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기억하는 것이다.
1. 은혜의 기적은 믿음으로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수준에서 이해하고 바라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소수의 병자들을 고치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드러나지 않으십니다.
2.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셨습니다. 주님은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어서 그들을 내보셨는데, 지팡이 외에 양식이나 돈이 없이 가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것도 의지하지 않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준비된 사람들(복음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최소한의 필요한 것들을 제공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주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사역을 그대로 수행하였습니다.
3. 예수님의 명성이 점점 드러나자 헤롯(안티파스)은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본문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죽인 이야기를 비교적 소상히 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헤롯의 마음 상태인데, 그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를 두려워했으며 그를 보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요한의 말을 들을 때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듣기도 했습니다(20). 하지만 결국은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두려워하며 그를 선대하고 그 말씀을 큰 번민으로 달게 듣는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로 회개하고 돌이켜 믿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은 허사이고, 그 영혼에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헤롯과 같은 심령의 상태로 변화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에서 돌아오자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라'고 하십니다(31).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운집한 까닭에 그들은 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저편 한적한 곳으로 갔지만, 사람들은 도보로 달려와 예수님의 일행보다 더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5. 주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히 보시고 그들을 여러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때가 저물고 장소가 빈들이어서 주님은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로 모인 오천 명을 풍성히 먹이시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건입니까? 인간의 지혜와 치밀한 계산은(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했다) 예수님의 전능한 능력 앞에서 무색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은혜를 종종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손 안에 지금 얼마가 있는가가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이 주님의 손에 드려졌는가가 중요합니다.
6. 이적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배타고 먼저 가게 하신 후에,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고생을 하는데, 주님이 새벽녘에(밤 4경은 오전 3~6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이라고 소리치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신 주님은 배에 올라 바람을 명하여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시 한 번 날카롭게 제자들이 앞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것을 잊었다고 지적합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기적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지 않습니까? 당장 내 눈 앞의 풍랑을 보고, 바로 조금 전에 받은 은혜를 다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자신입니다. 신앙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또 잊지 않도록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상세하게 기록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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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배척 당하심(1-6a절)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한 일과 열두 제자들을 파송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6a절은 예수님께서 자라신 고향인 나사렛을 방문하셨지만 배척당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누가복음 4장에도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신 일에 대해서 증거하는데, 그때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 되지 않으셨을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어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로 빠져나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약 2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 방문에서 낭떠러지에서 밀어서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음에도,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시기 위해서 재방문하셨던 것입니다.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거기’는 5장에 나온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30년 동안 자라신 곳은 ‘나사렛’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나사렛’으로 이동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서쪽에 위치한 호반도시입니다. 그리고 ‘나사렛’은 같은 갈릴리 지역지만, 호수에서는 상당히 떨어진, 갈릴리 호수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서쪽으로 약 65km를 가신 것입니다.
‘떠나다’와 ‘가시다’는 동사는 ‘나가다’와 ‘들어가다’의 의미인데, 예수님의 사역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한 지역에서 사역하시고, 거기를 나와서 또 사역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역을 일시 중지하고, 휴식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 고향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사역하기 위해서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섬김의 종 예수님의 사역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으로 향하셨을 때 제자들도 따랐습니다. ‘따르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같은 길에 있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바른 관계는 같은 길에 있는 것입니다. 같은 길에 있지 않다면 제자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제자로 삼아주셨다면, 같은 길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세워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제1의 목적이 ‘함께 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주님과 함께 있어야, 주님께서 가신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당시 회당모임은 3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제1부가 가장 중요한 중요한 순서였는데, 성경을 낭독하는 시간이었고, 제2부는 기도하는 시간, 그리고 제3부는 강론의 시간이었습니다. 제3부에는 회당장의 재량으로 방문객에게 강론할 기회가 주어지곤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제3부 강론 시간을 이용해서, 회당에 있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강론 시간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다 듣고서,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었다”라고 말하거나, “대단한 강의였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놀랐습니다.
‘놀라다(에크플렛소)’는 1장에서도 나왔는데, 문자적인 뜻이 ‘강하게 맞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망치로 머리를 맞다’입니다.
흔히 예수님의 3대 직분을 왕의 직분,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이라고 합니다. 이 세 직분은 모두 기름을 부어서 세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깜짝 놀랄만한 가르침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지혜자의 직분’도 추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 그리고 ‘∼∼의 형제’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은 굉장히 모욕적인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비 없는 자식’과 비슷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더라도 상대를 비하하는 경우가 아니면,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며 그 아들이라고는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목수’라고 했는데, 마태복음에는 ‘목수의 아들(13:55)’이라고 표현합니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기를,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목수의 일을 보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목수는 고급 기술을 가진 전문가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마을에 종종 연장을 담은 조그만 나무통을 매고는, “칼 갈아요”, “우산 고쳐요”를 외치며 다니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목수가 그러하였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떨어진 문짝도 고쳐 주고, 문고리도 달아 주는 일을 하는, 굉장히 천하게 여김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편모슬하에서 자라고, 천한 목수 직업을 가진, 게다가 집안에 형제·자매는 많은, 전혀 볼품없는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배척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렇게 대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에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격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굉장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가장 잘 알지 못하게 되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편견은 그 사람을 바르게 아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을 잘 아는데...”라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집에서 같이 사는 부부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내가 아는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나?” 또는 “내가 아는 내 아내가 이런 삶을 살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자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녀를, 자기 부모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 자녀를/ 내 부모를 정말 몰랐구나”라고 깊은 한숨을 쉬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고 나면 동일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다는 것이 가장 큰 죄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5-6a)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아무 권능을 행하실 수 없으셨다고 하는데,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불신하는 곳, 마음에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고향 사람들을 ‘이상히 여겨셨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놀라다’, ‘기이하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고향 사람들을 심히 안타깝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제자, 둘씩 보내심(6b-13절)
6b-13절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파송하는 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6b-7)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지내시며 훈련하신 후에, 때가 되었을 때 제자들을 내보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실 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보내셨습니다. 두 명씩 보내신 것은, 신명기에서 말씀하시는 대로, ‘증인의 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이 진실인 것과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확실한 거부가 되었습니다.
또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큰 용기를 갖게 해 줍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할 때 어린아이가 있다든지, 이웃이 찾아오면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런 때에 옆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응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명씩 보낸 것입니다.
(8-9)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지팡이는 산짐승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장거리 여행할 때에 걸음걸이를 쉽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칼이나 돈을 가지라고 하지 않고, 지팡이만 가지라는 것은 이 전도 여행은 자기 자신을 힘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힘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양식, 배낭, 전대의 돈, 두 벌 옷을 갖지 말라는 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당시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은 큰 미덕이었습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 마을을 방문하면 마을 사람들은 차례로 그 사람을 초청하곤 했는데, 때로는 위선에 가까울 정도로 후대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마을에서 손님 대접하기를 거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전도자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서 의식주의 문제를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0-11)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마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게 될 때, 이 집, 저 집을 바꾸어가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데 더 유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순회전도자가 한 마을을 방문하면, 한 집에 머물러 있어야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이 쉽게 찾아가 주님의 말씀도 듣고, 신앙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에 머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그런 정신이 사라지고, 한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 집에 부담이 되었고, 자신을 위해 오랫동안 머무는 거짓 선지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 문서에는 순회전도자들이 한 집에 3일 이상 머물려고 하면, 그는 거짓 선지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도가 한 집에 긴 시간 머무르든, 짧은 시간 머무르든 그것은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함이지, 그 자신을 위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영접을 하지 않거든 그 마을을 떠날 때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고 난 후 성전에 들어갈 때는, 항상 발에서 먼지를 털었다고 합니다. 이방인 지역의 흙으로 성전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실제적인 이방인은 특정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되는 셈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회개하라’라는 것은 ‘마음을 바꾸고 인생의 길을 바꾸라’라는 의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르시는 주님을 주인으로 삼아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사람들을 고치지 아니하고 기름을 발라서 고쳤습니다. 우리가 기도로 치유함을 받을 수도 있지만, 약으로 치유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서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마리아의 아들로만, 목수로만 알았지, 자신들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을 결코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들의 선입견이 그것을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우리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 주님의 제자로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4-16)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예수의 이름이 드러납니다. 6장 시작에서 ‘마리아의 아들 목수(3절)’ 이라고 불리던 그가 왕궁에 있던 헤롯까지 귀를 기울일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하지만 유명함은 예수를 구원자(메시아)의 자리에 앉히지 못했습니다. 모두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음에도, 그에 대하여 각자 다르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이쪽에서는 그가 엘리야라고 합니다. 저쪽에서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을 뿐이라고 합니다. 자기 입장과 생각 때문에 있는 모습 그대로의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는 마치 거울과 같아서 그를 알게 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어떤 구원자를 원하는지, 속내를 드러내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헤롯이라는 사람이 예수 속에서 세례 요한을 봅니다. 14-16절은 세례 요한이라는 말을 두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헤롯’이 목을 베어버렸던 사람입니다. 16절은 ‘내가’라는 인칭대명사를 넣어 행동의 주체가 자신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예수 안에서 ‘자신이’ 죽였던 세례 요한을 보았던 것이기에, 사실은 ‘살인자였던 자신’을 직면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17-28)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14절은 헤롯이라는 이름에 ‘왕’이라는 한 글자를 추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갈릴리 및 베레아 지역 분봉왕이었습니다. 분봉왕. 어느 곳에선 왕이라 불렀지만, 다른 곳에서는 머리를 숙여야 했습니다. 이곳에선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았지만, 어떤 곳은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이지만 사실 왕이 아닌 이.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에게 휘둘렸던 이. 그것이 헤롯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지금은 아내 헤로디아를 ‘위하여’ 무죄한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며 욕망의 도구가 됩니다(17절).
성경은 20절에서 분명하게 헤롯이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21절에서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을 의식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합니다. 26절은 그가 ‘심히 근심하나...거절할 수 없는지라’ 고 했지만, 27절에서 ‘곧’ 고민을 접고 시위병 하나를 보냈음을 말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독립적이지 못하고 평판에 종속된 존재로 그려집니다. ‘곧’. 평판 앞에서는 옳고 그름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왕’이라는 단어는 헤롯에게 과대포장이었습니다.
왕으로 불렸음에도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다는 자기모순과 두려움을 겸허히 인정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했지만, 헤롯은 이를 무리하게 부정합니다. 주어진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권력의 달콤함에 빠져들어 갑니다. 22절에서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는 말을 통해 그가 원했던 통지차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에서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는 외침을 통해 있는 힘껏 자신을 부풀리는 허영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길이 짜릿했지만, 폭력적이었으며, 하룻밤 지나고 나서는 죄책감만 남았음을 경고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던 헤로디아가 진정한 왕이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실 그녀도 복수심에 지배당한 노예였습니다. 19절에서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했는데, 분노의 이유가 정당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레위기 20장 21절에 근거해 죄를 지적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0:21) 누구든지 그의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의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헤로디아는 헤롯 동생 빌립의 아내였습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에는 왕과 왕비도 포함됩니다. 그녀는 반복해서 죄를 지적하는 요한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대신, 복수심에 몸을 던져 요한을 죽일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21절에서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라는 말은 헤로디아가 계속해서 요한을 죽일 틈을 엿보고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24절 원문을 보면 살로메가 무엇을 구할지 물어보자 ‘세례 요한의 머리!’ 라고 답하며 ‘구하라’는 단어를 생략함으로, 그녀가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즉각적으로 자기 소원을 외쳤음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자기 딸과 남편을 살인도구로 만든 그녀에게 모성애란 없었습니다. 그녀는 복수심에 불타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과 두려움과 허영과 분노의 엉켜짐 속에서 많은 사람이 인간성을 잃어버립니다. 17절에서 여자 때문에 의인을 잡아끌고 와야 했던 사람들에겐 명분과 정당성이 없습니다. 그저 밥벌이 때문에 시키는 일을 했던 것뿐입니다. 27절에서 시위병 하나는 재판 절차도 없이 무고한 사람의 목을 베어 머리카락을 잡아 소반에 올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22절에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는 어머니 욕망을 이뤄주기 위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하며 수많은 남성의 욕망 그릇이 되었음을 봅니다. 생부 빌립을 버리고 헤롯이라는 권력을 택했던 어머니 말을 전하기 위해 25절에서 ‘급히’ 들어가던 뒷모습. 28절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소반에 담고 어머니를 향하며 짓고 있을 그녀의 미소를 상상해보면, 결코 인간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타인의 욕망 도구가 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로 힘겹게 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의 죄마저도 지나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요한을 봅니다. 성경은 18절에서 그가 ‘당신’이라는 인칭대명사를 두 번 사용하며 헤롯에게 외치는 말임을 강조합니다. 에둘러 말한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사람이 왕이라 해도 정확하게 가리키며 지적했다는 것입니다. ‘말했다는’ 단어를 과거 미완료형을 사용함으로 단지 한 번이 아니라 잡아 죽일 때까지 반복적으로 지적하고 있었음을 밝힙니다. 그는 헤롯을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죄인이었고, 하나님만이 진정한 왕이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용기와 끈기의 결과는 육감적인 춤 한 번에 잘려 잔치상에 올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머리가 소반에 담긴 육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안주 삼아 잘근잘근 험담하며 씹어 댔고, 그의 제자들은 목 없는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 지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를 통해 그의 기억이 떠올려집니다.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생전 사역보다, 죽을 때의 모습을 더 많은 분량을 들여 설명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고향에서 배척을 받고 나신 후(6:1-6), 열두 제자를 부르사 보내셨다가(6:7-13) 사역 보고를 받으시는(6:30) 사이에 위치하며, 제자들 또한 결국 세례 요한처럼 살다가 죽게 될 것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바로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은 제자도의 약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넘어, 이렇게 되는 것이 바르게 걷는 것이며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말씀입니다.
소반 위에 올려졌던 그의 머리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생각해보곤 합니다. 여유 있고 평온한 미소, 경멸과 비웃음,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슬픔, 하늘을 소망하며 시선을 위로 향하는 모습. 각자의 상황과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일반적이진 않았으리란 것입니다. 먼 훗날 기적을 행하는 목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헤롯왕이 그를 떠올렸다는 것은 요한이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사람다웠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힘으로 여기며 마지막 1초까지도 의미를 담았습니다. 그는 뭔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장면을 제자도의 교훈으로 삼으며 그 이름을 다시 꺼내어 불러줍니다.
오늘도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표정을 바꿔 그의 얼굴을 그려봅니다. 그것만이 죄책감과 욕망과 허영과 분노의 세상 속에서, 더 가지고 누리고 즐기려는 사람들 가운데서, 고난과 죽음을 대비해가는 진리와 생명과 소망의 길이 될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30-34절)
30-31절에서 예수님은 전도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서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30-31)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예수님은 언제나 일정한 사역을 마치면, 한적한 곳에서 쉬시며 기도하심으로 새로운 사역을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여기선 오고 가는 사람들로 인해, 음식 먹을 틈도 없었던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며 배려해주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예수님도 휴식을 취하러 가셨지만, 33절을 보니,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34절에 예수님은 이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합니다. 불쌍하다는 것은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휴식을 취하러 온 예수님의 입장에선, 어찌 보면, 이 무리들이 귀찮거나 불편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긍휼이란 것은 <감정의 습기>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감정이 메마르면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립니다. 누가복음 8:6을 보면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며,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가 죽었는데, 이유는 습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습기는 생명유지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습기가 있어야 부드럽고, 부드러워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전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새벽에 전화가 와서 잠이 깼습니다. 암 투병 중인 교우님이신데, 잠을 못 이루고, 자꾸 무서운 환상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화로 기도를 해드리고 안심을 시켜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일새벽이라 바로 잠을 청했지만, 그 성도님이 마음에 자꾸 걸렸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으면 가족이 아닌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계속되는 그분의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그분이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집에서 병원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되었지만, 그분이 겪고 있는 무서움과 외로움을 생각할 때는,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병실에 도착하여 그분을 보았습니다. 그분은 저를 보자마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병에 대한 걱정과 불안 등으로 그날 잠도 안 오고, 밤새 많이 두렵고 무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제게 전화를 주셨는데, 전화를 받아주신 것도 감사한데, 생각지도 않게 새벽에 찾아와 주어서 놀라셨다고 합니다. 그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드리고,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드렸습니다. 훗날 퇴원 하게 된 그분이 말하길, 그 때의 새벽심방으로 마음이 너무도 편해졌다고 합니다. 당시 불안함과 두려움에 차여 있던 마음이 해소되고 평안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후 시작되는 여러 치료에 걱정하지 않고, 담대하게 임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만약 당시 저의 피곤함 때문에, 그분의 상황을 잠시 외면했더라면, 많이 죄송스러울 뻔 했습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보면, 그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긍휼이 아닌 메마른 마음으로 사람과 환경을 보면, 아무런 감동이 없고 다른 외부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부자인 사장이, 형편이 어려운 운전기사 주인공을 대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사장은 운전기사를 긍휼의 마음이 아닌, 메마른 감정으로 대합니다. 그래서 사장은 운전기사의 어려운 상황보다는,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질 때, 상대방의 심정을 이해하게 됩니다. 또 싫어하는 사람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질 때, 무엇보다 내 자신이 먼저 변화됩니다. 긍휼의 마음의 본질은 겸손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행하는 은혜(35-44절)
35-44절까지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 이상을 먹인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당시 때가 저물어,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수천 명이 넘는 인원인지라 식사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입장에선 먹을 음식도 없었을 뿐더러,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상황만 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부족하고, 내 형편과 상황이 안 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께서 직접 이루십니다. 주님이 시키신 대로 음식을 가져오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 기적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이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다른 어떤 기적보다, 큰 감격의 기적으로 다가온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는 기적 등’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간접적인 것입니다. 반대로 오병이어는 제자들에게 있어 직접적인 체험입니다. 예수님이 축사하신 떡과 물고기를 제자들이 받아서, 그들의 손으로, 직접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줘 주는 기적의 감격! 내 손에서 끊임없이 기적이 베풀어지는 그 기분은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외과의사는 수술의 첫 집도일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외과 수련의가 유능한 교수님 옆에서 수술을 보조하며, 수술의 성공을 경험하다가, 때가 되어 본인이 첫 수술 집도를 하는 날, 또 그 수술을 성공으로 마치게 되는 감격은 인생에서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손에서 직접 주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경험! 아마도 제자들은 이 기적의 감격을 잊지 못했으며, 예수님 승천 이후 전도사역을 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전했을 것입니다.
바람이 거스를 때(45-56절)
오병이어 기적으로 인해 무리들은 12광주리가 남을 정도로 배불렀고 만족했을 것입니다. 무리들뿐만 아니라 제자들 역시 직접적인 기적을 행한 것에 대한, 흥분과 열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게 하고,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서둘러 제자들을 무리들에게서 피하게 하신 것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요한복음 6:15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기적을 경험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은 피하십니다. 더불어 제자들도 무리들에게 다른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배에 태워 보내시고,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윽고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한 가운데에 있게 됩니다.
(48)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로마 제국 경비대의 근무 시간 중 하나인 밤 사경은 새벽 3시~6시까지를 가리킵니다. 이런 암흑의 바다를 건너는 제자들에게, 갑자기 바람이 찾아옵니다. 그냥 찾아오는 것도 아니고 바람이 ‘거스르다’고 합니다. ‘거스르다’의 원어 에난티오스는 ‘반대적’이란 의미입니다. 즉 내가 가야 할 길을 못 가도록 막는 것입니다. 바람은 제자들을 가야 할 항로로 가지 못하게 하고, 제자들은 이런 바람에 맞서고자 노를 힘겹게 젓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오병이어의 은혜를 받거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바람이 나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바람이 우리를 거스르게 하여,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못 가게 막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힘겹습니다. 그래서 문제의 바람을 이기고자, 노를 힘겹게 젓지만, 바람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때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시선을 봐야 합니다. 주님은 48절에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캄캄한 암흑의 바다에서 노 젓는 것을 보는 것이 가능합니까? 당시 불빛 하나 없는 상황에서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능하십니다. 우리 인생은 한치 앞도 안 보이지만, 주님은 우리가 인생의 바다에서 힘겹게 노를 지으며, 바람에 무너지지 않게 고전 분투하는 모습을 이미, 보고 계십니다. 보고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그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그리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그 무섭던 바람이 그치게 됩니다. 인생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습니까? 그곳에서 힘겹게 노를 젓고 있습니까? 걱정하시 마십시오,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 인생의 바람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잊고 있었던 것이 있습니다. 오병이어 때, 은혜를 베푸셨던 그 예수님이, 바람이 거스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1절 후반 절부터 52절인 구절을 살펴봐야 합니다. “....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우리도 인생의 바람이 몰아칠 때, 이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떡을 떼셨던 은혜를 베푸신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처럼 마음이 둔하여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으면, 바람이 거스르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바람이 거스르다가, 바람이 그쳐서 평안해지는 은혜도 있습니다.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본문 마지막 56절처럼, 인생의 문제에 주님이 개입하셔서 성함을 얻는 은혜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의 길에는 높고 낮음의 두 가지가 공존합니다. 그 공존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시편48:14에서 “아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우리의 상황이 바람이 거스를 때라도, 혹은 오병이어 사건처럼 은혜를 얻는 때라도,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든 동일하게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며, 인생의 바람을 멈추게 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히 인도하신다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품고 삶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며, 이 말씀을 지켜 담대하게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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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은 제사장인 아버지와 기도의 사람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것도 예수님처럼 천사로부터 태어날 것을 미리 예고 받고 태어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예수님께 직접 세례를 베푼 사람으로, 그가 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불의에 대항했습니다. 예수님조차도 그를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전하는 세례 요한의 참수 소식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4분의 1 군주)인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이복동생의 부인인 헤로디아와 부도덕한 결혼을 하자 이를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라고 질타했습니다. 헤롯은 세례 요한의 지적 때문에 불편했지만 기본적으로 세례 요한을 의인이요 선지자로 알았기에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잔인하고 야심 많은 헤로디아는 세례 요한에게 독을 품었습니다. 헤롯의 생일날 귀빈들을 초청해 잔치를 하던 중, 헤롯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아름다운 춤 앞에서 권력자 특유의 호기를 부립니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 나라의 절반까지도 주겠다며 약속합니다. 이에 딸은 어머니에게 달려갔고, 헤로디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헤롯에게 요한의 목을 줄 것을 요청하게 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딸의 요청 앞에서 헤롯은 아차 했지만, 혹여 자신이 호기로 부린 약속을 철회한다면 귀빈들 앞에서 자신의 체면이 손상될 것을 염려해서, 딸의 요청대로 요한을 목을 쳐서 죽여 그 목을 소반에 얹어 딸에게 주었고, 딸은 이를 어머니에게 줍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헤롯은 소반에 담긴 요한의 머리에서 혀를 잡아 댕기는 욕을 보이는 행동까지 취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 택함을 받은 의로운 세례 요한이 술에 취한 왕의 호기와 한을 품은 한 여인의 앙심 앞에서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죽었다는 이 사실이 참으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이런 일이 대명천지에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죽도록 방치했을까요?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축귀사역을 하시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하루 이틀 미루더라도 세례 요한을 구했어야지 하지 않겠습니까?
고토 켄지의 어머니 이시도 준코 여사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도 "슬픔이 증오의 사슬을 만들지 않길 바란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또한 그가 매년 정기적으로 평화를 주제로 수업을 했던 기독교학교인 타마가와성학원은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며 그를 추모했습니다.
"고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비참한 현실에 있다 해도 분노와 증오를 부풀릴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로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의미를 되묻고 싶습니다." (자료: 뉴스앤조이, 2015.02.03.)
고토 씨의 친구들은 그의 무사귀환을 바라며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 'I AM KENJI'에 "켄지 씨는 전쟁 중에도 남의 마음에 다가가는 부드러움과 약한 자를 돕는 강인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증오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켄지 씨는 살아 있습니다. 모두의 마음속에, 일상의 일 속에, 사람과 미소가 마주치는 순간마다 반드시 켄지 씨의 그 큰 미소(Big Smile)를 기억할 것입니다" 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앞서 살펴본 마태복음(11:2-6)에 의하면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이 바로 세례 요한이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며, 선지자들의 예언대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이제 다 완결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참수당하기 전의 세례 요한의 상황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세례 요한을 참수하도록 지시한 헤롯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4-16)
세상의 잣대로 보자면 광야에서 거친 삶을 살던 세례 요한과 궁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는 분봉왕 헤롯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더욱이 헤롯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보다 더 쉽게 앗아가 버릴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였다는 점에서도 세례 요한은 꿈틀거리는 지렁이보다 못한 존재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헤롯이 아무리 재산이 많고 사람의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가였다 할지라도 그는 진리 앞에서는 죄인이라는 초라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참이요 진리이신 예수님의 권능 앞에서 그는 자신의 죄악을 지적한 세례 요한을 떠올렸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다 선지자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참수한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처럼 의인과 악인의 삶은 참으로 역설적일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세례 요한은 세상 권력 앞에서 비참하게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이 세상에 다시 밝혀졌듯이, 의와 공의를 위해 삶을 추구했던 하나님의 선한 뜻들을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세워가려는 이들은 모든 사람들을 통해 반드시 구현될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배를 타고 따로 빈들에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따라온 무리들을 가르치시고 고치고 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주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제자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빈 들에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들이 작은 아이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에 넘치도록 남았습니다. 제자들은 그 기적의 현장 한 복판에서 그것을 직접 나누어주며 체험했습니다. 얼마나 흥분하고 감동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기적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자들은 거스르는 바람으로 인한 고난을 겪게 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간 것은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그날 초저녁쯤인 것 같습니다. 45-47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 벳세다로 보내시고 홀로 기도하시다가 저물었다고 한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제자들이 거슬리는 바람과 그로 인한 풍랑으로 고난을 당한 것이 밤 사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시-6시 사이입니다. 한마디로 죽을 고생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지치고 기진했겠습니까? 불과 몇 시간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이 바로 돌아서서는 이런 고난을 보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현장입니다. 방금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기적을 목도하고 병이 낫고 감동과 감격으로 찬송했는데 지금은 거의 죽게 된 지경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로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고 있습니다. 기적의 축복과 죽음의 고난이 어울리지 않게도 성도의 삶 속에 동시에 들어온 것입니다. 낮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의 감동은 한순간에 다 사라지고 현실적인 괴로움이 그들에게 닥쳐온 것입니다. 혹시 예수 믿고,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데도 불구하고 풍랑처럼 덮쳐오는 삶의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당해 본적이 있습니까? 예수 안 믿겠다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 믿는데도 고난이 닥쳐올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데도 왜 고통이 찾아올까요?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생도 없고, 축복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오해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러면 찬송가 384장은 뭡니까? 라고 질문하실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성경의 형통과 세상의 형통은 다릅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성경이 말하는 성공은 다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만사형통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막힘없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만사형통은 모든 것이 막힘없이 통하는데 누구와 통합니까? 하나님과 통합니다. 내 모든 생각, 마음의 소원이 하나님과 통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통하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창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사경, 새벽 3시-6시 사이입니다. 가장 어둠이 깊은 시간입니다. 이젠 완전히 지쳤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풍랑보다도 짙은 어두움보다도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우리가 이런 풍랑가운데 있는데 주님은 무엇 하시나?’ 이들의 두려움은 주님과 통하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47절을 보니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힘겹게 노를 젓는 그 시간에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위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풍랑만난 제자들이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그 때, 주님은 주무시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고난당하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만사형통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다. 두려워 말아라. 겁내지 말아라 하시며 믿음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절망 중에 그 사공 떨면서도 한줄기의 밝은 빛 보고서
배안에도 하나님 계심 믿고 오 기도올린다,기도올린다.(찬345장)
어떤 상황에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 그것이 만사형통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들에 주님이 계시므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가능했듯이 바다의 물결로 고난당하는 그 현장에도 주님이 계시면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49-50절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주님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가다가 고난을 만난 제자들을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밤 사경! 폭풍 속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절망 가운데 지쳐 쓰러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주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교우님들, 우리가 주님 말씀을 따라가다 고난을 당할 때 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까? 왜 아무 것도 없는 빈들이어도 염려하지 말아야 하고 물결로 흉흉한 바다 한 복판이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까?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찾아오시는, 내가 믿는 그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기 말씀에 순종해서 고난당하는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 신실한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믿음으로 산다고 사는데도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까? 눈물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까? 좌절이 있고 절망이 있습니까? 두려움이 있고 혼란이 있습니까? 밤 사경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듯이 그렇게 우리의 고난 속으로, 우리의 두려움과 절망 속으로 우리 주님이 걸어와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이성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난을 이길 방법이 없고 내 경험으로는 아무리 떠올려도 이 물결을 이기는 지혜가 없지만 내안에 거하시며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마라”고 말씀해주시는 형통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더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하며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만사형통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