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풀기
[1]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 소식을 누구로부터 듣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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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4분파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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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이 고린도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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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 ) ( )을 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사랑이 담긴 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형제”는 구원 용어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가족에게 해당되는 호칭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형제입니다. 바울은 형제들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권위’를 나타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엄숙하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권면”이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합당한, 복음에 합당한 반응을 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권면의 내용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쟁”(헬. 스키스마타)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쟁”은 단지 분열이 아니고 “노기가 가득한 싸움”(레온 모리스)입니다. 당파를 만들어 분쟁을 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분쟁이 더욱 깊어지게 만들어 마음이 갈라서게 합니다. 그들에게 같은 마음과 같은 뜻(판단, 생각)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합니다. 같은 말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가졌을 때 나옵니다. ‘온전히 합하라’는 말은 그물수리(마 4장 21절. 그물을 깁다)에 사용된 말과 같습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 같은 말은 현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얘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아, 개별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 얘기를 아주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생각을 없애라는 얘기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져야 할 마음과 뜻입니다. 그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신앙의 자태입니다.
다양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3장 6절에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합니다. 서로 감당하는 일이 다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4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몸에 속한 지체는 여러 가지입니다. 문제는 그 다양성이 교만이 되고 다른 사람을 깔보고, 한 몸 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
바울은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렸다.”고 합니다. 글로에는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여인입니다. 신자였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 여인의 집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었고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글로에는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 같고, 그녀의 종들은 사업상 에베소와 고린도를 오가야 했던 것입니다. 글로에의 집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신자가 되었고, 에베소 교회의 한 회원이 된 것 같습니다. 사업 때문에 고린도에 갔다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고 그 교회에서 발생한 상황을 바울에게 전해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소식은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격한 감정을 가지고 서로 분열되어 싸우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는 분쟁입니다. 갈리디아서 5장 20절에 분쟁과 분열은 육체의 일입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시기심과 이기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12절.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
분쟁의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말하면서 분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서로 나누어 싸운 것은 아닙니다. 뒤로 가면 초점은 바울과 아볼로에게 맞추어집니다(3장 4절, 5절, 6절, 22절. 4장 6절).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취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이처럼 파당이 조성된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어떤 내용을 가지고 분쟁을 했던 것일까요? 교리적인 문제는 아닙니다.
바울 | 나는 바울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했다. 이 얘기는 뒤집으면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이다. |
아볼로 | 아볼로는 사도행전 18장 24절 – 19장 1절에 나온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다. 그는 “언변이 좋다”고 하였다. 성경(구약)에 능통하였고, 탁월한 말솜씨를 가지고 유창한 설교를 했던 것 같다. |
게바 |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다. 베드로가 고린도 교회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고린도 교회에서 어떻게 게바 파가 형성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베드로는 사도들 가운데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이다. |
그리스도 |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 해석이 주어진다. 그리스도를 당파를 만드는데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인간 지도자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 |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
사도 바울은 수사학적인 질문을 합니다. 세 가지를 묻습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②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③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한 분 그리스도께서 나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리스도를 나누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 그룹만이 그리스도를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속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름으로”는 연합되어 지속적인 관계를 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지 바울의 이름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속한 사람이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른 지도자들에게 속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명으로 지도자의 이름을 주는 것은 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면서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세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교회의 머리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가 온전히 합해야 할 이유입니다. 어떤 지도자를 따른다는 이름으로 분쟁,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십자가와 세례”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스보는 사도행전 18장 8절에 나오는 회당장일 것입니다. 그는 고린도 회당의 지도자였는에 온 집과 더불어 주를 믿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듣고 회심하였습니다. 가이오는 로마서 16장 23절에 나오는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었다”고 했는데 그는 신자들을 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 부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세례를 무시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세례는 주님께서 친히 주신 지상명령의 내용에 속합니다(마 28장 19절). 주님께서 교회에 세우신 성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진실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교회는 세례를 베푸는 것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의 얘기는 고린도 교회의 분쟁 상황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15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세례는 연합 관계를 이룹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관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고대에 ‘이름’은 그의 전 인격을 의미합니다. 전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바울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는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 그 어느 누구의 이름으로도 베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말하면 그것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16절.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
바울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5절에 스데바나의 집은 아가야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집 전체가 처음으로 회심했다는 뜻입니다. 그 외에 다른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교회에서 파당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17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왜냐하면”(For)으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목적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그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사역, 그의 본질적인 사명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그 본질적인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하면 주님의 말씀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복음은 ‘말’로 전해집니다. 말이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 사회는 수사학을 높였습니다. 달변(達辯)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수사학적 실력은 그 사람의 탁월성을 평가하는 기준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수사학이나 철학적 논법들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중심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바울의 능력으로 사람들이 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