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20세 水使公 文載道 선조님
수사공은 나의 10대조이시다. 아드님이신 3남 희설계(9대조, 1594년 출생) 자손이며, 우리 지손은 보성 남산마을을 세거지로 정하신지 어언 400년이다. 지난 해(2018) 보성문화원은 수사공의 업적을 기리며 휴헌문집休軒文集을 발간하여 두루 배포하였다. 휴헌은 수사공의 호이다. 10대조의 공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우리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주 토요일은 희설 할아버님 시제일이다. 조상의 빛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남평문씨 시제관련 자료를 작성하면서 시조공 단제 홀기, 希契(9대조), 世昌(8대조), 龜河(7대조) 조상님 시제 홀기 및 축문, 수사공 일생을 기록해 두신 글을 모아, 이날 배포하려고 준비해 두었다.
여기에 수사공 재도(載道 20세) 할아버님에 대한 아드님 희순(希舜)님의 글을 올린다.
가장 家狀
숭정 을사 1665년 만추절(음 9월) 崇禎乙巳晩秋節 큰 아들 희순이 씀 孤哀子 希舜
부군府君의 휘는 재도載道이고 자字는 계기戒器이다. 휴헌休獻은 아버님의 호다. 문씨 계출系出은 남평南平이고 시조는 다성多省인데 석함石函속에서 태어나 큰 연못가의 바위 아래로 내려왔다. 5세 때 문장에 능숙하여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 문文이라 성을 쓰고 이름을 다성多省이라고 했다. 신라 때는 삼중대광 벽상공신 동평장사를 지내 공이 많아 개국백開國伯으로 봉직을 받고 시호는 무성공武成公이다. 시조를 삼광선생三光先生이라고 지칭해 온다. 고려 때 집현전 태학사 공유公裕는 시호가 경정공敬靖公으로 같은 직의 평장사를 역임했고 또 극겸克謙은 시호가 충숙忠肅인데 직간直諫으로 명성을 남겼다. 위 내용은 우리나라 동사東史에 나타나 있으며 유구역維鳩驛의 벽 위에 간신諫臣들이 나라를 떠나면서 그림과 시로 남겨두었다. 극겸克謙은 조선시대 명종明宗 임금의 사당에 배향配享되어 있다. 강성백江城伯으로 봉직받은 득준得俊은 시호가 의안毅安인데 동평장사를 지냈다. 숙선叔宣은 시호가 충정忠貞이고 호는 청도선생淸道先生이라고 칭한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는 휘諱가 익점益漸인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유학을 앞장서 천명했다. 조선 초기 참지의정부사로 증직을 받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封을 받았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인데 부군 문재도 공에게는 10대조가 된다. 6대조는 휘가 상능尙能이고 행직으로 승정원 우승지를 역임하고 호는 인재忍齋인데 문필로 세상에 명성을 떨쳤다. 고조는 휘가 우창佑昌인데 유일遺逸과 행직行職으로 여주목사 병마절제사를 역임했다. 둔재遯齋 정여해鄭汝諧(1450~1520)와 승지承旨 양이하梁以河[와 함께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선친의 휘는 서림瑞霖이고 내금위장을 역임하고 형조참의로 증직받았다. 선비先妣는 진원박씨인데 선교랑 박위朴衛의 따님이고 생원을 역임한 박윤원朴胤源의 손녀이다. 을해 1575년 4월 12일 해시亥時 오후11시에 보성군寶城郡 미력면 도개道開마을 고택에서 출생하셨다. 출생하신 날 밤에 대호가 대문 밖에서 쭈그리고 앉아 지키고 있다가 해산한 후 곧 갔다. 지역사람들이 기이하다고 했다. 자질이 괴걸魁傑하고 도량이 깊고 명확했다. 6~7세에 많은 아이들과 큰 길에서 놀면서 모래를 쌓아올리며 성을 만들고 군문軍門을 배열했는데 마침 본 고을 원님이 지나다 노는 것을 봤는데 모든 아이들은 좌우로 도망갔는데 부군은 혼자 성을 지키고 있었다. 졸도들이 길을 비키라고 호통을 쳤는데 부군이 말하기를 “성은 피할 수 없으니 사람이 피해 가라고 했으며 또 군문軍門은 누구도 범할 수 없다.” 고 했다. 원님은 부군을 기이하게 여기고 놔두라고 한 후 뉘 집 아이냐고 묻고 그냥 지나갔다. 9세 때는 소학小學을 암송한 소리가 아주 유창했다. 10세 때는 대학大學을 강론하면서 뜻을 명쾌하게 풀자 수의繡衣 김명현金明鉉이 이를 보고 극히 칭찬했다. 글 읽고 남은 여가에는 정자산程子山위에서 아무도 모르게 활을 쏘고 말타기를 연습했다. 지금도 치마대馳馬臺가 전해오고 있다. 갑오 1594년에 부친상을 당해 예제禮制대로 상인喪人의 예를 다하면서 극히 슬퍼하고 바싹 여위었다. 병신 1596년에 삼년상을 마치고 정유 1597년에 평민복을 입고 대검을 차고 순천과 당진의 전쟁터로 달려가 적의 추장을 모두 죽이자 중국에서 지원 온 장수가 아주 기이하게 여겼다. 계묘 1603년에 무과 합격하고 선전관을 제수 받았으며 정미 1607년에 비변사로 승직되었는데 당시에 혼조昏朝를 만나 결심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산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자호를 휴헌休軒이라고 했다. 날마다 은봉隱峯 안방준安邦俊과 석탄石灘 이신의李愼儀와 함께 경학의 뜻을 강론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요도를 깊이 연구하며 중화를 존중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며 토벌하고 대의를 회복시키는 의를 높였다. 아들 희순希舜에게 명하여 학문을 익히게 했다. 장릉長陵이 왕위에 오르자 왕명을 받고 등용되었다. 갑자 1624년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어가가 몽진을 가게 되자 몸을 솟구쳐 일어나 난리에 달려갔다. 임금의 어가를 돌리게 하고 난리를 평정시켰다. 호종공신으로 특지를 받고 장기현감으로 제수 받았는데 현감 취임 날 주민들에게 농업을 권장하고 예의를 가르치니 관리들이 이 분의 현명함에 복종하고 주민들은 생업에 안정을 얻게 되어 ‘촉군蜀郡과 같은 정치’라고 지칭 받았다. 경오 1630년에 경주慶州판관으로 임명되어 가게 되었으나 친병親病으로 명을 받고 상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신미 1631년에 모친상을 당해 부친상 때와 같이 슬픔을 다하고 복을 마친 후 흥해興海 군수로 옮겨갔다. 갑술 1634년에 평해平海 군수로 옮겼는데 서쪽의 오랑캐들이 여러 해 동안 국경을 침범해 왔기에 주민들이 모두 곤욕스러워 했다. 평해현으로 부임하던 날 먼저 그 고을의 자녀들을 소집해 춘추 대의를 강론하고 농한기 때는 활을 쏘며 무예를 익히게 했다. 을해 1635년에는 삼남순검사로 부임했는데 당시의 북쪽 오랑캐들은 나라의 심각한 걱정거리가 되었기에 임금으로부터 특명을 받았다. 부임한 고을마다 은혜를 앞세우고 위엄을 뒤로 했으며 파괴되고 남은 무기와 무너진 성터, 썩어 훼손된 배들과 없어진 창고의 곡식들을 일체 보충하고 완전하게 대비했다. 병자 1636년에 임금의 특명으로 군기시첨정으로 임명되었는데 당시의 건노建奴들이 만주지역에서 난리를 일으키고 서울로 쳐들어오자 대가가 남한산성으로 파천을 갔다. 내위외진內衛外鎭이 단절되어 밖의 우군 도움이 없었고 대설이 크게 내려 남한산성의 온 성이 방황하며 조석으로 걱정이 말할 수 없었다. 장병들은 싸울 생각을 못했는데 부군께서는 산 넘고 물 건너 임금을 따라 추위를 무릅쓰고 바람을 해치며 낮과 밤으로 성을 순시하고 외적을 막았다. 그 공로로 부산 수군절제사로 제수되었다. 정축 1637년 7월 통정대부로 승직되고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남한산성에서 오랫동안 겪은 병고로 인하여 사직하고 12월에 행직으로 내금위장을 역임했으며 무인 1638년에 충무위부사직 겸 오위장으로 임명되었다. 기묘 1639년 9월에 절충장군 행직으로 고령병마첨절제사로 임명되었으며 경진 1640년에 특명으로 재임되었으니 아마도 고령이 적의 경계에 사는 청인들이 내왕하는 곳이어서 이 길로 무수한 침략과 횡포를 당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주민들이 지배하지 못하다가 조정에서 그 적임자로 간택되었던가 싶다. 문관과 무관 등 안팎으로 모든 관료들이 부군의 강직함을 보고 추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곧 병든 몸을 수레輿에 싣고 부임지로 갔다. 부임하던 날 이웃나라끼리 서로 사귀자는 의리의 뜻으로 청인들을 선유宣諭하고 그들과 조약을 엄하게 정했으며 그 침범을 금하도록 했다. 이로부터 청인들이 항상 주의하고 침범하지 말라고 하며 “문公은 충성스럽고 어진 분이다.” 고 했다. 경진 1640년에 병 때문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사직하려 했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7월 22일 임금은 유서와 함께 심양 순찰 업무까지 명을 내렸다. 부군께서는 병든 몸을 안고 적을 진압하고 어루만지며 병졸들을 통솔하면서 은혜를 앞세우고 위엄을 뒤로 하니 관리와 주민들은 모두 안도하였고 청인들도 저절로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고 범하지 말자 했다. 이때부터 한 번도 수송하는 도로에 우려되는 일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다 부군께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진정시키고 어루만진 것이 큰 힘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남한산성에서 추위에 동상을 입은 후 남은 병세가 날로 위독해져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고 고향에 돌아가 병을 치료하기를 청했었다. 임오 1642년 11월 관할 도백道伯이 장계를 올리고 말하기를 “문재도文載道가 남한산성에서 오랜 병고에 시달려 병세가 크게 확대되어 군무를 오래 맡을 수 없으니 의당 체직遞職을 해야 한다” 고 하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국경을 진무鎭撫하도록 해야 한다” 고 했다. 또 좌우 대신臺臣들도 여러 차례 여쭤 말하기를 “문재도文載道는 늙고 병들어 정상情狀이 걱정된다” 고 하며 “실제 중대한 군무를 오랫동안 맡기 어렵다고 하며 체직遞職을 청하며 그동안 자리를 비우지 않게 해 달라” 고 했다. 이에 12월 4일 임금의 윤허를 받았고 다음해인 계미 1643년 8월에 고향으로 돌아와 그 다음달 9월 18일 자택에서 별세했다. 부고가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특명을 내리고 제문과 부의를 전했다. 다음해 1644년 2월 보성 샘골 조안동 해좌에 안장되었다. 아! 슬프도다! 부군께서는 모든 일에 임할 때 순후하고 방정하였으며 여러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항상 청백하게 정무를 처리하고, 주민들을 예의로 일정하게 인도했기에 관리와 백성들이 그 신명함을 칭송하고 감복했다. 또 여러 차례 내직과 외직을 겪으면서 직무에 신중하고 규율과 약속을 엄격히 세웠기에 북쪽 오랑캐들도 감화되었다. 덕德과 인仁을 내 몸의 규율로 삼고 근면과 검소함으로 남에게 이바지했다. 권문세도가에 찾아간 일이 없었으며 의복과 말을 치장하는데 가난한 선비와 같이 담담하고 소박하게 했다. 유독 서적만은 서가에 많이 저축했기에 옛날 업후鄴候의 집 장서와 비교했다. 공께서 이 책들을 선택해 소장해 뒀던 것은 아마도 불초한 자식인 나를 위해 진학을 꾀하기 위함이다. 손수 교훈을 써서 자손에게 경계한 글을 보면 효성과 공손을 앞세우고 너무 성급하게 진출하는 일은 삼가며 일가친척이나 친구를 만났을 때 가난하여 능히 부모 봉양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터와 땅을 나눠주고 노비에게는 땅 문서를 주었으며 마을의 학문을 닦은 선비들을 만나면 의심있는 일은 필히 질문하고 생각난 일은 필히 토론하여 흥미진진하게 기쁨을 만들었다. 평생에 남을 미워한 말과 낯빛을 붉게 하는 일이 없었기에 남들을 귀천이 따로 없이 정스럽게 대접했다. 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무관으로 종사하다가, 명예나 이익을 좇을 마음이 없이 스스로 벼슬을 물러날 것을 결정했다. 언제나 책상위에는 성현의 책이 떠나지 않았고 본심을 잃지 않는 착한 성품을 기르고 신중하고 신의가 있으며 의리를 밝게 분석했다. 그리고 관직에 있을 때는 비록 나를 저해하는 일이 있거나 임금의 사랑과 대우를 받들 때도 마음을 다해 충성을 다했으니 우리 아버님은 어찌 하늘이 내린 관리가 아니겠는가. 전해 온 글에 이르기를 사람에게는 삼불후三不朽가 있다 했으니 첫째는 덕德을 남긴 것이며, 둘째는 공功을 남긴 것이며 세 번째는 명언名言을 남기는 것이라 했으니 이 점만 보더라도 백세토록 사당에 모실만한 분이다. 이와 같이 우리 부군께서는 국가를 안정시키는 공과 근심을 막는 충성을 말하자면 그야말로 제향을 모시고 예를 올리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선비先妣께서는 임천林川 전씨田氏며 현감 여방汝氵雱 의 따님이요, 문과로 현감이며 송파松坡 팽령彭齡의 손녀이다. 선비 전씨田氏는 정숙하고 본받을 점이 있으며 가정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 내외 친척들이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아버님보다 2년 먼저 출생하고 아버님보다 18년 뒤에 돌아 가셨는데(1661) 묘는 합장했다. 그 후 64년 정해년에 용제마을 뒤로 이장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불초 희순希舜인데 선교랑을 역임하고 2남 희직希稷은 성균 생원을 지냈고 3남 희설希契은 교관을 지냈고 4남 희상希尙은 통덕랑을 지냈다. 사위는 조익준曺益俊인데 벼슬이 좌별제를 지냈고 손자는 세징世徵, 세장世章, 세보世黼, 세태世泰, 세필世弼, 세승世承, 세욱世郁, 세창世昌, 세흥世興, 세구世龜, 세익世翊이며 그 남은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나 희순希舜은 기왕부터 능히 몸소 밭 갈아 부모 봉양도 하지 못하고 또 능히 학계에 진출하여 부모를 현달하게 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대 유훈遺訓도 잊어버리고 만분의 일이나마 그 자식의 정을 이루지 못했으니 어찌 한 가정의 자손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세계世系와 사실을 찬차撰次하여 후세에 덕 있는 군자가 바른 이론으로 기록하길 바랄 뿐이다.
<문재도 장군 연보>
1575.4.12. 보성 미력 도개마을 출생 1597 순천 당진 참전(자력) 1603 무과급제 1607 비변사 승직 ,관직 사임(호, 휴헌休軒) 1624 이괄의 난-어가 호위 1630 경주 판관 1634 평해 군수 1635 삼남순검사 1636 군기시첨정, 병자호란-남한산성 인조 호위 (南漢手錄일기), 수군절제사 1637 경상좌도 수군절도사(통정대부) 1639 고령병마첨절제사(절충장군) 1640 의병사직 상소, 심양순찰업무 하명 1642 체직遞職청원-신병 1643.9.18.별세 1661 합장 후, 1664 정해년 용제마을로 이장
(20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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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버님(수사공 재도)의 세계와 업적을 간추려 아드님이 후손에 바른 길을 가도록 기록한 글, 잘 읽고 감동 했습니다.
남평 문씨 자손의 번창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