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송이 꽃
신노우
난 꽃이 아홉 송이 피었다. 내 집으로 시집 온지 십수 년만이다. 겨울 베란다에서 추위를 이기며 탐스러운 꽃을 피웠다. 잎은 동양란처럼 폭이 좁지만 길이는 서양란 심비디움 만큼 길다. 꽃송이는 심비디움을 닮았지만 은은한 향기가 났다. 난향이 자꾸만 마음속을 파고들어 무디어진 감정을 햇솜 되어 자극한다.
네게 이 난을 선물한 J는 강원도 삼척에 살았다. 수원 원예연구소에 2년간 장기파견연수를 같이하게 되어 알게 되었다. 나는 화훼분야의 국화, 카네이션, 거베라 등 숙근류 연구실에서 연수를 하였고, J는 채소분야의 육종 및 조직배양 연구실에서 연수를 하였다. 파견 연수라 푹푹 찌는 여름날에도 시험작물재배 유리온실에서 조사를 하였다. 한참 작업을 하다보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되었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J는 슬그머니 다가와 얼음과자를 건네며 좀 쉬면서 하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늘 이해하며 너그러이 바로 보는 마음으로 친해졌다.
파견연수를 마치고 각자 원래 근무지로 돌아갔다. 내가 근무하는 지역은 딸기, 수박, 메론, 참외 등 시설과채류 재배로 겨울과 봄 들녘은 온통 하얀 비닐하우스로 은빛 물결을 이룬다. 하지만 도시근교농업 작목으로 비교적 소득이 높은 화훼를 재배하는 농가는 한 농가도 없었다. 처음으로 연수 내내 시험재배를 해본 거베라 꽃을 평소 남보다 앞선 농사를 짓는 농가에 시범포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평생 참외와 멜론만 재배했던 농가이기에 꽃모종 구입에서부터 재배는 물론 꽃시장에 내다 파는 일까지 내가 직접 뛰어야만 했다. 지친 마음을 위로라도 받을까, J에게 어떻게 지내느냐며 전화를 걸면 나보다 한수 더 떠서 햇살 좋은 가을마당에 콩 튀는 소리를 하였다.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J의 전화를 받았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승진했다고 하였다. 그동안 일도 열심히 했지만 기술사 자격으로 5급 특별승진의 문을 열고자 관련부서를 문턱이 닿도록 수없이 찾아 갔다고 했다. 나중에는 업무담당자가 드러내놓고 짜증을 내며 노골적인 미움도 샀지만 나뿐만이 아니라 후배 직원들에게도 특별승진의 길을 열고자 그 고생을 하였다고 했다. 그렇게 남들보다 10년은 일찍 승진하다보니 동료직원들의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언제 J가 근무하는 삼척으로 출장을 한번 갔으면 하였는데 기회가 왔다. 마침 그곳에서 업무적인 연찬회가 있어서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날 밤에는 J를 만날 기대감으로 잠도 오지 않았다.
J는 삼척 근무지로 돌아가 원예육종연구를 하였다. 난(蘭), 나리, 토종마늘 등 새로운 품종을 만들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삼척토종마늘을 만들어 내어 농가소득 창출에 기여하여 지역농업인들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다. 그런 성과가 알려져 그곳에서 전국단위 연찬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
J는 성공사례발표를 끝내고 벙글 웃음으로 내게로 다가 왔다. 그리고는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손을 잡아끌었다. 유리온실 속으로 데리고 가더니 한번 둘러보라고 하였다. 거기에는 동양란과 서양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양란은 형형색색 요염한 자태로 나보란 듯이 꽃을 피워 내 마음을 그 아름다움 속으로 나비가 되게 하였다. 화분마다 개성적인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데 J가 난 화분 하나를 쑥 빼 들어서 내게 내밀었다. 연수를 마치고 복귀해서 줄곧 난(蘭) 육종에 매달려 품종을 만든 내 분신과도 같은 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내게는 기꺼이 선물하고 싶다며 안겨주었다. 얼떨결에 받아들며 J 당신을 대하 듯 잘 키우겠다며 인사를 하였다. 보물을 얻은 양 한 아름의 기쁨으로 잎이 다칠세라 신문지로 싸서 조심조심하며 차에 실어서 가져왔다.
그렇게 강원도 삼척에서 대구로 내게 시집왔기에 정성으로 가꾸었다. 그런데 한해가 가면 꽃을 피울까, 두해가 가면 꽃을 피울까, 기대와 궁금함이 산등성이를 넘고 또 넘는데도 도통 꽃 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아끼는 마음이 흩어지는 물안개 마냥 차츰 옅어지며 사라졌다. 그렇게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해서 한쪽 구석진 자리에 힘없이 차지하고 있었다. 난에 물을 줄때면 어쩌다가 눈길이 가다가도 축 쳐진 잎줄기가 볼 폼이 없어 얼른 지나쳤다. 봄이 오고 여름, 가을, 겨울로 강물이 흘러가듯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첫 꽃을 피운 난을 보고 있노라니 J생각이 봄날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아른아른하다. 그 J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서른아홉 창창한 나이에 폐암으로 홀연히 떠났다. 투병기간도 길지 않았다. 너무 서둘러 갔기에 가슴바닥을 후비는 진한 슬픔마저 느끼지 못하였다. 그저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쏟아진 우박을 맞은 듯 황망히 보냈다.
J가 간지 벌써 십 수 년이 되었다. 승진의 기쁨을 1년도 채 누리지 못하고 떠났다. 난 꽃송이가 아홉인 것은 서른아홉의 아홉 고비를 넘기지 못한 J의 슬픈 혼이 담겨 핀 것일까. 겨울 햇빛을 끌어 안 듯 나는 혼 꽃을 살포시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