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세미나: 2019년 11월 5일 / 발제자: 김선미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박옥줄 옮김, 한길사, 176-203쪽
제2부 여로에서
7. 일몰
레비스트로스는 일출과 일몰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고자 한다.
니체의 일출과 일몰과 살짝 비교를 해보면 어떨까 하여 예전에 메모했던 걸 여기에 옮겨본다.
레비스트로스의 일출과 일몰
- 일출은 하나의 전주이며 일몰은 마지막에 나오는 하나의 서곡
- 일출의 태양의 모습은 뒤따라올 순간들을 예고해주는 것인데, 일몰 때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완전하게 재현되는 것이며, 그 광경은 열두 시간 동안 전토와 승리, 그리고 패배가 연이었던 것을 축소시킨 일종의 그림을 명백하면서도 느릿느릿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러므로 새벽은 하루의 시작에 지나지 않지만 황혼은 하루의 반복이다.
- 사람들이 일출보다 일몰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여명은 지시를 제공해줄 뿐인 반면, 일몰은 그 신비스러운 모습 속에 바람, 추의 그리고 더위나 비의 轉變전변-그 속에서 인간의 육체적 존재가 뒤흔들리는-을 키우고 결합시키는 것이다.
- 저녁이 밤과 대체되는 일몰이후는 무대장치같이 앙상하고 병적으로 보이는 그림자들만 남게 되었다. 우리는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에 남은 무대장치를 보면 그것들이 초라하고 빈약하고 일시적인 것임을 느끼게 되고, 또 그것들이 환상을 창조해닐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조명이나 원근법(태양)이라는 술책의 힘을 빌린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니체의 일출과 일몰
* 아침놀 /새로운 진실
오랫동안 짜라투스트라는 잤고, 아침놀이 그의 얼굴 위로 스쳐지나갔다. 숲속과 숲속의 정적을 바라보았고 놀라서 그는 자기 자신 안을 들여다보았다. 급히 일어나 환성을 올렸다. 새로운 진실을 봤기 때문이다.
한 줄기 빛이 내게 떠올랐다. 길동무를 나는 필요로 한다. 그것은 죽은 길동무나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길동무가, 죽은 길동무나 시체는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내 자신이 메고 가야 하는 것이다.
창조하는 자는 길동무를 구한다. 시체를 구하는 게 아니고 또한 짐승의 무리나 신도들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하는 자는 새로운 표에 새로운 가치를 써넣을 , 함께 창조하는 자를 구한다.
나는 너로부터 (시체 ) 떠난다. 때가 되었다. 아침놀과 아침놀 사이에 새로운 진리가 내게 왔던 것이다. 나는 목자나 무덤 파는 사람이 되지는 않으리라. 내가 죽은 자와 이야기 한 것도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 니체의 몰락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 -심연 위에 매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인간이 가진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그가 하나의 <파도 >이며 <몰락 >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덕을 사랑하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덕이란 몰락에의 의지이며 동경의 화살인 까닭에.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서 모든 것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올 수 있도록 영혼이 넘쳐흐르는 사람을 나는 사랑한다.
그렇게 하여 모든 것이 그의 몰락이 되는 것이다.
제3부 신세계
8. 농무지역(적도 무풍대)
* 신세계
아메리카 대륙이 눈앞에 있다. 대륙은 그 엄연한 모습을 즉각적으로 느끼게 한다. 대륙은 저녁 무렵에 그 만의 안개가 자욱한 수평선에 생기를 부여하는 모든 종류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 같은 형상, 움직임, 광채가 이곳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 같은 풍경이 인간들의 개인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내게는 그저 단 하나의 총괄적 생활로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나를 사방에서 온통 둘러싸고 압도하는 것은 인간과 사물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이 아니라 하나의 단일하고도 무서울 실체, 바로 신세계이다.
적도 무풍지대의 농무지역 같은 바로 그 실체. 신세계
인류학 세미나: 2019년 11월 19일 / 발제자: 김선미
레비스트로스, 『슬픈열대』, 박옥줄 옮김, 한길사, 17장, 20장.
17 파라나
파라나는 아마존 강 유역의 혼잡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회귀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또 높이 위치하고 있다. 해발 약 천 미터의 위치에 있다.
과거 수백만 년 동안 석탄기의 아무런 변화 없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풍경이다.
장엄함과 완전한 질서감을 보존해 온 숭고한 지역.
제족(Ge)- 유럽인이 브라질을 발견하였을 당시, 남부 브라질 전체에는 언어와 문화의 모양에서 상호 관련성을 지니고 있던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라는 집합적 명칭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남부 브라질의 제족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물러났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 투피족들의 침략으로 몇 세기 전에 이곳으로 밀려나게 된 듯, 이들 중 한 두 집단은 1935년까지 존속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집단들은 1914년경에 진압, 브라질 정부는 문명생활에 적응 시킨다는 목적으로 특정지역 내에 거주 시켰으나 20년 후에 이 같은 실험은 중지되었다.
이들 원주민들은 짤막한 문명생활과의 체험을 통해 지니게 된 것이라고는 브라질인들의 옷, 도끼, 칼, 바늘, 실의 사용법이었고, 다른 측면에서는 완전한 실패였다.
이들은 갑작스레 강요를 당한 예전의 야만인들 이었다. 그들의 문화는 백인의 영향을 무시하여 고유하게 유지되어 있던 고대 전통들로써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다. (성냥이나 소총 권총은 집에 걸어놓고...활과 화살을 사용)
이들 결합(문명과의 접촉에서 생긴)은 인디언 문화 연구에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상제로나무의 원주민지역- 면적이 약 10만 헥타르 450여명의 인디언들이 대여섯 개의 작은 부락에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정부에서 건립한 목조가옥, 인디언들이 세워놓은 팔미투나무의 줄기를 얽어매어 만든 풀잎지붕의 집, 등
밀짚모자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생산 활동이며 돈벌이였다.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서 몽고인종형의 특징이 나타나고 키는 작고 얼굴은 넓고 평평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오고 눈은 가느다랗고, 피부는 노란 빛깔이며, 머리털은 검고 곧으며 몸에는 털이 전혀 없거나 매우 드물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광주리들이 다목적으로 쓰이고 있었으며, 남아메리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십자 짜기 기술을 볼 수 있다.
카인강족 - 농사는 별로 짓지 않았으나 고기잡이와 사냥 그리고 채취가 주된 생업을 이루고 있다. 유랑생활을 하며 남자들은 활과 화살을 여자들은 살림살이들을 헝겊 끈으로 등에 지고, 어린 이이들과 살림살이들도 이런 식으로 운반된다.
원예는 원주민들의 경제에서는 으뜸가는 활동이다. 감자, 바나나, 마인오크, 옥수수 등을 기르고 있다. 절구에 빻아서 가루를 먹기도 하고 빵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사냥에서 얻은 짐승과 반半 야생의 돼지가 육식의 재료가 된다. 고기는 나뭇가지에 꿰어서 불 위에 구워 먹는다.
애벌레 코루를 즐겨먹는다. 백인들의 조롱에 기분 상한 인디언들은 그 곤충이 맛있다는 것을 이제는 고백하지 않으려 들고, 또 그것을 먹고 있다는 것도 완강히 부인한다.
20. 원주민 사회와 그 형태
한 종족이 지닌 관습들의 전체적 집결에는 언제나 어떤 특정한 양식이 존재한다. 관습들이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예) 파라과이-토바족, 필라가족, 브라질-카두베오족, 므바야 과이쿠루족 등
우리들은 화학원소의 주기표와 유사한 일종의 주기표를 만들어, 사회가 실제로 어떤 것을 채택하느냐를 단지 식별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므바야족 – 카스트로 조직(귀족, 무사계급(귀족), 구아나족(천민), 샤마코쿠족(천민), 등)
일부일처제이며 자연적이라고 우리가 여기는 감정에 대해 강한 적의를 나타냄 – 출산에 대한 심한 혐오감, 낙태와 영아살해, 안면도식)
* 도색
인디언 문화에 존재하는 피부 채색과 특히 안면 채색은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림 그리기란 인간 속성의 한 부분이며,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상태의 금수와 같은 것
섬세하고도 미묘한 형태의 곡선들은 얼굴 자체의 선만틈이나 감각적, 회화적인 외과수술에 의해서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일종의 예술적인 접목
에로틱한 효과는 매우 체계적이고도 의식적으로 개발되어 온 것
직선, 나선상, 소용돌이꼴
대부분의 작품에서 두 개의 모티프(주제)가 교대로 나타난다.
구아나족과 보로로족 이 두 개의 사회가 카두베오족 예술의 양식이라는 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규명해온 것에 비교될 만한 하나의 사회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각각의 사회마다 이중의 대립성이 존재한다.
첫째로 3분조직과 양분조직, 대칭성과 비대칭성의 조직형태가 서로 대치
둘째로 상보성에 기반을 둔 사회기고와 상하의 서열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기구가 서로 대치되고 있다.
이 같은 모순적인 원리에 충실하기 위한 결과로서 사회집단은 연대를 맺고 있는 집단과 대립하는 집단으로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한다
* 문장紋章이 만은 분리된 선들로부터 파생된 특성들을 상징적으로 집합한 것이듯이, 사회도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등분되거나, 재단되거나, 좡로 등분되거나, 또는 우상에서 좌하로 비스듬히 양분된다.
구아나족과 보로로족은 사회구조의 모순에 직면하여, 이 모순을 순수하게 사회학적인 방법에 의해서 해결하거나 위장하려고 했던 것 같다.
23 죽은 자와 산 자
1. 죽은 자를 대하는 자세
레비스트로스는 죽은 자를 대하는 방식을 좀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죽은 자를 주체로 또는 객체로 표현하고 있다.
1)죽은 자가 주체가 되는 방식 : 죽은 자를 쉬도록 하는 방식 ex) 부유한 영웅
2)죽은 자가 객체가 되는 방식 : 투기의 대상으로 대하는 방식 ex)가난한 주인공
불러내는 방식 ex) 식인풍습이나 죽은 고기를 먹는 풍습이 죽은 자의 장점과 능력을 자신에게 첨부 시키려고 하는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모리)
3) 그 중간의 방식 ex) 멜라네시아 원주민(조상들이 후손의 편을 들거나), 중국이나 아프리카(어떤 조상제례에서는 죽은 자가 개인적인 신분자격을 유지하거나), 푸에블로족(특별한 역할들을 그들끼리 나누어 가지거나), 등등
이 같은 방식들은 한쪽으로 그 사회가 기울어져 있다고 할 때 그 사회는 미신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반대쪽의 가능한 형식으로 기울어지려고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의 이중적인 조정을 바라면서 실천해 나가고 있는 기구이다.
보로로족이나 다른 종족들의 독창성은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명확히 체계화하였고 또 서로를 적용시킬 수 있는 의식과 신념의 체계를 수립하였다.
2. 보로로족의 산 자와 죽은 자
바이테만나제오<남자의 집>
부락의 사회 및 종교 생활의 중심지로서의 존재 이상의 어떤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간과 우주, 사회와 초자연적인 것,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간의 관계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부족 중 한 사람이 죽게 되면, 부락의 반이 각각 죽은 자와 산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주술사의 영역(수직적)과 제식을 관장하는 사람들(수평적)의 영역 모두 포함한다.
남자들은 영혼들의 사회를 상징화하고 여자들은 종교적인 의식에서 항상 제외됨으로써 산 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술사의 영역은 열 번째 하늘에서부터 땅 밑까지 천상과 지상의 힘을 지배하는 사람
- 바리: 사람인 동시에 사물이기도 한 사악한 영혼들의 불분명한 우주와 인간 사이의 중개인(투가레족)
- 아로에토와라아레: 죽은 자의 사회와 산 자의 사회 간의 관계를 주재하는 중개자(세라족)
제식을 관장하는 사람들- 투가레족과 세라족
* 영혼의 소유물-‘투가레 혈족’의 영웅들
- 질병과 죽음을 예견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 창조자와 조물주로 나타난다.
- 태양계와 풍우 질병과 죽음의 변화를 담당.
- 물, 강, 물고기, 식물 따위의 사물의 존재에 대하여 해답을 준다.
- 물리적 우주에 보다 밀착해 있다.
- 비사회적 존재, 그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영혼들과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특권족인 존재이다.
* 영혼들의 길을 지배하는 사람-‘세라’혈족
- 병자들을 치료하고 낫게 해주는 재능을 갖고 있다.
-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그 자신을 희생한다.
- 평화와 조직의 담당자
- 인간을 괴물로부터 구출하고, 각각의 동물들에게 창조를 질서 있게 하였다.
- 정치적, 종교적 힘을 지니고 있음 투가레족보다 약하다.
- 인간적 우주에 보다 밀착해 있다.
- 선물을 받을 수 없고 어떤 법칙들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
- 그는 결코 먹어선 안 되는 것도 있고, 매우 검소한 옷차림을 해야 한다.
- 장식이나 호화로운 빛깔의 옷을 걸치는 것이 금지된다.
- 그와 영혼들 간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으며 이 영혼들은 언제나 그에게 나타나 있으며 어떤 의미로는 그에게 내재한다.
* 원주민들은 춤을 추는 가운데 부락의 반족들이 서로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고, 호혜성에 대한 일종의 정열로서 여자, 물건, 서비스를 교환하고 어린이들을 근친결혼시키며, 상대편의 죽은 자를 매장해주고, 삶이란 영원하며, 인간은 서로를 도운다는 확신을 함께하며, 사회는 정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믿는다.-도덕주의자들이여 귀기울여라-
* 집단들은 영적인 삶과 현세적 삶의 두 부분이 대칭과 비대칭의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될 때까지 수직적으로 또는 수평적으로 나누어진다.
이 과정은 카두베오족의 회화에서 표현하려했던 그 방식과 마찬가지였다.
* 한 사회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관점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자면 종교적 사교법을 통해서 살아 있는 자들 상호간에 실존하는 관계를 숨기거나 미화하거나 정당화하려는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는 진리는 은폐할 수가 없다.
이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주제는 우리 인간들에게 영원한 질문이다. 철학이나 종교 또한 이 죽음 때문에 생겨난 사유다.
어떻게 살다가 죽느냐 또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질문은 인간들의 끊임없는 불안증에 시달리게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 또한 인간들의 욕심이나 호기심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사회에 나타난다.
이런 주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어떤 구조를 이루게 되고 어떤 문화를 가지게 되는지 레비스트로스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듯 하다.
그는 또 죽은 자가 주체가 될 수도 객체가 될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동등하게 대하고 싶은 게 아닌가 한다.
제 7부 남비콰라족
24 잃어버린 세계
브라질 중앙부의 민족학 탐험의 준비는 파리의 레오뮈르 세바스토폴 네거리에서 이루어진다.(남비콰라족으로 가는 준비과정)
석 달 동안 원주민들과 지냄으로써 나는 그들의 욕구를 알고 있었으며,
내가 가져가는 모든 물건들은 이중 기능을 지녀야만 했다.
첫째, 인디언들과 교역하는 데 쓰거나 선물로 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상인들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외진 지역에서 식량과 용역을 확보하는 수단일 되어주어야 했다.
어떤 특정한 사례를 연구함으로써 인간본성에 관해 깊이 파들어가기보다는 아메리카 대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쿠이아바에서 마데이라 강까지 고원지대의 서부를 가로지름으로써 민족학적으로 그리고 지리학적으로 일종의 브라질 횡단을 실행해보자 결심했다.
나는 전신선 또는 손대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길을 따라감으로써 남비콰라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또 북쪽으로 더 멀리 나가면 있다는 수수께끼 종족들은 누구인지 밝혀보고 싶었다.
중부 브라질의 초원지대는 거의 2천 킬로미터에 걸쳐 놀라울 만큼 동질적인 문화를 지닌 생존자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다. 이 문화의 특징을 든다면 방언에 의해 여러 갈래로 변화되었으나 같은 어족에서 나온 한 가지 언어를 가졌으며, 비교적 낮은 물질적 생활수준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조직과 종교적 사고는 고도로 발달되어 있었다.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에 관해서 우리들은 지나치게 단순한 견해를 지녔다. 제족의 사회조직과 종교적인 믿음은 북아메리카의 삼림지대와 태평양 지대의 종족들에게서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태평양 해안을 따라 도는 연안 항해를 통하여 멕시코와 페루의 문명도 역사상 여러 시점에서 분명히 교류를 시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적어도 2만년전에 벌써 아메리카 대륙에 인간이 출현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태평양 해안 전체-아시아 해안 또는 아메리카 해얀-에 걸쳐 하나의 강력한 활동이 일어나, 수천 년에 걸쳐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연안항해의 힘을 빌려 퍼져 나갔으리라는 가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아메리카 문명들의 기원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제2의 오류, 즉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세계와 단절되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2만 년 동난 아메리카는 전 세계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정정하는 일이다.
25 황야에서
2년 만에 되돌아오는 이곳 쿠이아바에서 나는 북방으로 500~600킬로미터 뻗어 나간 전신선의 상태가 어떤지 정확히 알고자 한다.
과라나-쿠이아바 주민들이 좋아하는 자극성의 기호품, 중부와 북부의 마투그로수 사람들에게는 이 과라나가 남부의 마테에 비할 만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탐험 준비를 위해 쿠이아바에 한 달 동안 머물렀다. 목초도 사냥거리도 없는 불모의 지대라는 고원을, 건기의 6개월 동안 횡단해 가야 하는 여행이었다.( 조장 풀렌시오와 마투그로수에 정착하여 사는 포루투칼 옛 가문의 출신들과 소들과 반문명화한 파레시 인디언 젊은이들 등)
로자리우 오에스테 도착- 주민이 천여 명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주민 대부분이 흑인 난쟁이 그리고 갑상선이상자들이었다.
톰바도르 산 정상에서 야영(톱니바퀴가 부러져서)-10월에서 3월까지 우계, 비가 거의 매일 내림, 건계, 기온이 낮에는 최고 40도까지 오르고, 밤에는 최저 8도까지 내려감.
말벌이나 모기들이 들끓는 지역, ‘피움’과 ‘보라’ ‘슈루’ 같은 피를 빨아먹는 아주 작은 각다귀들도 있었다. 그리고 땀을 좋아하는 꿀벌들(눈핥기라는 별명을 가진)
디아만티누- 타파조스 강- 아리노스 강-샤크레 강-파파가이우 강-파레시(1박)-파파가이우 강(우티아리티 전신국 주재소) 맞은 편 강가에 남비콰라족
제 8 부 투피 카와이브족
30 카누를 타고(쿠피 카와이브족을 찾아)
우티아리티에서- 주루에나-주이나-캄푸스 노부스-빌례나-마지막 전신국들인 트레스 부리티스와 바랑 데 멜가수(기아에 시달리다가 여기서부터 기후가 바뀜)
바랑 데 멜가수에서 먹은 음식(석쇠에 구운 악어 꼬리, 앵무새를 구이, 자쿠새 구이를 넣은 스튜, 무툼(야생칠면조), 캐러멜을 발라 구운 자쿠새 등), 여행의 마무리 계획
피멘타부에느 전신국 도착(20여명이 소속되어 있음)-중요한 정보 제공, 즉 아직도 원시적인 상태로 남아 있는 투피 카와이브족에 관한 것- 전신국으로부터 빌린 카누 두 척, 노 저을 살람 네 명, 그리고 우리 측 두 명이 즉흥적인 모험을 떠남
카누 타기...사고 종류에는 세쿠(강바닥에 물이 말라버린 것), 카쇼에이라(급류), 살투(폭포) 등 흥미로운 것은 각 경우마다 노 젓는 사람들이 즉각 즉각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31 로빈슨
나흘 동안 강을 거슬러 올라감. 닷새째 되던 날 목적지 도착.
문데족- 인구 25명, 육체적 외모는 남비콰라족들과 딴판으로, 몸집이 땅딸막하고 다리도 짤막하였는데, 피부는 굉장히 맑았다. 피부가 약간 몽고인종 같은 얼굴 모습과 어울려서, 몇몇 원주민들을 코카서스인처럼 보이게 하였다.
이 원주민들은 꽤나 꼼꼼하게 자기의 털을 뽑아내고 있었다.(속눈썹은 손으로 뽑고, 눈썹은 밀랍을 발라 굳어지게 해놓고 잡아떼는 방법, 머리카락은 앞쪽에서 자르는데 태우는 방법)
그 원주민들은 민족학에 관한 문헌 속에서는 전혀 언급된 적이 없었다.
옥수수, 마니오크, 고구마, 땅콩, 담배, 호리병박, 그리고 잠두콩과 강낭콩 등을 경작.
애벌레와 야자수...가금사육으로 농경과 사육이 뒤섞여 공존하는 밭을 가꾸고 있음.
나는 원시적인 상태의 끝까지 가보고자 원했다. 열광적인 답파를 하며 돌아다닌 끝에, 드디어 나는 나의 원시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지나치게 미개하였다.
그들의 존재가 여행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내게 밝혀졌기 때문에 그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한정된 물자와 나와 내 동료들이 처해 있던 육체적인 쇠약 등은 몇 달을 걸릴 조사 대신에 짧은 며칠간의 임간 학교 생활만을 허락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들 원주민은 내게 자기네 풍습과 신앙을 가르쳐줄 채비가 되어 있었으나,
나는 그들의 말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적어도 모든 것에 다 정통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접하고 싶다. 나는 거대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고, 시야를 좁혀 이 점토질의 강변과 한 줌의 풀포기를 바라본다. 내가 다시 시야를 넓혀서 볼 때,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의 하인)의 발자취는 없는 이 한 뼘 땅뙈기 주위에서 뫼동 숲을 보지 못하리라는 증거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틀에 걸려서 피멘타부에누에에 도착(1938년 10월), 새로운 계획을 세움. 투피카와이브족에게 가기 위해 전신국에서부터 하루를 향해 사흘 동안 카누를 저어 가야함. 즉 그곳은 아가라페 두 포르키누 하구이다.
론돈(탐험가)은 1915년에 투피어를 쓰는 미개인의 집단 몇 개를 발견.
쿠르트 니무엔다주(민족학자)의 조사 덕분에 그 부족의 역사를 알게 됨.
투피 카와이브족의 무리들은 보통 마을 하나만으로 구성되어 있고, 사냥터도 한 곳을 정해 그 경계를 아주 조심스럽게 지키며, 이웃하는 무리들과의 사이에 엄격한 규율을 정해놓느니보다는 동맹을 맺자는 생각에서 외혼제를 행하고 있다.
피멘티부에누 전신국에서 개화된 투피 카와이브족들과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약 20개 개량의 무리이름을 알아냄.
아직 아무의 손도 닿지 않은 채로 있는 투피족의 어느 마을에 최초로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400년이라는 세월을 두고 레리, 슈타덴, 소아레스 데 소자『1587년의 브라질』, 트베와 만나는 것이며, 『수상록』 속의 식인종이라는 항목에서 만났던 투피족 인디언들과 나눈 대화에 관해 명상하던 몽테뉴하고도 만나보게 되는 셈이다. 이 얼마나 큰 유혹인가!
* 레비스트로스는 투피 카와이브족을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교차편집기법 또는 첨삭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기법으로 어떤 효과를 얻을 수 있었는지?
* 원주민들은 이름을 부를 때 즉각적으로 또 문데족 같은 경우는 사람을 죽였을 때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름을 지어 부른다. 그들은 이름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쓰고 버리는 이름 같기도 하고 훈장 같기도 한 이름들이 궁금하다.
제 9부 귀로
37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
캄푸스 노부스는 숙박지 중에 제일 비참한 곳으로 열두어 명 가량의 사람들이 말라리아, 라이슈마니아 기생충병, 십이지장충병 따위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굶주림 때문에 빈사상태에 있었다.
얼마 안 있으면 종족 전체가 뿌리째 사라져버리고 말 50~60명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도 좋다는 묵인을 얻어냈다는 것, 겨우 그런 결과 하나를 얻어내기 위해서 정든 고향이며 친구들이며 습관들을 버리고, 이렇게 많은 경비와 노력을 치르고 건강까지도 위태롭게 만들어 버린 셈이란 말인가.
이들이 하는 주된 일이라고는 이를 잡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것밖에 없는데도 조사자의 일의 성패 여부는 이들의 변덕에 달려 있다.
이런 자문을 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하러 여기 왔는가? 무슨 기대를 걸고? 무슨 목적으로? 도대체 정확하게 말해서 민족학 조사란 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태어나서 자라난 생활 체제를 비판하고 재고한 나머지, 내가 극단적인 직업 선택을 한 결과란 말인가?
역설적이지만 나의 모험 생활은 어떤 새로운 세계를 내 앞에 전개시켜주지는 않고, 오히려 이전의 세계를 내 마음속에 소생시켜주었고, 반면에 내가 찾아 나섰던 세계는 점점 내게서 멀어져가는 것이었다.
ex)쇼팽 연습곡 제3번, 작품 10의 선율-제일 평범한 것이 이 황야에서 내 마음을 잡아버렸을까?-들으면 들을수록 늘 새로운 매력을 느끼게 한다. 처음에는 무기력하게 시작되었다가 얽히고설키게 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는 얽힘을 풀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그 혼란에서 어떻게 헤어 나와야 할지 불안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떤 하나의 선율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
그 선율을 듣고 보면 바로 앞의 전개가 갖고 있는 새로운 뜻을, 즉 그런 전재를 추구해온 것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고, 이 예기치 않는 해결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로구나...
그런 더위에 눌려 지쳐버린 답답한 중에 희곡「아우구스투스 신으로 받들어지다」를 쓴다.
제1막 신격화에 대한이야기
(왕 아우구스투스, 왕비 리비아, 왕의 동생 카밀라, 카밀라와 사랑하는 사람 시나)
제2막 시나이야기(시인 기질인 탐험가? 화자 자신)
제3막 황제와 시나와의 대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