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괴객
박진성
빈집에 들어가 빈 식탁에 물병을 놓고 온 적이 있다
시집에 꽂아둔 승차권을 더듬는 저녁엔
손가락이 기억하는 방향이 있고
승차권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가 있고
죽을 개가 죽어갈 때 처음 기도를 했다고 네가 말했었지
봄이 오는 기척으로 방랑괴객(放浪怪客)이란 단어를 만드는 일, 방랑하며 괴상한 객이 되어 빈집에 들어가보는 일, 다른 봄을 걸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고 어떤 시인은 말했지만
빈집에 저녁이 들어앉고 사나흘쯤 들어앉아 저녁이 빈집의 주인이 되면 물병에는 물 대신 시간이 고인다 몇억 광년 별빛이 처음으로 도착한다 자기 몸속 낯선 사람이 물병을 바라본다
물병을 들고서 언덕을 올라가면 유기견이 따라오는 다른 저녁이 있다 동물은 버려질 때 다른 종(種)을 앓는 방랑괴객을 피 대신 흐르게 한다 처음 해보던 기도를 피 대신 흐르게 한다 이리로,
이리로 오렴, 문장들의 식탁인 시집에 물병을 얹어놓고 늙은 개를 어루만지는 밤이 있다 물병을 들면 도착하지 못하는, 떠도는, 수백억 광년의 별빛, 별빛들이다
—《문학동네》2013년 r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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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 1978년 충남 연기 출생. 고려대학교 서양사학과 졸업. 2001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목숨』『아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