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작가와 사회 자전 산문/ 에이 4/ 4장
약간의 허구와 과장된 표현과 이미지가 다소 가미된 자전적 산문
정 익 진
1. 말 못 할 사정
국민학교(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말을 못 했다. 거짓말 같은 사실이다(?). 말을 안 한 것이라고 위로해보지만 증거가 매우 부족하다. 기억의 고집일까. 그때까지 먹을 때와 하품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입술을 열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광안리 불꽃놀이처럼 터졌다 해도 입을 열어 소리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꽃은 과연 무슨 꽃이었을까. 궁금하다. 나의 입은 영원히 정전이었다. 말을 한마디도 못 하는 대신에 액션(바디 랭귀지)으로 나의 의사를 전달했다. 가령 yes: 고개를 끄덕인다. no: 고개를 가로젖는다. (그러니까 내 어린 시절의 소통법은 예스 오아 노, 이분법으로 요약됨). 당시 동네 약국 주인아저씨의 증언에 따르면 나의 별명은 ‘도꾸(불독을 의미함)’였다. 불독처럼 과묵한 입언저리 모양 때문이었을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나의 심경을 이해하시고 지은 별명 같다.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완구점 앞을 지나다 내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레이다 망에 걸렸다. 그러자 나는 문득 신의 계시를 받은 듯 걸음을 멈추고 말 대신 손가락으로 목표물을 정조준한다. 엄마가 사줄 때까지 조준을 거두어들이지 않고 묵언 정진한다. 엄마는 이번에는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 듯 못 사준다, 못 사준다 꾀꼬리, 꾀꼬리, 외치고 계신다. 이번에는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웬걸, 나도 만만치가 않다. 말을 못했지만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 조준을 결코 거두어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슬슬 바닥으로 쓰러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바닥에 드러누워 버린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자가 와 저라노,” “길바닥에 누워가꼬 와저라노”. “우째된 거 아이가” “자가 와 저라노”. 잠시후 꾀고리 소리 멈추고, “좋은 말 할 때 빨리 안 일나나.” “이거 얼맙니까? 좀 깎아 주이소”라는 소리가 메아리 되어 들려온다. 이럴 때마다 인생은 말보다 행동이라는 것, 이론보다 실천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래서일까. 어차피 말을 잘할 수 있는 능력도 기술도 없고 거기에다 희망도 보이지 않고, 인내력도 다소 부족한 듯하고, 따라서 문장의 개수가 워낙 많은 산문보다 될 수 있는 대로 말수가 적은 운문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2. 불합리한 조우
접신接神을 한 이후(문학을 하고나서) 멀어져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무지개 창문 밖의 구름과 같이 둥둥, 저 멀리 사라져간다. 기차의 맨 뒤 칸 창문을 열고 나에게 손을 흔들며 떠나간다. 이제 그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 그들은 거기에서 접시를 쌓으며 생활하고 나는 여기에서 동물들의 언어를 내 온몸에 새기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 머리 위에 위치한 다이빙 보드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좌절한 사람들의 취재나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과는 워낙 살아가는 세계가 달랐다. 그들을 한번 만나 봤지만 다시 만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 때, 그들은 친구였거나 대학동창이거나 가까운 지인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가까스로 연락이 되어 몇십 년 만에 그들 중 두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방탄조끼를 입고 다녔고 몇 년 전 정년퇴직한 분들이었다.
그들은 스위스 은행 계좌와 수천 개의 금송아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때론 그들의 가치가 부러웠다. 이분들과는 대학 시절 예비역(군대를 제대하고 입학한 남학생) 모임을 같이 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오늘 만난 사람들이다. 부산에 살긴 사는 데 그들은 전국구 우익토피아에 살고 나는 거북 마을 진보라맨션에 기거하고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가옥에 살 때의 나는 급진적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그때만 해도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에 대한 신념은 없었다. 그 이후 복잡한 심리상태를 유지하며 부조리한 세상과 마주했다. 역사에 관한 조금의 비판의식도 갖게 되었다지만 전반적으로 그 당시의 나 자신을 역사의식이 투철한 사람이라고는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봉화마을 부엉이바위 위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그의 인생을 목격하고 난 뒤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 시대가 무너짐을 그때 느꼈다. 하늘에선 가죽이 다 벗겨진 동물들이 바닥에 떨어져 쌓여가고 있었다.
3. 영화의 기원
시를 선택했으니 폴 고갱처럼 자신만의 예술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것인가.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 자락을 남겨두고 흔적도 없이 창문 밖으로, 밖으로, 사라질 수는 없지 않은가. 현실적인 문제들이 안데스산맥처럼 놓여 있어 엄두를 낼 수가 없구나. 어린 왕자여,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구나. 너처럼 아직 나에게도 미지未地가 남아있단다. 한동안 영화를 통하여 미지를 달래곤 했었다.
영화는 장면이었다. 시나 소설이 문장의 연속이라면 영화는 장면의 연속이었다. 책의 페이지를 넘기듯 장면들이 지나간다. 빠르고 느리게 완급을 조절하며 흘러간다.
그랬었다. ‘영화 보기’에 바빴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는데 비교적 초기에는 ‘칼쌈 배우’의 지존, 왕우가 주연으로 등장한 중국영화를 보았다. ‘단장의 검,’ ‘외팔이 시리즈’ 등등. 이후, 할리우드 키드를 거쳐 불란서 문화원으로 건너뛰기도 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가 ”내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 것처럼 나도 영화관을 탐험하거나 ‘명화극장’ 보며 나의 정신적 역량을 넓혀 나갔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나나미가 쓴 또 한 권의 저서 ‘남자에게’란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남자 배우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가 사랑한 배우는 ‘하이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모로코’ 등등의 남자주인공 게리 쿠퍼였다. 요즈음 표현으로 게리 쿠퍼의 ‘찐팬’이었다. 거의 경배하는 수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누구일까. 다니엘 데이 루이스? 얼마 전까지 국제신문 온라인을 통하여 영화배우에 관한 칼럼을 약 1년 반 정도 ‘정익진의 무비세프’란 제목을 달고 39회까지 연재한 적이 있다. 양쪽 날개도 지쳤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어 지금은 쉬고 있다. 지금까지 쓴 원고를 모아 책으로 출판할 계회도 있다.
나의 어머니(93세)는 지금도 영화감상을 매우 좋아하신다. 우리 집에 올 때마다 넷플릭스에서 어머니 보시기에 적당한 영화를 골라 함께 볼 정도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해 국무총리가 못된 것도 엄마 탓이다. 아무튼 어린 시절에는 쫄래쫄래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엘 따라다녔지만,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엄마에게서 독립해 주로 혼자 영화 보러 다녔다. 가끔은 영화를 보기 위해 대구로, 마산으로 원정길에 오르기도 했다. 영화도 영화지만 낯선 장소에 대한 폭발적인 호기심 때문에 시외버스를 타고 마산, 대구 등등 경남의 여러 도시를 전전하기도 했다. 처음 가보는 타 도시의 영화관에서 완전히 낯선 사람에 둘러싸여 혼자서 영화를 보는 소년, 그것이 그 당시 나의 초상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부산의 한 신문사의 지면에 쓰기도 했다.
”소년시절 의외로 나는 꿈을 갖지 못했다. 말하자면 세속적 의미의 꿈이랄 수 있겠는데, 앞으로 자라서 구체적으로 뭐가 되겠다는 설정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왠지 좀 쓸쓸한 성격이었다. 당연히 또래의 애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자연스레 공상이나 몽상을 뒤쫓게 되었다. 몽상이나 환상으로 통하는 길은 바로 극장 안에 있었다. 사춘기를 훌쩍 넘어서서도 나의 반사교적인 성격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이 같은 자폐적 상황이 반복되며 어떠한 소통의 길도 마련할 수 없었고, 언제나 폐쇄된 공간인 음악실이나 극장 안만이 나를 자유롭게 했다.“
번역가이면서 소설가인 故 안정효 작가가 쓴 소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읽을 적이 있다. 주인공인 소년은 영화를 보며 성장한다. 그의 모습에서도 성장기의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나는 분열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시는 분열의 언어이다. 즉, 언어가 분열하여 시가 된다. 언어의 분열이 육체의 분열을 이끈다. 언어의 팔과 다리가 잘려 꼼지락거린다. 언어의 오장육부가 뒤집어지고 언어의 머리가 단두대에 잘려 굴러간다. 팔은 팔대로 뻗어나가 동굴 속의 박쥐를 낚아채고 다리대로 다리 위에 앉아 두 다리를 흔들고 있다. 너의 목에 언어의 이빨을 꽂고 혈액을 흡수한다. 타인과 타자로 핵분열하여 회전목마 수백 마리의 등더리에 올라타 크고 작은 장애물을 지나쳐 부비트랩을 건너뛰어 장대 높이 뛰기의 높이를 넘어 밤하늘을 향해 떼거리로 몰려가고 있다. 지구가 회전하듯이 나의 몸도 공전과 자전을 거듭하고 있다. 나의 몸 반은 태양이고 반은 달이다. 내 머리는 북극성, 나의 두 발은 전갈자리로 빛난다. 잠을 잘 때에도 분열을 멈추지 않는다. 침대 위에서 누워 자는 내가 있는가 하면 지하철의 바닥에 떨어져 자기도 한다. 불안을 느낄 때면 벽시계 옆에서 말처럼 서서 잠잔다. 천정에 붙어 잠자기도 하고 창문 밖을 연기처럼 빠져나가 두둥실 떠올라 달무리에 누워 잠자기도 한다. 한동안 나는 코끼리였다, 살모사였고 낙타였고 얼룩말이었다. 오전엔 외국인, 오후는 인공지능, 그리고 내일은 복제인간일 것이다.
육체와 함께 정신도 분열한다. 나는 귀신이다, 유령이다, 좀비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이고 맥머피다. 나는 무질서의 표본이다. 정신의 분열은 무의식의 우물에 잠겨있던 것들의 반란이다. 무의식의 용이 깨어나 용트림을 하고 불을 내뿜는다. 목구멍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토해낸다. 비밀이 나의 꿈이다. 꿈들이 몰려와 사람들을 비밀의 웅덩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꿈은 비밀과 함께 내 깊은 내면 속에 잠자고 있다. 비밀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비틀거리며 지붕 위로 걷는다. 나는 천사의 영혼이다. 깃털이다. 깃털로 만든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과도들 원래는 깃털이었다. 너의 머리카락에 내가 꽂혀있기도 했다. 등에도 깃털이 돋아나 나의 몸을 가볍게 한다. 깃털을 뽑아낸다. 내 몸에 꽂혔던 식칼들이 떨어진다. 떨어진 식칼을 주워 나의 손가락을 자른다. 피가 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기억은 악몽이다.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내 온몸에 페인트 칠을 한다. 말을 거꾸로 하기도 하고 거꾸로 된 말을 수평과 수직으로 정렬하기도 한다. 우리말로 물으면 잃어버린 왕국의 언어로 대답한다. 대답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는 포르투갈 말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나는 조선시대 알려지지 않은 언어학자였다. 나는 ’통곡하며 쓰러져‘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이었고 잉카의 제사장이었다. 나는 분열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5. 의지와 음악으로서의 세계
예술 장르 중에 인간의 감성에 가장 신속하게 그의 감각이 전달되는 예술 매체가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청각을 통해 음악을 듣자마자 그 선율은 빛의 화살이 되어 심장에 바로 꽂히기 때문이다. 중독성이 심각하다. 그래서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듣기 싫어서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악은 감정 소모가 워낙 심해 현실 감각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창작에 더욱 몰두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나의 경우에는 집중에 방해만 되었다. 음악을 듣게 될 경우에는 신의 음성을 들을 때처럼 온전히 음악에만 몰두해야 할 것이다. 그랬다. 음악은 신의 감각이다. 저런 음악(고전음악)을 사람이 작곡했다고는 종종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시각적 이미지에 너무 기대지 않기 위해 클래식 음악 감상 동호회에 가입한 적이 있다. 3년 정도 한 달에 한 번 정기 감상회가 있어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자신이 선정한 음악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기회라기보다는 규칙이었다. 딱 한번 발표했다. 윤이상 작곡가가 작곡한 클래식기타 음악이 수록된 음반을 빌려서 준비를 했다. 윤이상의 기타 음악이라니 좀 의외였다. 윤이상의 일부 음악은 매우 현대적이며 실험성이 풍부했다. 음악을 듣기 위해 모이는 장소는 어느 정형외과 의사가 개인적으로 가끔 사용하는 오피스텔이었다. 최상급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질은 나의 청각의 한계로서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였다. 고압선 같은 선율은 내 피부를 뚫고 살 속으로 스며들어 나의 세포가 되었다. 나의 영혼은 충만하였다. 그러면서도 결코 오디오 마니아는 되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입술을 깨물며 다짐했다. 잘못하면 가산을 탕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분에게 음악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와 고음질의 오디오 기기까지 제공받은 셈이다. 고마운 일이었다.
음악을 음악으로 인식하지 않고 소리로 인식하고 듣는 편이다. 나의 경우 그래야만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연주자와 저 연주자가 연주할 때의 그 소리의 차이, 이 지휘자와 저 지휘자가 지휘할 때의 그 미세한 소리의 차이를 감지한다. 하지만 이런 감상법은 매우 피곤한 일이기도 하고 짜증이 밀려온다. 그냥 편하게 물 흘러가는 소리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분석하지 않고 그냥 듣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분석하고 쪼개고 할 필요가 없다. 요즈음도 구스타프 말러와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을 가끔 즐겨 듣는 편이다. 古음악, 바로크 음악도 좋아한다. 래퍼 윤미래 혹은 T의 목소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번 그 음악에 꽂히면 한동안 주야장천 그것만 듣는다. 사람마다 음악에 대한 취향 차이가 극심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남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병원도 자기에게 맞는 병원이 있듯이 음악도 그러할 것이다. 음악을 권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중학교 시절에는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음반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새로 구입한 음반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앞집(옥상을 통해 앞집에 건너갈 수 있었던 주거지에 살았다)에 성지공고 다니던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취미는 오디오 제작이었다. 전자 골목에서 구입한 부품으로 만든 조립형 오디오를 말한다. 그 형 때문에 그 당시 내게 생소했던 레드 제플린, 무디 블루스, 딥 퍼플 등등의 음악과 지미 핸드릭스의 미친 기타 연주를 ‘빽판(낮은 품질의 복사판)‘이라 불리는 LP로 들을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지미는 이빨로도 연주를 할 줄 아는 동물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지미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이 순간 잡념과 잡음이 엄청나게 들려온다. 잡음도 음악이겠지만… 며칠 전 오토바이와 접촉사고가 났다. 지지부진 해결이 나지 않는다. 뮤직박스에 저장된 음악도 없고 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보험회사 음악 프로그래머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내게 유리한(?) 결정적 음악이 있다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글쎄? 나의 과실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래저래 경찰이 개입해야 결정이 날 것인가.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단체로 방독면을 쓰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음악연주를 듣기 위해 문화 회관에 갔을까.)
6. 갤러리에 가다
”시인 정익진은 자주 미술관 화랑을 찾는다. 매주 한 번씩 날을 잡아 전시가 열리는 모든 곳을 섭렵한다. 5년여간 그래왔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미술의 흔적이 많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넓혀져 목매달아 죽은 조각가 권진규, 그 애인이 투신자살한 화가 모딜리아니를 비롯해 백남준, 몬드리안을 노래한 시도 있다. 또 '눈먼 고양이와 미술관을 둘러본 후'라는 시 구절도 보인다. 눈먼 고양이와 함께 미술관을 둘러본다? 새롭고 생경한 이미지와 느낌을 찾으러 미술관을 찾는다는 것일 테다.“
위의 글은 누군가가 나를 표현한 글이다. 대부분 사실이다. 지금도 그림들을 보기 위해 아트페어나 갤러리에 자주 가보는 편이다. 미술에서 시적 영감을 받을 경우가 종종 생긴다. 인상주의 그림들이나 달리나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드 키리코, 프란시스 베이컨 등등 초현실이 가미된 그림과 포스트 모던이나 개념미술을 비롯한 표현주의 화풍을 좋아한다. 누나가 미술을 전공한 탓인지 어릴 때부터 책장에는 세계적인 화가들의 그림을 총망라한 미술도록이 꽂혀있었다. 심심하면 구름 위에서 이 서적들을 펼쳐보며 놀았다. 책들이 철재 문짝처럼 크고 무겁기도 했다. 전집으로 되어 있는 이 미술도록을 펼친다는 것은 꿈속으로의 귀환 혹은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의미했다. 아직도 꿈속인지 모르겠다.
7. 성장기
얼마 전 발육기를 지났다. 눈동자도 좀 커지고 뼈도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나는 이제 성장기에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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