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대한민국이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세계 10위권 경제에서 10년 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져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그 열매만 따먹으면서 박정희를 비하하고 험담하고 모욕하며 박정희 군사독제가 어떻고 친일파가 어떻고 민심을 요리하면서 친중, 종북, 극일, 반미를 부르짖으면서도 자식은 미국에 유학 보내고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등 위선과 내로남불의 극치를 보이는 지금의 지역감정은 지역감정을 부추겨 정치생명을 이어가는 정치꾼들이 있는한 대한민국은 절대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멈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영호남 지역감정이 호남 좌파들이 진보성향으로 매꿔지면서 전국의 운동권 출신을 비롯한 종북세력들을 규합하여 진보와 자유 시장경제 체제를 숭상하는 보수와 대립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역감정이 왜 어떻게 생겨났는가 과연 박정희 정권이 지역감정을 조장하여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일부 정치꾼들의 권력 야욕으로 자연스럽게 동조 세력으로 뭉쳐진 정치세력이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만든 것이 지역감정을 날조한 것이 불과 30여년 정도의 짧은 기간에 지금은 기초의회. 광역의회, 국회 그리고 대통령을 비롯한 도지사, 시장군수 선거에서 호남지역에서는 보수정당 소속은 눈 딱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으로 그들이 말하는 소위 민주화 성지가 된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은 아무리 바리바리 싣고가 퍼주면서 애원해도 지역감정의 골은 절대로 허물지 못할 것이다.
역시 이번 22대 선거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의 이재명이 아니고 이재명의 민주당을 말하면서 김대중 정신이나 노무현 정신을 배척하여 혹시나하며 기대했으나 소위 김대중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일어난 이낙연 새로운미래 정당마져도 호남에서 환영받지 못하면서 또 호남의 지역감정은 뿌리가 같은 민주당과 새로운미래가 지분을 나눠가질 것으로 예견되어 역시 지역감정은 무너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많은 보수정당의 당 대표와 리더 들이 광주를 찾아 전두환 비석을 밟고 큰절로서 화해와 지역감정 해소를 간절하게 소원하며 빌었지만 계란세례를 받지 않고 멱살 잡히지 않고 돌아오는 것으로 안도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 지역감정 30년도 안 된다고 강조하면 의아해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사실을 되새겨 보자.
지금 서울 강남 3구는 보수세가 강하고, 전라도 지역의 투표 성향은 어디나 대동소이하며, 경상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처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의 정치적 생각은 서로 많이 다르지 않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강남 3구의 보수성향의 지지율이 비슷하게 높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지역갈등을 일부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갈등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지만, 사실 이러한 동서 갈등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박정희 후보와 윤보선 후보가 경합한 1963년 대선에서는 박 후보의 득표율이 남북 방향으로는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지만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우엔 거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후 똑같은 두 후보가 경쟁한 67년 선거 때는 드디어 박정희 후보가 경상도에서 약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이것 역시 매우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동서 지역 간 투표 성향 차이는 이후 점점 커지다 우리나라 대선 역사에서 가장 극명한 지역감정을 보여준 97년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 간 선거에서 극에 달한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과 전남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87년 대선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를 동서로 양분하는 지역감정은 길게 잡아 30년도 안 되는 우리 현대사의 암울한 기간에 만들어지고 고착화한 것이라는 점이다. 장구한 역사적 뿌리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지역갈등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투표에 의해 선출되기를 바란 정치인을 위해 조장된 것이다.
대동소이한 사람을 임의의 기준에 따라 두 집단으로 나눈 뒤 집단 내부 결속을 강화하면서 다른 집단과의 소통을 단절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는 믿음과 함께 상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는 여러 연구 결과가 있다.
국민 통합을 방해하는 자들은 평범한 우리가 아니다.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차이를 과장해 우리를 또 다른 우리와 구별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이용해 손쉽게 선거에서 선출되기를 바랐던(그리고 여전히 바라는) '그들'이다.
연속적이고 다차원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성향을 임의의 잣대를 이용해 둘로 나누고, 그 구별을 이용해 당선하기를 바라는 것은 정말 나쁜 짓이다. 이런 '구별'에 바탕을 둔 선거에서 득을 보는 것은 무능력하고 부도덕한 정치인뿐이다.
머리 복잡하게 공약을 개발할 필요 없이, 단지 '우리가 남이가'만 되풀이하는 그런 정치인은 결코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런 구태를 계속하는 것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변화는 그들이 아닌, 평범한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지역감정이 존재하는한 대한민국 정치판은 편한 날이 없을 것이다.
상식적인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가장 큰 폐단은 지역감정이 존재하는 것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지만 이를 타파하거나 해소할 수는 하늘에 해가 있고 달이 있는 한 절대로 깨트리지 못할 것이다.
지역감정이라는 말은 지역민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정치꾼이 만든 術辭이다. 지역갈등은 투표권을 행사하는 평범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투표에 의해 선출되기를 바란 정치인을 위해 조장된 것이다.
대동소이한 사람을 임의의 기준에 따라 두 집단으로 나눈 뒤 집단 내부 결속을 강화하면서 다른 집단과의 소통을 단절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한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는 믿음과 함께 상대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자발적으로 발전시키게 된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있다.
국민 통합을 방해하는 자들은 평범한 우리가 아니다.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차이를 과장해 우리를 또 다른 우리와 구별하도록 유도하고 이를 이용해 손쉽게 선거에서 선출되기를 바랐던 '그들'이다
다음은 다움에 게재된 brunch.co.krLohengrin 님의 글 “지역감정 뒤집어 보기에서 인용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없애야 할 요소 중 하나로 '지역감정'을 이야기한다. 특별히 영남 호남을 싸잡아서 범주화해 버리고 지역감정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지만 다른 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멍청도가 어떻고 감자바위 강원도가 어떻고 깍쟁이 서울이 어떻다고 한다.
지역감정이라는 단어는 특히 선거철만 되면 귀신처럼 등장한다. 선거의 마지막 전술로, 투표일을 며칠 앞둔 시점에는 예외 없이 가감 없이 튀어나온다. 우리가 ᄂᆞᆷ이가 라는 편을 가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의 일환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정치로 인하여 단어의 개념이 달라지고 의미가 왜곡되는 저질의 현장이 아닌가 한다.
정치판 밖에서 '지역감정'이라는 용어를 들여다보자. 지역감정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강한 애향심과 향수, 그리움들이 배어있는 감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 지역감정은 지역민끼리의 유대감을 높인다.
희노애락을 함께 겪어가고 이겨내는 힘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향사랑이라는 용어와 헷갈리고 있는가? 용어의 변형일 뿐. 결국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사랑 임에는 틀림 없다. 같은 현상을 안에서 바라보느냐 밖에서 바라보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같은 의미를 다른 용어로 사용하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지역감정은 증오와 편견의 산물이고 고향 사랑은 애정과 사랑의 산물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게 벌어진다.
세상에 자기가 태어난 고향뿐만 아니라 자기가 소속된 집단, 조직에 애착심이 없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바로 인연 때문이다. 자기와 연관된 어떤 조건, 어떤 상황이라도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발로다. 동네에서 삥이나 뜯는 얼챙이 깡패 조직에서도 자기들의 나와 바리를 지키기 위해 뭉치는 이유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대한민국이 망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조직 3개가 있단다. '해병전우회' '고대동문회' '호남향우회'다. 이들 조직에 들어있지 않은 사람들은 비아냥의 단어로 사용하나, 사실 내심에는 그 조직에 못 들어간 사람들의 부러움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 조직은 탄탄하게 움직여서 철옹성 같은 조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시선을 다시 바꿔보자. 인류사는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의 연속일 뿐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끊임없는 전쟁의 상흔들이 그 아픔을 말해주고 있다. 가족, 혈족, 씨족이 확장되어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구성원 간의 유대는 생존의 필수 요소다. 공동체 전체가 살아남느냐 없어지느냐의 절박한 결정이다.
그 와중에 지역감정은 필수적으로 구성원들의 힘을 모으는 원천이 된다. 내부자를 결속시키는 끈끈한 정이다. 그래야 살아남기에 발현시킨 본능이다.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프로배구 등 스포츠의 세계에서도 지역 연고를 빼면 서운하다. 지금은 구단 기업의 소속감이 더 크게 작동하지만 부산에서 롯데 자이언츠를 빼고 광주에서 기아 타이거즈를 빼고 대구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빼고 서울에서 두산 베어스를 빼고 감히 프로야구를 말할 수 없다.
간혹 경기결과를 놓고 양쪽 팬들이 거친 몸싸움도 벌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스포츠 권력은 그래도 가장 현명하게 감정을 추스르고 응원하는 쪽으로 갈등을 삭히고 있다. 지역감정이 가장 긍정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현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감정(感情 ; emotion)은 "어떤 일이나 현상, 사물에 대해 느끼어 나타나는 심정이나 기분"을 말한다. 원초적인 느낌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복합적 현상이다. 감정은 느낌을 만드는 단어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환경에 의해 학습되어 전이되기도 한다. 이 감정에 지역이라는 지리적 단위를 붙여 구획 지어 놓고 비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지역감정'이다.
한국사회는 정치판에서 갈등을 부추기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내면에는 지역을 뭉치게 하고 긍정의 힘을 끌어내는 원천이다. 전 세계 곳곳마다 지역별 축제가 있다. 지금은 돈벌이로 전락하여 지방마다 무슨 무슨 축제들이 난무하나 사실은 그 지역민의 유대를 강화하는 중요한 행사였다. 행사 참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의 동향을 알게 되고 서로 이웃임을 확인하여 미래의 불확실에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그 규모가 커지면 국가적 제전이 되고 세계적으로는 올림픽이 되고 월드컵이 된다. 지역감정이 도시 감정이 되고 국가 감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정치세력화가 된 호남향우회다.
정치가들의 얕은 혓바닥에 놀아난 '지역감정'의 세계를 긍정의 힘으로 바꿔 놓을 필요가 있다. 프로야구장에서 보이는 뜨거운 응원을 보면 '지역감정'은 용광로처럼 녹아들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역감정'이 하찮은 패거리 규합의 짧은 용어가 아니라 다양성의 범주를 확대하여 긍정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 아주 밝은 측면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지역감정'을 비틀리고 좁은 창으로 꼬나볼 것이 아니라 세상을 높고 넓게 보는 창문으로 확대한다면 그 또한 좋은 일로 발현되어 사회를 더욱 활기 있고 밝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나라에서 끈끈한 인연으로 맺어진 유명한 집단, 조직체가 있다. 잘 알려진 대로 고려대학우회, 해병전우회 그리고 호남향우회가 그것이다.
고려대학우회는 선후배간의 끈적끈적한 인간적 유대와 상대를 의리와 배려심이 얼마나 돈독한지 본드보다 강력접착제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한다. 그래서 황소가 디뎌도 꺼지지 않는 것이 고려대 학우회라고한다.
다음으로 원자폭탄이 떨어져도 깨지 못한다는 것이 호남향우회라는 조직이다.
그리고 지구 한쪽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해일이 일어나도 절대로 깨지지 않을 조직이 해병대 전우회라고 한다.
이 세 조직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정치꾼들이 이 조직을 활용하여 정치생명 연장에 링거처럼 악용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