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시승] 경쾌하고 멋진 전기 SUV, 폭스바겐 ID.5 GTX
조회수 1602023. 10. 4.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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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ID.5 GTX를 몰고 만년설이 빠르게 녹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정상에 다녀왔다. ID.5 GTX는 폭스바겐 최초의 쿠페형 전기 SUV. 지난해 공개해 올해부터 생산 중이다. ID 시리즈 가운데 ‘고성능’과 ‘스포티’를 상징하는데, 과거의 폭스바겐과 패러다임이 180° 다르다. 하지만 폭스바겐 고유의 디자인 철학과 운전감각은 오롯이 계승했다.
티롤(오스트리아)=김기범 편집장(ceo@roadtest.kr)
사진 폭스바겐그룹코리아, 김기범
빠르게 녹고 있는 알프스 빙하
167년 전 이곳을 찾은 오스트리아 황제는 장엄한 풍경을 보고 어떤 상념에 빠졌을까? 지난 9월 1일, 그의 이름을 딴 2,369m 높이의 ‘카이저 프란츠 요세프 회헤(Kaiser-Franz-Josefs-Höhe)’ 전망대에 올랐다. 해발 3,798m의 오스트리아 최고봉 ‘그로스글로크너(Groβglockner)’ 주위를 감싼 ‘파스테르체(Pasterze)’ 빙하가 멀리서 반짝반짝 빛났다.
파스테르체는 오스트리아 최대 규모의 빙하로, 협곡을 따라 기다란 혀처럼 뻗었다. 그런데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100년 전만 해도 길이가 11㎞에 달했다. 하지만 이제 8㎞도 되지 않는다. 부피도 1851년 첫 측정 이래 반 토막 났다. 스마트폰 검색으로 찾은 2006년 사진에서 스키장 슬로프 같던 빙하 끝자락은 그새 회색 담수 가득한 웅덩이로 변했다.
전망대는 1963년 오픈했는데, 당시보다 빙하 가장자리가 300m나 더 멀어졌다. 최근엔 더욱 빨라졌다. 해마다 50m씩 짧아지는 중이다. 학계에 따르면, 2100년까지 알프스 전체 빙하의 80%가 사라질 전망. 공교롭게 지구온난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을 신차 시승 때문에 찾았다. 그나마 주행 중 탄소배출 없는 전기차란 사실로 위안을 삼았다.
카이저 프란츠 요세프 회헤 전망대에 오르기 위해선 ‘호흐알펜슈트라세(Hochalpenstrasse)’를 타야 한다. 한 대 당 40유로(약 5만6,530원)의 이용권이 아깝지 않을 만큼 절경을 뽐냈다. 36개의 헤어핀이 중첩된 48㎞의 산악도로는 마니아들이 손꼽는 드라이빙 성지(聖地). 이날도 벼랑 사이로 굽이친 도로는 유럽 각지에서 모여든 자동차와 바이크로 붐볐다.
폭스바겐 최초 쿠페형 전기 SUV
지난 9월 1일, 오스트리아의 알프스를 함께 누빈 파트너는 ID.5 GTX다. 폭스바겐 최초의 쿠페형 전기 SUV로, 2021년 공개하고 2022년 1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먼저 데뷔한 ID.4의 ‘꽃단장’ 버전으로, 지붕을 쿠페처럼 날렵하게 다듬었다. 기능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가령 공기저항계수(Cd)가 0.26(GTX는 0.27)으로, ID.4보다 0.02 더 낮다.
차체의 길이와 너비, 높이는 각각 4,582×1,852×1,619㎜, 휠베이스는 2,766㎜다. 화석연료 마시는 폭스바겐 중엔 티구안과 비슷하다. 키만 16㎜ 작을 뿐 휠베이스를 포함해 모든 방향으로 더 넉넉하다. 형제 모델 ID.4와 비교하면, 길이가 3㎜ 짧고 너비는 2㎜ 넓다. 키는 의외로 2㎜ 더 크다. 실루엣만 차이 날 뿐 각 정점의 수치는 거의 같은 셈이다.
ID.5 GTX의 밑바탕은 ‘MEB’다. 2020년 폭스바겐 그룹이 ID.3를 통해 공개한 전기차 전용 플랫폼이다. 독일어 ‘Modularer E-Antriebs Baukasten’의 약자로, ‘전기차 모듈형 플랫폼’이란 뜻이다. 이란성쌍둥이인 아우디 Q4 스포트백 e-트론과 스코다 엔야크 쿠페Ⅳ를 비롯해 폭스바겐 그룹 및 포드 머스탱 마하-E 등 다양한 전기차가 나눠 쓰는 뼈대다.
폭스바겐은 오늘날 대세로 급부상한 ‘모듈러 아키텍처’의 원조다. 2012년 7세대 골프와 더불어 소개한 ‘MQB(Modulare QuerBaukasten, 모듈형 가로배치 플랫폼)’가 시작이었다. 카이스트 기술경영대학원 박정규 겸직교수는 “레고처럼 모듈화한 부품의 조합만으로 신차 설계의 80%를 완성한다는 개념은 당시 업계를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고 설명한다.
‘방향수정’ 마친 폭스바겐의 전동화
MQB 도입 2년 뒤(2014년), 난 폭스바겐 초청으로 독일 베를린 템플호프 공항을 찾았다. 폭스바겐은 폐쇄해 쓰지 않는 활주로와 격납고를 통째로 빌려 그동안 준비한 ‘전동화(Electrified)’ 전략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폭스바겐 e-모빌리티 부문 총괄 토마스 리버는 “2018년까지 전 세계 전기차 시장의 1위 브랜드가 되겠다”고 자신했다. 그럴 만도
했다.
폭스바겐은 행사장에 공장 일부를 재현했다. 엔진과 하이브리드, 전기 골프를 한 라인에서 만드는 설비였다. 전기차 공장을 따로 만들 필요 없고, 파워트레인별 수요에 맞춰 생산도 조절할 묘안이었다. 점진적 전동화를 예상한 노림수로, 9년 전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틀렸다. 전통 자동차 제조사의 사고에 머문 보수적 결정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9월 디젤 게이트마저 터졌다. 벼랑 끝에 몰린 폭스바겐 그룹은 전화위복을 노렸다. 2016년 전동화 방향을 수정하고 전사적으로 ‘올인’했다. 그 첫 결실이 MEB 바탕의 ID 시리즈다. 현재 ID.3~5, ID.버즈, ID.7을 판매 중이거나 양산형으로 공개했다. 폭스바겐은 2만5,000유로 이하의 보급형인 ID.2올(All)도 조만간 출시할 예정이다.
현재 폭스바겐 그룹의 전기차 플랫폼은 MEB와 J1(포르쉐), PPE(아우디) 등 세 가지다. 몇 년 내로 적용할 MEB+를 거쳐 2028년부터 ‘SSP(Scalable Systems Platform)’로 통합해 전 브랜드와 세그먼트에 걸쳐 4,000만 대 규모를 소화할 예정이다. 참고로, 폭스바겐 브랜드의 SSP 첫 수혜차종은 순수 전기차로 나올 9세대 골프가 될 전망이다.
빼어난 정숙성과 차분한 승차감
한편, 오전 일찍 뮌헨을 떠난 우린 오스트리아 땅을 밟자마자 ‘아이오니티(Ionity)’ 충전 스테이션부터 들렀다. 300㎞ 이상 여정의 알프스 드라이브를 위해서다. 4대의 ID.5 GTX 시승차와 두 대의 ID.3 진행차가 한적한 충전소를 점령했다. 휴게소에서 화장실 이용하고 커피 한 잔 마시는 사이 급속 충전이 끝났다. 이제 추가 충전 없이 하루를 버텨야 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보다 속도제한이 엄격하다. 속도 무제한 구간은 없고, 교묘히 숨긴 과속단속 카메라는 많다. 자동차는 물론 폭주족 스타일의 모터사이클조차 제한속도를 철저히 지킨다. 게다가 ID.5 GTX는 조용하다. ‘자폭의 달인’ 엔진도 없는데, 노면 소음과 풍절음까지 꽁꽁 틀어막았다. 그 결과 그림엽서 같은 차창 밖 풍경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시야는 시원시원하다. 시트 포지션은 높고, 대시보드는 낮다. 캡 포워드 스타일 덕분에 앞 유리가 멀찍이 물러났다. 덕분에 A필러의 사각지대도 줄었다. 천정은 한 장의 유리로 씌워 뒷좌석에서도 충분한 채광과 더불어 만년설 감상하기 딱 좋다. 실내와 짐 공간은 가족용으로 충분하다. 차체 길이가 30㎝ 이상 더 긴 투아렉과 정작 휠베이스 차이는 13㎝다.
승차감은 내연기관 폭스바겐의 느낌과 비슷하다. 속도와 상관없이 차분하고 담백하다. 앞뒤 승차감 차이도 적다. 하지만 늘 유연하고 능수능란하진 않다. 이따금씩 단차나 요철 등 순간 또는 잇달아 오는 충격 받을 땐 반응이 돌연 단단하고 거칠어진다. 비슷한 덩치의 티구안 2.0 TDI보다 550㎏ 더 나가는 공차중량(2,242㎏)을 떠올리게 만드는 순간이다.
기본기 탄탄하되 자극 없는 운전
GTX에 대한 폭스바겐의 정의는 ‘고성능’과 ‘스포티’로 간추릴 수 있다. 그런데 이번 뮌헨 모빌리티 쇼에서 ID.GTI를 선보이면서 GTX의 정체성이 다소 모호해졌다. 물론 GTX는 ‘앞뒤 듀얼 모터의 사륜구동 방식’이란 차별점을 갖는다. 비약해서 포르쉐 911 GT2와 터보의 관계로 이해하면 좋을까? 하지만 ‘매운맛’을 강조하기엔 성능이 아주 포악하진 않다.
ID.5 GTX의 앞 액슬엔 영구자석이 필요 없어 부피가 작고 저렴하되 제어가 까다로운 ‘비동기 전동기(ASM: ASynchronous Motor)’, 뒤 액슬엔 전기차의 대세인 ‘영구자석 동기모터(PSM: Permanently excited Synchronous Motor)’를 물렸다. 각각의 출력은 앞 204마력, 뒤 109마력이다. 시스템 최고출력은 299마력, 최대토크는 46.9㎏·m다.
0→시속 100㎞ 가속 시간은 6.3초. 공교롭게(아마도 의도적으로) 골프 GTI와 같다. 하지만 운전감각은 상당히 다르다. 양보단 질의 문제다. 속 시원하게 달려 나가지만, 변속 없이 강한 토크를 조용히 뿜으니 희열을 자아낼 기승전결의 서사가 없다. 또한, ID.5 GTX가 GTI보다 854㎏ 더 무겁고, 뒷바퀴에 강한 힘을 실었다. GTX는 GTI와 다른 개념의 차다.
스포츠 모드에서 서스펜션은 탄탄해진다. 하지만 운전대 답력 변화만큼 격차가 크진 않다. 마진 남겨둔 채 굽잇길 달릴 때 움직임은 정갈하다. 운전의 템포 높여 한계를 들쑤시면 예측 가능한 언더스티어로 이어진다. 그런데 온오프 개념처럼 중간 과정을 읽기 어렵다. 코너 안쪽 앞바퀴에 제동 걸어 궤적 다듬는 GTI의 전자식 디퍼렌셜 같은 ‘치트키’도 그립다.
유럽 기준 1회 충전 490㎞ 주행
손바닥만 한 5.3인치 디지털 계기판은 꼭 필요한 정보만 띄운다. 나머진 증강현실 헤드업 디스플레이와 센터페시아의 12인치 터치디스플레이로 역할을 나눴다. 물리 버튼은 거의 없다. 스티어링 휠 좌우 스포크의 깨알 같은 버튼도 햅틱(촉각) 방식. 터치 또는 쓸어 넘기기, 손가락 두 개를 오므리거나 펴기, 나아가 음성명령으로 대부분 기능을 제어할 수 있다.
주차(P)와 주행(D), 후진(R), 회생제동(B)은 계기판 오른쪽의 레버를 비틀어 넘나든다. 긴 내리막에선 가속 페달에서 발만 떼면 시작하는 타력주행과 B 모드의 회생제동을 번갈아 써서 77㎾h 용량의 리튬이온 배터리 채우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날 주행가능거리를 두 자리에서 세 자릿수로 늘렸다. 연료 잔량이 비가역적으로 줄기만 하는 엔진 자동차와 차이다.
ID.5 GTX의 1회 충전 주행거리는 490㎞(유럽 WLTP 기준). 완속은 최대 11㎾, 급속은 최대 135㎾의 전력으로 충전할 수 있다. 30분 급속충전으로 320㎞의 주행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MEB는 400V 충전 시스템을 쓴다. 곧 도입할 MEB+도 기본은 같되 차세대 배터리로 항속거리를 700㎞까지 늘릴 계획이다. PPE와 J1, SSP는 800V를 사용한다.
운영체제(OS)는 폭스바겐 3.0으로 시작해 1년 사이 3.1로 업그레이드했다. 그 결과 메뉴가 늘고, 기능도 구체화·세분화했다. 지도 확대·축소도 더 매끄러워졌다. ‘소프트웨어 정의 자동차(SDV)’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무선 업데이트를 통해 차가 꾸준히 진화한다. 다음 단계로, 폭스바겐 그룹은 자회사 카리아드를 통해 통합 OS 개발에 가속을 붙이고 있다.
원점부터 새로운 개념의 폭스바겐
‘GTI의 전기 SUV 버전 아닐까?’ 인천에서 뮌헨까지 날아오는 동안 자료를 살피며 이렇게 속단했다. 막상 겪어보니 혼란스러웠다. 익숙한 GTI 기준으로, GTX를 재단하고 정의한데서 비롯된 문제였다. 폭스바겐이 전통 제조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났듯 소비자 또한 새로운 기준으로 ID.5 GTX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럴 때 이 차의 가치도 가장 빛난다.
9년 전 베를린에서 폭스바겐은 전기차 관련 세 원칙을 못 막았다. ①구매 가능한 가격과 ②가족이 함께 탈 수 있는 공간, ③양산차 수준의 테스트와 엔지니어링이다. 당시부터 폭스바겐은 전기차와 관련해 얼리어답터의 관심 끌기 위한 ‘호기심 천국’ 전략은 지양했다. 이후 전용 플랫폼과 통합 OS, 배터리 내재화로 전략을 수정했지만 이 철학엔 변함이 없다.
이 같은 사상은 사업전략은 물론 디자인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전 폭스바겐 그룹 디자인 총괄 클라우스 비숍은 “ID 시리즈의 디자인 원칙은 친근함(friendliness)과 본질(essentiality)”이라고 강조했다. 구체적 해법으로 전자는 ‘과거를 회상시키는 모습’, 후자는 ‘장식 없이 간결한 디자인’을 꼽았다. 그 결과는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으로 수렴한다.
ID.5 GTX도 마찬가지다. 간결하면서 우아한 멋을 품었다. 나아가 엔진을 버리고 굴림 방식 뒤집으면서도, ‘오버 스펙’ 하체를 바탕으로 풍부한 개발 노하우를 담아 교과서적 운전감각을 재현했다. 그 결과 당장 살 수 있는 최신이자 최선의 폭스바겐으로 자리매김했다. 폭스바겐이 새 슬로건으로, ‘Neue Auto(새로운 자동차)’를 앞세운 덴 다 이유가 있었다.