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그 영원한 가슴앓이
김남준 목사(열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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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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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저는 종종 목회의 길에 들어 선 동역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일에 종사하였는지를 알게될 때 너무나 흥미롭고 신비한 느낌을 받습니다. 목회자들의 삶과 관심거리는 남들이 보기에는 재미없을 정도로 획일화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 그렇습니다.
그분들을 만나면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들도 모두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변화 받은 교인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감사하기도 하고, 교회에 급격한 성장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는 실패를 보고 배우는 가 하면 어느 목회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 배우기도 합니다.
별 사람 다 부르셔서
그러나 그렇게 만나는 목회자들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종사하던 일을 돌아보면 정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희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직업과 관심 가진 분야로 말하자면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만나서 교회와 하나님과 양떼에 대하여 나누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업을 하던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이기도 했고, 화류계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도 만납니다.
한 교회가 서는 원리를 보십시오. 교회를 세우기전 하나님께서는 먼저 목회자를 세우십니다. 그들은 모두 다양하고 평범한 직업에 사람들은 종사하던 사람들입니다. 할 일이 없이 지내다가 목회자로 소명을 받은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에 열심히 종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9세기 미국의 복음 전도자 빌리 선데이(Billy Sunday)는 유명한 야구 선수였습니다. 위대한 전도자의 생애를 살았던 드와이트 무디(Dwight L. Moody)는 제화 수선공이었습니다. 18세의 전설적인 설교자 조오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는 술집의 웨이터였으며 챨스 그랜디슨 피니(Charles G. Finny)는 부르심을 받기 전 법률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서울 근교의 한적한 마을의 우체국장이었습니다.
특별한 부르심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이것은 목자의 직무의 기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직업들은 모두 사람들이 원하면 그 일에 종사할 수 있지만 목회자가 되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양떼들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해서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기술과 기교 혹은 경험 습득의 문제가 아닙니다. 양떼들을 돌보는 목자의 직분은 소명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목자가 그 문을 들어갑니다. 그 문을 들어 갈 때에 문지기는 그 문을 열어 줍니다. 문지기가 그 문을 열어 주고서야 비로소 그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서 그는 양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만 그 문을 통과한 것이 아니라 양들도 그 문을 통과하여 우리 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성도도 목회자도 모두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에 붙들려 교회 안으로 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평범한 진리를 우리의 고통스러운 목양의 현장에 밝은 빛을 한 줄기 던져 줍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목회 현장에서의 목자와 양떼들의 관계입니다.
인간 관계의 끈
어느 교회에서 부역자들을 향하여 진지하게 충고하던 연로한 목회자의 다음 훈계는 조국 교회가 얼마나 잘 못된 토대 위에 목양의 사역을 세우려고 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여러분, 목회는 인간관계입니다. 원만한 인간관계는 목회의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할 수 있는 대로 인간관계를 잘해야만 목회에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신학을 깊이 전공하지도 않으신 분이 자신의 사상을 정확한 용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의 표현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심각한 신학적인 결함을 가진 말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목회에 있어서 가장 나쁜 것은 끈끈한 인간관계를 기초로 맺어진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교회에서 거룩한 부흥과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방문한 어느 교회 정문에 크게 붙여 놓은 다음과 같은 표어도 같은 문제를 보여 줍니다. “우리 교회는 가정 같은 교회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교회의 표상은 가정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저는 압니다. 끈끈하고 다정한 인간관계를 교회 생활 속에서 구축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군중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소외되고 있는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가장 나쁜 목회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문제에 관하여 더 이상 논쟁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명백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목사와 교인들 사이에 존재하여야 할 목양의 관계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목양의 관계가 인간관계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보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교회가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맺어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나쁜 목양의 형태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많은 교회들이 부러워하고 있는 그런 끈끈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교회의 형태가 왜 나쁠까요?
청교도로서 18세기 전설적인 설교가 죠오지 윗필드(George Whitefield)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던 헨리 스쿠갈(Henry Scougal)은 그의 대표적인 고전『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The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이라는 책 속에서 참된 신앙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참된 신앙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상한 마음, 깨어진 심령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필요로 하고 자신의 전존재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아니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대상28:9). 그릇된 자기 만족이 있는 곳에는 거룩도 없고 경건도 없으며 애끓는 기도도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끈끈한 인간 관계는 바로 교회가 그릇된 자기 만족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에 대하여 목마르기보다는 인간 관계에 만족하는 교회가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목마름이 없고 그 나라에 대한 갈망이 없는 신자들이 자신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는 진지한 목양을 기뻐할 리가 없습니다. 인척 관계나 목회자의 인간적인 친분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교회가 부흥을 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간 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목회자와 교인과의 관계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목회자로부터 주어지는 진정한 목양을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쌓는 역할을 합니다.
우정 충만(?)
교회가 우정으로 충만해지는 것과 신령한 은혜로 충만해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대한 갈망은 끈끈한 인간의 정으로 대신함으로써도 즐거운 교회 생활을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런 교인들을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본 자 만이 알 수 있는 값진 고뇌와 신령한 결단으로 이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독자 여러분은 혹시 주일날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공허함을 맛본 적은 없습니까? 오랜만에 교회에서 보고 싶던 얼굴들과 만나 함께 한 즐거운 시간들이 감사하면서도 무엇인가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허(虛)함 느껴 보신 적은 없습니까? 함께 어울려 있을 때는 무엇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혼자 있을 때는 자신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껴 본 적은 없습니까?
이 모두 인간의 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정으로 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오는 신령한 은혜로써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가 신령한 은혜 없이 단지 충만한 우정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교 단체를 설립하는 정신이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정신은 아닙니다.
이러한 목양지에서는 목양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목양의 관계는 우정을 토대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구축되기 때문입니다.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불변의 진리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목자도 양떼도 양 우리 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때문에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만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목양의 관계가 성립하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목양의 소명을 받은 목회자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에 나오게 된 참 교인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독자 여러분들이 한 목회자의 고매한 인격에 이끌려 그 교회를 택하게 되었거나 그이 뛰어난 지식이나 교회의 아름다운 건물이나 심지어 그 교회가 집 가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몸담을 교회를 택했다면 여러분은 이미 반쯤 실패한 채로 교회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숙달되지 않는 이별
참된 목자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인들을 아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목자들 뿐 아니라 양떼들도 그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종종 사랑하던 목자를 새로운 사역지로 보내거나 정든 목양지를 떠나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목사가 되기 전 저는 약 열 네 해 동안을 전도사로 섬겼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꼭 두 번 사역지를 옮겼습니다. 떠나가는 저와 함께 목놓아 우는 지체들을 보며 사역은 항상 보람이 있지만 사랑하던 양떼들과 헤어지는 것은 “못할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 중 한 번의 슬픈 이별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일어났습니다.
여덟 해 동안 섬겼던 교회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가장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던 것은 담임목사님과의 이별도 아니고 낯모르는 교회에서 잘 모른 성도들을 새로 만나야하는 두려움도 아니었습니다. 한 지체 한 지체 어떻게 나를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떻게 넘어지고 깨어지며 거기까지 같이 왔는지를 알았기에 그들을 남겨 두고 가는 마음이 언제나 가슴을 에이는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던 형제와 서로 나누다가 견디기 어려운 슬픔으로 울던 교정이 생각납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는 익숙해질 수 있어도 사랑하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은 숙달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목양의 관계와 그리스도
목자는 양 우리로 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담을 넘은 것이 아니라 문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을 열어 주심으로써 비로소 양떼를 만난 것입니다. 물론 담을 넘어 들어 온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는 목자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양 우리에 있지만, 탐욕스러운 마음은 양 자체가 그 고기와 털과 젖에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양의 생명이 아니라 양이 주는 이익입니다. 양과 목자가 모두 문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함으로 목양의 관계가 성립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한 교회의 진정한 하나됨이 무엇으로 말미암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가 어떻게 자라온 배경도 틀리고 가문과 교육의 수준과 세대도 다른 사람들이 하나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들을 하나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한 형제라고 부르며 사랑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격려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이것은 단지 온 교인들이 머리에 띠 두르고 단합대회를 자주 갖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성도 개개인이 진실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개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 중에 늘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새롭게 체험하게 하는 신령한 은혜가 교회 안에 넘쳐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인간은 이기심과 편견으로 가득 찬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곳에는 사랑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심과 편견은 곧 수많은 분쟁과 나뉨을 낳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일로 고통하는 세상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상한 모집 광고
우리는 이 사실을 보면서 또 한 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한 교회에 목자를 보내 주시는 주권이 그리스도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널리 유행하고 있는 목회자 청빙의 관습은 너무나 세속적입니다. 여러 가지 좋은 조건들을 따라서 목양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자신들의 영혼을 돌볼 목자를 신입사원 공채하는 것처럼 모집하는 교회도 문제입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로 섬기던 때였습니다. 신학년도 초(初)가 되면 각 교회에서 섬길 전도사들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학생처나 실천처로 많이 들어옵니다. 이러한 신청을 모두 수합해서 학교 게시판에 붙여 놓고 의향이 있는 학생들과 교회를 연결해 줍니다.
언젠가 게시판에 붙은 “교역자 구함”라는 타이틀 아래 게재된 광고문은 저를 서글프게 했습니다. 그 게시문에는 전도사를 구하는 교회, 교인 수, 교회 위치, 연락 전화번호, 섬길 부서, 근무조건, 월 사례금까지 한눈에 볼 수 있게 게재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상여금을 얼마나 주는 지까지 명시한 게시판을 보면서 공단 앞에 붙어 있던 직공모집 광고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담당 부서에 연락을 해서 그 게시판을 교역자를 구하는 광고답게 다시 게시하도록 권면하였습니다.
물론 어려운 처지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섬기는 교회로부터 받는 사례금은 중요한 생활 수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수조건이 교회를 옮겨 다니는 이유가 되는 것은 정상적인 목양의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섬기도록 명하시는 목양지가 어디인지를 진지하게 기도하고 응답을 따라 부임해 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가슴에 새겨야 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1-33).
어떤 장로들의 고민
언젠가 눈보라가 치는 겨울날 강원도에 있는 어느 기도원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연세가 지긋이 드신 장로님들 몇 분이 제가 묵고 있는 방에 합숙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대화하는 중 그분들은 자신들이 서울 시내에 소재하는 천 여명정도 성도가 모이는 교회의 장로들임을 밝혔습니다.
담임목사님이 공석중인지 삼 년이 가까워 오는 데도 아직도 후임 목사님을 정하지 못해 이렇게 기도하러 올라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목사님을 모시려고 하기에 그렇게 오랜 동안 결정하지를 못하셨습니까?”
저의 이러한 질문에 대한 그분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저으며 자신들은 그저 평범하고 선한 목회자를 구하지만 그러한 평범한 조건조차 만족시키는 지원자가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6개월에 한 번씩 신문에 공고를 내는데 이 백 여 통의 이력서가 들어온다고 말하면서 그 중에는 현재 사역중인 교회에 들어간 지 6개월도 안 된 목사의 이력서도 있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새로 목회자를 구하거나 후임자를 구하는 어떤 교회의 광고는 우리를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후임목회자 구함, 상가 이층 건물 000평, 도로변, 주위에 아파트 단지 있음, 교인 장년 000명, 주일학교 00명, 중고등부 00명, 새로 산 버스 한 대 있음, 가격 000000000원”
심지어 어느 교회에서는 담임 목사 청빙 조건으로 “대학은 철학과를 대학원은 00신학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 나이는 45세 미만......”을 제시하는 교회도 보았습니다. 마치 개인회사 간부직원을 공채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렇게 굴러가는 제도 속에서 우리가 정말 참된 목자를 갈망하는 교회의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까? 정말 그런 정도의 상식 이하 수준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교인의 대표들은 참된 신자입니까? 그들의 안목으로 능히 참된 목자와 그렇지 않은 목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믿어도 됩니까?
교인들을 선동해서 목회자를 모셔오는 일에 앞장 선 사람들이 일년도 되기 전에 그 목회자를 내 보내는 일에 주동자가 되는 일은 지난 한 해 만도 서너 교회를 보았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제도와 인간적인 방법을 더 많이 의존하고 하나님 앞에 교회가 되기 되기를 갈망하며 몸부림치는 대신에 잔머리나 굴리면서 교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에게 정직하고 참된 목자가 부임한다면 서로에게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마귀의 박수 소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이러한 세속적인 풍조에 의해서 유린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목양을 받지 않으려는 교인들의 태도나 목양은 없이 교인 관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목회 현실은 이러한 풍조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교인들에게 상처받은 목회자와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양떼들 사이에서 목양의 관계가 사라져 갈 때 박수칠 자는 마귀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교회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 중 하나가 허물어 졌기 때문입니다.
섬기던 교회가 싫어서 떠나는 목회자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목자장이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정든 목양지를 떠나야하는 목회자도 있습니다. 한 교회에서 오래도록 목회한 것은 자랑할 일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 목회자가 같은 교회에서 오래도록 목회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목양의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을 얼마나 잘 느끼겠습니까?
아름다운 목회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은 한 교회에서 42년을 계셨습니다. 자신이 주례한 사람들이 낳은 아이를 유아세례를 주었는데 그 손으로 그 아이를 장로로 장립을 시켰다고 하니 실로 긴 세월 동안 한 교회를 섬기신 셈입니다. 유아 세례를 받은 아이들이 어느덧 자라서 청년이 된 것을 보며, 젊은이들이 벌써 귀밑에 흰머리 희끗희끗한 초로(初老)의 나이에 접어드는 모습 속에서 세월의 살같이 빠름을 실감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자와 자신의 인생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목회자에게 매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매인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너른 강의실에서 학습을 통하여 습득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신앙과 거룩한 영성은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무엇을 믿어야 될 지를 보여주는 목회자의, 진리에 대한 불타는 확신과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삶의 분투하는 모본을 통하여 신앙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회자와 그를 신뢰하는 영적인 가족 관계, 혹은 도제 관계와 같은 인격적인 연합을 통하여 진리대로 사는 거룩한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멘토링(mentoring)에 대한 향수도 이 같은 목양의 관계가 사라져 가는 교회 현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경박한 민주주의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을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어줍지 않은 민주주의적인 사고 방식 때문입니다. 도무지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오늘날 현대인의 특징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신앙의 세계에서도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사고 방식과 상황(context)이지 성경(text)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관심이 거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옮겨다니기를 밥먹듯 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경박한 이기심 때문입니다. 지하실에 위치한 교회는 공기가 좋지 않아 기관지를 버릴 것 같아서 안 좋고, 이층 교회는 곧 건축 헌금을 해야할 것 같아서 싫고, 교인들 수가 적은 교회는 목회자와 구역장이 제 집 드나들 듯 할까봐 내키지 않고, 큰 교회는 너무 교인들이 많아서 가족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서 힘들고, 은혜로운 교회는 집에서 너무 멀어서 갈 수 없고......
마음에 사랑하는 교회 없이도 인생에 불편을 느끼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곧 목양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목양받기에는 너무나 높은 수준의 영적 생활을 이어가는 천사 같은 성도이거나,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자기의(義)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목자의 장을 적어 간 같은 성경 저자의 다른 고백은 교회가 교회되기 위하여 경박한 민주주의 대신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1:19-21)
보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에게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해 주는 그리스도의 도구가 되기 위하여서는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능력의 손에 붙들린 바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조국 교회는 이러한 축복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세운 지푸라기 같은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진리를 통하여 다스리시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교인들을 억압하고 자기의 뜻을 강요하기 위한 억압적인 권위가 아니라 양떼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는 목양의 권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목양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러한 권위를 인정하고 “듣고 아는 목양의 관계”를 가질 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음성을 듣나니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말하기를 “문지기가 그를 위해서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합니다. “양은 그의 음성은 듣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도 그리스도께로 말미암고 목자도 그리스도께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한 목양의 관계 속에서 엿보게 되는 광경은 목자는 말하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쳐 주시는 “듣는다”라는 말씀은 단지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양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입견들을 다소 손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 본문은 우리의 문화가 아니라, 약 삼천 년 전 팔레스타인의 문맥(Palestinian context)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화권에서 양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기질적으로 양순하고, 사람의 말을 잘 듣고, 다른 가축들과 다툴 줄 모르는 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들과 가까이 지내며, 목축을 위하여 잘 길들여지며, 비교적 친근하고 깨끗한 짐승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들이 파란 풀밭에서 한가로이 뛰노는 그림과 같은 장면을 연상하며 거기에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동 지방에서는 양에 대한 우리의 이러한 생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같은 중동 지방에서 통용되는 가장 상스러운 욕 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뜻밖에도 ‘양 같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그 지방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천박하고 치욕적인 욕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이란 동물은 생각이 모자라고 어리석으며 고집이 세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고 지저분한 짐승의 대명사입니다. 양이 힘이 없고 연약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리의 선입견일 따름입니다. 덩치가 큰 양은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앞발을 뻗고 있으면 좀처럼 끌고 가기 어려운 고집스러운 짐승 중의 하나입니다.
성경에서조차도 양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하면서 그들의 특징인 고집과 독선이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의 길로 가게 할 것임을 예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혼자 살 수 없는 짐승
더욱이 양이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시력이 매우 나쁘다는 사실입니다. 양이 분명하게 물체를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은 2미터에서 약 3미터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선천적으로 눈이 나쁜 짐승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짐승 중에 가장 깊을 잘 잃어버리는 동물의 대명사로 양을 거론하는 것도 이러한 그의 약점 때문이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양이라는 짐승은 이빨로 튼튼하지 못합니다. 표범이나 사자처럼 자기의 적을 물어뜯을 수 있는 강력한 이빨을 가지고 있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한 염소처럼 적수를 받아 넘어뜨릴 날카로운 뿔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치타처럼 빠른 다리나, 곰같이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숲 속의 카멜레온처럼 자신을 숨기거나 변신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양입니다.
결국 이러한 양의 특성을 통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양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동물이다.” 누군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그 돌봄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야 할 그런 존재가 바로 양이라는 뜻입니다.
말씀과 목양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이 양떼들이 보호받는 길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과한 양과 목자 사이에는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언어가 있습니다. 자기들만의 교감이 있습니다. 목양의 관계가 먼저 이처럼 “말씀을 전하고 듣는 관계”를 기초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떼에 대한 사랑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기 위하여 말하고, 양떼들은 목자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단지 목자의 음성이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주님의 보호를 힘입는 길이라고 믿으며 그 일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목양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전해 줄 수 있는 목자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목자의 음성에 순종하며 따를 수 있는 양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양떼들이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인간적인 결점이나 약점 때문에도 그렇지만, 자신들 안에 있는 불순종의 경향성 때문에도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교인들이 설교에 마음을 기울여 청종하는 것은 목회자가 진리를 설교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스테펀 챠아녹(Stephen Charnock)의 다음과 같은 견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 없이는 예배 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배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탁월하심, 관한 지식과 그의 엄위에 대한 실제적인 사고에 적용하면서 이루어지는 이해(understanding)의 행동이다.....그것은 또한 의지의 행동이다, 그것으로써 예배자의 영혼이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고 경의를 표한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황홀하게 되고 그의 선하심에 안기며,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 속으로 들어서 모든 애정 어린 정서(all his affection)를 그분 위에 부어 드리는 것이다”
헛된 자만심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신앙이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전수되도록 경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을 믿는 신앙의 도리에 대한 정직한 교훈을 들려 줄 수 있는 목회자 없이는 바람직한 목양의 관계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가르쳐 주고 배우는 관계야말로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룹니다.
어떻게 살아가야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될 것인가? 어떻게 믿어야만 죄와 더불어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거룩한 삶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어떻게 미리 감지하고 때로는 돌아가기도 하도 때로는 맞서기도 하면서 환경을 이기고 영적인 대적들을 이기며 나아갈 것인가?
저는 스스로 자기가 감화를 받은 목회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는 교인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온 자신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니라, 그런 목회자의 도움 없이도 이만큼 신앙 생활해 왔으니 자기들이야말로 신앙의 영역에서 인간 승리(?)를 이룬 장한 사람들이라는 자만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모두 자기의 문제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해서 그러한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을 가진 것도 아니며, 지식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힘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은 목회자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움을 받으며 신앙 생활하도록 하나님께서 목양의 관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아쉬운 간증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는 좀더 특별한 목회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누구인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 줄 수 있는 말씀의 탐조등을 가진 영적인 목회자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인간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은 자신에게 절망하는 것만큼만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거룩한 진리의 종들은 교회의 재산입니다. 우리는 그들과의 목양의 관계를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지방에 있는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내려갔을 때의 일입니다. 몇 주전에 발행된 그 교회의 신문에 실린 어느 교인의 간증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스스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 교회의 지체였습니다. 그의 간증 속에 이런 구절이 실려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웠습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기쁘고 기도하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예배시간만 되면 한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설교는 하나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지만 그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지금도 그때에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감화의 역사가 성령의 역사 하심이었다고 주장하는 간증자의 말을 굳이 비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감화가 그의 신앙생활을 견고히 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아니하리라는 사실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없이 흘린 눈물이 그의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위에 격정적인 신앙의 열정에 사로잡혔다가 곧 식어버리고 구태의연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교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문제는 감정적인 체험이나 느낌만을 가지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견고하게 이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필요합니다.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거룩하고 분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고함을 위해서는 진리를 깊이 깨닫고 그리스도께 인격적으로 승복하는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양의 관계는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통로입니다.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청교도적이고 명쾌한 정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청교도들은 지식 없는 종교적 감정이나 정서는 무익하다기보다 사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오직 진리를 지각하고 있을 때의 정서라야만 바람직한 정서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느끼고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고, 지식이 없는 감정에 의하여 지배될 때 그것은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확실한 표적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순종이 없는 지식이 영혼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지식과 분리된 감정과 어두운 정신이 지각하는 충동 같은 것들도 똑같이 영혼에 파멸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진리의 가르침이 목회자의 제일 과제인 것처럼 진리를 배움은 평신도의 제일 과제이다.”
목양,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의 도움 없이도 선지자를 부르시는 것 같은 장엄한 만남을 통하여 당신의 사람들을 부르시기도 합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엄청난 영적 각성을 주셔서 한 시대에 주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의 도움 없이도 말입니다. 하나님이 목회자를 사용하시지만 사람이 목회자에 의하여 당신의 일을 제한 받으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르심은 일반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어날 수는 있지만 언제나 흔히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커다란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한 부르심은 단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을 지켜 나가기 위한 일반적인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특별한 부르심의 방편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바울처럼 기적적인 빛 앞에 거꾸러져서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에 여러분 모두 졸도하셨습니까? 여러분 모두 하늘에 불 말과 불 병거가 내려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없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흔한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신앙의 길을 걸어 오셨습니까? 무엇인가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더 많은 진리의 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시기까지 어떻게 인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흔들리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습니까?
기이한 빛이나 이적만이 여러분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여러분 주위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여러분들도 다 알지 못하는 수많은 날들을 이름을 불러 가며 염려하며 기도해 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마음이 강퍅해지고 죄 가운데 있어서,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슬퍼할 수조차 없을 때에 누군가가 여러분의 영혼을 위하여 아파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가르쳤고 여러분은 배웠습니다. 놓친 말씀이 더 많지만 깨달은 말씀이 있기에 자랐고, 그렇게 자랐기에 오늘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만약 오늘날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이 부실 시공된 건축물과 같다면 그것은 오직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통해서 신앙적으로 바로 세우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노력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부실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들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 자라게 할 목자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엾은 친구
초등학교 시절 동생처럼 같이 지내던 동네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동네사람들이 그러했지만 그 아이의 집도 매우 가난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컴플렉스가 있었는데 자기 키가 매우 작고 체구가 매우 왜소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아이는 같은 또래 아이들에 비해 머리하나는 키가 작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어깨밖에는 키가 자라지 않았습니다. 먹성도 좋아서 무엇이든지 잘 먹고 운동도 좋아했습니다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그 체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유인 즉은 그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식구들을 버려두고 집을 나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발육이 필요한 유아시절에 충분한 모유를 섭취하고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따뜻하게 양육되지 못한 것이 그의 신체를 영구히 왜소하도록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신앙의 초기에 정직한 복음과 풍성한 말씀으로 기초를 놓지 않으면 뒤틀린 신앙을 갖거나 쓸데없는 아집과 잘못된 확신에 사로잡혀 정상적이고 풍성한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양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목회자로부터 순수하고 풍성한 진리의 말씀을 공급받아 영혼과 몸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잊혀지고 있는 이런 목양의 원리에로 우리들을 다시 데려갑니다.
선한 목자의 음성
예수님께서는 목양의 관계에 있어서 아주 단순한 원리 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말입니다. 한 사람의 목자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목자인가는 그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양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오 양도 제 양이 아니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모든 것이 평화로운 때에는 쉽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양의 현장에 위기의 때가 왔을 때 그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림으로써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점에 있어서 모든 목회자들의 영원한 모범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심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를 죽음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멸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심으로 당신의 참 사랑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선한 양의 표징
만약 참 목자의 징표가 목숨을 버리기까지 양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진실로 그리스도께 속한 양임을 보여 주는 징표는 무엇입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목자를 따르기를 원하는 양의 관심은 오직 자기를 인도하는 목자의 음성에 있습니다. 목자의 뒤를 따라갈 때 멀리서 들려 오는 바람 소리,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그리고 먹음직한 풀들이 뺨을 비비며 서로 흔들리는 소리가 그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의 관심사는 오직 목자의 음성입니다. 왜냐하면 양떼는 목자의 음성을 통해서 안전한 길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이 참된 양입니다.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 온 양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목양의 기초가 그리스도시라는 첫 번째 사실과 함께 두 번째로 중요한 요소를 만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목장으로 들어 온 양과 참된 목자의 관계는 “음성을 듣는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이 양떼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영적 본성
하나님께서 목자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가르쳐 주실 때 양떼들은 그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함으로써 그가 바로 주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양떼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천부적인 영적 본성, 혹은 영적 감각이 있습니다.
신앙이 별로 없으면 만나고 먹고 떠들고 이야기하고 그래도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점차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관심의 불일치가 생깁니다. 상대방은 세상 이야기를 하는데 이제 내가 변화되고 나니까 그 이야기들이 나의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대화 속에 자주 나오는 “우리가”라는 말에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 부자연스러운 감정이 생기게 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고 은혜를 받을 때 생겨나는 영적인 본성입니다. 영혼의 감각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 속에는 이러한 영적인 본성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느끼게 됩니다. 그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끼게 됩니다.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던 사람들이 오랜만에 만났는데 함께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사로 받은 은혜 체험이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헤어지기가 아쉬울 정도로 기인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가 하나되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강팍하게 세우고 거스르는 자들은 순종함으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은혜 충만한 지체들과의 깊은 대화 속에서 하나되지 못하는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 속에 깃들인 영적 본성입니다.
참 목자를 아는 것
이처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같은 은혜에 참여하고 삶을 서로 나누는 한 교회 속에서 영적인 상태에 따라서도 서로가 그렇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이 모두 그리스도를 만나고 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우리 안에 들어 왔다고 한다면 어떻게 서로가 서로를 못 알아보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성경 지식과 영적인 깊이에 따라서 분별에 필요한 기간이야 다소 차이가 나겠지만 어느 한 쪽이 어느 한 쪽을 속고 속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흐르고 있는 감각이 있습니다. 마치 어둠 속에서도 말 못하는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의 품을 알아보듯이, 엄마가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자기의 자식인 것을 분별하듯이 논리를 넘어서는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다면 더더욱 쉽게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회자가 한 교회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은 야망을 갖는 것은 양들이 목자 앞에서 위선과 가식의 너울을 뒤집어쓰는 것만큼 불결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몇 해 동안 몸담으면서 교수로서의 이러한 소박한 욕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악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목회자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사악한 욕망
목자는 양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부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서 있는 사람입니다. 존경과 사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스스로 포장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부정직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곳에서 외식은 난무합니다. 외식이 무성한 곳에서는 건강한 영적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자의 영광은 그리스도께 사로 잡혀서 그분의 음성을 충직하게 전하다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거스르며 불순종의 길을 걸어감으로 마음과 삶의 패역을 고치지 아니하는 영혼들을 위하여 통곡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며 목자장이신 그분의 충실한 대언자가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보람은 자신의 설교와 가르침을 통하여 양떼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건강한 목양의 관계는 신령한 은혜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단지 설교 시간에 강단에 선다고 해서 목자를 존경할 정도로 순박한(?) 성도는 이제는 별로 없습니다. 일단은 어느 정도 목회자를 덜 믿는 것이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분별력 있는 종교적 처신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대입니다.
신앙과 상관없는 설교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어느 목회자를 위한 잡지를 발행하는 출판사에서 서울 시내 삼백 명 이상 팔백 명 미만의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에 다니는 30대 성도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한 것이 있습니다. 응답자 천명 중 칠백 팔십 명이 주일 예배에 대하여 묻는 항목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의 주일 설교와 나의 신앙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 교회에 정말로 건강한 목양의 관계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가는 우리도 구미(歐美)의 교회처럼 목회자를 자기들 돈으로 고용한 직원(employee) 정도로 생각하는 시대가 오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나 목양의 소명에 불타는 사랑의 목자가 전해주는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감화를 받게 될 때 그 양떼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더 깊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할 것입니다. 굶주렸던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되고 소생하게 되는 일을 경험할 때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이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도 알지 못하는 내 영혼의 필요를 아시고 말씀을 주시며 그 가르침을 통하여 내 인생의 이정표를 다시 세우시고 능력 주시는 은혜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목자의 음성을 향한 갈망은 곧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팔복산의 사경회
신약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할 때마다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갈망하게 만들어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팔복산의 사경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마5:1-2).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올라 앉으셔서 무리들을 음성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훌륭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섬김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거룩한 감동을 주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친히 자신의 음성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쏟으셨습니다.
삶이 훌륭한 교훈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당신 자신의 음성으로써 양떼들을 가르치는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 않으셨습니다. 고생하고 유리하는 영혼들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분의 음성이 들렸고 그 음성이 전해 주는 가르침은 영혼들의 메마른 마음에 거룩한 깨달음과 사랑을 비처럼 내리게 하였습니다. 죄인들은 그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사죄하심을 경험하였고, 곤고하던 영혼들은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였습니다.
쉼 없이 주님의 입술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마치 땅에 있으나 천상에 있는 것 같은 은혜를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고 무리들은 조용히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에서 존재하여야 할 가장 큰 특징입니다.
신앙과 인격적 승복
예수님께서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은 군집(群集)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많은 양떼들이 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목자는 말하고 인도하며 양떼들은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합니다. 그가 멈추라고 말하는 곳에서 멈추고 그가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갑니다.
어떻게 보면 목회자의 한 마디 가르침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목양의 현장이 너무 비인간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너무 기계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뒤편에 보면 “그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설복이 나옵니다.
목양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인격적이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던 우리들을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찬송하는 자녀로 되도록 여기까지 이끄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몰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목자가 양을 앞서 인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기 싫어하는 사람들의 다리를 발로 차거나 경배하기 싫다는 이들의 머리채를 휘감아 땅바닥에 처박으심으로 경배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들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스스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며 그 사랑에 감격하는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신앙 생활은 절대로 강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양의 관계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필수적이지만 누가 그 관계를 강요하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신앙에 열심 있는 부모들이 패역한 자식들을 인하여 고통하는 모습을 봅니다. 물론 그러한 자녀들의 잘못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신앙을 몽둥이로 창조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모들이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부모의 말대로 움직이지만 장성할수록 강요보다는 인격적인 설복에 의하여 신앙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적인 승복의 과정은 목양의 관계를 이루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목회자의 고뇌
바로 여기에 목회자의 고뇌가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에 자기 교인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구타하는 목회자의 기사가 실려서 여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습니다. 본인의 해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잘못 행하는 자녀들을 보며 매로 가르치는 것처럼, 목사도 어버이의 마음으로 교인들을 때려 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권세와 육적인 권세를 혼돈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군대를 몰고 나타났어야 했고, 신약의 사도들을 칼 차고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완력으로 사람들을 바꾸고 무력으로 세상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침으로써 병든 교회를 치료하고 상한 이 땅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예레미야의 소명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1:18-19).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고귀한 소명을 받아 그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전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세상으로 나아갈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서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때릴 것이며 박해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들 때리면 그는 맞아야할 사람이었습니다. 핍박하며 그 고난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그는 진리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무장하지 않은 채 보냄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승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오게 되는 불신앙적인 반응,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목회자의 고난은 모두 그의 몫입니다.
“까불지 말고 믿어”
어느 부흥강사의 일화는 이러한 면에 대해 좋은 간증거리가 됩니다. 한 시골 동네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그는 며칠째 교회에 와서 집회를 방해하는 그 동네의 토박이 건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만나기를 피하는 망나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사야말로 옛날의 족보 있는 건달의 세계에서 놀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먹세계에 생리를 잘 아는 그 부흥강사는 집회 끝나는 마지막날 교회당에 와서 얼씬거리며 훼방을 놓는 청년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술 취한 채 횡설수설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흥사는 그를 단 한방의 주먹으로 턱을 날려 버렸습니다. 즉시 무릎을 꿇으며 “형님”을 연발하는 건달 청년을 번쩍 들어서 교회당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야 이 자식아 너 예수 믿을 꺼야 안 믿을 꺼야. 다음주일부터 교회를 나온다면 고이 내려놓고 싫다면 바위에 집어 던질 꺼다” 잔뜩 겁을 먹은 건달은 예수를 믿기로 약속을 하고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게 약속을 한 청년이 그 다음주일 교회에 나왔겠습니까?
신앙은 폭행이나 강요, 억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감화를 통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격적인 감화를 위해서는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인격적이신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는 진리를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도 한 마리 어린양
그가 누구이든지 인격적인 승복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방종하던 교인들이 목양의 관계로 들어오는 것도 교회법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 일을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인격적으로 승복하고 영혼이 변화될 때 목회자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알고 인격적인 목양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속에 깔려 있는 나태하고 하나님 계명대로 살지 않으려는 부패한 속성들 때문에 하나님은 주님을 깊이 체험한 목자를 보내시어 주님의 음성을 전해주게 하시고 영혼을 돌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양심이나 상식보다는 훨씬 더 신뢰할 수 있고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아서 그 뜻을 보여줄 수 있는 목회자를 보여 주셔서 천사에게도 맡기지 않으신 목양의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목회자, 그도 그리스도 앞에서는 여러분들처럼 연약하고 흠이 있는 한 마리의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설교단에 오르기 전 이런 기도를 자주하였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실은 저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필요한 한 마리의 연약한 양이 옵나이다”. 그가 자신의 설교에서 청중들을 향하여 “당신들, 너희들”이라는 말 대신에 “우리들”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한 것도 그의 이러한 자기 인식에서 온 것입니다.
야생(?)으로 돌아가는 양들
그러나 오늘날 조국교회의 현실을 보십시오. 너무나 극단적입니다. 목회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하나님의 저주라도 받을 것처럼 마치 교주처럼 떠받들 듯이 무엇인가 예속된 채로 교회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목양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자기 나름대로 여기 저기서 배우고 이런 책 저런 책 주워 읽으며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목양 받기에는 너무나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주님의 직접적인 목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의 현장에서 이런 사고 방식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목양 받지 못한 채 스스로 야생(?)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자기의(義)와 아집에 가득 차서 곤고한 신앙생활에 허덕이다가 다시 그 옛날 자기 멋대로 알아서 믿는 야생(?)의 신앙 생활로 돌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그들의 신앙의 반석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들을수록 곤고해지고 진리를 알면 알수록 힘겨워하는 신앙 생활을 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어느 정도 성경적인 방식을 거절하면서도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따뜻한 부모의 품에서 자라도록 되어 있지만 숲 속에 버려져서도 죽지 않고 살아서 “정글북”의 소년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고 해서 모두 산 것이 아니고 죽어있다고 해서 모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암세포가 항암 물질을 내고 항암 식품에 발암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선한 목자를 구하라
선한 목자의 목양을 받으며 신앙 생활하기를 힘쓰십시오. 만약 여러분의 목자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그런 목자로 되도록 변화시켜달라고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를 여러분의 목양지에 보내신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그를 부탁하십시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양떼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이 여러분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시고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려 사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선한 목자에 한 사람에 의하여 영도되는 양떼들을 보십시오. 수많은 양떼들이 한 목자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의 피리 소리에 양떼들이 걸어가기를 시작하고 그의 손짓을 따라 푸른 풀밭에서 쉬기 시작합니다. 그는 단지 인자한 목자일 뿐 아니라 용사입니다. 그의 지팡이로는 그들을 인도하지만 막대기를 맹수들을 처치하는 데 사용됩니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목회자의 도움을 받으며 걸어가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무지와 약점과 나태와 핑계대기 좋아하는 성품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끊임없이 깨닫게 하고 우리를 나태와 태만에 빠지기 쉬운 우리에게 당시의 불붙는 마음을 보여 주심으로 인격적으로 승복하게 하시려고 목회자를 주셨습니다.
목회자가 부족한 점이 있고 교회의 구조가 잘 못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목양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목욕물이 더러워서 아이까지 쏟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께서 하시던 거룩한 목양의 사역을 수종들어 우리를 책망하고 교훈과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여 우리가 선한 하나님의 백성되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넉넉한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특별한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목양, 그 영원한 가슴앓이
그들은 자신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떼들을 목양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와 모든 삶이 그 일을 위해 이바지할 때에만 자신의 인생이 비로소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하지만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께 대한 깊은 사랑으로 목양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선한 목자는 소박한 소원 하나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해져서 그 음성이 하나님의 마음 전해주는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목양지에 선 사람입니다. 그의 보람은 세상의 명예나 영광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영광은 자기의 증언을 통하여 양떼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승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목양을 거부하는 지체들을 보면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기도 없고 법적인 힘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양떼를 사랑할 의무만 있지 양떼를 의지할 권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오직 주님께로부터만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양떼들의 영안을 가리우려고 붙여두고 지나가는 거짓된 편견의 비늘들을 영적인 각성을 통해 벗겨 주고 삶과 신앙과 영적 생활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싶어 피 어린 몸부림으로 목양지를 쓸어안고 아파하는 사람, 무엇보다도 자신의 살아 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함이라고 믿으며 도무지 자신들의 위험한 영혼을 상태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그들을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밤들을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 자신에게 맡겨 준 양떼들이 실족할 때 아파하고 곤고해 할 때 고통하는 사람, 어리석은 아집과 편견으로 삼킬 듯이 덤벼드는 포악한 무리들을 향해서도 사랑으로 품으며 주께서 그 영혼을 만져주시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 선한 목자의 본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런 목자의 음성을 거절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의 목회자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를 외면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오늘 성경은 묻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는 진정한 목자가 있습니까? 그의 목양 아래서 주님을 배우는 즐거움이 있습니까? 완전하신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회자를 통해 여러분들의 영혼을 고치고 돌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양이 이루어지도록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성품을 본 받아 양떼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나눠 가진 목회자들에게 여러분들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신앙의 방황은 목자를 돌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선한 목자의 음성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성경을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