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용서의 길, 속죄제.
1. 4장은 속죄제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은혜로운 관계를 유지하려면 죄 문제의 해결이 반드시 요구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가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죄의 결과가 거룩해야 할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속죄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힙니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오염과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속죄제가 다루는 것은 우발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의적이지 않은 죄들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이지 않다고 할지라도, 알고 지었거나 모르고 지었거나 상관없이, 인간의 모든 죄는 다 속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3. 죄는 죄를 지은 사람의 영향력에 따라서 다르게 다루어지지만(제물의 차이가 있다), 매우 가난한 사람의 경우는 밭에서 이삭을 주워서라도 가져올 수 있는 밀 1/10에바가 드려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그가 지은 죄의 더럽혀짐이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속죄제의 목표는 하나님과 범죄한 인간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속죄제는 알지 못한 중에 범죄한 모든 사람에게 속죄와 회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런 죄는 사실상 고의로 지은 죄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5. 죄에 대한 용서는 죄를 인정하고 뉘우칠 때 옵니다. 속죄제라는 의식은 용서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성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제사의식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오는 죄인을 기꺼이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심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부지 중에 지은 죄라도, 의도적이지 않고 고의로 짓지 않은 죄라고 할지라도 간과하지 말도록 속죄제는 우리에게 양심의 늘 깨어 있음을 요구합니다. 신자는 양심이 죄를 깨달을 때, 하나님께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속죄제는 이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부지 중의 범죄로 더럽혀지게 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가되,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죄제가 일상이었듯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성도의 일상이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죄를 가볍게 여기는 성도와 교회 공동체에게 이 속죄제 의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크다고 하겠습니다. 더 이상 “모르고 그랬다.”라는 말은 신자의 말이 아닙니다. 모르고 그랬다고 할지라도,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동일하게 죄이며, 그 죄는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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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제는 삶 가운데 죄를 인식할 때마다 속죄를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개역개정 2절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를 새번역은 ‘어떤 사람이 실수로 잘못을 저질러, 나 주가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하나라도 어겼으면’으로 해석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알고도 고의로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실수로 계명을 어겼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대로 지나치지 말고 바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속죄제를 드려야하는 대상은 제사장(4:3), 회중(4:13), 족장(4:22), 평민(4:27)으로 누구든 예외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본문에는 이중에서 제사장과 회중이 드리는 속죄제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
제사장의 속죄제 (3-12)
(3)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 구약에서는 제사장과 왕 그리고 선지자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택하셨다는 것 자체가 뭇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실수로 인한 잘못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무엘서의 엘리 제사장은 제사장인 두 아들의 죄에 대해 처음부터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으로서 죄를 저지르고 있는 두 아들에게 죄에 상응한 벌을 내렸어야 하는데, 말로 꾸짖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이같은 행동을 하나님께서는 ‘나를 멸시하는 행위’(삼상3:30)로 여기셨습니다. 3절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다‘라고 합니다. 제사장의 범죄는 곧 이스라엘 전체에 악영향을 미칩니다. 엘리 제사장의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로 인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궤도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두 아들도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 비보를 듣고 엘리 자신도 의자에서 목이 부러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달았다면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본문은 지체하지 말고 바로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3)라고 합니다. 수송아지를 어떻게 제물로 드려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4)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회막 문 여호와 앞에 수송아지와 함께 서있습니다. 회막 문 앞에는 죄를 범한 제사장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회막 문 앞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있습니다. 뭇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제사장은 제사장으로서 체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제사장이 은밀한 곳에서 자신의 죄를 고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공개된 장소에서 고하도록 하십니다. ‘회막 문 여호와 앞’은 은밀한 골방이 아니라, 공개되어 있는 내 삶의 자리입니다. 내 삶의 자리를 여호와 앞으로 여기며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인정하는 리더가 존경받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사장이 공개된 장소에서 회개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니요, 제사장을 공개 망신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장을 바로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사장은 속죄제물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합니다. 머리에 안수한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수송아지에 전가시키는 행위입니다. 안수를 마친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목을 쳐서 죽입니다. 수송아지는 목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제사장이 죽이는 대상은 형식적으로는 수송아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기 자신, 죄지은 자신입니다. 죽이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수송아지가 흘린 피를 받아 회막에 들어가서 피를 여호와 앞 휘장 앞에서 일곱 번 뿌리고,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 뿔에 바르고,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았습니다(16-18). 제물의 피를 뿌리고 바르고 쏟는 것은 속죄제를 드리는 제사장의 죄가 사해진다는 상징입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에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속죄제물의 피를 뿌리고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는 행위야 말로 제사장이 목숨을 걸고 다시는 이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행위입니다.
이후 제사장은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떼어 번제단 위에서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가죽과 고기와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과 똥은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서 불로 나무 위에서 태워야 했습니다(8~12). 흠 없는 수송아지의 가죽과 고기 등은 당시에도 귀했지만, 속죄의 대가로 모두 불태워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야 했습니다. 제물의 목을 치고 피를 뿌리고 가죽을 벗기고 기름을 떼어내고 머리와 정강이와 고기와 내장 그리고 똥까지 분류해서 씻고 번제단에서 불사르고, 진영 바깥에 가져가서 불에 태우는 모든 일을 마친 제사장은 온통 피와 땀과 짐승의 냄새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제를 마친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회중의 속죄제 (13-21)
(13-15)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이스라엘 온 회중이 부지중에 죄를 범했는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깨닫게 되면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온 회중이 부지 중에 죄를 범했을 경우에는 제사장이 아니라, 회중을 대표해서 장로들이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죽였고, 그들이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회막 하나님 앞에서 피를 뿌리고 기름을 제단에서 불살랐고 이후 과정은 제사장의 속죄제와 동일하게 진행되었습니다 (14-21).
그런데 죄를 지었는지 모르고 있다가 어떻게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열왕기하 18장에 있습니다.
(왕하 18:3-4, 6)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 /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히스기야 왕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여러 우상들처럼 부수면서 그것은 느후스단, 즉 놋 조각일 뿐이라고 일갈한 이유는 백성들이 놋뱀을 향해 분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백성들이 신주 모시듯 귀히 여기는 놋뱀을 일거에 부술 수 있는 원천은 바로 그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한 계명을 지키는, 즉 말씀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은 아무런 생각 없이 출애굽 광야시대에 만든 놋뱀을 숭배하고 있었는데, 말씀에 비추어 보니 그것이야 말로 우상 숭배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사역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죄인된 우리의 본모습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살펴본 제사장과 온회중의 속죄제의 핵심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로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지체하지 말고 바로 삶의 자리에서 회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왕이 신하들과 궁전에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등장해서 다윗이 유부녀인 밧세바와 간통을 하고 그의 남편마저 전쟁터에서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절대 권력자인 왕의 신분을 지닌 다윗은 공개 망신을 준 나단 선지자가 거짓말하고 있다면서, 얼마든지 그를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달은 그는 지체하지 않고 신하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러한 점을 높이 사셨습니다.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저녁 집회에서 길선주 장로가 친구가 임종 당시 정리해달라고 맡긴 100달러의 거금을 횡령한 죄를 600명이 넘는 회중들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의 포문을 열자, 그 뒤를 이어 그 자리에 함께한 회중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평양대부흥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한국 교회가 교회로서 틀을 다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 한 사람의 행보가 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잘못된 행보로 인해 사회가 더 혼탁해질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는 나 한 사람으로 인해 혼탁한 이 사회가 정화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속죄제에 속죄의 기능이 있지만 앞서 살핀 번제나 화목제 모두 속죄, 즉 죄를 씻는 효력이 있기에 속죄제가 죄를 속하는 기능만 지니고 있다고 해석하면 다소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속죄제의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면 정결하게 하는 정결제 또는 정화제로 표현하는 것도 무방합니다. 속죄제의 목적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부정함 가운데 거하시지 못하기에 예배 처소를 정화하고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주체는 신분에 따라 자신이 드려야 하는 흠 없는 동물을 선택하여 회막의 입구로 가져와서 안수하고 잡았습니다. 여기까지는 동물로 제사를 드리는 다른 제사 의식과 동일합니다. 하지만 그 피를 취하여 처리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제사장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성소에 들어가 휘장과 향단 뿔에 피를 뿌렸고, 평민들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회막의 번제단에 피를 뿌렸습니다. 더 나아가 이후 레위기 말씀을 보면 속죄소 및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및 옷에도 피를 뿌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속죄제는 회막 곳곳에 피를 바르거나 뿌리는 의식을 동반하는데 여기에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족장과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족장의 속죄제(22-26)
(22-24) 만일 족장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숫염소를 예물로 가져다가 그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지니 이는 속죄제라
족장은 백성들을 인도하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하나님이 주신 계명 중에 하나라도 모르고 또는 실수로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깨우침을 받게 되면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속죄제를 드렸을 때 드린 수송아지 보다는 값이 저렴한 숫염소를 안수하고 잡았습니다. 앞에서 번제나 화목제가 드리는 동물의 값어치의 순에 따라 설명을 이어갔다면 속죄제는 제사드리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진술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동물의 가치에 따른 순서와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특별히 개역 개정에서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고 옮긴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주의해야 할 점은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을 때라는 사실입니다. 의도적으로 저지른 죄는 제사의 조건이 아니라 처벌의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속죄제에 해당하는 경우는 죄인 줄 알지 못하고 범하여 허물이 있는 경우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5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이라는 부분이 원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개역 한글로 보면 ‘그 범한 죄에 깨우침을 받거든’, 공동 번역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깨닫는 대로’, 새번역 역시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는 대로’ 라고 번역합니다. 원문을 살펴봐도 다른 사람이 알려준다는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본인이 깨닫게 되든, 또는 다른 사람이 일러주든 그 허물을 본인이 알게 되었다는 포괄적인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세상은 보통 죄를 저지른 사람을 범죄자라고 합니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범죄로 인한 책임을 다하면 그 사람의 가치는 원상회복이 된다는 듯한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죄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존재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죄가 사람을 규정 짓는 것입니다. 보통 말하듯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죄에 묶여 있기에 사람에게는 죄를 벗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대학생 시절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나 역시 죄인이라는 성경의 선포가 새삼스럽게 다가왔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인생의 황금기를 맞아 세상에서는 사람이란 모든 가능성을 이룰 수 있고,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존재라고 말하는데 왜 사람을 이렇게 절망적으로 이해하는가 하는 반문이 일었습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말처럼 쓸데없는 죄의식으로 오히려 사람을 공포와 불행으로 몰고 가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가 그렇듯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세상은 무에서 와서 무로 돌아가고 궁극적인 것은 없기에 그 무엇에도 빚진 것 없이 그냥 순간순간 최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면 된다는 생각과 세상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두 선택지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든지,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든지 어느 쪽이 거짓이든 택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리 살펴봐도 제 안에 제 자신을 보다 좋은, 보다 선한 길로 이끌어갈 수 있는 내적 동력이 없다는 사실을 실토해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눈을 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안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아무리 노력해봐도 거기에는 만족스러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은 어떻게 사람이 자살을 하지 않고 살아서 자식을 낳을 수 있는가 하는 염세주의적인 고민과 더불어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 이 세상의 소중한 공기와 음식 등 자원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했고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고백이 더 정직한 말이었으며, 오히려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죄인으로 정해지는 순간 모든 관계는 끊어지고, 그 책임은 그가 져야만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죄인의 여부는 본인이 규정합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며 스스로 모든 관계의 가능성을 포기하면 세상에서와 달리 다른 이가 나타나 책임을 져주시고 진정한 의미로 자신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단절이 아닌 연결이 생겨나고 새 생명이 찾아오는 역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다음 말씀이 그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25-26) 제사장은 그 속죄 제물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번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의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
제사장이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번제단 뿔에 찍어 바르고 나머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름은 화목제 제물 기름 같이 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 이 과정을 거쳐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하면 용서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속죄제는 다른 동물 제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죄인이 자신을 동물과 동일시하고, 자신의 죄를 동물에 전가한 후에 동물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한 자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장 17절에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자신은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겉보기에 건강해 보이고 건강하다고 주장해도 속에 병이 깊어 발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과하고 의롭고 흠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예수님이 만나 주십니다. 이처럼 이 세상의 하나님 대용품을 붙잡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결국 헛된 것을 붙잡았다고 한탄하게 될 날이 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 겸손하여 사함, 즉 바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평민의 속죄제(27-35)
(27-31) 만일 평민의 한 사람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부지중에 범하여 허물이 있었는데 그가 범한 죄를 누가 그에게 깨우쳐 주면 그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그 범한 죄로 말미암아 그것을 예물로 삼아 그 속죄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 제물을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 전부를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물의 기름을 떼어낸 것 같이 떼어내 제단 위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향기롭게 할지니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이제 평민이 드리는 속죄제에 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우선 31절까지는 흠 없는 암염소를 끌고 와서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를 다룹니다. 그 모든 절차는 족장이 드리는 속죄제와 차이가 없음을 봅니다. 평민이라는 단어는 백성이라는 뜻의 단어와 땅이라는 뜻이 단어가 결합한 것으로 그 땅 출신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그 땅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와 속죄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종에 상관없이 그 땅에 속한 이는 누구가 제사장 나라이자 거룩한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속죄제는 특별히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특별히 속죄일에는 속죄소에도 그 피를 뿌려 지성소를 정결케 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죄가 단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그 오염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속죄하지 않고 죄를 제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진노하실 뿐 아니라 그 오염된 성소에 계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하나님이 그 가운데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백성이 되어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노릇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한다는 놀라운 사건은 놀라운 은혜인 동시에 언제든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위험한 사명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며 성소를 정결하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거주하시는 성전인 우리 모두 이러한 엄중한 자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이 세속에 더럽혀지고 교회가 세상에 물드는 일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일이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의 교회가 그렇게 부지 중에 세상과 타협하고 범죄하여 허물 중에 있을 때 그 여파는 우리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가게 만드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사모하는 교회입니다. 또 교회인 우리가 모여 이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시기로 약속하신 처소로서, 음부의 권세조차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너지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우리 가족과 우리나라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를 살피고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보내지 않도록 애써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사모함을 품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맡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32-35) 그가 만일 어린 양을 속죄제물로 가져오려거든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그 속죄제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죄제물로 잡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번제단 뿔들에 바르고 그 피는 전부 제단 밑에 쏟고 그 모든 기름을 화목제 어린 양의 기름을 떼낸 것 같이 떼내어 제단 위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같이 제사장이 그가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어린 양을 가져왔을 때 속죄제에 관해 논합니다. 흠 없는 암컷을 끌어다가 속죄제물로 잡는 경우인데 특별히 마지막 말씀에서는 예전에 없던 설명이 나옵니다. 바로 여호와의 화제물 위에서 불사른다는 표현입니다. 이 구절을 통해서 평민이 속죄제를 드리기에 앞서서는 번제를 이미 드렸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속죄제의 규정을 점점 세밀하게 가르치심으로써 그들이 바른 예배자로 서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속죄제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정결케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레위기에서는 성소가 정결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예배자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떠한 믿음의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기 원합니다. 하나님 대용품으로 만족하고, 하나님 대용품을 구하며 살아가고 있었다면 하나님만을 바르게 예배하고 모든 순간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닫고 세속의 물결 가운데 부지중 저지른 우리 죄를 깨닫는 은혜를 구하며 오늘도 정결한 예배자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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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의 핵심단어는 ‘거룩’ 입니다. 거룩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과 ‘완전성’이라는 뜻이며,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하)’는 성도가 세상과 구별된 삶의 방식과 가치관, 사회질서에 따라 살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이스라엘은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외적 세상의 도전과 내적 죄의 도전이 있습니다. 이렇듯 막강한 도전으로 무너진 성도를 거룩하게 복구하는 것이 속죄의 제사입니다. 속죄제는 히브리어 ‘하타트’로 ‘씻어내다’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속죄 제사는 언제, 어떤 이들이 드립니까?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속죄의 제사는 여호와의 계명, 즉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드려야 했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켜내다가 1개가 어긋날 경우, 그는 죄로 오염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속죄제의 대상은 본문의 ‘누구든지’라고 표현된 것처럼, 예외가 없습니다. 본문은 총 네 계층, 3절에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13절 이스라엘 온 회중, 22절 족장, 27절 평민의 한 사람이 각기 제물로 속죄제사의 방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 지도자, 회중, 이스라엘의 우두머리, 평범한 사람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의 영향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선언하였듯이, 본문에서 ‘누구든지’, ‘하나라도’ 처럼, 모든 이는 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의 결과, 인류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은, 영혼의 활동이 정지되어 모든 것에 점점 무감각해집니다. 더 이상 인간답게 살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죄에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 생수를 마시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마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온갖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지면, 더 이상 사리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소수의 의견에 좌지우지되어 옷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대낮에 백성들 앞에서 행진을 벌이는 웃지 못할 일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죄는 한 존재를 마비시켜 파멸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사회와 시대에도 큰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성도 역시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준비하셨습니다. 속죄 제사는 특별한 제사였습니다. 그 제사를 드리는 위치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막은 총 3 부분, 가장 외부에 번제단이 있는 마당이 있고, 성소 내부로 들어가면 향단이 있는 내성소, 가장 안쪽에 법궤가 있는 지성소가 있습니다. 성막 중 지성소는 대제사장이라도 1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번제와 소제는 장막 마당에서 이루어졌는데, 속죄제는 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가지고 내성소, 성막의 깊은 곳까지 들어간 것입니다. 3-7절입니다.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 그가 범한 죄로 말미암아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들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 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속죄제는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성막 안, 내성소로 들어갑니다. 성소의 휘장 앞에 일곱 번 피를 뿌리고 향단 뿔에 피를 바르고 나와, 회막 앞에 뿌렸습니다. 내성소까지 피를 가지고 들어간 이유는, 죄로 인해 성전 기능이 오염되고 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죄는 성전의 기능,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습니다. 속죄제는 성막의 깊은 곳까지 들어와야 성전의 기능 회복이 가능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가장 중요한 제사입니다. 구약의 속죄제사는 예외 없이 누구나 드려야 했지만, 불완전한 제사였습니다. 속죄제사의 한계로 인해,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1, 12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불완전한 성막과 제물이 아닌 온전한 장막과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성도는 더 이상 불완전한 제사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속죄의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성도에게 제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이면 충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 공장이므로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매 순간마다 속죄의 제사, 주님과의 동행과 교제가 필요합니다.
거룩함은 성도의 구별됨에서 시작되고,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자발적 의도적으로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질수록 우리 영혼은 빛나게 됩니다.
속죄는 우리의 영혼을 거룩한 빛을 발하는 작은 촛불이 되도록 합니다. 거룩한 성도들의 촛불이 모여, 마침내 캄캄한 세상을 향한 거대한 빛이 되는 것입니다. 교우님, 십자가 앞에서 다시금 거룩함을 회복하십시다. 아무리 악이 창궐하고 번성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다. 오히려 주님 앞에 회복된 빛을 지니고, 함께 거대한 거룩한 빛의 물결을 만들어나가십시다. 거룩한 주님께서 오염된 이 땅을 씻기고, 짧지 않은 여호와의 손으로 이 땅을 바로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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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 소제, 화목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드리는 속죄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라기보다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입니다. 번제와 소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화목제를 통해서 이웃과 풍성한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하나님 앞과 이웃 앞에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고 있듯, 그 사실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속죄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지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빗나가는 삶을 살았을 때, 죄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가로막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백성 중에 계속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1.성경이 말하는 죄
1>구약성경에 사용된 단어
1)하타-표적(과녁)을 맞추지 못한다, 빗나가다,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in(죄)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시 51:2)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또한
레위기와 민수기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철저한 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범죄와 죄에 대한 형벌을 제거하기 위해 속죄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2)페솨-위반, 범죄, 허물, 범과, 죄과 등의 뜻이 있습니다.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 51:1).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 또는 반역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며, 하나님의 계명의 한계를 범하여 무시하는 죄를 말합니다.
3)아온-不, 不正을 나타내는 단어로 왜곡된 일, 굴곡진 사실, 바르지 못한 방법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2>신약성경에 사용된 죄의 용어
1)하마르티아-빗나감, 잘못, 죄, 악행, 위법
2)포네로스-악한
3)아디키아-불의, 부정
4)파라바시스-위반
5)아노미아-무법
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단절시키는 무서운 것입니다. 죄는 아름다운 관계를 파괴시킵니다. 그러기에 죄는 지극히 심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가 없이는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무거운 죄로부터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섯가지 제사 가운데도 특히 속죄제를 통해서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주신 것입니다. 속죄제의 핵심은 죄를 씻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2.속죄제를 드려야 할때.
(레 4:2)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속죄제는 "그릇"행하였거나 "여호와의 계명"중 어떤 것을 범하였을 때 드려야 했습니다.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지은 죄,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은 죄, 서두르다가 실수한 죄 등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에 빠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였으나 육신이 약하여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3절의 말씀과 같은 경우
"(레 4:13)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레 4:14)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 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제사를 올려야 했습니다.
우리들은 나약하여 언제나 죄에 빠질 가능성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의 허물보다는 나 자신에게 더 큰 허물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3.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는 누가 범죄하였느냐에 따라서 제물이 달라집니다. 속죄제는 다른 제사와는 달리 제물을 다양하게 드리게 하였습니다. 수 송아지, 숫염소, 암염소, 암 양, 산비둘기 또는 집비둘기, 이것도 형편이 안되면 고운 가루 에바 십 분의 일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속죄제는 4가지로 구분하여 말씀합니다.
1)제사장이 범죄한 경우(1-12절)
2)이스라엘 회중이 범죄한 경우(13-21절)
3)족장이 범죄한 경우(22-26절)
4)평민이 범죄한 경우(27-35)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회중이 범죄했을 때는 흠없는 수 송아지로 제물을 삼을 것을 명령하셨고,
족장이 범죄할 경우에는 흠없는 숫염소로,
평민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흠없는 암염소나 암 양으로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제물 중에서 수 송아지는 제일 고급에 속합니다. 제사장이나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했을 때는 흠없는 수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 것은 그들의 위치와 책임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지도자의 범죄는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때문에 더욱 책임이 큰 것입니다.
범죄하여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은 제물을 끌고 와 제물의 머리에 안수를 했습니다. 죄를 제물에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같은 희생제사의 희생제물은 기름이나 콩팥과 같은 부위는 번제단 위에 태워서 화제로 드리도록 하였고, 나머지는 진 바깥으로 가져가 가죽, 고기, 머리, 다리, 내장, 심지어 똥까지도 다 태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진 바깥은 구약시대 저주 받은 자, 혹은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지는 죽음과 치욕의 장소였습니다. 이것은 죄악을 멀리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히 13: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죄가 없으신대 우리 죄 때문에 영문 밖에서 십자가의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영문 밖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로 정결함을 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 죄 때문에 고통가운데 있으신 분이 계시다면 갈보리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보혈이 모든 죄를 사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신 주님의 은혜로 깨끗함을 받고 용서받은 기쁨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