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신라의 달밤을 보고 쓴 가벼운 감상문입니다.
연극에 대한 지식이 짧아 감상문 형식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좀 더 형식에 맞추어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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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신라의 달밤」을 보고
경주 토박이인 시민들을 상대로 한 악극 ‘아. 신라의 달밤’은 어떤 목소리를 낼까? 천년의 수도 경주, 신라의 이미지를 빌려 온 것으로 보이는 이번 악극은 배우들의 구수한 사투리와 귀에 친숙한 배경 음악으로 처음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연이어지는 무용수들의 화려한 의상과 발랄한 춤은 스스럼없이 관객들의 박수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관객연령을 40~50대로 잡았다는 생각이 악극 내내 드는 것은, 멜로디가 트로트 풍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였으리라.)
주된 줄거리는 이렇다. 별다른 신들의 지시를 받지 않는 저승사자들은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즉 잘 노는 노배우를 자신들의 세계에 데려 오고자 한다. 저승사자의 출현에 깜짝 놀란 노배우는 아들네 극단의 공연에서 놀다감이 어떠하냐고 제안을 하고, 저승사자들은 어떨결에 연극 무대 위까지 올라 함께 놀게 된다. 극 안에서의 아들과 노배우 간의 돈독해지는 관계를 지켜본 두 저승사자의 마음은 약해지고, 노배우가 자신이 더 살 수 있음을 알고 도망치는 것으로 극이 끝을 맺는다.
내 생각에는 이 악극에서의 반전은 두 번 있는 것 같다. 첫 번째는 표면적으로 들어나는 노배우가 죽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아들과 어머니 간의 관계 회복이라 생각한다. 표면적 반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라 생략한다. 두 번째 모자간의 관계 회복은 어찌보면 상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 노배우가 저승사자들과 무대에 난입하여 분장실에서 화를 내는 아들내외 와 후에 김유신 장군 연극을 끝내고 온 (역시 분장실에서의) 아들내외를 대칭적으로 보고 싶다. 처음 노배우에 대한 그들의 관점은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나 봐라.” 즉 “걸리적 거리지 말라.”라는 일관된 대사들로 이어진다. 하지만 김유신 장군 극 중에서의 모자 관계는 현실과 정 반대의 관계를 가진다. 현실에서 자신의 욕심을 위해 떼쓰는 어머니에서, 아들의 입신을 위하여 희생하는 어머니로. 또 현실에서 일에 방해되는 노배우에게 언성을 높이는 아들에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불효하는 바람직한 아들로. 각각 대칭을 이루는 것이다. 이 섞이지 못 할 것 같이 평행선을 그어가던 이야기는 극중에 저승사자가 노배우에게 노래 한 곡 해보라고 부추김으로써 현실과 만나게 된다. 아들내외 역시 노배우의 노래를 청하고, 슬피우는 어머니를 감싸 안으면서 극과 현실이 융합된다. 즉 내면적 반전이라는 것 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아사달과 아사녀’와 ‘김유신 장군’ 이야기 였을까?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둘 다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전생에 전라도에서 살았다는 저승사자가 개입하면서 악극 내내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해지는 동안 톡톡 튀는 느낌을 준다. 극작가가 지역감정을 부추기려 한 것일까?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연극에서는 불교의 나라, 신라라는 주제 안에서 아사녀가 이런 대사를 던진다. “불상과 불경이 많아서 불교의 나라가 아니잖아요. 불교의 신념이 있어서가 아닌가요?” 이 말의 파장은 크다. 우리가 물건에 얽매여 시시비비를 가리는 동안 본질이 가려지는 것을 꼬집는 것이 아닐까? 무영탑은 이름대로 그림자가 없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신념 자체인 것이다. 불교는 신에게 의지하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해탈에 이르고자하는 자아 성찰의 종교이다. 그런 종교의 메카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는 마땅히 허물어지는 것이다. ‘과연 극작가가 그 말을 하고자 했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어리석은 나는 더 이상 대답할 구색을 잃어버린다. 추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제 2부. ‘김유신 장군’ 연극의 프롤로그에 신라를 상징하는 까치와 소나무가 등장하여 전라도 저승사자에게 신라를 가르쳐 준다. 처음 굿거리에서 시작하여 점차 자진모리, 휘모리로 음이 박해지면서 네 사람은 사물 안에서 하나가 된다. 물론 흡인력을 가지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 대사부분이 내용에 비해 너무 길지 않았나, 의문스럽다. 사물이 퇴장하고 음은 다시 굿거리로 느려지고, 천관녀와 김유신이 전통무를 추며 등장한다. 김유신은 허울뿐인 귀족신분에 괴로워하며 방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신라인이 아닌, 마지막 가야왕의 증손인 것이다. 중심이 서지 않는 그에게 던져지는 신검은 그를 신라와 융합시키고, 이야기의 큰 줄기인 어머니에 대한 효를 깨닫게 한다. 하지만 너무 큰 줄기를 따라 가려 하다 보니, 소 이야기인 ‘김유신 장군에 대한 부분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점이 남았다.
전체적으로 시민들의 호응을 많이 얻었다. 특히 연로하신 분들의 맞장구를 악극 내내 들을 수 있었다. 조명도 적절히 쓰인 것 같고 소품도 군데군데 적절해 보였다. (하지만 의미모를 물줄기 같은 효과는 의아스러웠다.) 단지 아쉬웠던 점은 마이크 상태의 불량과 합창단의 태도 불량이었다. 마이크 상태 불량은 연기자들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약 5분여간 합창단의 마이크가 켜져있는 사고에 있어서 합창단의 잡담과 웃음소리는 악극의 진지성을 떨어뜨리고 산만해지는 파급을 가져왔다. 아무리 프로급 연극이 아니라고는 하나 너무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중간 중간 배우들의 실수는 오히려 재미요소 였다.)
악극을 감상하는 한 명의 관객으로써 깊은 연극의 묘미를 이정도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배우들에게 미안했다. 경주의 문화행사가 더욱 활발해져, 배우와 관객의 수준이 좀 더 높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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