장은 오래 전해지는 것인데, 그대가 당세에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망 잇는 집에서 구하지 않고, 이름 없는 글 못하는 자에게 부탁하니, 어찌 말을 믿을 수 있으며 전하기를 과연 오래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정군이 누차 문에 이르러 몸을 조아리기를 더욱 간절히 하여 의리상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공(公)의 이름은 성근(誠謹)이요, 자(字)는 이신(而信)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였으며, 행동에 규범이 있어서 어린 나이에 학문에 뜻을 두어 사람들이 남다른 기국임을 알았다. 성화(成化) 무자년(146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갑오년(1474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니,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감찰, 장예원 사평(司評)이 모두 그의 처음 경력이다. 얼마 후에 홍문관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가 수찬, 부교리, 교리, 부응교, 응교, 전한으로 옮겨 십년의 경력을 쌓아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러, 학문이나 견해를 논하고, 경계하여 돕는 것이 동렬(同列)에 비해 으뜸이었다. 성종(成宗)께서 특별히 상을 더해 주었다.
정미년(1487년)에 해주목사가 결원이 있어서 특명으로 임명하여 장차 민사(民事)를 시험하여 크게 거두어 쓰자고 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으면서 올바름을 지켜 정사를 우선으로 하고 풍속을 교화시켜 성적을 고사함을 제일로 삼았는데, 마침내 예기치 못한 일로 파면되어 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봉상시 부정(副正)에 제수되었고, 마침내 승진하여 정(正)이 되었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어 여러 번 옮겨 좌부승지에 이르렀다. 언사(言事)가 연산의 뜻에 거슬려 이윽고 권신들의 이간을 받아 서위(西衛)로 좌천되어 한산한 곳에서 지내며 높은 벼슬에 임용되지 못한 것이 10여년이더니, 충주목사로 나갔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가 일어나자 연산이 공의 굳세고 곧은 것을 미워하였는데 성종(成宗)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을 한 것을 실정에 맞지 않았다고 과격하게 꾸짖고 마침내 죽음을 논하였다.
아! 원통하도다. 공은 천성이 강개(剛介)하고 청백(淸白)하며, 처신을 세속과 달리하여 동함에 법으로써 본보기를 삼았다. 무릇 왕곡(枉曲)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잡아 곧게 하고자 하여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은 분발하여 세상의 꺼림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경하여 중히 여김을 받았으나, 또한 이 때문에 화(禍)를 입었다. 일찍이 여주(驪州)의 수령이 되어 폐단을 척결하였는데 안찰사의 전최(殿最)에서 체직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정직함을 옳게 여겼다. 또한 대마도(對馬島)로 사신 가서 선물을 통렬히 물리쳐 노여움을 받아 거의 돌아오지 못할 뻔 했으나 오랑캐들도 그의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시묘 살이 3년 동안 상(喪)을 집행함에 몸이 수척하였으나, 손수 조석으로 제물을 올려 예를 다하였다. 뒤에 비록 관직의 임무와 고달픈 벼슬을 할 때라도 삭망(朔望)에는 묘소에 가서 계신 듯이 하는 정성을 극진히 하였다. 비록 여러 동료들과 함께 처할 때라도 임금을 위하여 근심하여 한 몸의 의와 충효의 도를 다하여 둘 다 유감이 없었으니, 세상에 보기 드문 바이다.
공이 화(禍)를 입자 아들 주신(舟臣)은 가슴을 치며 부르짖어 울면서 먹지 않다가 죽었다. 성조(聖朝)가 중흥한 이래로 세효(世孝)를 맨 먼저 포상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착한 이에게 복을 주는 이치가 생전에는 어긋났으나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도가 사후에 부합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조참판에 추증된 휘(諱) 자순(子淳)과 호조판서에 추증된 휘(諱) 설(舌)은 공에게 양세(兩世)의 왕부(王父)가 되시며, 지중추원사 시(諡) 공대공(恭戴公) 척(陟)과 동지총제 이양몽(李養蒙)의 따님이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부인은 덕이 어진 이에 짝할 만하여 마침내 자손을 훌륭하게 키웠다. 공대공은 세종(世宗)조에 유명하여 벼슬한 업적이 모두 드러났으며 대전(大篆)과 소전(小篆) 두가지를 가장 잘 썼다. 나이가 환갑에 가까웠는데 공은 모두 좋은 명예를 얻었으니 또한 특별한 일이다.
공은 정통(正統) 병인년(1446년)에 태어나 갑자년(1504년)에 돌아가셨으니, 춘추 59세이다. 공은 공조정랑 유효장(柳孝章)의 집안과 혼인하여 5남 2녀를 낳았다. 장남 여신(礪臣)은 성균관 생원, 차남 주신(舟臣)은 승문원 박사, 삼남은 임신(霖臣)이다. 4남 국신(麴臣)은 헌릉 참봉, 막내는 곧 매신(梅臣)이니 죽산현감 때부터 업적이 뛰어나 형조좌랑이 되어 관리의 임무를 잘 수행하고 행실을 연마하였으며, 또한 효도하고 삼갔으니, 부모님의 욕되게 함이 없었다고 이를 만하다. 장녀는 이유(李籲)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현감 김자호(金自湖)에게 출가하였다.
여신(礪臣)은 봉사 송효침(宋孝琛)의 따님과 결혼하여 4남을 낳았다. 원서(元瑞), 원상(元祥), 원린(元麟), 원기(元麒)인데 모두 어리다. 김자호(金自湖)는 1남 3녀를 두었고 나머지는 모두 후사가 없다. 특히 은해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생각이 진실하고 총영(聰穎)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니, 정(鄭)씨의 번창함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명(銘)하여 이르기를,
하늘은 사람을 어기 않고,
사람은 반드시 하늘에 감사하도다.
악인은 엎어뜨리고 현인을 배양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권면하여 선만이 상천의 강기로다.
숙계가 어지럽히니
이치가 혹 역이 되도다.
인수(仁壽)를 겸하여 복을 받으니,
과연 어디에 거해야 하는가?
사람에게 있어 아름다운 행실은
충효만한 것이 없도다.
몸에 모였으되 세상에서는
도리어 병으로 여기도다.
마침내 부당한 형벌에 걸렸으니,
누가 명을 믿겠는가?
작설이 문에 있어 남 다른 포정이 인륜에 맞으니,
누가 거짓이고 누가 참인고.
광릉의 언덕에 정민이 있으니,
자손들이 선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
후인의 숭상을 받으리로다.
가정(嘉靖) 13년 갑오년(1534년) 2월 일에 비석을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