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의 무익함(2-6절)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율법이 아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온전히 지켜낼 수도 없으며 결국 하나님의 편에서만이 구원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사람이 율법을 지켜 얻어낸 공로나 능력은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입니다. 값없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자녀삼아주시고 천국백성으로 인정해주십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가뜨리려는 세력이 갈라디아 교회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율법을 더하여야 구원이 온전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말인 즉 슨,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그래서 거기에 인간의 행위 즉, 율법이 더해져야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바울은 크게 분노하며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교훈합니다.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할례를 받는 행위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자가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정신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결단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할례는 그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을 믿어 의롭게 되었고 할례를 통해 그 믿음을 외적으로 확증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의 표징이 될 뿐이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보라 나 바울이 말한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거친 어조로 할례를 비판하는 이유는 그 할례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익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겠다는 생각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무관한 삶이며 그리스도께서 선물로 주신 새로운 생명의 삶을 팽개치는 것입니다.
(3-4)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의 일부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선동자들은 율법 전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 유독 할례를 포함한 몇몇 가시적인 율법들만 중요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할례처럼 눈에 드러나는 율법들은 강조하면서도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 더 나아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들은 등한시 여겼습니다. 이처럼 율법에 대한 이해조차도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 이미 받은 자유를 저버리고 율법 안에 갇혀 율법의 멍에를 메겠다는 것은 더하거나 뺄 것없는 주님의 완전한 십자가 사역을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5-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성도는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바울의 경고는 할례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러했다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금지하는 교훈만 했을 것입니다. 할례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입니다. 다만 공로를 얻기 위한 할례를 행함으로써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떠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위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의 유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원어의 느낌을 살려서 표현한다면 ‘믿음은 사랑의 삶을 통해 그 효력을 드러낸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의 반대가 아닙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고 성령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다만 그 믿음은 모든 율법 위에 율법인 사랑을 행함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누룩을 제거하라(7-12절)
(7-8)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교회서신을 쓰면서 자주 달리기의 비유를 사용했었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1등하기 위해 자신을 절제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으며 정도를 달리기 위해 온 힘을 쏟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러해야 함을 교훈합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인들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는 거짓 선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권면한 할례 때문에 갈리디아 교인들은 믿음의 달리기를 멈춰버렸습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권면’이라는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설득’입니다. 즉, 거짓 선동자들이 율법을 더해야 한다는 주장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게 다가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득력있고 화려한 언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를 부르신 주님에게서 난 것이 아니기에 가짜진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가짜진리에 아무리 반응하고 따라가봤자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9-10)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교회 전체를 잘못된 진리로 물들 수 있었던 데에는 소수의 거짓 선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누룩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큰 반죽을 부풀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약간의 누룩만 있으면 되듯이 소수의 거짓 선동자들이 구원 공동체 전체를 가짜진리로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은 단 하나. 누룩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확신한다는 표현까지 사용하며 소수의 거짓 선동자을 출교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는 다시한번 신뢰가 회복되길 원한 반면에 거짓 선동자들에게는 심판의 경고를 보냈습니다.
(11-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거짓 선동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쳤고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박해를 받았던 이유는 할례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할례를 해야한다고 가르쳤다면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을 외면하게 만드는 최대 걸림돌은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할례가 구원의 요건이라고 할 때는 그토록 환영했던 사람들이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진리 앞에서는 다 걸려 넘어집니다. 그래서 거짓 선동자들은 바로 이러한 걸림돌을 은근슬쩍 치웠던 것입니다. 바울은 진리에 대해 조금의 타협도 없이 이 걸림돌을 최전방에 내세웁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비록 자신은 박해를 받았지만 그 속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가짜진리, 유사복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있으면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에 어떤 종교적 행위가 더해져야 한다고 가르치거나 사람의 방법과 지혜를 더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구원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도 경쟁과 우열이 생겨나고 세속적 잣대로 서로를 판단하기도 합니다. 가짜진리, 유사복음이 만들어낸 후유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접할 때 그 진리가 누구에게서 난 것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기록된 계시인 성경말씀을 통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믿음의 경주에 힘쓰게 만들지만, 그렇지 않은 가짜진리는 달음질을 멈추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믿음의 경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우리 안과 밖에 존재하는 가짜진리를 제거하는 일에 힘쓰시길 소망합니다.
사랑으로 종 노릇 하라(13-15절)
이제 바울은 율법을 넘어 우리가 지켜야할 더 위대한 가치를 증거합니다.
(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은 초지일관 율법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은 믿음과 행위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지 않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열심은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만 바른 믿음은 바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믿음이 육체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우리로 하여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하셨다면 이제 그 자유는 주님을 향한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신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이 어찌하여 악을 행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모시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자유는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하며 방종의 기회로 삼기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통해 온 율법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다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바울의 말처럼 서로 물고 뜯는 죄의 본성만 가득한 야생동물과 다를바 없습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실 때 우리에게 자유를 위하여 부르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더 나아가 그 은혜의 감격을 주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어가시길 축복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자유인이자 하나님을 모신 성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의 자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유는 바르게 누리지 못할 때 자칫 방종으로 흐를 수 있기에 사도 바울은 이를 주의해야 함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율법으로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되는데, 주님을 믿음으로 자유인이 되었다면 자유인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제 본문은 자유인에게 율법의 할례 준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육체의 일이며 성령님을 거스르는 일인 것과 자유인은 자신의 몸을 육체의 일을 하는데 내버려 두며 방종하지 말고 자유인답게 사람을 사랑하며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본문은 육체의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사랑으로 사람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6절에서 18절은 이를 말하기 전 ‘육체의 일과 성령의 일’의 대립 관계를 우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16-18절)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이런 권면을 하였겠습니까? 바울은 3장 3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이미 성령님을 받았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이 성령님을 받은 사람에게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였다는 것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저절로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님을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따라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이유를 다음 구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은 16절의 ‘육체의 욕심’과 비슷한 말입니다. ‘소욕’의 원어적 의미는 '원하는 것'인데 '원하는 것'이 강해지면 욕심이 되고 탐욕이 됩니다. 육체가 원하는 것은 성령님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면 성령님을 거스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은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난 진정한 자유인이 됨을 다음 구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라는 말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드러낼 뿐이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으며, 오직 믿음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이라면 육체가 원하는 방종의 삶이 아닌 성령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았다고 해서 육체의 일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일과 대립 관계에 있는 육체의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19절부터 23절까지 알려주면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지 말 것을 강력히 권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19-22절)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라는 말은 육체의 일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육체의 일은 성령님을 거스르는 행위로서 악한 일입니다. ‘음행’은 모든 불법적인 성적 행위를 뜻합니다. 불륜이 이에 속합니다. ‘더러운 것’은 육체적 부정함 뿐만 아니라 내면의 부정함을 포괄하는 단어로서 음행보다 더 광범위한 성적 악행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호색’은 억제할 수 없는 성적 욕구에 따른 행위를 뜻합니다. 언론에 가끔 보도되지만 유사 성행위가 여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은 모두 성적 악행이며 육체의 일에 속합니다.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상 숭배와 주술’은 종교적인 범죄 행위입니다. ‘주술’은 우상 숭배와 관련된 행위로서 약물을 사용한 마술 행위를 뜻합니다. 주술은 우상에게 신적 능력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속이는 행위입니다. ‘원수를 맺는 것’은 원어의 용례를 고려하면 민족 또는 혈통간 적대 행위입니다. 오늘날에도 인종차별, 다문화 사람들에 대한 적대 행위가 사라지지 않는데 이러한 행위가 원수를 맺는 것입니다. ‘분쟁과 시기와 분냄’ 역시 타인에 대한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당 짓는 것’은 진리를 반대하는 행위와 관련이 있습니다. ‘분열함’은 집단 이기심의 결과를 뜻합니다. 자기가 속한 부서나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 이기주의는 사회나 공동체를 분열시킵니다. 집단 이기심이 깊어지면 정통 교리에 벗어나서 분파를 생성하는데 이를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본 구절에서 말하는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은 모두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행위와 관련된 육체의 일입니다. ‘투기(헬, 프도노스)’는 ‘시기’(헬, 젤로스)와 비슷한 말인데 성경에서 사용된 용례를 보면 ‘시기’보다 더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8절을 보면, 유대인들의 투기(헬, 프도노스)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투기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습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은 지나친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육체의 일입니다.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는 앞에서 언급한 15가지 이외에도 육체의 일이 더 많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육체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바울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혹시 육체의 일을 할까 봐 걱정되십니까? 그렇다면 성령님께 자신의 몸을 맡기고 살아가면 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육체의 일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따르는 사람이 행하는 자연스러운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22절과 23절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22-23절)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포스’는 성령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사와 구별되는 것으로써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동시에 인간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육체의 일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반하여 인간에 의해 자행되듯이 성령님의 일 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인간이 행하는 일입니다. 성령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9가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처럼 사람을 자기희생적으로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둘째는 희락입니다. 헬라어 ‘카라’를 번역한 단어로서 기쁨을 뜻합니다. 인간의 욕망이 채워질 때 누리는 기쁨이 아닌 거룩한 기쁨,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셋째는 화평입니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는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 또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을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주님처럼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넷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래 참음인데 용서와 관련이 있습니다. 화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오래 참음은 곧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는 자비입니다. 자비는 인자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듯이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람을 대하는 행위입니다. 여섯째는 양선입니다. 이는 선한 성품과 선한 행위입니다. 일곱째는 충성입니다. 헬라어 ‘피스티스’를 번역한 충성은, 군인이 국가에 대해 충성하는 것처럼 수직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일로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서 말하는 충성은,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신뢰할 수 있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피스티스’를 번역한 충성은 신실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영어 성경과 우리말 새번역 성경과 현대인의 성경은 ‘피스티스’를 신실함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여덟째는 온유입니다. 온유는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에게 분노하며 보복하지 않는 성품입니다. 아홉째는 절제입니다. 절제는 필요한 것에는 과하지 않게 자기 통제와 조금도 이로울 게 없는 육체의 일에는 과감히 그 일을 하지 않는 절단을 뜻합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은 9가지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율법 조항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24절에서 26절은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24-26절)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바울은 이 구절에서는 앞선 구절들에서 ‘형제들’이라고 호칭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으심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 역시 옛사람이 주님과 같이 죽었음을 말하기 위함인데, 강조점은 정욕과 탐심을 가진 육체가 죽었음에 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그 정욕과 탐심과 함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는 정욕과 탐심으로 가득 찬 육체를 가진 옛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정욕과 탐심의 육체를 못 박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다음 구절들이 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만일’은 일반적으로 조건절 접속사이지만 24절과 연결된 논리적인 접속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살아야 하며 성령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16절의 ‘성령으로 따라 행하라’와 같은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며, 자신의 몸을 ‘하나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 기도하는 처소’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정욕과 탐심의 육체를 못 박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헛된 영광’을 버리는 것은 허영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명예, 돈, 권력 등을 추구하는 사람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이를 성취하려면 타인을 짓밟아야 합니다. 나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을 보면 배 아파하고, 노여워하고, 심할 경우 투기하여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노여움과 투기를 유발하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의롭게 되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라면 육체의 일을 행하는 방종에 빠지지 않고 성령님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정욕과 탐심과 함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면 육신의 일을 경계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님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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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그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만이 구원을 얻게된다고 선포하고 그 사실을 믿는 자들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교회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 가운데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며 그동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던 믿음을 흔들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바울이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그의 가르침 가운데 한결같이 강조하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시한번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을 향해 구원 받게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로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 가운데에는 유대인도 있지만 헬라인이나 다른 이방 사람들까지도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들만 복음을 듣고 유대인 신앙공동체만 이루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약속의 자녀의 증표로 여기던 “할례”문제입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의 증표로 몸에 지니고 사는 언약의 상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난 이후 이방인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자녀임을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바울은 3장과 4장에 이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5장에서 계속해서 이 문제에 대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본문 12절에서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매우 강력하고도 단호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히 율법 아래에서 이방인 성도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1절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자유를 언급한 뒤에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의 멍에 아래 종으로 살아가지 말라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은 다 완성 하셨기 때문에 그동안 실재를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도와왔던 그림자나 모형은 실재가 나타나게 되면 더이상 모형이나 그림자가 필요없는 것처럼 구약의 모든 가르침이나 율법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그리스도로의 오심으로 인해 이제 그 효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에 집착하며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행위로 인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16장 3절에서 친 아버지가 헬라인이었던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복음을 전하기 전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만일 할례를 받지 않은 채 복음을 전하면 오히려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방해가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할례가 이제 의미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인 할례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이기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4절에서 율법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4)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지식과 영광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하게 되어지는 것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부되시고, 예수님으로만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온전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5절에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5)
첫째는 성령에 의해서, 성령을 통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갈3:3에는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끊을 맺고 있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믿음으로 시작했다가도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결국 육체적인 결과를 보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만 성령으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 합니다.
둘째는 믿음을 따라,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행위의 결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자들 이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주님께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완전한 것이 이루어 질 것임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시어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주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된 자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그 소망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삶을 묵묵히 이겨내며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에수그리스도로 안에만 이 땅에서 살아갈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께서 주신 참된 자유를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혹시 우리 공동체 안에도 여전히 할례받지 않았다고 하여 믿음의 지체들을 배척했던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처럼 어떤 기준을 언급하며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적 수준, 경제적 수준, 직분이나 교육, 지연이나 혈연 등이 '이 시대의 할례'가 되어 다른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한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우리 자신을 더 낮추고, 상대를 위해서는 종노릇이라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사랑과 겸손을 가지고 14절의 말씀처럼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는 구약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실천하는 자들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를 위해 죽임 당하신 예수그리스도 그 한 분이면 충분하다고 고백한 우리들입니다.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기에 우리 또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는데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항상 염두에 두는 것으로써 이해하기는 쉬운 것 같으나 실천함에 있어서는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25절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처럼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이시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행하는 것’과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같은 표현을 달리 말한 것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영이신 하나님,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는 자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과는 구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부활 승천 후 보혜사 성령님께서 믿는 자들과 함께 하실 것에 대해 바울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제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성령님께서 내주하셔서 조명해 주시기에 육체를 따라 살아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아를 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는 곧 일상에서 예배자로서 살아가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예배가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며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자는 달리 표현하면 예배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을 따라 행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겠습니까? 오늘 본문 중심으로 보면,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둘째는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1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율법 아래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에 할례를 행하는 것과 같이 율법 아래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자신 보다 먼저 사도된 자인 베드로를 책망했던 과거의 사건까지 들추어내었습니다(갈2:10).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한다는 것은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도 없겠지만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자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의롭게 되었으므로 율법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임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자는 22절, 23절에 기록된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위 3가지의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과연 나는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시간은 3가지 중 첫 번째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가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지 않는 것인데 사람이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육체의 욕심으로 자신을 채우려고 해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과 육체의 욕심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소욕은 헬라어 ‘에피뒤메오’를 번역한 것으로 ‘갈망하다’, ‘간절히 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가 갈망하고 간절히 원하는 대로 자신을 맡긴다면 결코 그 사람은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은 성령님을 거스를 수밖에 없으며, 성령님은 육체를 거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둘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17절에 ‘대적함으로’는 헬라어 ‘안티케이마이’를 번역한 것으로 ‘맞은편에 선’, ‘반대하는’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이 둘은 서로 양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육체의 소욕, 육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육체의 일을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버려야 할 것으로 2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정욕은 헬라어 ‘파데마’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고난’ 또는 ‘고통’의 의미로 쓰이지만, 이 구절과 로마서 7장 5절에서는 ‘정욕’으로 쓰였습니다. 탐심의 헬라어는 17절의 소욕과 같은 단어입니다. 탐심과 소욕은 모두 욕심입니다.
첫 번째 범주인 정욕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본문에서 찾아본다면 19절에 있습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입니다. 이 세 가지는 첫 번째 범주인 육체의 쾌락을 위한 정욕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범주인 탐심은 20절과 21절에 열거된 것들로 볼 수 있는데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열거된 육체의 일들을 보면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욕심을 버린다면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겠습니까? 인간이 욕심을 버린다면 시기와 분냄이 있을 수 있으며 당파와 분열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술 취함과 방탕함 역시 욕심을 채우지 못한 욕구불만에서 기인하는 행동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참고로 방탕함은 헬라어 ‘코모스’를 번역한 것으로 ‘술을 마시며 야단법석’일 때를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이지 않습니까? 24절의 표현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죄의 몸이 주님으로 인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24절 말씀처럼 죄의 몸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여호와의 짧지 않으신 손을 붙잡아야 하고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안일과 이기심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 위해 적용하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공익과 정의와 질서를 세우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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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종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있는가? 그것은 성령을 좇아 행하는 길뿐이다(5,16,18,25). 만일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복음을 믿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되지 못하실 것이며(2) 그들은 할례뿐 아니라 율법의 모든 조항도 다 지켜서 모든 율법을 만족시켜야 할 것이다(3). 이렇게 율법의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구원을 얻지 못한다(4). 그러므로 성도가 사는 길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다(5). 문제는 할례를 받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이 되는가에 있다(6). ‘오직 믿음(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은혜를 질식시키고 교회를 무너뜨린다. 사도는 거짓 교사들의 거짓 복음이 어떻게 갈라디아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보여준다(7~12). 거짓 복음인 할례의 복음은 인간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지만, 참 복음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으로, 거치는 것이며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멸하는 것이다. 할례를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은 할례 때 베어버려지는 양피처럼 잘려져 나가야만 한다고 사도는 강조한다(12).
2. 성령으로 행하면 자유 안에서 서로 종 노릇하게 된다(13). 사랑은 율법의 마침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된다(16).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주목한다. 성도의 영혼은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간의 각축장이다(17). 하지만 이것은 대등한 두 세력의 싸움이 아니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새 피조물이 된 신자 자신과 그 내면에 남아있는 죄성(육체의 소욕)과의 싸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에만 율법 아래 매이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18). 결국 육체의 일(열매)들이 그 사람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19~21),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을 보면 그가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22~24).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은 자기의 헛된 영광과 자랑 그리고 남을 향한 시기와 질투의 마음에 이끌리지 않는다.
3.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그 단순한 지식만으로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성도의 내면에 육체의 소욕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복음의 진리를 바르게 아는 지식을 통하여 자유를 누리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좇아서 행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율법 아래서 벗어나며,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자유를 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살아갈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참 은혜의 복음 위에 서서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시는 은혜를 간절히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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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또 다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그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주신 자유를 굳게 지킬 것을 권고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시 거짓 교사들의 미혹을 받아 율법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무지로 인한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율법에 따라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았다면 결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에 의하여 의로워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해 준 것이다. 먼저 바울은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선언함으로 그들의 어리석음을 말해 주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5:2)” 여기 “할례를 받으면”이라는 말에서 할례는 율법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의로워지기 위하여 할례를 받는다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그리스도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어리석은 갈리디아교회 성도들을 일깨워지기 위하여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해 주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5:3,4)”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한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것을 지키라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것도 지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지켰을지라도 저것을 지키지 못했다면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정죄한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의로워지려는 자들은 오히려 그 율법으로 인하여 죄인으로 정죄함을 받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율법 아래 있는 모든 자들에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율법 아래 죄인 된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율법 외의 다른 한 길을 주셨다. 로마서는 이 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미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구원의 길로서 율법 외에 다른 길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는 길이다. 율법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주신 길이지만 이 길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율법에서 실패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범함으로 인하여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대신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에 이르는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이르는 길을 버리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그들에게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말한 것이다. 만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들은 다시 복음의 은혜 안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배우고 확신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해 준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미혹을 받았을 때, 복음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변화된 신분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더라면 그들은 결코 미혹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자신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그토록 쉽게 율법으로 돌아갈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누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도 그리스도인은 그것이 그런가 하여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행17:11). 그리스도인이 언제나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한다면 이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배우고 확신함으로 거짓 교훈의 미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5)” 복음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은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자들이고 또한 은혜 안에서 약속하신 의의 소망을 기다리며 사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은혜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에 따라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처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에 따라 사는 것과 은혜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말한 후에 복음의 은혜를 떠나 율법으로 돌아간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했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5:7-9)” 여기 “그 권면”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는 말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율법을 가르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와 같은 사실은 누가 우리를 가르칠 때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그가 무엇을 가르치던지 그의 가르침 역시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거짓교사라고 부른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5:10,11)” 바울의 이 말을 통하여 자신은 복음을 증거 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임을 말하였다. 이처럼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진리에 따라 사는 자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를 말하면서 그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가 말하는 진리를 진리로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말하는 자조차 따르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할 수 없이 때문이다.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진리에 따라 산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을 통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계속하여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5:10)”라고 말했고 또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5:12)"라고 말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 교훈이 비록 적은 누룩과 같을지라도 교회가 그것을 용납하면 교회 전체를 병들게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사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교사들이 적은 누룩과 같을지라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화 성도들에게 그들을 내쫓을 것을 명한 것이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권고한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들에게도 권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미숙한 자들은 복음 안에서 누리게 되는 자유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하여 누리게 된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하여 가장 귀한 은혜를 육체의 기회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사람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사단에 예속되어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예속되어 있든지 둘 중의 하나에 예속되어 있다는 의미다. 칼빈은 인간의 이와 같은 상태를 “부자유”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께 예속된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방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허용된 자유라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고 권고한 것이다. 여기 바울의 권고 가운데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말은 칼빈이 말한 것처럼 이 자유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허용된 자유임으로 어떤 경우도 육체의 기회로 사용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자유는 어떻게 사용하도록 허용해 주신 자유인가? 바울은 이 물음에 대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용해 주신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사는 것이 사랑의 법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하나님께 예속된 삶을 말하고 동시에 사랑의 법에 예속되어 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원천이시며 모범이시라는 의미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서로에게 예속한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독생자 되시는 주님 역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으심을 죽으셨다. 그러므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것은 사랑의 원천 되시고 모범이 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의 법에 따라 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는 사랑의 법에 따라 삶으로 누리는 자유다. 만일 우리가 사랑의 법에 따라 살지 않는다면 피차 싸울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된다면 피차 멸망할 뿐이다.
바울은 율법과 복음 그리고 복은 안에서 얻게 된 자유에 대하여 말한 후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좇아 행할 것”을 권고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5:16)”고 말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이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바울의 권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성도들에게 먼저 진리를 가르치고 다음으로 그 진리에 따라 살도록 권한다. 여기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소원에 따라 행하라는 의미다(빌2:13). 그리고 이렇게 살 때 나타나는 결과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맺게 되는 열매다. 여기 성령의 열매들은 모두 사랑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므로 결국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한 소원이란 사랑에 따라 살도록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3)”라는 말은 사랑의 원리에 따라 살 때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다. 이 원리에 따라 살 때 양심에 자유함을 누리게 될 것이고, 또한 삶의 의미를 더해 갈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 따라 살면 죄의 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에 따라 살 때 다음과 같은 결과에 이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5:19-21)” 여기 육체의 일들은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의 속성이 요청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자아 중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자아중심적인 삶을 살 때 나타나는 결과들은 우리를 결코 자유하게 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탐욕에 속박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육신에 따라 산다면 결코 자유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임을 말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길은 오직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사는 것임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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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5:1-4)
바울은 1절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다. 성경에서 자유란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죄에서의 자유, 율법에서의 자유 등, 그러면 이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1. 주님이 주신 자유
바울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분은 그리스도라고 했다. 이 자유란 말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활의 방향을 제시하는 의미 있는 말이다. 이 자유란 첫째로 율법에서의 자유를 말한다. 왜 율법에서의 자유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율법의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종의 자리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율법 아래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는가? 이에 대하여 4 : 4-5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준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율법에서 자유케 하셨다는 말은 율법의 속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며 율법에서 벗어남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자유인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율법의 메임에서 자유를 누린다. 그러면 이 같은 자유는 어떻게 얻게 되었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사 속량 하셨다고 했다. 속량이란 말은 율법의 종으로 율법에 메인 우리들을 속전을 주시고 사셨다는 뜻이다. 그 속전은 곧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우리를 율법의 종의 멍에를 벗겨 주셨다. 그래서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자유는 대단히 값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쟁취하여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귀중한 자유를 어떻게 간수하라고 했나?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 것이다. 굳세게 서란 말은 믿음에 굳게 서란 뜻이다. 믿음에 서 있을 때만이 율법의 멍에를 메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2. 할례의 무익
2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의 종의 멍에를 멘 일 중의 하나가 할례였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할례란 성별 된 백성의 표로 받는 율법적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할례를 통해서 자신들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과 구별된다고 하는 확고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별 된다고 가르쳤으며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 가르침을 받아 드려 그들 중에 많은 성도들이 할례 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을 바울은 소식을 듣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할례에 대하여 단호하게 공격한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유인이 없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뜻이다.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며,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말씀해 준다. 할례가 하나님의 백성된 표인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표가 되는 것이다. 만약 갈라디아 교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마땅히 율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왜냐 하면 할례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율법의 종이 되어 율법의 정죄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은 4절에서 결론적으로 이처럼 말해 준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했다.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밖에 있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요 은혜의 자리에서도 떨어진 자가 아닐 수 없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서5:5-6)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뿐임을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1.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
바울은 5절에서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소유자가 된 신분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는데 이 연합은 그리스도의 모든 소유가 믿음을 통해서 내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했다. 바울이 소망으로 기다리는 이 의의 소망이란 우리가 온전히 의인을 이루게 되는 소망으로 이 소망은 부활로 성취된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앞에서는 죄인이다. 육체의 몸으로는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인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게 된 자유다. 그리스도는 이 자유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죄와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속량해 주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늘 탄식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육체가 죄의 습성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우리를 죄 가운데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아마 이 같은 현실에서 오는 우리의 탄식은 이 땅에서 삶이 계속되는 한,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법적으로는 분명히 율법이나 양심이나 죄악에서 벗어나 의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날마다 죄인의 모습으로 고민하고 번뇌하며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멍에를 벗고 온전한 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날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이다.
2. 효력이 없는 할례나 무 할례
바울은 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서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거짓 선생들의 꾐에 빠져 할례를 받은 일에 대하여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단정하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고 말하므로 할례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효력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면 무 할례가 효력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는 일도 구원을 얻는 일이나 의롭다 함을 얻는 일에 아무런 효력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율법의 종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며 율법의 멍에를 메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 할례가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여기서 왜 무 할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무 할례란 할례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그 사람에게 의롭게 하는 일에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란 의미다. 바울이 할례 받는 일을 공격했다고 해서 바울이 무 할례자냐? 무 할례가 할례보다 더 의롭다는 것인가?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일에 할례나 무 할례나 똑같이 아무런 효력이 없다는 뜻이다. 할례를 자랑하는 자는 율법의 종으로 멸망 받지만 그렇다고 무할례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믿음이 없다면 무 할례자나 할례자나 율법의 정죄를 받아 멸망하기는 마찬가지다.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했다. 우리에게 의롭다 함을 주며 구원의 효력을 주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인데 바울은 6절에서 이 믿음에 대해서 “사랑으로써 역사 하는 믿음”이라고 언급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한 믿음의 뿌리는 사랑에 있다. 사랑이 믿음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의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속죄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셨다. 이 같은 사랑이 없다면 믿음이 역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도 이 사랑이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믿음이 존재할 수 없으며 또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계속하여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34) 적은 누룩의 위력
(갈라디아서5:7-9)
갈라디아 교인들이 진리에서 떠나게 된 것은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온 “적은 누룩”으로 말미암아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달음질을 잘 하였었다. 그러나 적은 누룩이 그들의 길을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한 것이다.
1. 달음질을 막은 자는 누구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7절에서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고 묻고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달음질을 잘 하고 있었다. 달음질을 잘 했다는 말은 소망 가운데 올바른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나의 다름질에 비유해서 말해 준다. 고전 9 : 24절에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했다. 누가 달음질을 잘 하는 자냐?
① 올바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달음질이 잘하는 달음질이다. 달음질에는 목표점이 있게 마련이다. 달음질하는 사람이 그 목표점이 아닌 다른 길로 달음질 한다면 그것은 헛된 달음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한다”고 했다. 이 길은 믿음의 길이다. 믿음의 길이 아닌 길은 아무리 잘 달려도 향방 없이 달려가는 달음질이요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달음질이다. 예수님이 내가 길이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달려갈 믿음의 길이 되신다는 의미가 된다.
② 진리를 굳게 잡고 달려가는 달음질을 잘해야 한다. 믿음의 길은 진리의 길이다. 진리가 믿음의 길을 밝게 비취어 준다. 진리를 떠나면 이미 믿음의 길에서 떠난 달음질이 된다. 엡 6 : 14절에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우리의 속사람의 허리를 진리의 띠로 단단히 동일 때,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③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야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다. 바울의 달음질은 이 상을 좇아가는 일로 그의 달음질을 달려갔다고 말씀해 준다. 빌 3 : 13,14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준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바울이 이 달음질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같은 위의 상을 바라보면서 달려갔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이 같은 달음질을 잘 했으므로 바울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이 달음질을 막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였다”고 했다. 우리의 달음질에 고장이 난 것을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진리를 순종치 않게 된 사실을 보아야 한다. 잘못된 가르침은 언제나 우리들로 진리를 거스리게 한다. 그들의 목적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탄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값진 보화인 진리를 빼앗기 위해 거짓된 교훈으로 가까이 온다. 갈라디아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은 할례를 가지고 들어가 갈라디아 교인들로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기 위해 미혹했다.
2. 온 덩이에 퍼지게 하는 적은 누룩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을 바울은 권면이라고 말하면서 그런 권면은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 준다. 우리를 부르신 그리스도에게서 난 것이란 곧 믿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 믿음만을 주셨다. 믿음 외에 다른 가르침은 잘못된 교훈으로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 다시 율법의 종으로 만들려는 사탄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다.
처음에 교회에 들어오는 다른 복음은 적은 것으로 대단치 않게 생각하기 쉽니다. 그러나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경종해 주고 있다. 악은 언제나 누룩과 같은 역할을 한다. 가루를 부풀게 하는 누룩은 그 덩이가 큰 것이 아니다. 언제나 적은 소량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온 덩이를 능히 부풀게 할 만한 악의 능력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 누룩에 감염되면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고 순종을 빼앗고 소망을 빼앗는다. 우리의 마음에서 교회에서 누룩을 제하자.
요동케 하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서5:10-12)
갈라디아 교인들이 비록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잠시나마 거짓 선생들의 교훈에 빠지기는 했어도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다.
1. 다른 마음
바울이 말한 다른 마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라져 완진히 회복 할 수 없는 자리에까지 이른 것은 아니란 뜻이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성령이 그 마음에 임재하시어 우리의 생을 주관하신다. 우리가 비록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잘못된 길을 잠시나마 걷는다 해도 그 이유로 성령이 우리를 영원히 떠나시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라도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승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믿음으로 주님을 그들의 마음에서 쫓았지만 주님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의 탄식하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이 내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권고하심과 그의 간구를 통해서 우리들로 회개케 하시어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애를 살아가게 하신다. 누룩은 그리스도인을 썩게 할 수 없다. 잠시 더러워질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요동케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고 한 것이다. 요동이란 뒤흔드는 일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우리의 마음을 누룩으로, 거짓말로 뒤흔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흔듦은 겨를 날려보내는 채같이 가라지들만 데리고 갈 뿐, 그리스도인들을 타락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교회건 이 같은 누룩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 누룩은 하나님의 교회를 정화시키는 작용을 할 뿐, 하나님의 교회를 넘어지게는 못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잠정적으로 거짓 선생들의 미혹에 빠져 율법적인 복음을 받아 드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들의 마음까지 빼앗은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무엇이라 하셨나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한때 이들에게 미혹받아 잠시 진리에서 돌이킨 일은 하나님께서 다시 돌이켜 더 나은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켜 주시고 은혜를 주시겠지만 그들의 달려가는 길을 막고 다시 죄의 종의 멍에를 메게 하려고 갈라디아 교인들을 뒤흔들어 놓은 자들에게는 오직 심판만이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2. 할례 때문에 핍박을 받은 바울
바울은 11절에서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자랑하고 누구나 할례 받는 일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며 복음을 받아 드린 이반인에게 조차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것임을 주장하였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의 정체가 바로 이 같은 자들이었다.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당하고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된 이유가 어디 있었는가? 그것은 할례가 구원에 아무런 역할를 하지 못하며 할례를 받고자 하는 자는 오히려 율법의 종으로 다시 들어가 죄의 종노릇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하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믿음으로 외롭다하심을 받으며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바울은 전했다. 그러나 할례를 전하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율법 아래로 끌어드려 율법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복음과 할례는 융합이 될 수 없다. 만약 바울이 그들처럼 복음을 믿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다른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이야말로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울은 12절에서 “너희를 어지럽히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할례를 하느니 차라리 어느 이방인의 습성대로 거세하는 편이 낳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오히려 그 편이 더 의로워질 수 있을 것이란 풍자적인 말이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갈라디아서5:13)
우리는 자유한 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 자유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은 이 자유를 방종한 것으로 오해하며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중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13절에서 말씀해 준다.
1.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바울은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율법의 속박에서 정죄함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할 그런 종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자유를 소중히 간직해야 하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잘 이해해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를 악용하면 더 무서운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되며 방종한 생활로 돌아가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왜 새삼스럽게 자유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인가? 이 자유를 악용하는 자들이 있어서 교회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 버가모 교회에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어서 주님의 책망을 들었다. 니골라는 소위 신앙적인 자유를 육체의 자유와 혼돈하여 성도들에게 주신 참 자유를 오히려 파괴한 장본인이다. 니골라는 이방 교도로써 그리스도교로 전입한 자인데 처음엔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아 7집사 중에 한 명으로 피택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교리에 대해 사탄의 함정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믿음으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은 그 후 어떤 죄를 짓든지 죄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교리를 펴냄으로써 초보적인 순박한 교인들을 유혹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으니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죄의 속박에서도 벗어났으니 죄를 범해도 죄가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성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구원 파와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악한 누룩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롬6장에서 바울은 이 같은 자들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죄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이 자유는 또한 새로운 종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 6:15절에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고 밝혀 주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자유는 의안에서 누릴 자유이기 때문에 의에 대해서는 순종해야 함으로 의의 종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2. 자유로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바울이 말한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한 말은 무엇인가? 육신의 일을 도모하는 일에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유를 쓰면 안 된다는 뜻이다. 죄와 손잡은 자유, 자기 육체의 정욕과 타협하는 자유는 이미 죄의 종의 자리에 되돌아가는 일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 아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참된 자유는 어떠해야 하는가? 바울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해 준다. 그리스도인의 최고 최선의 자유는 사랑과 연계된다. 사랑은 하나님의 최고의 법이며 자유의 목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누리는 자유는 성도들간의 사랑인데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이야말로 자유의 극치인 것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사랑의 종이 되라는 뜻이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줄에 얽매어 사랑 안에서 가치 있는 자유를 누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율법과 사랑
(갈라디아서5:14-15)
바울은 14절에서 율법은 사랑을 이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의 이 말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율법의 대 강령은 곧 사랑이란 뜻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사랑으로 율법을 성취하여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다는 뜻이다.
1. 사랑으로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
사람들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참뜻을 오해하고 있다. 율법에서 의를 얻어야 할 것으로 알고 율법을 지키려다가 결국은 율법의 종이 되어 버린다. 율법의 뿌리는 사랑에 박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떠나서는 율법의 뜻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날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시니이까고 질문을 했다. 이에 예수님은 율법을 둘로 나누어 첫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사랑을 가르치시는 거울로 주신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신약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 밝히 들어내었다. 요 13 : 34절 말씀에서 이처럼 말씀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심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이웃인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생명까지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으로 사랑의 계명을 주신 것이다. 이 계명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인데 이 사랑의 새 계명에는 정죄가 없고 오직 상급만이 있을 뿐이다. 율법의 의문에 의한 계명은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우리에게 정죄를 주는 역할을 하지만 사랑의 계명은 율법을 훨씬 뛰어넘은 온전한 계명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2.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한다.
바울은 15절에서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경종하고 있다. 물고 먹는다는 표현은 사랑과는 정반대 되는 행위로 시기, 다툼, 모략, 이간질 등의 사악한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 말이다. 문다는 말은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고통을 주는 동물적인 행동의 표현이며 먹는다는 말 역시, 야수들이 먹이를 잡아 잔혹하게 먹는 모양을 나타낸 표현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왜 이 같은 경종을 주는 것인가? 아마 그들 중에는 거짓 선생을 따르는 무리들과 바울의 순수한 복음을 사수하려는 성도들 간에 감정적인 대립이 노골적으로 표면화되어 교회 분열에 위험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령은 교회에서 사랑으로 역사 하지만 사탄은 교회를 분열시키기 위해 다툼을 조성하는데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선생들은 쑥물과 누룩을 통해서 이 같은 일을 일으킨다. 성령은 사랑으로 화합시키고 덕을 세우며 생명을 얻게 한다. 그러나 사탄은 미움과 다툼으로 화합을 깨고 혼란을 가져온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성령을 따라 모든 일을 할 것을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의견의 차이가 있다고 감정의 대립으로 다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다툼은 피차에 멸망을 가져 올 뿐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사랑으로 화평을 이루며 사랑으로 모든 불의와 거짓 진리에 맞서 싸워야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 그 중 몇은 비록 거짓 선생에게 미혹되어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지만 영적 대적자는 거짓 선생들이지 같은 교회의 형제들이 아닌 것이다. 사랑으로 역사 하는 성령을 힘입어 먼저 우리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와 정욕과 파당적인 생각들을 소멸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을 가져 와야 한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갈라디아서5:16-18)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육체의 욕심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영육간의 모든 것이 회복되어 새롭게 되었다. 그러나 육체는 의롭다는 선언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약속만 받았지 실제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육체가 완전히 의로워지려면 우리 몸의 구속의 날이 이르러야 한다. 이에 대하여 롬 8 : 23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씀해 준다. 이처럼 육체의 온전한 구속의 날인 부활의 소망이 이르기 까지는 우리의 육체는 세상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정욕과 시기와 탐심으로 인하여 시험을 당하기도 한다.
1.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지만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지난날의 내 몸을 종으로 부렸던 죄의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다. 이 유혹이 우리로 탐심을 일으키고 죄와 손을 잡게 되며 죄를 범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육신의 욕심과 싸워야 한다. 바울은 이 싸움을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싸움을 통해 성화의 과정을 걸어가게 된다.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방심할 떄 이 싸움에서 지게 되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면서 늘 탄식한다. 누가 자기는 이제 의를 행하는 일이나 죄를 짓지 않는 일에 자신이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지으면 안될 줄 알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마다 탄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 같은 일을 자꾸 반복하는 것인가? 그것은 육신의 애씀으로 이겨 보려고 힘쓰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이나 탐심은 육체에서 나오는 힘으로는 막아낼 도리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이 그 해답을 준다. 16절에서 이르기를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그러면 성령을 좇아 행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을 의지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성령은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기 위해 우리 안에 계신다. 성령은 우리 육체의 연악함을 아시고 능력으로 붙들어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삶에서 죄를 떠나게 하시고 착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2.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바울은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 육체의 소욕은 죄를 따라가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소욕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려고 하며 마음속에서 들려주시는 성령의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이 같은 유혹에 깊이 빠지면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곧 넘어진다.
그런데 성령의 소욕은 또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고 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더러운 정욕이나 탐심을 품고 있는 것을 참지 못하신다. 거부 반을을 일으키시고 우리에게 책망하신다. 이처럼 두 가지 소욕이 모두 우리 안에서 서로 견제하며 우리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 가운데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성령의 소욕이 존재치 아니한다면 우리는 구제 불능한 죄인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만 있고 육체의 소욕이 없다면 우리는 이미 완벽한 의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자연히 성령의 소욕을 거스려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께서는 우리로 육체의 소욕을 거스려 모든 불의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18절에서 결론적으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준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임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해야 한다. 누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가? 성령의 충만함에서 온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인데 이 같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슬렸을 떄 곧 회개하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한다.
육체의 소욕에서 나오는 인간의 죄
(갈라디아서5:19-21)
바울은 1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는데 우리가 율법의 종의 자리에서 자유함을 얻은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신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 성령 안에 거하지 못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율법에서 자유한 몸이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생활이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1. 육체의 소욕
바울은 19절 이하에서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자세히 열거해 주고 있다. 이 육체의 일은 결과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21절 하반절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종해 준다. 육체의 욕심이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에 속한다. 인간이 범죄하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후. 타락한 인간의 본능적 욕심으로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새겨 주신 마음의 율법이라고 하는 양심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양심은 죄로 인한 타락 앞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할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양심도 죄 앞에 무릎을 끓을 수밖에 없는 것이 죄 앞에 다만 그것이 죄라고 하는 양심적 고통만 줄 뿐 막을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된 것이다. 혹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죄의 소욕 자체를 버리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육체의 욕심이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한 가지 사건을 의미하는데 음란에 속한 죄악들이다. 인간이 범하는 죄 중에서도 가장 죄질이 나쁜 죄가 바로 음란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우상 숭배를 들고 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가증한 일을 우상 숭배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 나가기까지는 누구나 이 우상 숭배 의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유업으로 받지 못할 하나님의 나라
바울은 21절 하반 절에서 육체의 욕심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에게 경종해 준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란 말할 것도 없이 천국을 말한다. 그러면 왜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를 못하는 것인가? 육체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성령은 약속의 자녀들 가운데서 성령으로 인도해 주심으로 성령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게 하신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소욕(능력)으로 육체의 욕심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까지나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가 나타나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케 하시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롬 8 : 6절에 있는 말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깨닫고 육신이 원하는 생각대로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야 한다. 다음에 롬 8 : 8절에서는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또란 롬 8 : 13절에서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고 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믿음은 육신의 욕심과 싸우는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이 내 안에서 나에게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주시는 그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육체의 정욕된 생활에서 정말로 벗어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의 열매를 맺을 때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5:22-23)
바울은 19절부터 육체의 욕심에 대하여 그 죄악상을 여러 가지로 열거했다. 이 같은 육체의 일이란 곧 육체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열매를 의미한다. 악을 뿌리는 자는 악을 거둔다고 하신 말씀처럼 육신의 소욕은 악의 씨앗으로 우리의 생활에 뿌려지게 되며 그 열매는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는 악의 열매인데 바울은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해 주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22절과 23절에 와서 그와 정반대가 되는 열매로써 성령의 열매를 열거해 준다.
1. 심는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두 가지 열매는 그 결과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는데 이에 대하여 갈 6 : 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육으로 심는 일이란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모든 계휙과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결과를 의미한다. 비록 그런 것들이 명예와 영광을 자신에게 안겨 주고 또 사회와 인류에게 많은 공헌을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게 된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썩어질 것으로 거두게 되며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면 성령으로 심는 일이란 무엇인가? 육신의 소욕을 성령으로 죽이는 생활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이 성령을 의지하여 그 능력으로 우리들의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생활을 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서다. 성령은 우리의 생애와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다. 우리로 죄에서 떠나게 하며,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회개하게 하며,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인도하시고 감동을 주신다. 성령은 순종이 축복 받는 생활임을 체험케 하신다. 성령은 이런 생활을 천국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마음속에서 역사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뿌리치지 말아야 하며 그 감화하심과 감동하심을 소멸하면 안 된다.
2. 성령으로 행하는 자의 열매
바울은 22절에서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밝힌다.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은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생활에 나타나는 결실을 말한다. 그런 결실이 곧 성령의 열매로 9가지에 이른다.
① 사랑 =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사랑이다.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랑이다.
② 희락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가 누릴 즐거움과 기쁨을 말한다.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의 생애에 희락이 있다.
③ 화평 = 화평이란 사랑의 교통을 말한다. 화평이란 분쟁이나 질투의 반대말로 화평이란 화합과 이해 등 사랑에서 나온다.
④ 오래 참음 = 인내를 말한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일에 인내가 필요하다. 그뿐 아니라 성도들 서로간의 교제에도 오래 참음이 필요하다. 이런 인내는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
⑤ 자비 = 상대방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육체의 소욕에는 자비 대신 멸시와 교만이 있다.
⑥ 양선 = 착하고 선한 일에 마음을 두고 형제들에게 이 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사랑의 자세를 말한다.
⑦ 충성 = 주님께 대한 충성된 믿음을 의미한다. 주님께 누구나 충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충성은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킨 성령의 열매이다.
⑧ 온유 = 그리스도의 마음을 의미한다. 교만한 마음이 낮아져서 주님의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열매이다.
⑨ 절제 = 육신의 소욕의 절제로 성령의 소욕으로 이길 때만이 절제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따를 때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의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결실이기 때문에 성령의 뜻에 순종하여 그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인
(갈라디아서5:24-26)
24절에 나오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에 잘 인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성경적인 해답을 주는 말인데 그리스도인들이 왜 죄 가운데서 살아갈 수 없는가에 대한 해답이 된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정욕의 사람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욕심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것은 육체와 함께 그 정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죽음에 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 그를 믿으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정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인의 심판을 갈보리에서 예수님과 함께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다시는 죄 가운데 살아가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인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우리는 그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도 함께 못 박힌 것이다. 정욕의 사람과 욕심의 사람이 우리의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니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옛 사람으로 돌아가 육체의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하나는 부활에 대한 연합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만 연합된 것이 아니라 부활에도 함께 연합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이 살리심의 역사는 바로 성령이 하신다. 성령은 우리가 죄와 허물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리셨다. 우리는 육체와 함게 정과 욕심의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사람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갔던 것처럼 지금은 그 육체의 사람이 죽었으니 육체의 욕심대로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셔서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는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로 살 사람이 아니요 성령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을 거듭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성령의 전으로 성령이 거하시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성령은 새로운 생명의 공급자, 그 생명의 유지자로 우리의 생애와 생활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살아가야 한다.
바울은 25절에서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말해 준다. 우리들이 성령으로 사는 것이 분명하다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응당 성령으로 살아야 한다. 성령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으며 우리의 생애를 주관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성령으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성령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더욱 강력히 권고한다.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라고 한 것이다. 성령으로 행하라는 말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다.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으로 새롭게 살리심을 받았으며 성령이 내 안에서 내 인생을 주관하시는데 우리의 생활은 엉뚱하게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다.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들은 결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다. 헛된 영광이란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신의 명예를 의미하며 이 같은 명예를 구하기 위해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오히려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일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육체를 정과 욕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생활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