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에는 일반적인 성경 독자들에게 익숙한 인물이 기록되어있는데, 사사 옷니엘(4:13)과 갈렙(4:15)과 같은 인물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유다 지역의 일부에 정착했던 시므온 지파의 자손들이 미미하나마 소개된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습니다(4:24~43).
우리는 이 본문에서도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나라가 망해도 백성은 망하지 않으며, 더욱이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역대기를 쓰는 에스라는 아마도 이런 점을 이스라엘을 재건해야 하는 백성들에게 심어주기를 원했을 것이고, 성령님께서는 그를 감동하사 이 성경을 쓰게 하셨을 것입니다. 나라가 망할 때의 왕은 시드기야였는데, 하나님은 거기서 모든 것을 단절시키지 않으셨고, 그 속에서도 계속해서 역사하고 계셨고 왕통을 보존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다 끝난 것 같고 가정이나 사업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거나, 주무시거나, 포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그분의 전능하시고 선하신 손안에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계십니다. 성도가 모든 상황 속에서 이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보석같이 빛나는 인생 야베스, 수많은 인물을 열거하면서 왜 성경 기자는 특별히 야베스에게서 멈추어 섰을까요? 그래서 더 자세하게 설명할까요? 성령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기를 원하실까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보석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일 것입니다. 야베스는 절망 중에 소망을 주는 인물로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난처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힘이 되어줄 만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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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어느 한 밤중에 아브람에게 찾아와 그에게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며, 그의 자손도 밤하늘의 많은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라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이 있고 나서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윗에게 찾아가 그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셨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그의 언약을 더욱 구체화시키시고 발전시키셨습니다. 다윗의 집과 그의 나라가 하나님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다윗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는 언약이었습니다.
족보,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
역대상 1장부터 무려 9장까지 이어지는 족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피로감을 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누가 누구를 낳고’라는 공식으로, 읽기도 어려운 이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족보를 영적으로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아담부터 포로기 이후의 족보까지를 상세히 나열하고, 또 의도적으로 2장부터 오늘 본문인 4장까지는 다윗의 가문에 무게를 실어 기술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맺으신 언약을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삶을 이어가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적국에서 포로로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문화적 혼돈, 정치적 혼돈, 가치관의 혼돈 그리고 정체성의 혼돈을 포로기 이후의 삶을 이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겪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 족보를 나열해 나가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잊지말라’라는 영적인 회복을 전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렌즈를 통하여 1장에서 9장까지 이어지는 족보를 읽어야만, 족보가 상당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상황과 상관없이, 여전히 일하고 계신 분이며, 그들을 잊지 않았다는 진리를 역대기 기자는 밝히고 있습니다.
나머지 유다의 아들들에 관한 소개
오늘 본문은 야곱의 네 번 째 아들인 유다의 자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2장에서 다루지 못한 유다의 자손에 대하여 연속적이고 추가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잘 아시는 바와 같이, 2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등장합니다. 보통 자손의 가문을 나열하고자 하면, 첫째 아들 순서부터 시작하는 게 상식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대기 기자는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상식을 깨뜨려, 넷째 아들인 유다의 가문을 먼저 선보입니다. 후에 계속해서 이어져 나올 다윗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유다 가문에서 주목해볼 만한 내용인 다윗 왕족의 계보를 3장에서 자세히 기록한 뒤에 유다의 가문에 대한 내용을 2장에서 그치지 않고, 4장에 이르러 다시 언급합니다.
그래서인지, 4장에서 나오는 유다 자손에 대한 기록들은 다소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이 학자들의 일반적인 입장이기도 합니다. 4장에 나오는 유다 족보의 특이점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족보 중간중간에 지속적으로 여자들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의 직업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도 나옵니다. 개연성이라곤 다른 족보들과 같이 ‘누가 누구를 낳고’의 공식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뒤죽박죽 짜여진 족보속에서도, 역대기 기자는 몇 가지 틀을 가지고 유다 가문을 소개합니다.
먼저, 4장 1절에서 8절은 유다가 자신의 아들 베레스를 통해 얻은 자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구간에서 특별히 주목해볼 만한 것이 있다면, 3절과 4절에서 성읍의 지도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훌과 브누엘과 에셀은 성읍을 다스린 자들입니다. 4절에서 나오는 ‘아버지’라는 표현은 육체적인 아버지를 의미하기 보다는, 창시자 혹은 지도자란 의미로 보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 훌은 베들레헴의 지도자라고 나오는데, 역대기 2장 54절에서 그의 아들 살마가 베들레헴과 연관된 인물로 이미 언급하며, 4장 4절에 이르러 살마의 아버지 훌이 베들레헴의 지도자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렇게 베들레헴이 여러 번 언급되는 이유는, 베들레헴은 다윗의 출생지로서, 유다 가문에게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성읍이기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배출한 베들레헴이라는 장소는 유다 가문의 정신이 담긴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가문을 통해 이러한 장소를 언급함으로, 잊혀져 가고 있던 이스라엘의 정신적 고향을 백성들로 하여금 되새김질 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4장 11절에서 12절은 글룹이라는 인물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에서는 글룹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아마 우리 모두는 글룹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글룹’이라는 이름의 발음과 ‘갈렙’이라는 이름의 발음이 비슷하여, 70인역은 글룹을 갈렙으로 추측하는 측면도 있긴 하지만, 11절과 12절에 나오는 9개의 이름은 이 곳외에 다른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이러한 문맥상, 글룹 역시 갈렙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글룹이라는 다소 생소한 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역대기 기자는 무던히 애를 써가며 유다 가문의 무명의 사람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에게는 12절 하반절에 나오는 레가 사랍들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목적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스라엘의 침체된 정체성을 깨우기 위한 족보에 무명의 이름들을 기록한 그의 의도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는다 사실을 더욱 피부로 와닿게 전하기 위함도 있었을 것입니다.
4장 13절에서 16절은 옷니엘과 갈렙의 계보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 지파를 대신하여 가나안을 정탐한 갈렙과 아람 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 옷니엘입니다. 두 인물을 연속적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계보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기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지경을 넓히는 데 아주 커다란 공을 세웠기때문입니다. 당시 역대기를 접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갈렙과 옷니엘을 통해 땅의 지경이 넓어졌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안겨다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긴 포로생활 끝에 돌아왔고, 여전히 바벨론의 시선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었으므로, 그들에겐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의 영토의 지경이 넓어지길 소망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소망을 옷니엘과 갈렙의 계보를 통하여 하나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역대기 기자는 독자들에게 심겨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본문 17절에서 20절은 유다 가문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무리들을 집대성하여 기록함으로, 유다 가문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참고문헌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한편, 17절에 나온 ‘에스라’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하긴 하지만, 그는 ‘에스라서’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입니다. 유다 자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본문 21절에서 23절은, 역대상 2장 3절에 나온 유다의 아들 셀라 계보를 보다 면밀히 정리하며, 우리와 같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독특한 유다 가문을 마무리합니다.
무명한 야베스의 기도
본문 1절에서 23절에 나오는 유다 가문의 특이함을 최대한 간촐하게 설명해드리면서, 일부로 생략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하게 잘 알려진 야베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9-10)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족보를 소개하는 중간에 갑자기 야베스라는 인물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이 사실부터가 독특하지만, 야베스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는 알 수 없고, 그가 누구의 자손인지, 그가 낳은 계보는 어떻게 이어져 가는지 또한 알 길이 없습니다. 그는 유다 가문속에서 혜성같이 등장했습니다. 우리가 야베스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의 이름이 야베스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고통’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심정이 어찌나 고통스러웠던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고통이라고 지었습니다. 둘째는, 그는 형제들 중에서 귀중한 자였습니다. 마지막 셋 째는, 그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었다. 그저 기도했던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 קָרָא ‘카라’라는 단어를 통해 그가 힘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그의 기도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더 나옵니다. 그는 기도중에 ‘만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께 ‘만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기도하면 믿음이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중에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 부정적인 의미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에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는 ‘만약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만약이라는 기도는 내가 놓지 못했던 나의 가치관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려고만 했던 나의 완악한 습성을 포기하는 의미입니다. 만약이라는 기도는, 나의 원함보다는 하나님의 원함이 무엇인지 살펴보겠다는 폭넓은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약이라는 기도 후에,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자세로 ‘만약의 기도’를 완성하셨습니다.
야베스가 사용했던 ‘만약의 기도’도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복을 구했지만,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 복을 당장에 그에게 주실지, 혹은 수년후에 주실지, 아니면, 그의 생에 복을 받아, 그의 지경이 넓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만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조심스럽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때문입니다. 기도란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나를 내려놓는 작업입니다.
한편, 야베스의 기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도 합니다. 2000년 초반에 브루스 월킨슨이 쓴 ‘야베스의 기도’라는 소책자가 교계에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그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복을 얻기 위한 기도의 방법을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설명했습니다. 역대기에는 야베스의 기도 외에도 몇개의 기도가 더 나오는데, 일각에서는 그 기도들에 비하면 야베스의 기도는 그저 자신의 지경을 넓혀달라는 간구 밖에 없는, 다소 이기적인 기도에 불과하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야베스의 기도는 당시 바벨론 포로 생활 이후에 영적인 침체기를 겪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영적인 ‘고통중에’ 있다는 사실을 그의 이름에서 단편적으로 보여주며, 바벨론의 압제로 인해 잃어버렸던 이스라엘의 지경을 다시 찾도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여 부르짖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만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기도의 응답은 인간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며,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달려있다는 사실 또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보좌를 마음대로 흔들 수 없습니다. 보좌에 앉으실 권한이 있으시고, 일어설 권한도 있으시며, 보좌에서 말씀으로 응답하실 수도 있으시고, 침묵을 지키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겸손히 주의 발 아래 엎드려, 카라, 부르짖을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인내의 영역이자, 자아의 죽음의 영역입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자신의 지경만을 넓혀달라고 했던, 그런 논란이 되는 기도인지, 혹은 기도의 좋은 모델이 되는지에 대한 여지는 굳이 우리가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베스의 이야기가 담긴 본문 9절에서 10절속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야베스가 누구의 후손인지, 그의 계보가 어떻게 이어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의 직업이 무엇인지, 생의 업적이 무엇인지 또한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중한 자
그런데 과연 무엇때문에 그가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이러한 그에 대한 성경의 칭찬에 우리는 무슨 근거로 동의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러한 의문은 욥기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일종의 그의 지경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 처참한 소식을 들은 욥의 세 친구는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에게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그들 나름의 신학적 사고, 논리적 사고로 첨언해주며, 객관적인 입장에 서 있기도 하며, 가까운 친구로서만 해줄 수 있는 말들로 욥의 고난을 해석합니다. 세 친구의 말을 가만히 들여다 살펴보면, 하나도 틀린 말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더욱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옆 사람이 나의 상황에 대해 전혀 맥을 잡지 못하여 다른 말을 한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친구들의 말이 일리가 있기때문입니다.
욥이 친구들의 말에 반응하여 꺼냈던 말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욥의 말이 전부 다 의로웠습니까? 그는 진정 하나님께 원망을 쏟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는 논리를 내세우며 자신의 고난을 해석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심지어, 그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욥과 그의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실로 흥미롭습니다. 욥기 42장 7절입니다.
(욥기 42: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틀린 말을 하지 않았던 세 친구에게 노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던 욥의 말이 옳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욥은 세 친구중에 귀중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입니까? 그건 다름 아닌, 기도였습니다. 욥은 위기와 절망들을 모두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그 분 앞에서 부르짖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을 기도로 숨김없이 토로하는 욥의 모습을 귀중하게 보셨습니다.
유다 가문중에 야베스는 모든 것이 불분명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무엇때문입니까?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기도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 가운데 올바른 기도를 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환난중에 자신 앞에 나와, 세속적 가치관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부르짖는 자를 귀중하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아버지가 위기 가운데에서 부르짖는 자녀의 소리가 응당한지 검토하고 있겠습니까? 오히려, 아버지는 위기 가운데 놓인 자녀의 심정을 불꽃같은 눈으로 살필 것입니다. 그리고 위기 가운데에도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자녀의 생명이 한 없이 귀중해 보이기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찾고 부르짖을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위기 속에서도, 그것을 세속적 논리와 힘으로 해결하기보다, 자신 앞에 나아와 부르짖는 모습을 귀하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본문 10절 마지막 부분에 나온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라는 문구보다, 기도의 사람으로 등장했던 무명한 자를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보신 성경의 증거에 더욱 관심을 두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허락하시는 부분은 ‘만약’이라는 그분의 주권적 영역속에서 내려놓으십시다. 그리고, 위기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애통한 심령을 숨김없이 부르짖는 교우님들의 모습을 귀중하다 여기실 하나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하십시다.
역대상은 서두에 계속해서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뿌리를 기억하게 함으로 다시 한 번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지파에 대한 소개에 이어 시므온 지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시므온의 아들들과 분배된 땅(4:24-33절)
(24-27) 시므온의 아들들은 느무엘과 야민과 야립과 세라와 사울이요 사울의 아들은 살룸이요 그의 아들은 밉삼이요 그의 아들은 미스마요 미스마의 아들은 함무엘이요 그의 아들은 삭굴이요 그의 아들은 시므이라 시므이에게는 아들 열여섯과 딸 여섯이 있으나 그의 형제에게는 자녀가 몇이 못되니 그들의 온 종족이 유다 자손처럼 번성하지 못하였더라
시므온의 아들들에 대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볼 부분은 시므이에게는 아들 열여섯과 딸 여섯이 있으나 그의 다른 형제들에게는 자녀가 많지 못했고 그 온 종족이 유다 자손처럼 번성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한 부분입니다. 또한 인원만 비교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후 28절에서 33절에는 시므온 지파가 얻은 땅에 대하여 나옵니다.
(28-33) 시므온 자손이 거주한 곳은 브엘세바와 몰라다와 하살수알과 빌하와 에셈과 돌랏과 브두엘과 호르마와 시글락과 벧말가봇과 하살수심과 벧비리와 사아라임이니 다윗 왕 때까지 이 모든 성읍이 그들에게 속하였으며 그들이 사는 곳은 에담과 아인과 림몬과 도겐과 아산 다섯 성읍이요 또 모든 성읍 주위에 살던 주민들의 경계가 바알까지 다다랐으니 시므온 자손의 거주지가 이러하고 각기 계보가 있더라
이 땅은 시므온 지파가 여호수아 시대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분배받은 땅들의 목록입니다. 그들의 땅은 유다지파가 얻은 땅에서 부분을 분배받았습니다. 이에 대한 여호수아 19장 9절의 기록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시므온 자손의 이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 취하였으니 이는 유다 자손의 분깃이 자기들에게 너무 많으므로 시므온 자손이 자기의 기업을 그들의 기업 중에서 받음이었더라” 시므온 지파는 독자적으로 기업을 얻지 못하고 유다 자손이 얻은 분깃이 많아 그 중에서 기업을 함께 받게 됩니다. 그러다가 시므온 지파는 그 땅이 비좁다고 느끼게 되어 목초지를 찾아 히스기야 때에 함의 자손의 땅을 점령합니다.
시므온 지파 지도자들과 이주(4:34-41절)
(34-41) 또 메소밥과 야믈렉과 아마시야의 아들 요사와 요엘과 아시엘의 증손 스라야의 손자 요시비야의 아들 예후와 또 엘료에내와 야아고바와 여소하야와 아사야와 아디엘과 여시미엘과 브나야와 또 스마야의 오대 손 시므리의 현손 여다야의 증손 알론의 손자 시비의 아들은 시사이니 여기 기록된 것들은 그들의 종족과 그들의 가문의 지도자들의 이름이라 그들이 매우 번성한지라 그들이 그들의 양 떼를 위하여 목장을 구하고자 하여 골짜기 동쪽 그돌 지경에 이르러 기름지고 아름다운 목장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이 넓고 안정 되고 평안하니 이는 옛적부터 거기에 거주해 온 사람은 함의 자손인 까닭이라 이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이 유다 왕 히스기야 때에 가서 그들의 장막을 쳐서 무찌르고 거기에 있는 모우님 사람을 쳐서 진멸하고 대신하여 오늘까지 거기에 살고 있으니 이는 그들의 양 떼를 먹일 목장이 거기에 있음이며
유다 지파가 강력한 힘을 얻고 번성할 때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그늘 아래서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그 땅에서 다른 곳을 향해 살 곳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비록 몇몇 지도자들의 가문은 번성했지만 유다 분깃에서 얻은 땅에 모여 살 수 없어 결국 흩어지는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후 내용도 분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므온 지파 가문의 지도자들(4:42-43절)
(42-43) 또 시므온 자손 중에 오백 명이 이시의 아들 블라댜와 느아랴와 르바야와 웃시엘을 두목으로 삼고 세일 산으로 가서 피신하여 살아남은 아말렉 사람을 치고 오늘까지 거기에 거주하고 있더라
이번에는 시므온 자손 중 오백 명이 두목들을 세워 세일 산으로 가서 아말렉 사람을 치고 그 땅을 점령하여 살게 됩니다. 이 기록외에도 시므온 지파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의 분리시에 많은 수가 북이스라엘 쪽으로 이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여러 상황들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지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런 지파가 된 것입니까? 그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천천히 시므온 지파의 스토리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므온 지파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한 야곱의 말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49장 5-7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들의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야곱은 죽기 전 유언을 하며 아들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전하면서 시므온과 레위의 칼은 폭력의 도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을 때 오라비였던 시므온과 레위가 칼로 세겜과 그 족속을 모조리 죽여버려 피의 복수를 감행했던 내용에서 기인된 언급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형들을 만난 후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할 때 유일하게 인질로 감옥에 가두었던 사람이 ‘시므온’이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생각할 때 갈등을 불러일으키거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한 사람을 ‘시므온’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므온은 혈기가 있었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했으며, 충동적이며 폭력적인 성향이 강했던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므온의 성품과 삶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 야곱은 그들이 저주를 받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질 것임을 미리 알려준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세력화되어 민족의 암 덩어리같은 존재가 되지 않도록 바벨탑 사람들을 흩어버리듯 가나안 곳곳에 흩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야곱이 선포한 말씀이 성취된 것이 시므온 지파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레위는 다른 방식으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는 광야의 사건과 연관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서 나왔을 때 싯딤에서 모압여인들과 음행을 한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들은 음란한 제사를 행하며 그들의 우상숭배에 동참하며 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노하셨을 때 한 민족의 지도자가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와서 장막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다가 비느하스의 창에 두 남녀가 한 자리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때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영까지 이방여인을 데려온 민족의 지도자는 바로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였던 ‘시므리’였습니다. 그때 염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많았고 시므온 지파의 인구수는 처음 조사 때 59,300명에서 두 번째 인구조사 때 22,000명으로 줄어 절반이 안되게 감소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시므리를 죽인 비느하스는 레위지파이며 아론의 손자였습니다.
이처럼 레위 지파와 시므온 지파의 분노와 폭력은 그 결이 다르게 흘러갑니다. 특히 같이 흩어짐을 당할 것이라고 했던 레위 지파는 이전에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간 시기에 사람들이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범죄하여 하나님의 분노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편에 서서 악한 이들을 칼로 쳐서 하나님의 분노를 가라앉게 하여 제사장과 성막을 돌보는 하나님의 거룩한 지파로 구별되는 사건이 있었고, 비느하스 같은 인물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레위의 칼은 자신의 감정과 사욕에 치우친 칼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를 담아내는 거룩한 칼로 쓰임을 받게 됩니다. 이로 인해 레위는 야곱에게 시므온과 동일하게 저주를 받았지만 그 흩어짐이 시므온과 같지 아니하고 각 지파의 땅에서 도피성을 포함하여 48개의 성읍을 부여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돌보며 섬기도록 흩어져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소명을 위한 거룩한 흩어짐이었습니다.
결국 신명기 33장에 모세의 유언과도 같은 민족들을 향한 축복에서 레위와 시므온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지게 됩니다.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 주의 법도를 야곱에게, 주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며 주 앞에 분향하고 온전한 번제를 주의 제단 위에 드리리로다 여호와여 그의 재산을 풍족하게 하시고 그의 손의 일을 받으소서 그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자와 미워하는 자의 허리를 꺾으사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옵소서’ 레위 지파는 야곱의 저주에서 모세의 축복으로 전환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그들의 칼이 감정과 사욕의 칼이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를 위한 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오히려 음란한 범죄를 통해 민족을 위기에 빠뜨린 범인처럼 수치스러운 순간만을 남겼고 모세의 축복에서 11지파가 다 언급되는데 유일하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지파가 바로 ‘시므온 지파’였습니다. 인터넷에 ‘악플보다 무서운 것이 무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무관심이 가장 무서운 징계라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의 축복에서 유일하게 언급이 되지 않은 시므온 지파는 그 미래가 어두울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본문은 최대한 시므온 지파에 대하여 긍정적인 표현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는 역대상의 기록목적이 비판이 아닌 위로와 회복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자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 모든 내용을 살펴볼 때 시므온 지파의 흩어진 역사는 결국 그들이 저질렀던 악행에 대한 슬픈 저주의 성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한량이 없습니다. 이 시므온 지파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 신약에 나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왜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인 것이 중요합니까? 베드로의 지파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몬이라는 헬라식 이름의 히브리 표현은 ‘시므온’입니다. 왜 그의 이름이 하필 ‘시므온’이었습니까? 베드로의 평소 모습이 마치 조상 시므온과 시므온 지파를 떠올리게 하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매우 다혈질에 분노를 참지 못하며 감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잘랐고 또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세 번이나 부인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면서도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혈기도 많았지만 실수도 많은 ‘시므온’의 모습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시몬 베드로의 모습을 볼 때 그의 이름이 그에게 걸맞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시므온’이라는 지파의 연약한 모습을 역사속에서 뚜렷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시므온 베드로’를 품어주시는 모습 곧 말고의 귀를 붙여 주시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 주시고,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를 찾아가 세 번 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시몬이라 호칭하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봐 주시며 회복시켜 주신 스토리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이 그들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가능함을 보여주시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하필 베드로의 이름이 ‘시몬’, ‘시므온’이었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진 용서와 사랑을 통해 시므온 민족의 자손들 뿐 아니라 가장 실수많고 혈기많고 허물많았던 심지어 모세의 축복에도 이름이 빠져있던 시므온을 알고 있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특히 그런 연약한 이름의 대명사 ‘시므온’에게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인 ‘베드로’란 이름을 주신 것이 더욱 그러한 사랑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요한계시록 7장 7절-10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세의 축복에서 빠졌던 시므온 지파의 이름이 당당히 12지파의 이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죄와 죽음으로 멸망에 이를 수 밖에 없던 이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다시금 자녀된 이름으로 호명을 받는 ‘양자됨’의 은혜를 누리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시므온’과 같지 않으십니까? 그동안 우리의 삶이 분노로 타인에게 상처를 줄 뿐만이 아니라 감정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선택들을 할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또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된 우리의 몸으로 음란함과 정욕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삶을 살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로 인해 야곱에게 저주를 받고 모세에게는 잊혀진 이름이 된 시므온 지파처럼 부모님에게도 분노를 일으키고 지도자들에게 잊고 싶은 골칫덩어리 같은 삶을 살아오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시므온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시고 그의 많은 실수와 혈기에도 불구하고 품어주시고 수없이 기회를 주사 교회의 지도자로 삼아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다시금 찾아오사 기회를 베풀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순절 넷째 주일을 보내고 있는 이 참회의 절기를 통해 레위의 칼날이 사욕의 칼날에서 거룩한 분노의 칼날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칼날로 변화된 것처럼, 혈기와 욕망 가득한 칼날 같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거룩한 비느하스의 삶처럼,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연약한 시몬의 삶에서 흔들림없는 반석같은 베드로와 같은 삶으로 변화되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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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상은 아담부터 포르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계보를 1장부터 9장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유다 자손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도 유다 자손에 대해서 상당 부분을 언급했는데, 다시 3장에서 유다 자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다윗 왕족의 계보를 상세하게 기록한 다음, 이제 4장에서 다시 유다 자손의 계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왕족의 계보인 3장을 가운데 두고 유다 자손이 나머지 집안 사람들에 대한 계보를 제시하는 것은 왕족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낄 수 있는 그들을 배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 1~8절까지는 베레스의 자손 홀과 아스홀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고, 9~10절에는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 있으며, 11~23절까지는 글룹, 옷니엘, 갈렙, 에스라와 다른 사람들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고, 24~43절까지는 시므온 자손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특이한 것은 지금까지 자손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말씀들 중에 기도문이 들어가 있다는 점입니다. 유다 자손의 계보를 정리하다가 갑자기 야베스라는 사람을 소개합니다. 야베스는 이전에 지역 이름으로 언급된 적이 있지만, 사람 이름으로는 이곳에 처음 등장합니다.
본문에는 야베스가 누구의 자손인지, 혹은 그의 후손이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느 시대 사람이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야베스의 이야기가 유다 자손의 계보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유다 자손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입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이야기는 계보가 이슈가 아니라, 다른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이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베스 이야기는 겉으로 보면, 한 사람이 이스라엘 하나님께 기도하여 복을 받은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야베스에 대해서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합니다. 첫째, 가족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는 것, 둘째, ‘야베스’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고통속에서’ 낳았기 때문에 지어졌다는 것, 셋째, 야베스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정보를 기초로 ‘야베스의 기도’라는 베스트셀러가 나왔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부르스 윌킨슨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네 가지를 제안합니다. 1) 하나님께 복 받기를 사모하라 2) 더 큰 개인적인 ‘지역’을 추구하라 3)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 4) 시험에서 도망하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이 네 가지가 마치 하나님께 축복을 받는 공식인 양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한 이유가 ‘야베스의 기도’를 하지 않아서 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열려라 참깨!’ 주문을 외우면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책은 누구든지 네 가지 요소로 기도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왜 주님의기도를 가르쳐 주셨으며, 성경에는 왜 수많은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야베스의 기도는 역대기 기자가 살았던 시대의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야베스’의 이름처럼 하나님께 고통만 안겨주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고통을 주는 사람들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고통을 주었던 야베스가 더 이상 남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10절 하반절에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번역하고 있는 문장을 ‘내가 고통을 주지 않게 해 주십시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어 문장은 두 개의 번역이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문맥상 이 번역이 더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야베스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의 이름을 야베스 즉, 고통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이제 야베스는 더 이상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는 아닙니까?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우리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다면 우리가 바로 야베스입니다. 이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먼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받은 복은 내 욕망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은총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지역이 넓어져도 그곳은 나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때 나의 손은 주님의 손이 되어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능력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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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얻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은 단지 과거에 머물거나 사장되지 않고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게 하고 다시 과거의 실패와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인식인 중요하고 나라의 위정자를 뽑을 때에도 이 역사인식에 대하여 중요한 자질로 여겨 그 부분에 대해 검증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역대기는 마치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의 반복과 같이 여겨지는 책입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확연히 다른 책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서는 바벨론 유수의 입장에서, 즉 정치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다면 역대기는 포로 생활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포로기 이후의 관점에서 유대인의 역사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보자면 열왕기서가 포로기에 대하여 ‘우리가 왜 망했을까’를 다룬다면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귀환하여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역사를 되돌아보고 공부하는 이유는 사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느냐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그 과거의 사건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주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살피는 일 중에서도 사건을 중심으로 살피는 경우가 있고 인물을 중심으로 살피는 경우가 있는데 역대기는 먼저 족보를 살피는 것으로부터 과거의 계보를 추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 공동체는 자신들의 뿌리가 무엇이고 그 뿌리로부터 교훈을 얻기 원하였고 뿐만 아니라 족보를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의 과오를 정리하고 무엇을 추구하고 목표로 하는지까지도 그 방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오늘 4장부터 9장까지는 이스라엘 지파의 족보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1장부터 3장까지는 아담에서 이스라엘(야곱)과 그 가족까지, 그리고 유다 자손들, 다시 말해 다윗의 선조들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이스라엘 지파들을 정리하면서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잘 보면 열왕기와는 다른 관점을 파악하게 되는데 그것은 역대기의 족보는 남왕국의 지파인 유다, 베냐민과 이스라엘에 제사장과 사역자를 배출했던 레위 지파에 치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대기의 저자는 노골적으로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역대기가 북왕국 이스라엘과는 관련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 이후에 통일왕국 이스라엘은 두 나라로 분열하여 북쪽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되었고 남쪽에는 유다족속과 베냐민이 속한 남왕국 유다가 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와 배교를 일삼다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망하고 이후 기원전 587년경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결국 나라를 완전히 잃고 70년 만에 폐허가 된 나라에 다시 돌아온 이스라엘은 남왕국의 중심지파인 유다지파와 다윗왕조의 족보만을 의도적으로 불균형을 이루게 배열함으로 자신들의 과거 역사가 주는 최대의 교훈 즉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욕망을 따라 세속을 선택한 민족은 결국 패망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남유다 즉 다윗 왕가의 혈통을 적통으로 인정하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혈통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은 다윗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한 그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통해 하나님이 다윗의 나라에 영원토록 복을 주시며 그 나라를 형통케 하시겠다는 약속을 붙잡는 것만이 앞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이 계승하고 나아가야 할 전통이며 신앙이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후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영어로도 Jew(유대) Jewish(유대인)이라고 표시하고 있어서 결국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예수그리스도가 오시고 유다 족속에서 메시야가 오심으로 다윗왕에서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됨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다윗의 길로 행하며 다윗과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면 영원토록 그 후손에게 그 땅을 주시며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인간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실패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에 이르는 통일왕국은 겨우 120년만에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낼 실력이 없습니다. 지키고 싶어도 지키지 못하고 울어도 하지 못하고 결단해도 무너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겪고 피눈물 나는 어려움을 겪어야 그제서야 과거로부터 배우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인인지, 내가 얼마나 완악하고 강퍅한 존재인지를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의 족보는 무엇입니까? 오늘 나의 과거를 통해 나에게 깨닫게 하시고 돌이키며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피눈물 나는 역경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저주나 벌이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고 또 한가지는 나를 하나님께서 돌이키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려는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만 목적하여 사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해 배우시고 과거를 통해 깨달으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