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풀기
[1]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무엇이라고 합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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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울은 무엇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합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 어떤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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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께서 세상이 미련한 것들을 택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6] 하나님께서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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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울은 자신의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무엇으로 하였다고 합니까?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For”(왜냐하면)로 시작을 합니다. 17절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를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고,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수사학적인 말의 능력을 의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18절에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의 도(道. 말씀)”라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가 그들의 중심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류를 둘로 나누고 있습니다. “멸망하는 자들”(현재분사. 멸망해가고 있는 자들)과 “구원을 받은 우리”(현재분사.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입니다. 바울이 사람을 나누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제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나눕니다. 멸망하는 자입니까? 구원을 받은 자입니까? 이 새로운 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믿는가를 근본으로 합니다. 모든 사람은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의 복음이 미련하게, 어리석게 들립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반대로 구원을 받는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닫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실제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십자가의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즉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19절.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
십자가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를 멸하고 폐하는데, 그것은 이미 성경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고린도전서에는 지혜에 관해서 6개의 구약을 인용하고 있다. 1장 19절. 1장 31절. 2장 9절. 2장 16절. 3장 19절. 3장 20절) 이사야 29장 14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29장 13절에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고(마 15장 8-9절)고 하시고 14절에 “그들 중에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려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이한 일입니다. 그들의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을 찾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총명은 분별할 수 있는 지적 능력입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 ‘지혜와 총명’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길과 인간의 지혜를 자주 대조시킵니다. 사람은 자기의 길이 옳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잠 14장 12절. 16장 25절). 그리하여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의 지혜를 멸하시고 총명을 폐하십니다.
20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
지혜 있는 자가(헬라의 철학가나 사상가일 것) 어디 있는지 묻고 선비(율법 학자로 보기도 함)가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이 세대에 변론가가(철학자를 함의한다.)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도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세속 사회에서는 환영 받고, 높임 받고,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 앞에서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이 세상의 지혜, 웅변, 변론 등으로는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미련합니다.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타락 가운데 있는 인간의 모든 질서”(고든 피)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주시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실 때만 올바르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지혜로는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기뻐하신다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임을 나타냅니다. 전도는 내용과 방법을 모두 함의합니다. 내용은 “십자가의 도”요 방법은 그 십자가의 도를 말로 전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로 복음을 믿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이 세상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습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추구합니다. 그 표적으로 확증을 얻고자 합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라면 메시아라는 확증을 해보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입증해 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행하실 때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부분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표적을 요구하였습니다(마 12장 38-39절. 16장 1-4절. 막 8장 11-12절. 눅 11장 16절).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합니다. 철학 같은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철학도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but”(그러나. 헬, 데)이 있습니다. 22절에 나오는 유대인, 헬라인과는 반대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게” 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음은 우리의 죗값을 완전히 치르신 죽음, 속죄의 죽음입니다(마 20장 28절. 막 10장 45절. 고전 15장 3-4절). ‘전하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전한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그리스도로부터 위탁받은 것이지 전하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믿을 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그들이 생각하는 표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표(신 21장 23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주한 자를 하나님으로 예배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갈 1장 13-14절. 3장 13절). 유대인들이 요구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해 보였습니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이방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은 끔찍한 사형 방식입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은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믿고 받아들이는 기독교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24절.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
영어는 “but”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르심은 효력 있는 부르심입니다(1장 2절. 9절).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누구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실제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죄에서 해방을 주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죄악을 이길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참으로 이해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것을 보면 됩니다.
25절.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설적 언어”(고든 피)를 사용하시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사람의 그 어떤 지혜보다 지혜롭고 사람의 그 어떤 힘보다 강력합니다. 사람이 쓰는 최고의 지혜로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이 세상의 가장 강한 사람의 힘으로 어느 누구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연약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강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기는 참된 능력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 전도와 설교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26절.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고린도 교회를 계속해서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형제들”은 구원 용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권속, 가족이 된 사람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누구였는가를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신다(1장 19절)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을 통하여 깨닫도록 하십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다.”고 명령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은 구원으로의 부르심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습니다. ‘형제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습니까?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하십니다. “육체”(사륵스)는 타락한 인간을 의미합니다. 육체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기준,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 사람들의 지혜로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에 집중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위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찾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자(예. 지식이 있는 철학자들)를 하나님께서는 찾지 않습니다. “능한 자”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재력도 함의)이고 “문벌 좋은 자”는 학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고귀한 가문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귀족의 신분). 하나님은 세상에서 영향력 있는 자, 엘르트 그룹에 속한 사람을 찾아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대개는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많지 않다”는 말씀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소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을 따르지 않습니다.
27절.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27-28절에 바울은 복음의 위대한 영광을 표명합니다(고든 피). “택하심”을 반복적으로 써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선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부끄럽게 하신다’는 것은 그 당시 “명예-수치 문화”에서 의미 있게 들렸을 것인데,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시 6편 10절. 31편 17절. 35편 4절 등)이 나타남을 의미합니다.
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 없는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천한 것’은 비천한 출생을 의미할 것입니다. 멸시받는 것은 가치 없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이 세상의 기준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파기하다. 무효화하다) 하십니다. “폐하심”은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은 장차 모두 파기 됩니다.
29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께서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하나님의 선택을 알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사랑을 알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지혜, 영향력, 세상에서의 업적, 성공, 재물, 명성 등.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로 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30절.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
교회는 어떤 공동체입니까? 참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그분에게서 나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에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입니다. 교회는, 참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관계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잘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목적을 가르쳐주시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밝혀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 지혜로운 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로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음을 의미할 것입니다(칭의. 고후 5장 21절). 예수님은 우리의 “거룩함”이십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 설 만한 거룩함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고(결정적 성화), 계속해서 거룩해시는(점진적 성화) 은혜를 누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함”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값 주고 사셔서 죄의 형벌에서 자유를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구원을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31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뜻은 무엇입니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고, 하는 것 등.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하신 말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을 동등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입만 열면 자기 자랑이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입만 열면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2장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형제들아”(1장 10절. 26절. 2장 1절. 3장 1절 등) 부르면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를 얘기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나아간 때는 제 2차 전도여행 때(주후 51년쯤. 1년 6개월 동안. 행 18장 1-17절)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하나님의 증거라고 합니다. “증거”는(헬. 뮈스테리온. ‘비밀’이라는 뜻도 됨) 난외주에 어떤 사본에 “비밀”이라고 나온다고 하였습니다(예. 알렉산드리아 사본). 하나님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행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증거,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장 18절의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때에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습니다. ‘아름다움’은 ‘탁월성’입니다. 수사학적인 기교와 달변이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말과 지혜의 탁월성이 십자가의 복음보다 더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말과 지혜의 탁월성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1절의 “하나님의 증거”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이것이었습니다. 레온 모리스는 이것이 “복음의 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전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거리끼는 것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그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길입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말합니다. 고든 피는 “그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바울의 유일한 관심과 열정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의 복음이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바울은 단순하고 꾸밈없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
바울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거할 때, 즉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사람으로서 가지는 심정입니다. 그는 약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1장 23절에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환영하는 것을 전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지만 사람들이 환영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그는 약함으로 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좌절을 겪었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했다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5-10절에 그가 약함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였습니다.
“두렵고 떨림”에 대해서 토마스 R. 슈라이너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바울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봅니다. 자기 자신이나 수사학적인 능력을 자신이 선포하는 메시지보다 더 탁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였다는 의미로 봅니다.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말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때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수사학적인 지혜를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말로 전한 복음이 설득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을 의존하기 위하여 꾸미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능력’인 사람의 수사학적인 능력에 구원이 달려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였습니다. 1장 18절에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미가 같습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의존하여 전했습니다. 복음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학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한 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의존하는 방식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한다고 기도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로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서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할 때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5절.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님과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복음을 믿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능력은 단 1%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합니다. 그들이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주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도리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3권)에서 “믿음은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역사”(faith is the principal work of the Holy Spirit)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를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